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아포칼립스의 요새 상속자 47화
잘그락.
나는 철제 탄약 박스를 열어 그 안에 담긴 중기관총 탄약을 살펴보았다.
반질반질하고 윤기가 도는 게 공장에서 제대로 찍어낸 양품이 분명하다.
“어때요?”
“훌륭하네. 고마워.”
호환되는 탄은 구할 길이 없어 M2 중기관총을 한동안 방치하고 있었는데,
설마 송지영 중위가 전화 한 통으로 이렇게 쉽게 구해다 줄 줄은 몰랐다.
고맙다, 송팡.
이 정도 양이면 당분간은 걱정 없이 중기관총을 운용해도 될 것 같네.
나는 일행들을 도와 탄약 상자를 적재한 뒤 다시 그녀가 있는 공터로 걸어 나왔다.
“바로 복귀야?”
“네. 치료제 위치를 찾는 게 임무였거든요. 끝났으니 슬슬 돌아가 봐야죠.”
중요 임무만을 도맡아 하는 특임대답게 아주 제대로 굴려 먹는구나.
나는 작별 선물 대신, 알비노 변이종 샘플을 넣어두었던 통을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대관령에서 처음 보는 알비노 변이종을 발견했어. 한 번 연구소로 가져가 봐.”
“뭐 특별한 점이라도 있나 봐요?”
“일단 변이종이 가지는 기본적인 능력은 다 갖추고 있다고 보면 돼. 근데 특이하게도 감염체를 유도하는 능력도 있나 봐.”
감염체=단순하다는 공식이 머리에 박혀 있는 송지영은 당연히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이걸 어떻게 설명해줘야 할까 하다가 그냥 느낀바 그대로를 말했다.
“군락이 자아가 있는 것 같아. 이 변이종은 감염체와 군락을 이어주는 연결체고.”
“······진심으로 하는 말씀이세요?”
“그 이상 알아볼 방법이 없어서 너한테 맡기는 거야. 연구소에 꼭 좀 전달해줘.”
아직 감염체 연구소가 있는 서울 요새라면 변이종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하던 송지영도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샘플을 받아 챙겼다.
투두두두두두 - - - !!
마침 저 멀리 상공에서 송지영 중위를 데려가기 위한 수송 헬기가 날아왔다.
나는 오랜만에 만나 반가웠던 그녀와 가볍게 악수한 뒤 바로 왼쪽을 바라봤다.
“·········.”
그곳에는 내게 호되게 혼난 병아리 소위가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서 있었다.
“이름이?”
“소, 소위 이석진!”
“초면에 미안했다.”
“아닙니다!”
“그랬다면 다행이고. 앞으로 어디 가서 깝죽거리지 말고 항상 몸 사리고 다녀.”
반쯤 농담으로 던진 말에 이석진은 부들부들 떨었고 송지영은 소리 내서 웃는다.
나는 녀석의 어깨를 툭 쳐준 뒤 헬기로 걸어가는 송지영 중위를 마중해주었다.
그녀는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는 발을 헬기에 반쯤 걸친 채 내게 물어보았다.
“선배!”
“응?”
“정말 안 돌아오실 거예요?”
“어.”
“도대체 이유가 뭐예요? 이제 전역도 하셨겠다 서울에서 편하게 쉬시면 되잖아요.”
“됐고, 또 연락해.”
단호하게 말을 끊자 송지영 중위는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입을 다물어버린다.
여기서 더 권유했다가는 내가 다신 만나지 않을 거라는 걸 눈치챈 것이다.
“······몸조심하세요, 선배.”
헬기가 떠오른다. 나는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것을 마지막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눈 위로 발자국을 찍힐 때마다 이제는 볼 수 없는 환영이 스쳐 지나가는 기분이었다.
* * *
가장 큰 골칫거리였던 화력 문제가 해결되면서 방어선 구축에 속도가 붙었다.
대여받은 무기를 두 눈으로 확인한 생존자들이 드디어 용기를 얻은 것이다.
하루가 멀다고 내려찍는 곡괭이와 삽질에 1차 저지선은 일찍이 공사가 끝이 났고,
구덩이와 철조망을 설치하는 2차, 3차, 저지선은 어느덧 마무리 단계를 지났다.
그렇게 언제 감염체 웨이브가 몰려올지 모른다는 불안한 나날이 지나,
드디어 모두가 기다리던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이브, 24일이 찾아왔다.
“이게 방어선 배치입니다.”
요새를 빠져나와 성산면으로 모인 동맹군 수뇌부는 천막 아래 모두 모였다.
그리고 내가 밤새워서 만든 방어선 배치를 보여주며 하나 같이 고개를 갸우뚱한다.
“젊은 동장. 내가 군 출신은 아니지만, 이 배치가 특이하다는 것 정도는 알 거 같네.”
그래, 이상할 만하다. 이 배치는 오직 감염체를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거니까.
나는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조용히 시키며 지도를 향해 다시 시선을 옮겼다.
“정규전이 선과 선, 비정규전이 점과 점의 싸움이라면 대 감염체 전투는 이 모든 게 구 형태로 뭉친 회(會)전이라 봐야 합니다.”
전쟁 초기만 해도 국군은 단순히 화력을 투사하고 놈들을 죽이는 것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그것이 너무 비효율적이고 위험하다는 걸 스스로 깨닫게 된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대 감염체전 교리.
최소한의 탄약으로 최대한의 감염체를 소멸시키는 것이 이 배치에 핵심이다.
“개인 화기는 무조건 단발, 분대 지원 화기 최대한 점사로 끊어 쏘게 하세요.”
“탄약 낭비를 막는 거군요.”
“후방에서 탄약을 실어 옮기는 것도 다 시간입니다. 탄약을 모두 소비한 생존자들이 알아서 뒤로 퇴각하게 하면 됩니다.”
“그럼 빈틈이 생기지 않을까요?”
“그래서 예비대를 운용하는 겁니다. 단순히 머리를 맞추는 행위라도 1시간 이상 지속되면 명중률이 현저히 저하되니까요.”
아, 그래서 후방에 생존자들이 몸을 녹일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하라 한 거구나.
처음 접해보는 교리에 흠뻑 빠진 사람들은 점차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화기 발사 순서를 정한 이유는 뭔가?”
“이것도 효율 때문입니다. 포탄이 떨어진 한 자리에 또 다른 포탄이 떨어지지 않게 하세요. 최대한 넓게 분포하는 겁니다.”
“그래서 155mm가 첫 사격이군요.”
가은 씨가 의외로 머리가 돌아가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뼉을 짝짝 쳤다.
“견인포는 두 가지 다 최대 사거리에서 사격하게 할 겁니다. 운용 인원들 숙달도가 높아서 포격은 문제는 없을 것 같네요.”
그 외에도 조명탄 타이밍, 예광탄, 후퇴 순서를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
질문이 많아질수록 간단하게 끝내려 했던 회의 시간은 점차 길어졌다.
펄럭!
그런데 그 순간 천막 문이 열리며 한 자경 단원이 다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왕제산 고지와 연결된 아마추어 무전기가 들려 있었다.
“움직임이 감지되었답니다!”
조용히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내나 했더니 놈들도 어째 축포가 필요했던 모양.
나는 내려놓았던 모자를 다시 주워 쓰며 딱딱하게 굳은 분위기를 깨트렸다.
“아마 반나절 내로 성산면 앞까지 도착할 겁니다. 그때까지 방어선 배치 끝내시고, 민간인들 전부 대피소로 이송시키세요.”
결전의 날이다.
이 순간을 위해 많은 희생을 치렀던 우리는 각자 정해진 자리로 이동했다.
* * *
부르릉, 끼이익.
덜컹!
조심스럽게 456번 국도를 달린 픽업트럭이 적당한 장소에 멈춰 시동을 껐다.
전조등이 꺼지자 어둠이 내려앉은 산길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으로 변했다.
달칵.
하지만 이럴 때를 대비해 노획해두었던 야간투시경을 꺼내 착용했다.
그러자 엄청난 규모의 감염체 웨이브가 협곡으로 이동하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
끝이 보이지 않는다.
군락은 우리를 최악의 적으로 생각했는지 모든 감염체를 강릉으로 보내고 있다.
일행들은 그 압도적인 광경에 할 말을 잃으면서도 자신들이 할 일을 잊지 않았다.
부르르릉!
다시 시동이 걸렸다.
일사불란하게 차량에 탑승한 우리는 속도를 내며 감염체 웨이브를 따라갔다.
유인 조 역할은 감염체 무리가 다른 길로 가지 않도록 성산면으로 이끄는 것.
시간을 확인한 나는 짐칸에 실려있는 중기관총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시작해.’
하나, 둘, 셋. 가은 씨와 경태가 하늘을 향해 동시에 조명탄을 발사했다.
삐이이이이이 - - -펑!
하늘이 한순간 환해진다.
어슬렁어슬렁 앞으로만 걸어가고 있던 감염체들은 넋 놓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빛이라는 물질이 놈들의 머리통에 있는 분노를 일깨운다.
끼이이이이이이이익 - - - - - -!!!!
끼이이이이이이이익!
끼이이이이이이이익 !!!!
이 많은 감염체가 동시에 울부짖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가만히 있어도 이명이 울리고 다리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덜덜 떨린다.
하지만 그걸 이겨내는 방법이 하나 있는데,
투두두두두두두두 - - - -!!!
바로 그보다 더한 반동을 느끼는 것이다.
번쩍!
내가 중기관총을 발사하자 차량에 설치된 서치라이트가 한순간 빛을 뿜어냈다.
뒤이어 다음 목표를 찾아낸 감염체 웨이브가 픽업트럭을 따라오기 시작했다.
끼아아아악!
끼기긱, 끽!
그래, 맛있는 미끼다. 물어라.
점점 속도를 더한 차량은 빠르게 도로를 가로지르며 놈들을 향해 꼬리를 흔들었다.
“11시 방향입니다!”
하지만 모든 계획이 원하는 대로만 진행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움직임을 관찰하던 알비노 변이종이 차량 진로를 방해하려고 했다.
‘중기관총이 우스워?’
나는 즉각 총구를 돌려 차도를 가로막는 감염체 무리를 향해 총알을 쏟아냈다.
척하면 척, 발사하면 발사하는 대로 박히는 총탄이 호쾌하게 길을 뚫는다.
부아아아아앙 - - - -!!
끼기긱!
자칫 길이 막혀 멈출뻔한 빨간색 픽업트럭은 핸들을 돌려 우회전했다.
목적지는 당연히 방어선이 구축되어있는 성산면. 차량에 탑승한 일행들은 쉬지 않고 조명탄과 총을 쏘며 주의를 끌었다.
끼이이이이이이이익 !!!!
그리고 그런 노력이 통했는지 감염체 웨이브 전체가 완전히 방향을 틀었다.
됐다!
나는 손으로는 중기관총을 장전하고 눈으로 는 적절한 시기를 계산했다.
진입로가 점점 좁아짐에 따라 밀도가 높아지고 하나로 뭉치는 때를 노려야 했다.
“형님! 곧 도착합니다!”
저 멀리 방어선으로 보이는 빛의 띠가 야경처럼 반짝이고 있다.
그 모습이 마치 크리스마스트리 같다는 실없는 생각에 헛웃음이 나왔다.
끼아아아아아악 - - -!!
양쪽 산맥으로 인해 지형이 좁아진다.
차량은 차도 한가운데를 가로질렀고 그 뒤로 감염체 파도가 우르르 몰려왔다.
멈추면 끝, 넘어지면 끝, 운전대를 잡은 경태의 얼굴에 식은땀이 가득하다.
하지만 급박한 시간도 잠시 우리는 아무런 변수 없이 성산면 시내로 진입했다.
“·········!!”
거리 간격이 좁혀온다. 뒤를 바라보니 검은색 웨이브가 파도처럼 밀려온다.
그 진동이 여실히 느껴지며 차량 또한 덜컹덜컹 위태롭게 흔들린다.
신호, 신호를 보내라.
나는 식은땀이 고인 손바닥을 닦으며 품속에 넣어둔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번쩍!
그러자 저 멀리 견인포가 설치된 포대 진지에서 빛이 두 번 빠르게 점멸했다.
지금이다.
치익!
“쏴!”
펑!
견인포 하나가 불을 뿜는다.
포성이 대지를 울리고 길게 이어지는 파공음이 밤하늘을 빠르게 가로지른다.
삐이이이이이이이 - - -콰아아앙!
고폭탄은 감염체 웨이브 사이에 정확히 명중한다. 폭발이 일어나고 화염이 솟구친다.
초탄 명중! 기준포가 날린 초탄이 명중하자 이내 본격적인 효력사가 시작됐다.
퍼버버버버벙!
불과 300m 뒤에서 폭발이 일어난 것을 확인한 나는 경태를 재촉했다.
“속도 올려!”
조금이라도 뒤처지면 포격에 휘말린다. 이를 악문 경태가 속력을 올린다.
동시에 차량은 성산면 시내를 빠르게 가로지르며 방어선 안쪽으로 진입했다.
삐이이이, 쾅!
포옹! 콰르르릉!
견인포, 박격포 할 것 없이 초탄이 명중한 부근으로 집중 포격이 가해진다.
아무 생각 없이 성산면으로 진입하던 감염체 웨이브는 말 그대로 녹아내렸다.
전세를 바꾸는 압도적인 화력!
인간은 사냥감으로만 보았던 군락의 당황스러운 비명이 여기까지 들려온다.
끼이이익!
임무를 끝마친 픽업트럭이 진한 스키드를 남기며 1차 저지선 앞에 멈춘다.
나는 내리자마자 짐칸에 쌓인 탄피를 발로 차며 저지선 부근을 빠르게 살폈다.
빨리, 빨리!
사격 준비!
저지선에는 각 요새에서 차출된 자경 단원과 생존자들이 벌써 배치를 끝냈다.
그리고 저 멀리서 몰려오는 감염체 웨이브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누군가는 마른침을.
누군가는 신을 향한 기도를.
각가지 방식으로 두려움을 이겨낸 그들은 방아쇠 위로 손가락으로 올려둔다.
마침 포격을 이겨낸 감염체 잔존 무리가 1차 저지선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나는 거칠게 숨을 내쉬며 트럭 위 중기관총 총구를 감염체 무리를 향해 겨눴다.
“발사!”
확성기를 통해 발사 명령이 떨어지자 수백 개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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