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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의 상속자-49화 (49/180)

49화

아포칼립스의 요새 상속자

“거기 나오세요!”

쿵, 우르르르.

강릉항에서 보낸 중장비 한 대가 산처럼 쌓여있는 감염체 시체를 밀쳤다.

그러자 검은색 살덩이들이 구덩이 안으로 우르르 떨어지며 불과 함께 타오른다.

전쟁만큼이나 중요한 전후 처리.

특히 주변을 오염시키는 감염체 특성상 불로 정화하는 것은 꼭 필요한 행위였다.

지난밤 총을 들었던 생존자들은 오늘을 삽을 들고 또 한 번 구슬땀을 흘렸다.

“35명 사망, 12명 실종입니다.”

35명 사망, 12명 실종, 승리와는 상관없이 결코 적다고는 할 수 없는 숫자다.

특히 대부분 인원이 후방에서 발생했다는 점에서 침통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빨리, 아니 애초에 이를 예상하였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참극인데.

나는 운구를 기다리고 있는 주검들을 살피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동장님, 이쪽입니다.”

한쪽에서 사망 원인을 살피고 있던 김태식이 조용히 나를 호출한다.

그곳으로 가보니 이번에도 머리가 뚫린 시체가 방수천 안에 싸여 있었다.

“같은 방식으로 당한 건 총 15구입니다.”

우연이 아니다. 긴 손톱을 이용해 코와 머리에 구멍을 뚫고 뇌를 전부 빨아먹었다.

대부분이 후방 인원으로 몰려있는 것으로 보아 알비노 변이종 짓이 분명했다.

“실종자들은 찾았습니까?”

“아뇨, 이 근방을 수색했는데 아직 발견된 건 없습니다.”

군락이 지능과 자아를 가지고 있다는 건 전쟁 전부터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괴이한 행동과 사람을 잡으려는 행위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만약 김춘식 회장도 그대로 끌려갔다면 이 시체와 같은 신세가 되었을까.

나는 눈조차 감지 못하고 죽은 직원의 눈을 감겨주며 방수천을 다시 감쌌다.

“사인은 유가족들한테는 비밀로 해주십시오. 그리고 대원들이 무리하지 않은 선에서 실종자 수색은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가족이 죽은 것도 비통할 텐데 머리가 빨아 먹혔다는 괴소문이 돌게 할 수는 없다.

적어도 전문적인 장의사를 고용해 제대로 염하고 장례도 정식으로 치를 생각이다.

그렇게 사상자 명단을 전부 확인한 나는 김태식과 함께 본부 천막으로 걸어갔다.

슬슬 현장도 정리되는 분위기이니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낼 차례였다.

“군락은 어쩌실 생각입니까?”

“놈들도 감염체 손실이 커서 한동안은 못 움직일 겁니다. 지방 도로가 뚫리는 대로 공격해서 끝장을 봐야죠.”

“음, 눈사태 규모가 생각보다 커서 치우는데, 아마 이틀 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다시 연락해주십시오.”

군락은 이번 침공으로 수년간 쌓아놓았던 전력 대부분이 소멸당했다.

거기다 변이종까지 전부 잃었으니 다시 몸집을 키우려면 한참을 걸릴 터.

이제는 이쪽에서 대관령으로 쳐들어가 한바탕 폭죽을 터트려 줄 차례였다.

어째 쉴 틈이 없네.

나는 치워도 치워도 몰려오는 업무에 한숨을 쉬며 터덜터덜 앞으로 걸어갔다.

“형님!”

그런데 그 순간 저 멀리서 손에 무언가를 잔뜩 쥔 경태가 허둥지둥 뛰어온다.

뭔가를 대뜸 내밀길래 받아보니 다름 아닌 아직 따뜻한 백설기 떡이었다.

“떡이네?”

“크리스마스 떡이래요! 강릉항에서 방금 도착한 건데 진짜 맛있어요.”

어쩐지 현장이 소란스럽다고 했더니 강릉에서 떡을 만들어 보내준 모양이다.

나는 김이 폴폴 나는 백설기 떡을 한 번 두 번 뒤집은 뒤 이내 입으로 가져갔다.

우물우물.

달다. 귀한 쌀과 콩, 설탕이 들어간 귀한 양식이 오늘따라 더 달게 느껴진다.

“너 몇 개째 먹냐?”

“우웁.”

“에라이, 화상아!”

일행들과 픽업트럭 옆에 쪼그려 앉아 오순도순 백설기를 까먹었다.

볼때기가 터지도록 떡을 쑤셔 넣는 경태 녀석을 보며 어이없어하다가도,

그런 경태를 기어코 넘어트리는 가은 씨를 보며 또 한 번 웃음이 터진다.

그래, 먹고 웃으니 좋네.

그제야 살아남았다는 게 실감이 되었다.

* * *

늦은 저녁이 돼서야 모든 정리 끝났다.

나는 일행들을 먼저 희망 요새로 돌려보낸 뒤 강릉항으로 가 선박에 올라탔다.

그리고 숨겨 놓았던 감염체 치료제를 챙겨 접선 장소인 주문진항에 정박했다.

항구에는 이미 도착한 최 중령이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소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왔군.”

“운치 챙기시는 겁니까?”

“동해니까.”

주문진 앞 바다에서 건진 활어회에다 상식 아저씨가 침을 흘릴 두꺼비 소주라.

곧 서울로 돌아가실 양반이 아주 마지막까지 제대로 즐기다 가시는구나.

나는 조금 거리를 두고 담배를 물었다.

“대여한 무기는 전부 주문진 출구 앞에 세워뒀습니다. 가져가기만 하시면 돼요.”

“물건은?”

“저쪽 선박 앞에 있습니다.”

감염 치료제를 가져왔다는 말에 최 중령은 술 냄새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간 남몰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베레모를 벗은 머리는 많이 비어있었다.

“한잔하겠나?”

“······뭐, 그러죠.”

웃으면서 술잔을 나눌 사이는 아니지만, 이제 떠난다는데 소주 한 잔 정도야.

나는 최 중령이 내미는 술잔을 받아 들고 건배와 함께 쭉 들이켰다.

술기운이 돌고 바다가 보이니 처음 날을 세웠던 분위기는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상부에서 온 제안이 하나 있다.”

“돌아갈 생각 없습니다.”

“그건 사령부도 충분히 알고 있으니 그만하지. 이번 제안은 완전히 다른 건이야.”

전역할 때는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 죽여버린다고 하더니 제안은 갑자기 무슨 제안.

나는 됐다고 거절할까 하다가 일단 들어나 보자는 마음에 귀를 기울였다.

“각하께서 요즘 무역항을 찾고 계시다.”

“인천이 있지 않습니까?”

“서해에서 벌어들이는 시세 차익보다 약탈당하는 물자가 더 많아지고 있어. 상부도 이를 걱정해서 다른 루트를 찾는 거다.”

무장 해적들이 활개 친다는 건 알고 있는데 그게 설마 항로 유지가 불가능할 정도였나.

요새 간 해상 무역이 필수인 서울 요새로선 확실히 좋은 소식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제안이 뭡니까?”

“강릉과 중계무역을 했으면 하더군.”

중계무역? 말 그대로 강릉항이 서울 요새의 물자를 대신 수입, 수출하라는 뜻이다.

나는 정말 의외인 제안에 이게 함정인가, 아닌가 고민을 해야 할 정도였다.

“협박입니까?”

“아니, 정말 제안이다.”

“제안처럼 안 보이니까, 이 말 하는 겁니다. 양아치 짓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내가 자연스레 경계하자 무언가를 한참 고민하던 최 중령이 목소리를 낮췄다.

“그냥 서로 솔직하게 말하자고.”

“예.”

“서울 요새가 소유 중인 무역 선박이 전부 나포당했어. 원유는 고사하고 당장 시장에 풀 식량과 물자도 부족한 상태다.”

그 두 마디에 이해가 끝났다.

수입이 안 된다면 지역 방어는 고사하고 요새를 유지할 수 있는 동력이 끊긴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서울 요새 입장에선 한시라도 빨리 다른 항구를 구해야 했다.

어쩐지 저자세로 나온다더니, 지금 급한 건 우리가 아닌 바로 저쪽이었다.

“육로 운송은요.”

“열차가 있지 않나.”

열차. 그래, 운송 가격도 저렴하고 돌아갈 필요 없이 강릉과 서울을 곧장 연결한다.

나는 그럴싸한 제안에 우리 쪽으로 떨어질 시세 차익부터 계산기를 두드렸다.

‘무조건 이득이다.’

최소로 이윤을 잡는다고 해도 희망 요새만 한 장벽을 수십 개는 세울 수 있다.

가뜩이나 강릉항으로 가중되는 부담이 걱정이었는데, 괜찮은 기회가 생겼다.

고민하는 척 잠시 술을 홀짝이던 나는 최 중령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정말인가?”

“못할 건 또 뭡니까. 비즈니스인데.”

물론 서울 요새와 좋은 관계인 것도, 최 중령이라는 사람이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 박범석을 기분 나쁘게 하기에는 그들이 내민 이득이 너무나 컸다.

나를 돈으로 매수하려는가!

아주 현명하신 판단이다.

“으음.”

최 중령은 얼떨결에 손을 잡는다.

분명 수락해서 다행이어야 하는데, 왜 앞으로 손해를 볼 것 같은 기분이지?

나는 최 중령이 술에서 깨기 전 얼렁뚱땅 상황을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치료제 잘 가져가시고, 좋았던 기억, 좆같았던 기억 다 털고 가시길 바랍니다.”

“알, 알겠네. 곧 연락하지.”

좋은 기억도 털고 가라고?

말실수겠지. 라고 최 중령은 생각했다.

* * *

“잘한다!”

“엄마, 여기야!”

아파트 공원에 설치된 캠프파이어 앞으로 모든 주민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맛있는 수프와 햄 조각을 나눠 먹으며 즐겁게 노래 부르고 떠들었다.

때아닌 늦은 밤 찾아온 크리스마스의 축제.

앞으로 1시간이면 끝날 짧은 여흥이었지만, 다들 아랑곳하지 않고 즐기고 있다.

“동장!”

그렇게 한참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는데 거나하게 취한 상식 아저씨가 다가왔다.

“내 특제 양송이수프 맛이 어때?”

“통조림 맛인데요.”

“양송이만 통조림이여!”

“그게 통조림 맛이죠, 뭐.”

거짓말이다. 상식 아저씨가 정성을 다해 끓인 수프 맛은 정말 따뜻하고 끝내줬다.

나는 억울해하는 아저씨를 보고 낄낄 웃으며 반짝이는 요새 내부를 둘러봤다.

희망 아파트는 칙칙한 회색빛을 벗고 오랜만에 조명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장식은 누가 한 거예요?”

“애들이 하겠다고 나서길래 시켰지. 뭐, 우리가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잖여?”

“그러게요. 보기 좋네요.”

우리가 감염체와 전쟁을 벌일 동안 전전긍긍 소식만을 기다렸을 주민들이다.

겨우 크리스마스트리 하나로 이 불안감을 종식할 수 있다면 도리어 환영이었다.

“처자! 처자가 노래 한번 해!”

“제, 제가요?”

마침 술기운으로 얼굴이 붉게 물든 가은 씨가 성황에 못 이겨 앞으로 나온다.

어르신들 패시브인 노래해! 스킬에 걸려든 모양인데 기분이 마냥 좋아 보인다.

“그럼 한 곡만······.”

사이다병에 숟가락이 꽂힌다. 가은 씨는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이내 노래를 불렀다.

“- - - - - -.”

노래는 예상외로 크리스마스 밤과 무척 어울리는 고요한 성가였다.

가은 씨가 크리스천이었다고 한 기억이 있는데 농담이 아니었던 모양이야.

훌쩍.

분위기가 조용히 가라앉는다.

모두가 캠프파이어 앞에 가만히 앉아 아름다운 성가를 들으며 두 눈을 감고 있다.

몸을 치유하는 적막함.

영혼을 어루만지는 고요함.

언제 죽을지 모르는 치열한 세상 속에서 훌쩍이는 눈물로 아픔을 씻어내린다.

I'm only going over home.

나는 집으로 갑니다.

all my loved ones who've gone on.

사랑했던 모든 사람을 만나기 위해.

순간 졸음이 몰려온다.

그동안 피곤함에 지쳐 쓰러졌던 잠이 아닌 진정한 졸음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조명이 반짝이는 크리스마스트리에 기댄 채 아무도 모르는 사이 잠이 들었다.

의식이 점차 사라지고,

곧 편안한 암막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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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김상식이 신호하자 노래를 부르던 김가은도, 주민들도 모두 움직임을 멈춘다.

그리고 박범석이 잠에서 깨지 않도록 주변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리스마스트리 주변에는 어느새 희망 요새 주민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스륵.

경태가 조심스럽게 박범석을 들어 올리자 주민들은 옆으로 물러나 길을 만든다.

그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고,

그 누구 하나 소리를 내지 않았다.

오직 침묵을 지키며 숙이는 고개만이 그들이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존경이었다.

사각, 사각, 사각.

[위대함의 대가는 책임감이다. 즉,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 건 고통을 짊어지고 이겨내는 것에 있다. 두 차례 전쟁을 극복한 강릉 공동체는 더욱더 견고해졌다.]

[하지만 아직 과제는 남아있다. 강원도 전역으로 영향력을 뻗쳤던 옛 성세를 회복해야 한다. 감염체가 사라진 틈을 타 장벽을 넓히고, 토지를 확보해 폐허뿐인 도시 위에 새로운 문명을 건설할 기회가 왔다.]

[다음 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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