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아포칼립스의 요새 상속자 45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막강한 화력 앞에 몰려오던 감염체 웨이브는 잠시 주춤한다.
하지만 소모의 개념을 알고 있는 놈들은 두려움을 느낄 뿐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부우우웅, 끼이익!
선발대 차량이 터널 앞에 설치된 바리케이드를 지나 안전 구역으로 들어왔다.
우리가 차량에서 내리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순찰 대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부상자 있으십니까!”
“여기 깨끗한 수건이랑 물 가져와!”
지옥 같았던 군락 영역을 빠져나오느라 다들 꼴이 말이 아니다.
나는 한 대원이 건네준 따뜻한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급히 책임자를 찾았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그러자 KLF와 벌였던 전쟁 때 몇 번 본적이 있는 대원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와 반갑게 악수하며 일단 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대략적인 규모부터 물었다.
“탄약은 얼마나 있습니까?”
“견인포는 급하게 빌려온 거라 이제 몇 번 발사하면 끝입니다. 나머지 박격포랑 소총 탄약도 사정은 마찬가지고요.”
한순간 화력을 집중해서 그렇지, 순찰대 사정도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아마 우리를 급히 지원하기 위해 최소한의 물자만을 챙겨 달려온 모양이다.
나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순찰 대원들 한명 한명에게 재차 고마움을 표했다.
‘문제는 시간.’
현재 강릉은 물자와 인력을 한곳으로 모으는 것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여기서 만약 감염체 웨이브가 들이닥친다면 상상조차 못 할 일이 벌어질 터.
빠르게 고민을 끝낸 나는 어느새 이쪽만을 바라보고 있는 대원들을 향해 지시했다.
“가지고 있는 폭약 전부 가지고 오세요. 터널 입구를 무너뜨리고 후퇴합니다.”
“입구를 말입니까?”
아무리 감염체라고 해도 험악한 산악 지형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456번 지방 도로는 산사태로 막혔으니, 영동고속도로와 같은 큰 진입로만 차단해줘도 충분한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정말 무너뜨려도 될지······.”
강릉과 서쪽으로 이어주는 유일한 고속도로를 막으라는 지시에 대원들은 주저한다.
“제가 책임질 겁니다.”
하지만 나는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말로 그들을 안심시킨 뒤 다시 언성을 높였다.
“뭐합니까! 빨리 움직이세요!”
내 단호한 외침에 정신을 차린 대원들은 서둘러 사방으로 흩어졌다.
폭약을 터널 입구 산 위에 설치하고 견인포와 박격포를 다시 차량에 싣는 일이다.
시간이 촉박한 만큼 대원들은 구슬땀을 흘리며 바삐 떠날 준비를 했다.
“놈들이 옵니다!”
“감염체 접근 중!”
그 순간 감염체 무리는 이를 예상하기라도 한 듯 다시 몰려오기 시작했다.
끼이이이이이악!
까가가각!
장마철 불어난 홍수처럼 드넓은 고속도로를 가득 채운 검은색 무리의 향연.
그 광경은 가히 대규모 이름을 붙여도 될 만큼 엄청난 크기의 웨이브였다.
“견인포와 박격포는 후방으로 후퇴합니다! 나머지는 정면을 향해 집중 사격!”
얼굴이 하얗게 질린 대원들이 서둘러 견인포와 박격포를 챙겨 후방으로 후퇴한다.
그사이 차량에 탑승한 나머지 사수들은 아까 분배받은 탄약을 장전했다.
드르르륵! 드르르륵!
투다다다다다다 - - -!!
기관총이 다시 불을 뿜는다.
개인화기를 든 나머지 인원도 감염체 웨이브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끼이이이아아악!
콰직, 콰드득!
하지만 아무리 총알을 쏟아내도 우리가 가진 탄약수보다 놈들의 숫자가 더 많다.
쓰러지는 시체를 짓밟고 몰려오는 감염체들은 어느새 바리케이드를 넘고 있었다.
철컥!
“후퇴! 후퇴해!”
순식간에 탄알집을 비워낸 나는 황급히 트럭 짐칸으로 올라탔다.
후퇴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던 무장 트럭들은 황급히 시동을 걸었고,
서둘러 대원들을 태운 뒤 반대쪽 출구를 향해 하나 둘 출발했다.
“갑시다!”
우리가 마지막이다.
마찬가지로 급유를 끝내고 대기하고 있던 1호 차도 서서히 가속하기 시작했다.
“동장님, 여기요!”
내가 뒷좌석으로 손을 내밀자 가은 씨가 기다렸다는 듯 격발 장치를 건넨다.
입구와 놈들 거리는 대략 200m, 황급히 뚜껑을 열고 격발 버튼을 눌렀다.
달칵. 달칵.
“?”
하지만 터널 입구에 설치해 둔 폭탄은 터지기는커녕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진짜 마지막까지 이러기야? 억울하다 못해 짜증이 난 나는 욕설을 뱉었다.
“아니, 시발······!”
쿠르르르르릉 - - - -!!
그러자 뒤늦게 폭탄이 터지며 터널 위쪽 산에서 엄청난 눈사태가 일어났다.
끼익?
콰직!
맹렬하게 달려오던 감염체 웨이브는 위에서 떨어지는 바위 무더기에 깔려버린다.
그 뒤로 엄청난 규모의 눈사태가 쏟아지며 검은 물결을 뒤집어 삼킨다.
놈들의 기괴한 울음소리는 막혀버린 터널 입구와 함께 잦아들기 시작했다.
하아.
그 광경을 마지막으로 다리 힘이 풀린 나는 트럭 짐칸에 조용히 주저앉았다.
“······가은 씨.”
“담배 드릴까요?”
척하면 척이다. 나는 그녀가 내미는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 불을 붙였다.
연기를 힘껏 들이켜 내뱉으니 살얼음을 걷는 것 같던 정신이 몽롱해졌다.
* * *
우여곡절 끝에 강릉 톨게이트를 지났다.
우리는 그대로 새로운 중간 거점으로 선정된 유통 종합 단지로 향했고,
하이패스로 입구를 지나 요새 동맹군이 주둔 중인 창고 앞에 정차했다.
다들 기진맥진 쓰러지기 직전이다.
나는 수고했다는 마지막 말과 함께 대원들과 해산하며 트럭에서 내렸다.
덜컹!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번영회 직원이 헐레벌떡 달려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동장님, 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
도착한 지 얼마나 됐다고 호출인가.
내 상태가 영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경태가 불만을 표하려고 했다.
“곧 가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눈이 붉게 충혈된 녀석을 제지하며 번영회 직원을 먼저 보냈다.
“가은 씨, 오늘 촬영한 카메라 주세요. 경태는 아이 데리고 먼저 들어가고.”
“여기요.”
“괜찮으세요, 형님?”
“금방 끝날 거야.”
나는 같이 가고 싶은 눈치인 일행들을 먼저 보낸 뒤 태식 씨와 함께 창고로 향했다.
“젊은 동장.”
사무실 소파에는 얼굴이 수척한 김춘식 회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장 쉬어도 모자랄 판에 이렇게 불러서 미안해. 이 늙은이가 정말 면목이 없구먼.”
“아뇨, 괜찮습니다. 당연히 와야죠.”
우리가 전방에서 치열하게 싸울 동안 이들도 후방에서 밤낮없이 일했을 것이다.
서로의 고충을 아는 만큼, 개인적인 피로를 이유로 얼굴을 붉히고 싶지 않았다.
나는 준비된 간이 의자에 앉아 가은 씨가 촬영한 카메라를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저희가 목격한 감염체 군락입니다. 그 외에도 새로운 변이종도 발견했습니다.”
김춘식 회장은 우리가 확보한 감염체 군락의 정보를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그리고 점점 표정을 굳혔고 나중에 가서는 답답함을 참지 못해 담배를 물었다.
우리는 그 심정을 알기에 사무실 내부를 조용히 너구리 굴로 만들어주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하군.”
군락 규모가 상상을 초월한다.
그나마 진출이 어려운 대관령이라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강릉은 진즉 멸망이었다.
김춘식은 한숨과 함께 담배 연기를 뿜으며 의자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일단 국내, 외국 가리지 않고 무기랑 탄약은 긁어모으고 있어. 하지만 젊은 동장도 알다시피 이건 체급 차이가 너무 나.”
“도움을 청할 지역이 없을까요?”
“강원도에서 대형 요새가 있는 지역이라 봤자, 양양이나 원주가 전부지. 원주는 왕래가 없고, 양양은 자네도 알지 않나.”
그래, 양양 속초 쪽은 KLF가 점거한 후 서울 요새로 인해 철저하게 파괴······.
잠깐, 서울 요새? 문득 좋은 생각 하나가 떠오른 나는 마른 입술을 핥았다.
‘분명 양양이라고 했지.’
KLF를 쫓아 왔던 서울 요새 군대는 현재 양양에 주둔 중인 걸로 알고 있다.
국방부 성향을 그대로 계승한 놈들이니 분명 포라는 포는 다 끌고 왔을 터.
만약 여단 규모만 되어준다면 감염체 군락과의 정면 싸움도 가능하지 않을까.
“회장님.”
“좋은 생각 있나?”
“예.”
“젊은 동장이 망설이는 걸 보니 꽤 위험한 일인가 보군. 내 예측이 맞나?”
정확하다. 조용히 말을 아끼자 김춘식 회장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전보다 더욱 주름진 이마를 쓸어내리며 책상 밑에서 양주와 잔을 꺼냈다.
“인간이 죽을 각오로 달려들었으면 그 결정은 결국 하늘이 하는 법이야. 이 늙은이가 볼 땐 동장 자네는 최선을 다했어.”
진인사대천명.
회의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럼 한번 운명에 맡겨보자고.”
우리는 한 모금씩 나눈 술 한잔을 마지막으로 흔들리지 않는 의지를 확인했다.
* * *
회의가 끝나는 대로 곧장 유통단지를 나와 희망 요새로 복귀했다.
설마 이렇게 늦은 밤 올 줄 몰랐던 아파트 주민들은 깜짝 놀랐고,
동시에 죽은 사람 없이 무사히 돌아올 우리를 눈물로 반겨주었다.
하지만 일정이 바빴던 나는 더러운 몰골을 씻을 겨를도 없이 옥상으로 올라왔다.
“- - - - - -.”
꽤 오랜 시간 자리를 비웠던 할아버지 집은 지난 모습 그대로였다.
물론 그날 이후 쭉 침묵하고 있는 책과 만년필 또한 여전했다.
사춘기냐?
나는 슬슬 도움이 안 되는 책을 노려본 뒤 한쪽에 설치된 CB 무전기를 들었다.
어디 보자, 약속한 주파수가 이거였지.
나는 현재 강릉 부근에서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송지영 중위에게 무전 했다.
“송 중위.”
[······선배?]
다행이다. 늦은 밤이라 답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재깍재깍 반응해준다.
“강릉 상황은 알고 있지?”
[네, 모르는 게 더 이상하죠. 선발대가 오늘 복귀했다고······잠깐, 설마 그게 선배예요?]
“송 중위. 혹시 임진강 처음 도하 할 때 발견한 A-2 감염체 군락 생각나?”
[뜬금없이 군락은 왜요.]
“그거보다 큰 놈이 대관령에 있어.”
치익, 치이익.
대답이 없다. 아마 충격과 공포에 빠져 할 말을 잃어버린 게 분명하다.
잠시 뒤, 생각을 정리한 송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이걸 저한테 알려주는 이유가 뭐예요?]
“상부에 보고해. 내가 거래하자 했다고.”
[선배, 설마!]
“임상 치료제 넘길게.”
치료제를 완성하는 것도, 군락을 파괴하는 것도 어차피 강릉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임상 치료제가 내 손에 있는 이상, 적어도 거래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선배, 그렇게 쉽게 말할 일이 아니에요. 상부가 강제로 뺏으려 들면 어쩌려고요?]
“선박 한 척에 치료제 실어서 동해 한가운데로 보낼 거야. 바다 밑에서 썩어가는 거 보고 싶으면 그렇게 해보라고 전해줘.”
[······여파는 감당할 수 있겠어요?]
“수틀리면 내가 직접 가야지.”
복무 시절 내내 개새끼, 시발 새끼 거리며 수뇌부 멱살을 잡았던 경력이 있다.
단언컨대, 이번에 개수작 부렸다가는 침실로 직접 찾아갈 생각도 있었다.
[확실하네요. 보고 올릴게요.]
“고맙다.”
됐다. 목소리가 한층 밝아진 그녀는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과 함께 무전을 끊었다.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사각, 사각, 사각.
“!?”
그런데 그 순간 여태 침묵만을 지키던 만년필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녀석은 마치 왈츠를 추듯 책상 위를 돌아다니더니 이내 책 위에 안착했고
나는 무언가 홀린 사람처럼 집필되기 시작한 글을 하나하나 읽어내렸다.
[재앙의 징조는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생존자들은 콘크리트 벽 뒤에 숨어 이권만을 챙기려 했을 뿐, 이러한 징조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 대가는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감염체 군락의 등장이었다.]
[하지만 아직 희망은 있다. ‘그’는 장막을 들추어 진실을 엿보았고 방관이 아닌 맞서 싸우기를 선택했다. 늘 그래왔듯 하나로 뭉쳐 위험을 직시해야 한다. 오직 인간의 결집만이 이 난관을 헤쳐 나갈 열쇠였다.]
[서울 요새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치료제를 거래할 것이다. 물론 그들의 수뇌부는 불쾌함을 표하고 강릉 생존자들은 불안감을 느끼겠지만, ‘그’는 망설이지 않는다.]
천천히 책을 읽어 내려가던 나는 마지막 문장을 끝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이건 해야만 하는 일이니까.]
확신이 섰다.
[다음 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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