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아포칼립스의 요새 상속자 44화
후웅,
서걱!
그 사이 어깨를 노리고 들어오는 공격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냈다.
그리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두려움에 떨고 있는 소년에게 속삭였다.
“어렵지 않은 일이야.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옷을 당겨줘. 딱 그거면 돼.”
지시는 간단명료하다.
360도 공간 중 적어도 30도 반경만 알려준다면 그 뒤는 내가 알아서 한다.
방향만 알려주면 된다, 방향만 알려주면 된다. 소년은 마치 자기 암시를 하듯 중얼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후욱.
추위가 감각을 흐린다. 총을 쥐고 있는 손은 얼음덩어리처럼 둔탁해졌다.
다음 공격을 피할 수 있을까? 아니, 아마 2번 내로 삶과 죽음이 갈릴 것이다.
사사사사삭
하나, 둘, 셋.
나는 심호흡과 함께 천천히 눈을 감고 소년이 소리를 듣기를 기다려주었다.
무음, 무색, 무취의 공간. 숨이 멈추며 쿵쾅거리던 심장이 작게 숨죽인다.
움찔!
온다.
감각이 폭발한다. 근육은 한계를 넘어 불가능에 가까운 영역으로 총구를 이끈다.
나는 소년이 바짓단을 당겨준 11시 방향으로 정확히 콜트 파이슨을 겨누었다.
철컥!
끼이익?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눈보라 속에서 몸을 드러낸 알비노 감염체는 자신에게 겨눠진 총구에 깜짝 놀랐다.
녀석의 흰자위 없는 검은 눈동자와 붉은빛 조명탄이 절묘하게 허공을 교차했다.
타앙!
곧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얕다.’
하지만 놈이 급히 몸을 비튼 탓에 총알은 급소가 아닌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는 것에 이를 악문 나는 황급히 자세를 고쳐 잡았다.
사사사사사삭
사사사삭
움직임이 기민해졌다.
도망칠 것이냐,
아니면 또 한 번 올 것이냐.
꺼지기 직전인 붉은 조명탄이 놈과 우리의 인내를 시험하기 시작했다.
나는 여기서 한 가지 승부수를 띄워야 함을 직감하며 천천히 자세를 열었다.
방심한 척, 이제 한계인 척, 가장 치명적인 급소를 노리고 아가리를 벌려라.
당장 죽을지도 모른다는 긴장감과 동시에 쾌감이 목덜미를 핥고 지나갔다.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눈보라가 순간 역방향으로 분다.
사박.
“- - - - - -!!”
귀를 기울인 소년은 방향을 확신했는지 이번에는 3시 방향으로 바짓단을 당겼다.
상황, 타이밍, 환경이 이 3가지 요소가 들어맞는 순간 내 팔을 기계처럼 움직였다.
철컥!
시선보다 빨리 겨눠진 총구는 눈보라 속 변이종을 정조준하고 있었다.
타앙!
끼이이이익!
콜트 파이슨 특유의 정확도와 대인 저지력이 이 순간 빛을 발휘한다.
가슴팍이 꿰뚫린 변이종은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쓰러진다.
나는 놈이 도망치기 직전 재빨리 자세를 돌려 머리통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묵직한 반동과 함께 기괴한 비명을 내지르는 놈의 이마 정중앙이 꿰뚫린다.
제 역할을 다한 붉은 조명탄은 그제야 마지막 빛을 토해내며 천천히 어두워졌다.
즉사다.
나는 큰 활약을 해준 소년을 품에 안은 뒤 알비노 변이종을 향해 다가갔다.
“- - - - - -.”
지난번 놈과 동일한 체구와 특징에 마치 갈고리 같은 손톱을 가지고 있다.
만약 이런 놈을 훈련받지 못한 일반 생존자가 마주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장담하는데 10초도 되지 않아 목이 잘린 뒤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고맙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놈을 잡게 도와준 건 버림받은 이 맹인 소년이었다.
나는 마찬가지로 놈의 샘플을 채취하고 딱딱하게 얼어붙은 손에 입김을 불었다.
변이종과 함께 찾아왔던 화이트아웃 현상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다.
* * *
순조롭게 산악 지형을 빠져나와 456번 지방 국도를 발견하고 쭉 걸어갔다.
그리고 머지않아 약속했던 합류 지점에서 익숙한 픽업트럭을 발견해냈다.
“동장님!”
“형님!”
반가운 얼굴들이 달려온다.
여기까지 마중을 와준 이들은 다름 아닌 우리 희망 요새 일행들이었다.
와락!
울음을 터트린 경태가 나를 끌어안는 걸 시작으로 가은 씨가 팔짝 뛰어 매달린다.
마찬가지로 급하게 뛰어온 김정구 씨는 그 모습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떨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들 이래.
나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뭐라 말하는 두 사람의 등을 조용히 토닥여주었다.
“숨, 숨 막혀······.”
졸지에 샌드위치처럼 끼게 된 소년이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발버둥 친다.
“어머!”
이에 깜짝 놀란 가은 씨는 가운데 낀 소년을 번쩍 들어 바닥에 내려주었다.
“이 꼬마는 누구예요?”
“펜션에 혼자 남아 있던 생존자예요. 복귀할 때까지 저희 쪽에서 보호할 겁니다.”
일행들은 혼자 살아남은 소년이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금세 눈치챘다.
하지만 너무나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며 살갑게 아이를 대해주었다.
“부축해드릴게요.”
그렇게 짧은 해후를 끝낸 나는 부축을 받으며 주차된 픽업트럭으로 걸어갔다.
“상처부터 봅시다, 동장님.”
아니나 다를까, 의료 상자를 챙긴 정구 씨는 귀신같이 허벅지 상처를 찾아냈다.
나는 빨간 소독약이 가져다주는 고통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얼어붙은 몸을 녹였다.
“후우.”
이제야 좀 살겠네.
나는 그동안 누적된 피로가 한 번에 몰려오는 걸 느끼며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형님, 무전입니다.”
하지만 상황은 쉬게 두지를 않는다.
내가 합류했다는 소식에 베이스캠프에 있던 김태식이 무전을 보내왔다.
[동장님, 괜찮으십니까?]
“예, 무사히 합류했습니다.”
[다행입니다. 저희 쪽은 그사이 감염체 습격이 있었습니다. 동장님이 어제 말씀해주신 대로 흰색 감염체 개체도 찾아냈고요.]
변이종을 찾아냈다고?
나는 자세를 바로 하며 되물었다.
“잡았습니까?”
[아뇨. 워낙 빨라서 쫓아내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그래도 놈이 사라지니까, 감염체 움직임이 수동적으로 변했습니다.]
역시 예상이 맞았다.
알비노 감염체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감염체 무리의 움직임이 달라진다.
확실히 그 알비노 변이종은 탐지, 추적, 통제 등 여러 역할을 하는 모양이었다.
“지원군은 어떻게 됐습니까?”
[일단 급한 대로 현재 이동 가능한 순찰대를 모아 파견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회장님께서 미안하다고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아뇨, 이해합니다.”
현재 강릉으로 들어오는 물자 대부분은 강릉항이 외국에서 수입하는 무역품이다.
사흘이라는 시간은 아마 그동안 소모했던 탄약을 거래하는 데 필요한 기간 일터,
그나마 순찰대를 먼저 보내주는 것도 김춘식 회장으로선 무리하는 것이다.
치익!
[그럼 이따가 뵙겠습니다.]
모든 준비를 끝낸 픽업트럭은 눈이 쌓인 도로를 빠져나와 베이스캠프로 달려갔다.
* * *
뒤늦게 도착한 캠프 앞에는 수많은 감염체 시체가 이곳저곳에 널려 있었다.
아무리 놈들이라도 철조망과 지원화기 조합을 쉽게 뚫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탄약이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최대한 아끼면서 사용했던 탄약이 완전히 바닥을 드러냈다는 것.
제일 중요한 기관총과 박격포는 고사하고 개인화기에 쓸 총알조차 부족했다.
나는 짐칸에 실린 마지막 탄약 상자를 바라보며 결국 임시방편인 지시를 내렸다.
“전방과 후방 차량에 탄약을 몰아주세요. 되도록 단발로 쏘라고 지시하십시오.”
“알겠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 대관령으로 접근 중인 순찰대와 합류해야 한다.
명령이 떨어지자 선발 대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장비를 챙겨 차량에 탑승했다.
휘익, 쨍그랑!
화르륵!
감염체 시체 더미에 화염병을 던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캠프를 빠져나왔다.
부우우우웅 - - -!
나와 일행들이 탑승한 1호 차가 선두로 치고 나와 힘차게 앞으로 질주했다.
그 뒤로 나머지 차량이 양방향으로 나뉜 채 부지런히 뒤를 따라온다.
그나마 새벽 내내 내리던 눈보라라도 그쳐서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나.
주변 시야도 탁 트이고 주행을 방해하는 요소도 현저하게 적어졌다.
나는 소총을 꼭 쥔 채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도로 옆 풍경을 주시했다.
[곧 시내입니다. 1호 차 문제없습니까?]
“괜찮습니다.”
5분가량을 계속 달리자 차량 행렬은 어느덧 대관령 시내로 진입하고 있었다.
100m, 200m, 차도 옆 나무들이 사라지자 시내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맙소사······.”
인간이 세운 문명은 사라졌다.
그 위에는 오직 ‘군락’이라는 이름에 새로운 주인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폐허를 기반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액체와 뿌리로 범벅이 된 소형 도시.
우리가 봐왔던 건 빙산의 일각이라는 듯 감염체 무리가 저 멀리 파도치고 있었다.
[- - - - - - -.]
한참 시끄럽던 무전기가 조용해진다.
경태는 손이 떨리는지도 모른 채 넋을 놓고 군락이라는 존재를 마주하고 있었다.
“정신 차려.”
나는 그런 녀석을 흔들어 정신 차리게 한 뒤 무전기를 잡고 지시를 내렸다.
“그대로 도로를 달려 대관령 톨게이트까지 진입합니다! 절대 멈추지 마세요!”
부아아아아앙 - - -!!
픽업트럭이 속력을 더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차량이 빠르게 뒤따라온다.
어느덧 군락의 영역으로 들어온 우리는 환경 자체가 변했다는 것을 느꼈다.
“카메라.”
“네, 네!”
가은 씨는 준비된 카메라를 꺼내 도시를 점거한 군락을 사진으로 담았다.
찰칵!
찰칵!
다수이되 단수인 존재. 저 멀리 일렁이는 감염체 파도는 꼭 하나의 존재 같았다.
가은 씨는 이 광경을 모두 카메라에 담으며 바싹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 순간 무전기가 다급히 울렸다.
치익!
[여기 4호 차! 놈들이 움직입니다!]
역시 몰래 지나가기에는 무리였나.
벌써 냄새를 맡은 놈들은 일순간 우리가 있는 도로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끼이이이이이이익 - - -!!
파도가 출렁인다. 둑을 뚫은 검은 물처럼 오른쪽 강둑이 감염체로 가득 찬다.
[바로 뒤까지 따라붙었습니다!]
드르르륵! 투다다다다!
끼기기긱, 끼익!
후방 차량이 교전을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나아갈 길에도 감염체들이 속속히 등장하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선루프를 통해 짐칸으로 이동한 뒤 일제 사격을 명령했다.
“엄호해!”
타앙! 탕탕탕! 탕!
탕탕탕! 탕!
총알이 불을 뿜는다.
픽업트럭을 막기 위해 달려들던 놈들이 쓰러지고 일부는 차에 달려들었다.
쿵! 끼기기긱!
콰직!
마치 빛을 보고 달려드는 하루살이처럼 차 보닛에 치이고 타이어에 짓밟힌다.
경태는 이를 악물며 차량이 도로에서 전복되지 않게 최선을 다했다.
“- - - - - -.”
나는 그사이 빼곡하게 몰려오는 감염체 사이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정 거리마다 어슬렁거리는 알비노 변이종을 발견해냈다.
철컥!
심장이 빠르게 뛰고 손가락 감각이 예민한 날이다. 단언컨대, 이런 날은 보통······.
타앙!
콰직!
쏘면 쏘는 대로 맞는다.
타앙! 타앙! 탕!
첫 번째 알비노를 죽여버리는 것을 시작으로 집요하게 다른 변이종을 노렸다.
그럴 때마다 한 몸처럼 달려오던 감염체 무리는 눈에 보일 정도로 주춤거렸다.
벌레의 더듬이를 자른다.
그 표현이 딱 좋겠다고 생각한 나는 기계처럼 방아쇠를 당기고 또 당겼다.
끼이이익, 덜컹!
“톨게이트가 보여요!”
그리고 그 노력이 통했는지 차량 행렬은 어느새 시내를 빠져나와 우회전했다.
동시에 넓어지는 길과 함께 저 멀리 그토록 지나가고 싶었던 톨게이트가 보였다.
부아아아아앙 - - -!!
군락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불과 후방 200m 뒤로 도시에서 튀어나온 감염체 파도가 우르르 쏟아진다.
퍼엉!
[5호 차 간격 좁혀!]
[타이어가 나갔습니다!]
끼이이이익!
그 순간 끝까지 후방을 지키려고 했던 5호 차의 타이어 한쪽이 터진다.
곧이어 차선을 이탈한 5호 차를 통해 처절함이 섞인 무전이 들려왔다.
“차 돌려!”
그 모습에 나는 다급히 보닛을 두드리며 지난번처럼 유턴을 지시하려 했다.
[오지 마십시오! 제 아내랑 딸한테 사랑한다고······!]
콰아아아앙 - - -!!
하지만 5호 차는 오지 말라는 무전과 함께 그대로 수류탄 핀을 뽑아버렸고
차체는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몰려오는 감염체 무리와 폭사해버린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 광경을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던 선발대 차량은 기어코 톨게이트를 지나친다.
부아아아앙 - - -!!
이제부턴 영동고속도로.
찌그러지고 유리창이 깨진 트럭 행렬은 아슬아슬 고속도로를 질주했지만,
반대로 기기 판에 보이는 연료는 빠른 속도로 줄어가고 있었다.
‘젠장.’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탄알집을 끼워 넣으며 최후의 발악을 준비하려 했다.
치이익, 칙!
[선발대, 선발대 들립니까?]
“?”
그런데 그 순간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가 무전을 통해 전해졌다.
두 눈을 크게 뜬 나는 즉각 보조석으로 다시 들어가 무전기를 잡았다.
“들립니다!”
[현재 위치가 어디입니까?]
“대관령 1터널 진입 직전입니다!”
[확인했습니다.]
뭘 확인했다는 거야? 나는 순찰대로 추정되는 남성에게 다급히 되물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저 멀리 터널 앞에서 대지를 울리는 포성이 울려왔다.
두쿵!
삐이이이이이 - - -콰아아아앙!
60mm 박격포와는 비교할 수 없는 포탄이 몰려오는 감염체 한가운데 직격했다.
“하하······.”
나는 피어오르는 폭탄 구름과 찢겨나가는 감염체 놈들을 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105mm 견인포. 왜 이렇게 늦으시나 했더니 듬직한 친구 하나를 데려오셨구나.
콰아아아앙 - - -!!
기세등등 몰려오던 감염체 무리는 막강한 화력 앞에 놀라 기괴한 비명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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