40화
아포칼립스의 요새 상속자 40화
정신을 잃은 놈은 어깨뼈와 코뼈를 얼추 맞춰 놓고 한구석에 던져놓았다.
그리고 못다 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테이블을 대충 치우고 송지영과 마주 앉았다.
한동안 말없이 커피를 마시던 그녀는 한쪽 눈썹을 살짝 추켜세우며 물었다.
“KLF, 선배 짓이죠?”
“놈들을 알아?”
“원래 경기도에 있던 군벌이에요. 서울 요새 물건을 훔치는 바람에 양양까지 추격했는데, 설마 강릉으로 올 줄 몰랐네요.”
시발. 어째 밀려서 온 낌새가 있다고 하더니 설마 서울 요새 짓이었을 줄이야.
목에 가시가 턱하고 막히는 기분에 나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강중식은 잡았어?”
“죽었어요. 근데 물건은 없더라고요.”
놈이 가지고 있을 리가 있나. 그 물건을 훔쳐다 창고에 처박아둔 지가 오래인데.
내가 아무런 말이 없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송지영이 언성을 낮추며 묻는다.
“역시 선배죠?”
“······맞아.”
“위험한 물건이에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선배도 잘 알고 계시잖아요.”
단순한 허세거나 거짓말인 줄 알았다.
하지만 설마 KLF 놈들이 훔친 물건이 진짜 감염체 치료제와 관련된 거였다니.
나는 똥을 잘못 밟았다는 낭패감과 동시에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고민에 빠졌다.
“하나만 묻자.”
“네.”
“임상 시험은?”
“당연히 했죠. 이미 임상 2상까지 통과하고 3상까지 예정되어 있던 물건이었어요.”
“시발, 말도 안 돼. 그게 가능했으면 미국이나 일본에서 먼저 나왔겠지.”
“······그게, 사실 미국 물건이에요.”
“그럴 줄 알았다, 이 병신 같은 새끼들! 아주 지도에서 지워지고 싶어서 환장했어?”
“선배! 이거 진짜 심각한 일이에요. 그 물건이 요새가 가지고 있던 유일한 샘플이거든요? 우리가 반드시 확보해야 해요!”
“누구 좋아하라고.”
“당연히 국가를 위해서······!”
쾅!
나는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졸지에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게 된 송지영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너, 내가 거기 왜 나왔는지 잊었냐?”
대한민국? 웃기지 마라. 모두 수뇌부 새끼들 잇속 채우려고 하는 일이겠지.
그 꼴이 역겨워 제대했던 내게 나라를 위한다는 말은 역린이나 마찬가지였다.
딸꾹.
막내 시절 개 털리던 기억이 아직 남아있는지 송지영은 힘겹게 딸꾹질했다.
그래도 짬 좀 먹었다고 시선은 피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꼴이 용하다.
그래, 얘가 뭔 잘못이냐.
그냥 하라는 대로 하는 애들인데.
순간 화가 뻗쳤던 나는 등받이에 등을 기대앉으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러자 잔뜩 주눅 들어 있던 송지영이 재빨리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준다.
“······제가 숨긴다고 해서 숨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물건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아시면 당장 공격부터 할지도 몰라요.”
당최 상식이랑은 거리가 먼 새끼들이다.
아마 강릉 전체를 불바다로 만드는 한이 있더라도 물건을 회수하려 들것이다.
전쟁이라는 큰 리스크. 내가 굳이 불필요한 모험을 할 필요가 있을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강릉에 대한 안전을 저울 위에 올려둘 필요가 없었다.
치익.
[동장님?]
그 순간 주머니 속 무전기가 울렸다.
장시간 자리를 비운 내가 걱정되었는지 가은 씨가 무전을 보내온 것이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나. 나는 곧 돌아가겠다는 무전을 보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급히 처리할 일이 있어. 곧 연락할 테니까, 부대로 복귀하지 말고 기다려.”
“알겠어요, 선배.”
“저 친구한테는 미안하다고 전해주고.”
“이 기회에 정신 좀 차리겠죠.”
그렇게 반가운 회우, 껄끄러운 진실을 동시에 얻어간 나는 건물을 빠져나왔다.
* * *
성장은 고통을 동반한다.
항상 세상을 변화시키는 발전은 고통과 파괴 뒤에 오는 문명의 재건에 있었다.
뜬금없이 뭔 말인가 싶겠지만,
지금 강릉항을 보면 그런 소리가 나온다.
‘야시장?’
현저하게 줄어든 감염체 분포도 덕분에 해가 진 밤에도 이동이 가능해졌다.
이에 한동안 고민하던 김춘식 회장은 야간 통행금지를 없애는 강수를 두었고,
밤이면 항구에 정박해두어야 했던 외국 선박도 24시간 통행이 가능해졌다.
이걸 전쟁 ‘후’ 특수라고 불러야 하나?
강릉항으로 들어오는 무역선도, 캐러밴도 두 배 가깝게 뛰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 기세라면 항구를 증축해 동해 최고 무역항으로 거듭나는 것도 꿈이 아니었다.
“사장님!”
그렇게 시끌벅적한 야시장 한가운데를 걷는 와중 익숙한 얼굴이 달려왔다.
역시나 이번에도 가장 먼저 나를 반겨주는 건 강릉항 직원 강혜지였다.
“헤헤, 진짜 오셨네.”
“그거 먹을 겁니까?”
“네! 야시장에서 파는 거예요!”
갯고둥이라고 동네 축제에 가면 번데기와 함께 파는 작은 소라가 있다.
예전이야 싼 가격에 사 먹을 수 있었지만, 세상이 이 지경이 난 이후로 내륙 지방은 해산물을 구경조차 하지 못한다.
추억이네, 이거.
나는 강혜지가 내미는 종이컵을 받아들고 따뜻한 국물을 호로록 마셨다.
“킁킁.”
“뭐하십니까?”
“다른 사람 냄새나길래요.”
아주, 시발, 이걸 그냥 콱. 이번에는 그냥 머리를 냅다 쥐어박아 혼냈다.
“젊은 동장! 여기야!”
마침 항구 부두에는 김춘식과 김태식이 드럼통난로를 피운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소한 냄새가 나는 것으로 보아 운치 있게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한잔할 텐가?”
“좋죠.”
역시 잘 나가는 상가 번영회 회장님답게 노상에서 보드카를 까고 계신다.
저번에 먹은 술맛을 잊지 못한 나는 재빨리 잔을 들어 보드카를 받아먹었다.
“상인끼리 바꿔먹기 좋은 물건 중 하나가 바로 이 술이지. 쉽게 훼손되지 않고, 누구나 원하고, 또 선물하는 맛이 있어.”
“러시아 선박이 다녀갔나 봅니다.”
“끌끌, 세상이 이 지경이 돼도 보드카 공장은 꼭 돌리는 놈들이거든. 이번에 원료를 수입해 가면서 잔뜩 두고 갔더라고.”
어쩐지 지나가는 사람들 하나 같이 얼굴이 술기운으로 벌게져서 돌아다니더라.
김춘식 회장은 보드카와 함께할 크리스마스가 기대되는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선발대를 보내기로 했어.”
“규모는 어느 정도입니까?”
“무장 트럭 다섯 대. 이번에는 중기관총과 박격포까지 포함될 거야.”
“거의 공격대 규모인데요.”
“이번에는 왠지 감이 좋지 않아서 그래. 최대한 규모만 확인하고 돌아오면 될 거야.”
“이상한 점이라도 발견하셨습니까?”
“남대천 상류에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어. 둥지치고는 그 규모가 너무 크고, 움직임이 규칙적이지 못 해. 혹시 아는 거 있나?”
수많은 생존자를 이끌어온 노련한 연륜은 역시 무시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이미 이변을 눈치챈 김춘식 회장을 향해 아는 것을 일부 털어놓았다.
“감염체 군락이라고 아십니까?”
뚝.
군락이라는 말에 김춘식과 김태식 모두 움직임을 멈추고 내게 시선을 돌렸다.
“군락이라고 했나?”
“예. 군락이요.”
“설마 남대천 상류 둥지가······.”
“아직 완전체까지는 아니고 군락으로 진입하는 초기 단계가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복무했던 시절 본 것과 몹시 유사해요.”
거짓말이다. 그냥 책이 그렇게 말했기에 대충 얼버무리며 대화를 유도했다.
하지만 이게 꽤 잘 먹혔는지 김춘식과 김태식은 표정을 굳히며 술잔을 내려놨다.
“산 넘어 산이구먼.”
“당시에는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화력 말고는 답이 없습니다. 방어선 만들어서 달려 나오는 놈들 저지하고, 클레이모어, 박격포, 수류탄 다 때려 박았죠.”
방어선과 압도적인 화력이라.
“어렵군.”
승산을 가늠해보는지 김춘식 회장은 조용히 팔짱을 낀 채 타오르는 난로를 바라봤다.
“자네가 볼 땐 승산이 있겠나?”
어려운 질문이다. 늘 나아갈 길을 알려줬던 책은 이번만큼은 침묵하기를 원했으니까.
하지만 그 침묵은 포기라기보단 나 스스로 답을 구하길 원하는 것 같았다.
찰나의 정적.
고민은 짧았다.
“사활을 걸면 가능합니다.”
대관령과 남대천 상류는 평야 지대가 아니라 진입할 곳이 한정된 산악 지역이다.
산맥을 입구 삼아 몰려오는 감염체를 틀어막을 수 있다면 승산은 충분히 있었다.
이에 김춘식 회장은 결심이 섰는지 내려놓았던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시간이 사흘 정도 필요해. 최대한 긁어모아서 갈 테니까, 선발대를 부탁하네.”
“무전 드리겠습니다.”
다시 부대를 꾸리고 필요한 탄약과 물자를 분배하려면 사흘도 부족할 것이다.
나는 매번 큰 도움을 받는 강릉항 김씨 일가분들 잔에 손수 술을 채워드렸다.
* * *
남대천 상류 감염체 둥지를 토벌한다는 소문이 강릉 전역에 파다하게 퍼졌다.
그간 짧았던 평화도 잠시, 요새 생존자들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다급해졌다.
“방탄복이 필요할까요?”
“팔, 다리, 목을 보호할 수 있는 보호대만 챙겨. 몸은 최대한 가볍게 하는 거야.”
인간 간 벌이는 전투와 감염체를 상대하는 전투는 그 본질부터가 차이가 난다.
감염체와의 전투는 뭐랄까, 서로를 도태시키려는 생존 싸움과도 같다고 할까.
좀 더 원초적이고 야만스러우며 동시에 몸서리가 쳐질 만큼 잔혹했다.
“가자.”
그렇게 모든 준비를 끝낸 나, 경태, 김정구와 가은 씨는 요새를 빠져나왔다.
시내로 진입하는 삼거리에는 이미 강릉항 선발대가 합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찍 오셨군요.”
김태식이 트럭에서 내려 우리를 반겨준다.
“직접 가십니까?”
“동장님이 나서시는데 저희도 구색은 맞춰야죠. 작전 지휘는 잘 좀 부탁드립니다.”
일 처리가 확실한 강릉항답다. 나는 김태식과 악수한 뒤 다시 보조석에 올라탔다.
부르르릉!
붉은 도색이 눈에 띄는 우리 차량을 선두로 강릉항 무장 트럭이 뒤따라왔고,
행렬은 곧 시내를 빠져나와 익숙한 국도가 아닌 456번 지방 도로로 진입했다.
“- - - - - - -.”
순간 주변 풍경이 확 바뀐다. 이에 운전대를 잡은 경태는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길은 오랜만이네요. 이쪽으로 쭉 가면 휴게소랑 양떼 목장이 나오거든요.”
“거기도 사람이 사냐?”
“2년 전만 해도 작은 생존자 캠프 하나가 있었어요. 근데 지금은 소식이 끊겨서.”
그 추운 대관령에 생존자들이 살고 있다니 참 인간의 적응력은 대단하다.
작게 감탄한 나는 백미러를 통해 느림보처럼 따라오는 차량 행렬을 살폈다.
경태가 말한 산중 휴게소까지 거리는 대략 20km. 아마 이 속도로 가면 해가 지기 전까지는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거북이처럼 엉금엉금 가더라도 안전하게.
우리는 계속 반복되는 흰 산과 구비 진 도로를 주시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 - 치치직 - - -치익.]
그리고 시간이 얼마쯤 지났을까, 점점 신호가 약해지던 희망 FM이 완전히 꺼졌다.
길게 하품한 경태는 저 멀리 보이는 지역 입간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평창군.’
‘대관령.’
“여기가 딱 강릉 경계에요.”
눈사람 마스코트가 스키를 타고 있다.
그 뒤로 잘 정돈된 포장도로와 함께 휴게소로 보이는 건물 한 채가 시야에 들어왔다.
적당한 위치, 적당한 주차 공간. 당분간 베이스캠프로 쓰기에 딱 맞았다.
“내립시다.”
확실히 대관령까지 올라오니까, 평상시 낮 기온과는 차원이 다른 추위가 몰려온다.
나는 방한복을 잘 감싸 안고 뒤따라오는 강릉항 차량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끼익!
“동장님!”
그런데 그 순간 트럭 한 대가 급정차하더니 김태식이 다급히 나를 불렀다.
이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직감한 나는 뒤뚱뒤뚱 뛰어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구조 신호가 하나 잡혔습니다.”
구조 신호? 이 대관령에서?
나는 무전기 볼륨을 울려 치지직 거리는 잡음 속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치직, 칙. - - - 여, 여기는 대관령 펜션 촌 생존자 캠프입니다. 저희는 현재 감염체들로 인해 일주일째 고립 중이며 식량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입니다. 이 구조 신호를 들으시는 분이 있다면, - - 치치직 칙.]
녹음된 음성이다.
무전기 너머 남자는 두려움에 찌든 채 다급히 구조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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