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아포칼립스의 요새 상속자 50화
문명.
사전적 의미를 찾을 것도 없이 당장 생각해보라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많다.
뭐, 도시는 기본이고 높은 빌딩과 수많은 차, 사람, 그리고 다양한 인프라.
동시에 각 도시와 생산, 소요 시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있는 하나의 덩어리다.
말 그대로 현재 우리가 짓고 사는 요새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명을 재건하라고?
말이 쉽지, 시발!
나는 오랜만에 기분 좋게 일어나서 책을 읽자마자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처음에는 그래도 해볼 만한 과제를 던져주던 책이 드디어 정신이 나간 모양이다.
하지만 더러워도 어쩌겠는가.
결국 책이 원하는 목표와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이상향은 일치한다.
시작이 반이라고, 조금씩 쌓다 보면 그 문명이라는 걸 재건할 수 있을지 모르지.
한숨을 쉬며 생각을 정리한 나는 가볍게 세안하고 나와 오늘 하루 업무를 시작했다.
첫 번째 일정은 자리를 비운 사이 많이 진척된 요새 증축 공사 시찰이었다.
“공사는 언제쯤 시작해요?”
“지반은 다 다졌는데 아무래도 추운 날씨가 문제인가벼. 이 기온에 시멘트 말았다가는 큰일 난다고 기술자들이 절레절레하더라.”
하긴 오죽 추워야 말이지. 영하 2~3도면 몰라도 이 정도 추위면 시멘트가 언다.
폴리텍대 출신 기술자들 말대로 지금은 지반만 다져놓고 기다리는 게 최선이었다.
그렇게 중축될 땅만을 바라보고 있는데 상식 아저씨가 손뼉을 짝 치며 말했다.
“아, 맞다!”
“예?”
“봄 하니까 생각났는디, 우리도 슬슬 내년 농사 준비도 시작해야 하지 않겄어.”
“에이, 농담하지 마세요.”
“진짜라니까. 여태 농사 안 지었으면 우리가 뭘 먹고 살았게? 저기 안인리로 가면 차도 옆에 농사지을 땅도 크게 있어.”
영동 지방이라 무시하고 있었는데 자체적으로 농사를 짓기도 하는구나.
제법 충격적인 사실에 놀란 나는 종종걸음으로 상식 아저씨를 따라갔다.
“종자가 있긴 해요?”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뒀지. 이건 백만금을 준다고 해도 절대 안 바꿔.”
“품목이 뭔데요.”
“감자랑 고구마.”
적당하네. 구황작물이 쌀처럼 농업용수와 많은 노동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니까.
해가 갈수록 그 규모가 작아지고 있다고 하니 이번에는 좀 제대로 해볼까.
나는 벌써 봄 농사 생각으로 들떠 있는 상식 아저씨를 향해 말해주었다.
“이왕 하는 거 크게 좀 해봐요. 제가 화학 비료랑 씨감자 좀 더 구해볼게요.”
“참말로!?”
가뜩이나 가중된 업무가 늘어난다는 소리인데 그렇게도 좋으실까.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희망 요새 생각밖에 안 하시는 상식 아저씨다.
“박 동장님이 살아계셨으면······.”
으, 또 시작이다. 나는 지겨운 옛날이야기에 진저리치며 장벽 아래로 도망쳤다.
치익
그러자 마침 방금 잠에서 깬 것 같은 경태가 하품과 함께 무전을 보내왔다.
[형님, 자리에 계세요?]
“응. 장벽이야.”
[강릉항에서 무전이 와서요. 혹시 지금 빨리 와주실 수 있냐고 물으시는데요?]
응? 길을 뚫는 데 이틀 정도 걸린다고 하더니 벌써 공사가 끝이 났나?
나는 생각보다 빠른 속도에 의아함을 느끼며 일단 알겠노라고 대답했다.
“또 어디 가는겨?”
“부르는 곳이 많네요.”
“다들 동장을 신뢰한다는 증거 아니겠어. 진짜 강릉 시장 출마를 한번······.”
또, 또 그러신다. 나는 있지도 않은 선거 출마 권유에 일단 후다닥 도망치고 봤다.
* * *
이제 요새 동맹군의 중심으로 자리 잡은 강릉항은 여전히 부산스러웠다.
전쟁 승리 소식을 들은 외국 선박이 일시에 정박해 인산인해를 이룬 탓이다.
하지만 나는 복잡한 절차를 그대로 건너뛴 뒤 김춘식 회장이 있는 병실로 향했다.
“바로 와줘서 고맙네.”
“몸은 좀 어떻습니까?”
“당분간은 입원하라고 하더군. 그래도 태식이가 있어서 번영회는 큰 걱정 없어.”
“······많이 부족합니다, 회장님.”
연이은 활약으로 차기 회장 자리는 김태식으로 낙점이 되는 분위기다.
나는 갈수록 좋아지는 둘 관계를 기분 좋게 바라보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래서 무슨 일이십니까?”
“군락 관련 일이야.”
김춘식 회장이 손짓하자 김태식이 가방에서 사진 몇 장을 꺼내 내밀었다.
눈치를 보아하니 길을 뚫었다는 소식 같지는 않고, 도대체 뭐길래 사진까지?
나는 김태식이 내민 사진을 한 장 한 장 살피며 무슨 일인지를 확인했다.
그 사진에는 다름 아닌 군락의 본거지였던 대관령 시내 모습이 찍혀 있었다.
“······언제 찍은 겁니까?”
“오늘 아침입니다.”
분명 감염체와 더러운 오염 물질로 가득해야 할 할 대관령 시내가 깨끗했다.
이는 눈속임이 아닌 것을 증명하듯 초근접 사진까지 여러 장이 존재했다.
“가장 노련한 대원들을 뽑아 정찰하게 한 결과입니다. 보시다시피 시내 안쪽으로 접근했는데도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하하. 말도 안 돼. 이 새끼들 지금 우리가 쳐들어가기 전에 방 뺀 거야?
나는 그 영악함에 혀를 내두르며 혈압이 오르는 뒤통수를 손으로 툭툭 쳤다.
“어디로 갔는지는 모릅니까?”
“영서지방으로 간 흔적을 발견했다고는 하는데, 참 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
아니, 인간을 사냥하던 놈들이 이렇게 도망쳐 버릴 줄 우리가 알았겠냐고.
졸지에 우리가 뿌리 뽑지 못한 재앙의 씨앗이 다른 지역으로 굴러가게 되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마른세수했다.
“어쩌실 생각입니까?”
“대원중 직접 추격하겠다는 자원자는 많아. 하지만 젊은 동장도 알다시피 한 사람이 아쉬운 상황이라 쉽사리 결정 못 하겠어.”
고작 코 앞인 대관령으로 향하는 것도 온갖 위험이 산재하고 있는 세상이다.
그런데 산 넘어인 영서 지방까지 소중한 전투 인원과 물자를 어떻게 보낸단 말인가.
나는 표정이 어두운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등받이에 기댄 채 입맛을 다셨다.
차량은 아무리 많이 끌고 가봐야 한계가 있고 차라리 중간 거점이 있다면 좋을 텐데.
나는 머리가 안 돌아가려던 차 습관적으로 담배 하나를 꺼내 물려고 했다.
‘음?’
그런데 그 순간 잠시 잊고 있던 기억이 머리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육로 운송은요.’
‘열차가 있지 않나.’
잠깐, 내가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꼭 우리가 차량을 고집할 필요는 없잖아.
강릉부터 시작해 평창, 횡성, 원주까지 웬만한 영서 지방은 다 지나가는 이동 수단.
거기다 튼튼하고 힘 좋으며 기관총 몇 개만 달아줘도 움직이는 요새가 된다.
나는 왜 그러냐는 듯 바라보는 두 사람을 향해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낮췄다.
“사실 제가 좋은 제안 하나를 받았습니다.”
원래 세상에서 제일 반가운 게 하나를 사면 하나를 더 주는 1+1행사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중계무역과 영서 지방 탐방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서울 요새와 저희 강릉항이······.”
나는 그날 있었던 일을 전부 털어놓았다.
* * *
‘한 병, 두 병, 세 병.’
그 귀하다는 전쟁 전 양주가 무려 3병이나 조수석에서 찰랑거리고 있다.
내가 중계무역 건을 따왔다는 말에 입이 떡 벌어진 김춘식 회장이 준 선물이다.
‘고맙네! 정말 고마워!’
사연을 듣자 하니 예전부터 서울과 무역을 하는 건 상가 번영회의 숙원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의 콧대가 워낙 높다 보니 실현하는 건 그리 쉽지만은 않았고,
매년 자존심만 구겨진 채 돌아와 이제는 완전히 포기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계약을 따온 것도 모자라 무려 제대로 된 차액까지 남길 수 있다니.
김춘식 회장은 잠시 아픔도 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호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뭐,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덕분에 나도 양주는 물론 화학 비료와 씨감자까지 보답으로 받을 수 있었다.
아저씨가 좋아하시겠네.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오늘따라 날씨가 좋은 해안 도로를 여유롭게 달렸다.
“- - - - - -?”
그런데 그 순간 바다를 구경하며 운전하던 내 시야로 우연히 한 물체가 포착되었다.
그것은 꽤 큰 크기의 선박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배 이름이 일본어였다.
어디서 본 기억이 있는데.
나는 조심스럽게 속도를 줄여 배가 정박해 있는 안인항 앞에 차를 정차했다.
‘요시다 호?’
그리고 배 이름을 확인하자마자 강릉항 번영회 사무실로 무전을 날렸다.
“박범석입니다. 계십니까?”
[으응? 사장님?]
혜지 씨가 오늘 당직이었구나. 나는 마침 잘 됐다는 생각에 넌지시 물었다.
“혜지 씨, 혹시 요시다 호 입항했습니까?”
[잠시만요. 한번 명단 좀 볼게요.]
요시다 호, 이제 기억난다.
내가 식수를 팔러 강릉항에 왔을 당시 높은 가격으로 낙찰해 간 일본 선박이다.
그들은 무슨 일이 있길래 정식으로 허가된 강릉항이 아닌 이곳에 정박한 것일까.
잠시 뒤 혜지 씨가 무전을 보내왔다.
[한 일주일 동안 안 왔는데요?]
“······지금 안인항에 정박했네요. 혹시 이거 상가 번영회에서 허락한 겁니까?”
[그럴 리가요. 저희가 호구도 아니고 다른 곳에 정박하게 두지는 않죠.]
강릉시에 속한 모든 항구는 사실상 강릉항 번영회가 소유하고 관리하고 있다.
정박을 허가하지 않았다는 건 불법 입항했다는 뜻. 나는 수상한 냄새를 맡았다.
“안인항 쪽으로 대원들 좀 보내주십시오.”
[······곧 갈게요.]
나는 무전과 자동차 시동을 껐다.
그리고 조용히 차량에서 내려 선박이 정박하여있는 안인항 안으로 들어갔다.
‘흔적.’
눈 위로 발자국이 찍혀 있다.
그 깊이와 보폭이 다양한 것으로 보아 적어도 10명은 넘는 사람이 여기를 오갔다.
나는 혹시 몰라 챙겨온 권총을 뽑은 뒤 그 흔적을 따라 선착장을 향해 걸어갔다.
“- - - - - -.”
흠칫! 일본어가 들려온다. 곧장 횟집 창문을 넘어 그 안에 몸을 숨겼다.
그러자 상자를 든 일본인 선원이 묵직한 상자를 선착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중에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은 강릉항 창고에 있어야 할 러시아제 탄약 상자였다.
‘재밌네.’
보름 전부터 수출이 금지된 품목으로 알고 있는데 너무나 당당하게 배에 싣고 있다.
놈들 의도를 알아챈 나는 횟집에서 기어 나와 버려진 폐차 뒤에 붙었다.
선착장 앞에는 요시다라는 일본인과 낯이 익는 한 남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물건은 이게 단가?”
“······이것도 힘들게 빼 온 겁니다.”
누군가 했더니 강릉항 주민회의 당시 나랑 충돌이 있었던 박 대리라는 직원이었다.
그때도 참 재수 없게 굴더니 기어코 이승 은퇴를 당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찰칵.
볼 것도 없다. 그냥 대원들이 도착하기 전에 총알 한 방씩 떠먹어줘야겠다.
“이 남자입니까?”
그 순간 한국어 사이로 버터가 굴러가는 것 같은 미국식 영어가 들려왔다.
힐끔 시선을 돌리니 한 백인 남성이 선박에서 걸어 내려오고 오고 있었다.
“맞습니다, Mr 제임스.”
“협력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시다 상. 원하시는 물건은 곧 도착할 겁니다.”
풍기는 분위기상 저 요시다라는 일본인이 밀거래와 이 자리를 주선한 것 같다.
제임스라 불린 미국인은 박 대리와 악수하며 가식적인 웃음을 짓는다.
“그래서, 이 정도면 만족하시는지?”
뭘 받았는지 몰라도 박 대리는 무척 불안해 보이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빙글빙글 웃고 있는 제임스를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해주었다.
“박범석이라고 희망 요새에 리더로 일하고 있는 남자입니다. 이틀 전에 주문진항으로 떠나는 걸 제가 똑똑히 봤습니다.”
“으음, 그 뒤로는요?”
“물, 물건은 전달했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뭔지는 저도 알아낼 수가 없어서······.”
잠깐 고개만 돌렸다 하면 종양 같은 새끼들이 무럭무럭 자라 뒤통수를 때리려고 든다.
인정한다. 이번 건은 우연히 겹치지 않았으면 정말 아프게 맞을 뻔했다.
근데 아쉽게도
내가 현장을 봐버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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