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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의 상속자-46화 (46/180)

46화

아포칼립스의 요새 상속자 46화

“확실하네요. 보고 올릴게요.”

송지영 중위는 마지막 대답을 끝으로 들고 있던 무전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초조함 때문에 잊고 있던 담배를 다시 물었다.

“······누님은 자존심도 없습니까?”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소위 이석진은 잔뜩 기죽은 목소리로 묻는다.

지난날 겁 없이 덤볐다가 개작살이 난 이후 그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자존심?”

“그렇잖습니까. 아무리 소싯적에 이름 좀 날렸다고 해도 겨우 중위 전역인데.”

그래, 실력자인 건 인정한다. 자신이 단 두 방에 정신을 잃고 병원 신세를 졌으니까.

하지만 전쟁이라는 건 결국 집단이 결정하는 것이지, 개인은 뚜렷한 한계가 있다.

말마따나 서울 요새에서 군대를 보내 강릉을 불바다로 만들면 어쩔 건가?

이석진은 유난히 저자세로 나오는 송지영 선임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 임관한 지 얼마나 됐지?”

“······올해 지나면 1년이죠.”

세상 참 좋아졌다. 아무리 특수 임무대 소속이라도 쏘가리가 이런 말을 하다니.

송지영은 감히 말도 걸어보지 못했던 지난 시절을 떠올리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너, 지금 박 중위님이 서울 요새로 복귀하면 누가 가장 먼저 마중 나올 거 같냐?”

“예?”

“진급이 계속 누락 되셔서 그렇지, 그분 동기랑 옛 상관만 해도 사령부에 수두룩해 이 미친 새끼야. 신원에 락 걸린 군인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거 보고 싶어?”

당시 한반도에서 벌어졌던 주요 전쟁 보고서를 살펴보면 항상 들어가는 부대가 있다.

바로 현 송지영이 소속된 특수 임무대의 모태가 되는 감염체 특수 대응팀.

오직 감염체 대응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특수팀 창설 멤버가 바로 박범석이다.

그들의 활약상이야, 전쟁 영웅 대우를 받는 것만으로 설명이 필요 없는데,

비밀리에 치러진 주요 작전을 아는 군 출신들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조금 과장 보태서 박범석과 만나고 싶어 하는 영관급 장교만 해도 한 트럭이다.

“네가 아버지 빽 믿고 지랄하는 거 알거든? 근데 제발 똥오줌은 가리고 싸라.”

“············.”

그냥 뭣도 모르는 군 출신 퇴물 하나가 헛짓거리를 벌이는 줄만 알았다.

이 사실을 전혀 몰랐던 이석진 소위의 얼굴은 하얗게 질리다 못해 창백해진다.

“쯧.”

그나마 손속에 여유를 둬주셔서 그렇지, 아니었으면 살아있지도 못했을 새끼가.

송지영은 고개 숙인 이석진을 향해 혀를 작게 찬 뒤 위성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일단 선배님 의중은 확인했으니 이제 나머지는 서울 요새와 쇼부를 쳐야한다.

송지영은 크흠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전화기 밖 상관과 조용히 대화를 나누었다.

* * *

[안녕하세요~ 오늘도 희망찬 아침을 여는 희망 FM 라디오 이하나입니다. 벌써 12월도 마무리가 되어가죠? 참 다사다난했던 겨울이었던 만큼 방송을 듣고 계신 청취자 여러분들도 감회가 새로울 것 같아요.]

[하지만 오늘만큼은 우울한 기분을 위로해줄 다양한 음악이 아닌, 요새 동맹에서 배포한 정보를 알려드리려고 해요. 강릉 전역에서 이 방송을 듣고 계실 생존자 여러분들은 귀를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하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감염체 웨이브가 시작되면 요새 동맹은 방어선을 최소한으로 유지할 예정입니다. 현재 안정권 바깥에 있는 모든 생존자 캠프는 안전 지역으로 들어오시거나 순찰대원을 찾아 요새로 몸을 의탁해주세요.]

[또, 우리 고향인 강릉을 지키기 위해 언제든 자경 단원을 모집하고 있으니 관심 있으신 생존자분들은 강릉항으로······.]

강릉에서 살아가는 생존자라면 10명 9명은 희망 FM을 듣는다고 봐도 좋다.

덕분에 정보를 전달하는 건 굳이 발품을 팔지 않아도 전파상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요새끼리, 혹은 캠프끼리 모여 살던 강릉 생존자들을 하나로 모으는 과정.

처음 대형 요새끼리 시작했던 요새 동맹은 서서히 그 몸집을 불려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강릉을 공격했던 감염체 웨이브는 전부 이 성산면을 통해 들어왔다고 들었습니다. 한 번 살펴보시죠, 동장님.”

나는 김태식이 건네준 쌍안경을 받아 저 아래로 보이는 성산면 시내를 살폈다.

“괜찮네요.”

칠봉산과 왕제산을 양쪽으로 둔 이 성산면 길목은 완만한 협곡 지형이다.

특히 호리병처럼 줄어드는 지역은 감염체 방어선을 구축하기 제격이었다.

산세가 험한 게 이럴 때 도움이 되는구나.

나는 지도와 현장을 직접 비교하며 방어선 배치를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부르르릉!

마침 차도에는 물자와 무기를 실은 트럭들이 성산면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무기는 얼마나 확보된 겁니까?”

“60mm는 워낙 많아서 다 새지는 않았습니다. 근데 그 이상 구경은 수입이 힘들어서요. 멀쩡한 견인포도 저 2대가 끝입니다.”

그 짧은 사이 중대급 지원 화기와 탄약은 차고 넘칠 정도로 많이 확보했다.

하지만 정작 대 감염체 전에는 필수인 105mm 이상 화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이대로 놈들이 쳐들어왔다가는 제대로 된 타격은커녕 지연전도 겨우 가능한 수준.

역시 서울 요새를 끌어들이는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혹시 그쪽과는······.”

“오늘 밤 접선 예정입니다.”

책이 예언한 대로 양양에 주둔 중인 서울 요새 군대는 거래를 흔쾌히 수락했다.

약속 시간은 당장 찾아오는 오늘 밤, 접선 장소는 중간 지점인 주문진이다.

이에 긴장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김태식은 내게 한 아마추어 무전기를 내밀었다.

“말씀하신 대로 그 ‘물건’은 가장 큰 선박에 실어 바다로 보냈습니다. 믿을만한 이들한테 맡겼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 당장 무전만 때리면 선원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상자를 바다로 던질 것이다.

어쩌면 자폭 버튼보다 타격이 클 이 낡은 무전기를 나는 소중하게 챙겨 넣었다.

“꼭 연락드리겠습니다.”

“······예, 부디 몸조심하세요.”

준비는 모두 끝났다.

나는 저 멀리, 불길한 먹구름이 일렁이는 대관령을 노려본 뒤 언덕을 내려왔다.

언덕 아래는 어느새 빨간색 픽업트럭을 끌고 온 일행들이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 * *

서울 요새.

멸망한 대한민국 정부를 계승한 집단이자, 한반도 최대 규모의 군벌이다.

경기도와 인천을 행정권 아래 두고 있어 사실상 조그마한 국가라고 봐도 좋았지만,

육로 왕래가 극히 적은 강릉 사람들 눈에는 서울은 그저 망국의 수도일 뿐.

오가는 여행자들 입에서 전해지는 소문만이 양측을 연결해주는 유일한 연결고리였다.

그런데 오늘,

드디어 그 두 지역이 만나게 되었다.

[선배, 어디까지 오셨어요?]

“근처야.”

부우우웅, 끼이익.

저녁 늦게 희망 요새를 출발한 픽업트럭은 밤이 돼서야 주문진에 도착했다.

차량이 멈추자 일행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에서 내려 사방을 경계했다.

“형님, 정말 혼자 가시게요?”

“대기하고 있어. 금방 돌아올 거야.”

접선 장소에는 오직 양측 지휘관과 그리고 중재자인 송지영만 참석하기로 했다.

나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일행들을 안심시킨 뒤 저 멀리 공터를 향해 걸어갔다.

타닥, 탁!

공터 한가운데에는 캠프파이어 타오르고 있었고 그 앞에는 군인 두 명이 서 있었다.

둘 다 벌써 도착했구나.

나는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상대 지휘관을 향해 예의상 경례를 붙여 주었다.

“충성.”

“으음.”

계급은 중령. 185cm는 가뿐하게 넘을 튼튼한 체구에 얼굴은 흉터투성이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경례를 받으며 내게 대뜸 악수를 권유했다.

“최 중령이라 부르게.”

“······박범석이라고 합니다.”

손을 잡자 커다란 체구에서 오는 아귀힘이 오른쪽 손을 통해 그대로 전해진다.

군인 맞아?

어디 레슬링 선수는 아니고?

가까스로 손을 놓지 않은 나는 최 중령과 함께 간이 의자에 마주 보고 앉았다.

“- - - - - - -.”

묵직한 침묵이 가라앉는다.

이 자리를 마련한 송지영 중위는 조심스럽게 거래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다.

“그래서.”

그런데 그 순간 조용히 팔짱을 끼고 있던 최 중령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임상 치료제는 어디 있지?”

목소리가 위협적이고 제스처가 거만하다. 딱 봐도 주도권을 잡으려는 게 보인다.

나는 다짜고짜 치료제부터 찾는 최 중령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기 가지고 왔겠습니까.”

“임자가 있는 물건을 가져갔으면 빨리 주인한테 돌려줘야지. 아무리 요새를 떠났다고 해도 그런 기본 상식도 잊었나?”

지랄하네, 지들도 미국이 개발한 거 몰래 훔쳐 와서 샘플로 만든 새끼들이.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는 그냥 하고 싶었던 말을 필터 없이 내뱉었다.

“그럼 잘 좀 잡지 그랬습니까.”

“······뭐?”

“병신도 아니고, 고작 KLF 하나 못 잡아서 이 사달을 만든 건 그쪽 아닙니까?”

병신? 너무나 신랄한 욕설에 송지영은 경악했고 최 중령은 으르렁 분노했다.

“제대로 미쳤군.”

“안타깝게도 제정신입니다.”

“좋은 말로 할 때 그냥 넘겨.”

“좆까지 마십쇼.”

언제 이런 대접을 받아 봤겠는가?

화를 참다못해 결국 폭발한 최 중령이 간이 의자를 밀치며 일어났다.

쾅!

“그 알량한 연줄 하나 믿고 이러는 모양인데, 나 최 중령이야, 호랑이 최 중령! 내가 이딴 장단에 계속 놀아날 거 같아!”

“진, 진정하십시오, 대대장님!”

“닥쳐! 너희 특임대도 똑같아! 오늘 있었던 일은 각하께 직접 보고하겠다! 고작 중위 나부랭이 새끼들이 감히······!”

달칵.

가만히 호통을 듣고 있던 나는 주머니에서 조용히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송신 버튼을 눌러 한창 항해 중일 선박을 향해 무전 했다.

“들리십니까?”

[송신 상태 양호. 말씀하십시오.]

“물건 상태 확인 부탁드립니다.”

[이상 없습니다~ 바로 던질까요?]

물건, 그리고 던진다.

내가 내걸었던 협박이 무엇인지를 잊고 있던 송지영은 입을 헤 벌린다.

마찬가지로 머리에 몰렸던 피가 싹 내려가 버린 최 중령도 일순간 당황했다.

“잠, 잠깐!”

“왜. 그냥 던지고 끝내지.”

“그게 어떤 물건인 줄 알고 이러는 거야?! 못 찾으면 여기 있는 사람들 모조리 몰살이야! 시체도 못 찾고 사라진다고!”

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식은땀을 흘리는 최 중령을 향해 다가갔다.

“우리가 아니라 댁이겠지. 물건도 못 찾아, 거래도 못 해, 사령부가 머저리도 아니고 누구 책임인지 모를 거 같아?”

그냥 단순히 귀한 물건도 아니고 무려 임상 3상까지 통과한 감염체 치료제다.

미국 눈치 보면서 조용히 회수하려고 한 물건인데 고작 중령이 깽판을 친다?

시체도 못 찾고 사라지는 건 최 중령과 그 부하들이 먼저일 것이다.

“············.”

처음 기세등등했던 모습은 어디 가고 동공이 세차게 흔들린다.

한눈에 보아도 넘어온 기세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정정 무전을 보냈다.

“잘 보관해주십시오. 귀한 물건이니까.”

[예에~]

송지영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처형대로 올릴 뻔한 최 중령도 빠르게 이성을 되찾았다.

한발 물러났으니 서로 진정하자.

이번 건은 진짜 파탄 나면 끝이니까.

“큰 거 바라지 않습니다. 현재 가지고 있는 지원 화기랑 탄약만 지원해주십시오. 일 끝나는 대로 바로 넘기겠습니다.”

반말이 자연스럽게 존댓말로 바뀐다.

이것이 대화로 해결하자는 제스처인 걸 눈치챈 최 중령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찰칵!

내가 자연스럽게 담배를 물자 송지영이 허둥지둥 달려와 불을 붙여 준다.

나지막이 퍼져나가는 담배 냄새에 한참을 고민하던 최 중령이 결국 입을 연다.

“약속을 지킨다는 보장은?”

“뭐, 믿는 거 말고 다른 방법 있습니까?”

없겠지. 당장 바다 위를 둥실둥실 떠다니는 감염체 치료제가 최우선이니까.

초장부터 거래 대신 협박을 가해오던 최 중령은 본전도 찾지 못한 채 패배했다.

“······거래하지.”

“좋습니다.”

나는 피고 있던 담배를 눈 위에 비벼 끄며 최 중령이 내미는 손을 잡았다.

* * *

푹! 푹!

진지 공사에 동원된 김상덕 씨는 한 때 강릉에서 잘 나가던 은행장이었다.

하지만 세상이 멸망한 지금은 죽 한 그릇이 아쉬워 이렇게 땅이나 파는 신세가 됐다.

관절은 왜 이렇게 쑤시고,

또 땅은 왜 이렇게 안 파지는지.

“에이, 시발!”

참다못한 김상덕 씨는 결국 들고 있는 삽을 집어던지며 담배를 꺼냈다.

마침 흡연장에는 자신과 같은 노동 지원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이러다 다 뒤지는 거 아니야?”

“재수 없게 무슨 소리야.”

“아니, 다들 노력하는 거 아는데, 솔직히 이걸로 막을 수나 있겠어. 60mm 빼면 견인포도 딸랑 저거 두 대가 끝이래.”

“진짜?”

다들 표정이 심각하다.

아무리 숨긴다고 해도 눈으로 보이는 재원과 규모는 감출 수가 없기 때문이다.

겨우 이 정도 무기로 파도처럼 몰려오는 감염체 웨이브를 막을 수 있을까?

흡연장에 쌓여가는 담배꽁초처럼 강릉 생존자들의 걱정도 점점 쌓여만 갔다.

‘튀어야 하나?’

그리고 그 부근에서 조용히 눈치만을 살피던 김상덕 씨는 고민했다.

집에서 능력 없는 남편, 한심한 아빠 취급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언제나 진심이었던 성실한 가장이다.

만약 사태가 더 심각해져 가정이 위협을 받게 된다면 정말 떠나야 하는 걸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한심해졌다.

‘젠장.’

남몰래 눈을 삼킨 김상덕 씨는 주름진 눈가를 비비며 코를 킁 삼켰다.

부르르릉!

덜컹!

“어, 어! 저, 저거 뭐야?”

그런데 그 순간 가만히 담배를 피우고 있던 생존자들 사이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다름이 아닌, 성산면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커다란 무언가를 목격한 것이다.

총중량 6.8 톤을 가뿐하게 넘기는 육중한 무게와 하늘로 높이 뻗은 우람한 7m 포신.

힘 좋은 군용 트럭도 낑낑거리며 끌고 오는 155mm 견인포가 모습을 드러냈다.

“와, 이런 건 어디서 구한 거야?”

“장난 아니구먼!”

어느새 생존자들이 우르르 몰렸다.

다들 155mm 견인포를 보며 감탄하다가도 저걸 어떻게 쓸 건지를 걱정했다.

덜컹!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여긴 다름 아닌 대한민국이니까.

“포병 보직이셨던 분!”

김상덕 씨가 재빨리 손을 들었다.

“나! 나요!”

“아따, 이게 얼마 만이여!”

한때 군대에 청춘을 불살랐던 민방위 용사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155mm 견인포 운용 인원을 채우는 건 불과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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