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아포칼립스의 요새 상속자 48화
멸망론자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문명이 멸망한 이유는 모두 우리가 너무 많은 죄를 저질러서 생긴 일이라고,
이를 용서받기 위해선 언젠가는 다가올 죽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 징벌이라는 걸 수십 년째 보고 있는 내 생각은 그들과 조금 다르다.
신이 인간에게 정말 벌을 내리고 싶으셨다면 화약과 총은 뺏어 가셨어야 했다.
투다다다다다다 - - - -!!
드르륵, 드르륵! 탕탕탕! 탕!
총은 신이고,
화약은 그 신의 벼락이다.
수백 개 총구에서 발사되는 총알은 이를 증명하듯 감염체 웨이브를 찢어발겼다.
시체 위로 시체가 쓰러지고, 또 그 위에 시체가 쓰러지며 점차 쌓여가는 산.
감염체들은 서로를 밟고 밀치며 1차 저지선을 향해 꾸역꾸역 밀고 왔다.
“재장전!”
“빨리, 빨리!”
한때 특전사셨다던 노인도, 처음 총을 잡아보는 아기 엄마도 열심히 총을 쏜다.
조금은 서툴고 느려도 이곳을 지켜내야 한다는 신념만은 확고하다.
그 덕분일까, 10분을 예상했던 1차 저지선은 1시간이 넘어가도 뚫리지 않았다.
“탄약 소진!”
“훈련받은 대로 하자고!”
하지만 우리가 애당초 계획했던 작전은 최소한의 인명 피해를 계산하고 짜였다.
생존자들은 소지 탄약이 전부 소진된 즉시 지정된 자리에서 벗어난다.
“서두르세요!”
그리고 미리 대기 중인 트럭에 탑승해 2차 저지선이 있는 후방으로 후퇴했다.
투두두두두!!
드르륵! 드륵!
그 사이 기관총 사수들은 빈 화망을 대신 틀어막으며 최대한 놈들은 저지한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10분, 내가 차 보닛을 두드리자 경태가 액셀러레이터를 밟는다.
부우우우웅!
“저기!”
픽업트럭은 1차 저지선 부근을 한 바퀴 돌며 남은 이들이 없나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합류 시점을 놓친 생존자들이 허겁지겁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다.
“잡으세요!”
“감, 감사합니다!”
후송차 역할을 자처한 우리는 그들을 짐칸에 태운 채 빠르게 지역을 벗어났다.
[마지막 차 확인!]
그러자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한 자경 단원이 뒤쪽 동료들을 향해 신호를 보낸다.
[격발!]
호쾌한 고함이 터진다.
동시에 1차 저지선 앞에 매설해둔 대량의 클레모아가 일순간 폭발한다.
퍼어어어엉!
포격과는 또 다른 폭발이다.
무전을 통해 터져 나오는 함성은 그 성과가 얼마나 큰지를 대변해주고 있다.
1차 저지선 앞에는 시체가 산처럼 쌓였고 일순간 웨이브 사이에 공백이 생긴다.
끼이익!
2차 저지선에 트럭이 정차한다.
내가 짐칸에서 내리자 동시에 비전투 인원들이 우르르 뛰어와 큰 수건을 내밀었다.
“다치신 분 계십니까!”
“따뜻한 물 있어요!”
대 감염체 전투는 지독한 장기전이다.
한참 놈들을 죽이다가도 후방으로 돌아와서 담배를 피우는 여유를 부려야 한다.
나는 사람들이 건네준 뽀송한 수건과 따뜻한 물로 얼어붙은 몸을 녹여냈다.
“예비대 차례입니다!”
“거기 간격 좁히세요!”
감염체 웨이브가 잠시 주춤거린 사이 생존자들은 탄약을 재보급받았다.
그리고 그동안 귀따갑게 들었을 지휘를 따라 또 웨이브를 상대할 준비를 했다.
달칵.
망원경을 꺼내 1차 저지선에서 움찔거리고 있는 감염체 웨이브를 살폈다.
놈들은 크레모아 쏟아지는 포격에 손실이 심각한지 함부로 다가오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어디까지나 단순 숨 고르기일 뿐, 분명 다시 진격을 시작할 것이다.
꿀꺽, 꿀꺽.
우적, 우적.
긴 밤이 될 것이다.
나는 입에 칼로리 바를 욱여넣고 배가 부르지 않는 선에서 수분을 섭취했다.
요즘 고생이 심한 차량을 타이어를 점검한 뒤 다시 짐칸 위로 올라탔다.
[놈들이 다시 움직입니다!]
숨 고르기가 끝났다.
군락은 포기할 생각은 없는지 2차 저지선을 향해 다시 감염체를 보냈다.
이에 잠시 대기 중이던 견인포와 박격포도 포대 위에서 다시 포격을 시작한다.
콰앙! 쾅!
쿠르르르릉.
감염체 웨이브 소멸률은 현재 3~40%, 우리 쪽 물자 소모율도 이와 비슷하다.
아마 놈들이 물러나지 않는 이상 3차 저지선까지 전쟁이 이어질 수 있다.
우리는 벌써 사격을 시작한 사람들을 따라 한 손이라도 더 보태려고 했다.
치익,
[동, 동장님 거기 계십니까?!]
그런데 그 순간 포대에서 지휘하고 있을 김태식이 다급히 무전을 보냈다.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챈 나는 빠르게 무전기를 꺼내 대답했다.
“무슨 일입니까?”
[저희 대원이 방금 후방 본부에서 총소리를 들었답니다! 근데 무전이 먹통이에요!]
후방 본부? 아니, 가장 안전해야 할 후방에서 왜 갑자기 총성이 들리는가.
무전이 먹통이라는 것은 단순한 오발 사고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다.
“제가 가보겠습니다!”
현재 2차 저지선에서 몸을 뺄 수 있는 인원은 현재 우리 희망 팀이 유일하다.
픽업트럭은 즉각 핸들을 돌려 후방 본부가 있는 3차 저지선을 향해 달려갔다.
드르륵, 드륵!
끄아아아악!
아니나 다를까, 후방에는 간헐적인 총성과 함께 이곳저곳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대체 왜?’
무슨 일이지,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분명 어둠과 눈보라를 밝히고 있을 서치라이트가 하나도 켜져 있지 않았다.
이는 기습을 가한 적이 전력부터 끊어버렸다는 것인데, 감염체가 그만한 지능이······.
‘변이종.’
놈들이 우회해서 후방을 공격했다. 나는 당황하는 경태를 향해 다급히 외쳤다.
“본부 막사로 달려!”
이제 내 명령은 조건반사다.
운전대를 잡은 경태는 혼란에 빠진 후방을 가로질러 즉각 본부 막사로 달려갔다.
끼기기긱, 끽!
끼이이익!
어둠과 눈보라를 틈타 잠입한 알비노 변이종들이 생존자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있다.
일부 용감한 이들이 총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시야가 극히 제한된 상황.
사람들은 어디서 공격받는지도 모른 채 심장과 목이 꿰뚫려 죽고 있었다.
“차량에서 떨어지지 마! 지원 요청하고 도망치는 사람들부터 우선 보호해!”
여기서 우리까지 당하면 본부는 물론 2차 저지선까지 위험해진다.
나는 차량을 중심 삼아 버티라고 외친 뒤 짐칸에서 내려 본부로 뛰어갔다.
김춘식 회장, 그가 아직 여기 있다.
나는 제발 목숨만 붙어있기를 바라며 천막 사이로 재빨리 몸을 던졌다.
끼이익!
철컥, 펑!
혹시나 해서 챙긴 산탄총을 알비노 변이종을 잡을 때 쓸 줄은 몰랐다.
나는 달려드는 놈들을 시원하게 터트린 뒤 청각에 모든 것을 집중했다.
끼아아아악!
아니나, 다를까. 사각을 노리고 있던 또 다른 변이종이 어둠에서 튀어나왔다.
펑!
가슴 한복판이 뻥 뚫린다.
시체를 발로 걷어차고 탄띠에서 꺼낸 슬러그 탄 두 발을 재빨리 장전했다.
달칵, 달칵.
천막마다 피가 흩뿌려져 있고 바닥에는 목과 심장이 뚫린 시체들이 가득하다.
억울하게 죽어간 그들의 얼굴을 침통한 심정으로 확인한 나는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총알 두 발, 3명 즉사.’
참모 역할로 따라왔던 번영회 직원 3명이 탁자 앞에 쓰러져 있다.
바닥에는 탄피 두 개, 변이종 피로 추정되는 액체들이 사방에 흩뿌려져 있다.
이미 습격을 받았구나.
나는 권총을 뽑아 발사했을 김춘식 회장의 자취를 쫓으며 사방을 훑어봤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김춘식 회장의 시체는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죽었다면 남아 있어야 할 시체.
그 자리에는 한쪽 다리를 잡고 끌고 간 형태의 핏자국만이 남아 있었다.
치익.
[형님! 지원군 왔습니다!]
밖에서 고함과 함께 알비노 변이종을 물리치는 총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일행들이 살아남은 생존자를 구출하고 때맞춰 지원군을 불러온 모양이다.
펄럭!
나는 그대로 천막을 뛰쳐나와 길게 이어진 핏자국을 재빨리 뒤따라갔다.
김춘식 회장 것으로 추정되는 핏자국은 바로 옆 왕제산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달칵!
쓰고 있던 야투경을 내려 시야를 확보한 뒤 나무가 빼곡한 산으로 진입한다.
사사사사사삭!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나무 사이를 타고 내려온 알비노 변이종들이 접근했다.
그 숫자만 물경 10마리.
놈들은 나를 알아보기라도 한 것처럼 조소가 섞인 울음소리를 끽 끽 뱉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긴 놈들의 마음대로 활개 칠 수 있는 군락 영역이 아니다.
끼아아아악!
철컥.
끽?
사각지대를 노려 달려오던 변이종 하나가 정확히 겨눠지는 총구에 깜짝 놀란다.
펑!
마찬가지로 머리통을 날려준 나는 방아쇠를 꾹 누른 채 연신 펌프를 당겼다.
철컥, 펑!
철컥, 펑!
철컥, 펑!
철컥, 펑!
보이지 않아야 두려움이지, 이렇게 잘 보이는 적은 동요조차 만들지 못한다.
나는 야투경의 존재를 모르는 알비노 변이종을 손쉽게 쏘고, 또 쏘고 죽였다.
끼아아아악!
울음소리에서 분노가 느껴진다.
동시에 자신들의 형제를 학살한 내게 공포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다.
계속 싸우라는 군락의 명령과 여기서 도망쳐야 한다고 외치는 본능 충돌.
결국 이성을 놓은 알비노 변이종들은 눈보라를 뚫고 나와 내게 달려들었다.
끼이이이이익!
철컥, 팡!
앞서 달려오던 놈을 죽이고 펌프를 당긴다.
동시에 머리 뒤로 날아오는 공격을 고개 숙여 피하고 바닥을 한 바퀴 굴렀다.
철컥, 팡!
급할 필요가 없다.
하나하나 차근히 죽인다.
공격을 피해 거리를 벌리고 둘러싸일 것 같으면 슬러그 탄을 퍼부어준다.
머리가 아닌 몸이 기억하는 것. 최상의 컨디션에서 최상의 움직임이 나온다.
철컥, 펑!
틱, 틱!
그리고 얼마나 많은 놈들을 바닥에 눕혔을까, 산탄총 탄약이 바닥이 났다.
이때를 노린 알비노 변이종들은 사방에서 거리를 좁혀오며 동시에 공격해왔다.
서걱!
끼이익!
하지만 어느새 뽑힌 토마호크는 변이종 놈의 팔을 반토막 냈고,
철컥, 펑!
반대쪽 손에 뽑힌 콜트 파이슨은 또 다른 놈의 머리통을 터트렸다.
스으으으.
숨이 살짝 차올랐다. 앞니 사이로 작게 숨을 뱉어낸 나는 놈들을 노려봤다.
이제 남은 변이종은 셋.
저 멀리서 고함과 손전등 불빛이 가까워지는 거로 보아 지원군도 다가오고 있다.
놈들은 이 이상은 불가능하다고 여겼는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꾸르르륵, 끅.
그런데 그 순간 가장 체구가 작은 알비노 변이종 하나가 검은색 피거품을 뱉었다.
동공이 없던 검은색 눈동자가 흰자위를 드러내며 이내 하얗게 물든다.
시시싯, 싯.
놈은 혀를 움직여 다른 소리를 냈다.
기괴한 울음소리가 아닌 높낮이가 있고 성조가 있는 그 목소리는 분명 ‘언어’였다.
나는 직감적으로 이 모든 사태를 유발한 군락이 이 자리에 찾아온 것을 눈치챘다.
시시싯, 싯, 시싯, 시익.
언어 다양한 감정이 섞여 있다.
대부분은 나를 향한 증오, 인간을 향한 분노, 모든 것을 집어삼켜야만 끝날 것 같은 탐욕이 깃들어 있는 게 느껴진다.
여기서 끝내지 않을 거라고?
놈이 히죽 웃는다. 마치 최후 통보를 하듯 나를 검지로 가리키며 경고한다.
아니, 하려 했다.
싯, 시시싯, 시······.
“뭐라는 거야, 시발.”
철컥, 탕!
나는 그대로 콜트 파이슨을 들어 조소하고 있는 군락의 대가리를 날려버렸다.
끽? 알비노 변이종들은 머리가 터져버린 군락을 보며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리고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살기 위해 허겁지겁 뒤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타앙!
탕!
실린더에 남은 총알을 깔끔하게 비워 도망치는 놈들도 군락 곁으로 보내주었다.
저 멀리 포성이 잦아든다.
무전기에선 포대를 지휘하고 있던 김태식이 다 쉬어버린 목소리로 외쳤다.
[놈, 놈들이 물러납니다!]
변이종의 몰살과 함께 감염체 웨이브는 성산면에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무전기가 연결된 모든 채널에서 커다란 환호성이 울려 퍼진다.
와아아아아아!!!
생존자들은 물러나는 감염체를 보며 서로를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한고비 넘겨 또 한고비, 지난밤의 악몽이 물러나고 새벽이 찾아오고 있었다.
“아우, 허리야.”
그제야 지끈거리는 허리를 잡은 나는 핏자국이 이어지는 숲속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다행히 죽지 않은 김춘식 회장이 머리에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동, 동장······자넨가?”
“예. 운수 억수로 좋으시네요.”
나는 붕대를 꺼내 출혈을 막고 바닥에서 일어날 수 있도록 부축을 돕는다.
그는 다행히 의식이 남아 있는지 어깨를 잡고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야지.”
“예, 그래야죠.”
눈이 내린 설산을 걷는다.
저 멀리 펼쳐진 방어선의 야경은 꼭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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