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아포칼립스의 요새 상속자 52화
부우우우웅 - -!
나와 김태식을 태운 무장 트럭은 중앙동 시내 거리를 천천히 가로질렀다.
적막하고 위험했던 예전과는 달리 시내에는 사람 사는 냄새가 풍겨오고 있었다.
“다들 여기 거주하는 겁니까?”
“시내가 안전하다는 인식이 생겨서 캠퍼들이 많이들 옮겨오는 추세입니다.”
생활권 확장 공사가 잘 진행 중이라고 듣기는 했는데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듣자 하니 감염체는 사라진 지 오래고 치안도 무척 안정되어 있다고 하는데,
캠퍼들로서는 좁은 은신처보다 이런 안전 지역이 훨씬 살기 좋을 것이다.
뿌듯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던 김태식은 마침 저 앞에 보이는 검문소를 가리켰다.
“많을 때는 하루에 50명도 넘게 이주해옵니다. 보통 저렇게 검문소를 거쳐서 강릉항으로 오면 순서대로 주거지를 배정받죠.”
“출입국사무소 같은 거군요.”
이 정도 체계면 거의 서울 요새와 비교해봐도 꿀리지 않을 만큼 철저하다.
역시 수십 년간 강릉항을 관리해온 상가 번영회 짬밥이 어디 가지 않는 모양.
나는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이주민 아이들을 바라보며 가방을 뒤적였다.
잠깐, 사탕이 어디 있더라.
전투식량을 먹을 때마다 쟁여둔 사탕을 나눠주자 아이들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아저씨 감사합니다, 해야지.”
“감사합미다.”
나는 이쪽으로 고개를 숙이는 모녀에게 손을 흔들어준 뒤 다시 창문을 닫았다.
분명 같은 눈보라가 불어오는 날인데 오늘은 이상하리만큼 눈이 포근했다.
부우웅, 끼익.
그렇게 얼마나 더 달려갔을까, 차량은 어느새 홍제동 회전교차로에 멈춰 섰다.
교차로 앞에는 예전엔 없었던 출입구와 철조망 장벽이 빠르게 건설 중이었다.
“젊은 동장 왔구먼.”
“회장님? 병원에 안 계시고 여긴 왜.”
“직원 놈들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가끔 이렇게 나와줘야 다들 긴장해서 잘해.”
어쩐지 현장을 지휘 중인 번영회 직원들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더라니.
나는 직원들을 위해 서둘러 김춘식 회장을 데리고 공사 현장을 둘러봤다.
“어디까지 공사 예정입니까?”
“일단 중앙동까지는 확보할 생각이야. 점차 안정되면 다른 지역도 꿈은 아니겠지.”
감염체 둥지가 있었을 때야 회색 정글을 연상케 하는 콘크리트 정글이지,
놈들이 사라진 시내는 2~3층짜리 건물들이 장벽을 이루는 복잡한 시가지다.
건물 사이로 들어서는 길목만 막아줘도 중앙동 전체를 커버할 경계선이 완성된다.
그렇게 도시를 확보해나갈 청사진을 그리고 있는데 김춘식 회장이 헛기침했다.
“그나저나 서울에선 연락 없나?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해도 바뀌는데 말이야.”
“안 그래도 어제 사람을 보내라고 해뒀습니다. 지금쯤 아마 서울에서 출발을······.”
투두두두두두.
“마침 오네요.”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저 멀리 서쪽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당황하는 사람들을 안심시킨 뒤 김춘식 회장과 함께 차량에 탑승했다.
“태식아, 청심환 가지고 왔니?”
“여기 있습니다, 회장님.”
늘 강철 같던 김춘식 회장도 앞으로 있을 거래가 떨리는 건 매한가지인 모양이다.
* * *
시끄럽던 로터 소리가 잦아든다.
동시에 호위 명목상 우리 뒤를 따라온 자경 대원들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옛 대한민국의 수도이자 이제는 한반도 최대 군벌 집단으로 불리는 서울 요새.
최 중령 때는 무기만 대여해왔지,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보는 건 처음일 것이다.
턱, 턱.
송지영 중위와 이진석 소위를 필두로 10명이나 되는 인원이 한꺼번에 내린다.
뭔 호위를 저렇게 많이 데려와? 나는 남몰래 인상을 찡그리며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전원 장교 혹은 부사관이다.
그중 가장 계급이 높은 대위 하나가 웃는 낯으로 다가와 나와 가볍게 악수했다.
“박범석 씨?”
“예, 맞습니다.”
“소문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거래 책임자로 온 강우석 대위라고 합니다.”
여태 내가 만났던 서울 요새 장교 중 첫인상이 가장 친절하고 예의 바르다.
하지만 모 영화 한스 란다를 떠올리게 하는 얼굴은 어딘가 몹시 꺼림칙했다.
“그럼 이쪽이······.”
“김춘식이라고 하네.”
“반갑습니다.”
어쨌거나 표면적인 강릉항 주인은 김춘식 회장. 나는 잠시 뒤로 빠졌다.
그리고 분위기가 나쁘지 않은 대화를 엿들으며 송지영 중위를 향해 속삭였다.
“누구야?”
“놀라지 마세요. 쟤들 기무사 소속이에요.”
어쩐지 책임자치고는 계급 낮더라니 기무사 소속이었나. 순간 미간에 힘이 들어간 나는 불쾌한 기분을 감추며 되물어봤다.
“이쪽이 기무사 담당이었어?”
“그럴 리가요. 2시간 전에 갑자기 담당자가 바뀌더니 대뜸 저 남자가 찾아왔어요.”
기무사. 요새 방위 사령부와 사사건건 충돌하던 그 집단이 난데없이 끼어들었다.
사령부에서 왜 제지하지 않았지? 보통 그 끝이 더러워진다는 걸 잘 알 텐데.
나는 웃는 낯으로 대화하는 그들을 살펴보다 이내 한 가지 경우를 떠올렸다.
잠깐, 설마.
저쪽으로 정보가 샜나?
“선배! 안 들려요?”
“어. 어?”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자면서요. 도대체 무슨 일인데요? 여기서도 말 못 해줘요?”
일단 송지영은 아니다.
그녀에게는 당장 강릉으로 오라고만 했을 뿐 CIA에 C자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강릉항 내부를 의심하기에는 접촉할 수 있는 시간과 동기가 없다.
시발, 머리 아프네.
지금만큼 미래 일기와 그 위에서 탭댄스를 추고 있을 만년필이 그리운 순간이 없다.
“선, 선배 화나신 거 아니죠?”
내가 표정이 좋지 않자 덩달아 같이 걷고 있던 송지영과 이진석이 긴장한다.
아니, 누가 보면 내가 복무 시절 매일 갈구고 어깨뼈라도 뽑은 줄 알겠다.
나는 그녀와 이번 일을 상의할까 하다가 일단 입을 꾹 다물고 앞으로 걸어갔다.
“같이 가요!”
마치 거미줄처럼 얽힌 인연과 이해관계는 갈수록 내 판단을 어지럽게 했다.
* * *
“정말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허허, 내가 더 고맙지.”
예상과는 달리 강릉항과 서울 요새 간 중계무역은 너무나도 손쉽게 체결이 되었다.
그 이유는 강우석 대위가 애초 예상했던 것보다 조건을 더 후하게 쳐준 덕분이었다.
김춘식 회장은 당연히 크게 기뻐했고 늦은 밤까지 그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 - - - - -.”
하지만 취한 척 빠져나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마냥 웃을 수가 없었다.
저들의 목적이 정말로 계약인지, 아니면 제임스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제일 믿을 만한 혜지 씨에게 주변 입단속을 부탁한 뒤 은밀히 건물로 들어갔다.
덜컹.
“Mr. 박?”
한참 꾸벅꾸벅 졸고 있던 제임스가 나를 보자마자 목소리를 심하게 떤다.
척 봐도 심각한 분위기에 드디어 살인 멸구를 하려고 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드르륵.
하지만 나는 총구가 아닌 의자를 끌고 다가와 제임스와 마주 보고 앉았다.
“강릉으로 파견된 건 너뿐이라고 했지.”
“예, 예!”
“그럼 서울 요새로 파견된 건?”
“작전국 산하 요원 12명입니다.”
“그중 연락이 닿는 건.”
“············.”
그래, 그래야지. 뜬금없이 기무사 애들이 왜 강릉으로 찾아오나 했다.
아마 그 12명을 처리하면서 이쪽과 관련된 냄새를 맡은 게 분명하다.
일찍 물어보기나 할걸. 나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화 대신 숨을 깊게 내쉬었다.
“지금 기무사 애들이 왔어.”
“아아······.”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너를 기무사가 아니라 방위 사령부에다가 넘기는 거야.”
“둘, 둘이 뭐가 다릅니까?”
“겪어봐서 알잖아? 한쪽은 관련자 전부를 죽일 거고 한쪽은 너만 죽인다. 그래도 대화라는 게 통할 테니까, 상부랑 이야기해서 너희들끼리 쇼부를 보든가 해.”
사실 이 자리에서 제임스를 넘겨버리는 게 훨씬 더 간단하다.
하지만 기무사가 내막을 알고도 왔다는 건 우리를 이미 내통자로 추정하고 있거나,
늘 그렇듯 관련자를 전부 죽여 정보를 원천 차단하려고 할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고 제임스를 죽이기에는 또 미연방이 어떻게 움직일지 모르는 상황.
이럴 때는 역시.
“대신 우리는 여기서 손 털 거야. 강릉은 관련 없는 거고, 너는 입 다물어. 오케이?”
엮이지 않는 게 최고였다.
“······알겠습니다.”
달칵.
나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는 제임스의 수갑을 풀어주며 일으켜 세웠다.
일단 요시다 호 물자 창고에 박아두고 일본으로 밀항을 시켜주든가 해야겠다.
저벅, 저벅, 저벅.
‘쉿.’
그런데 그 순간 취조실 문밖에 묵직한 군화 소리가 조용히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곧바로 제임스의 입을 털어 막으며 드리우는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 - - - - -.”
기무사 소속 군인이다.
놈은 무언가를 찾듯 상가 사무실을 기웃거리며 복도 이곳저곳을 살피고 있었다.
뒤를 밟혔나?
최대한 아무도 없을 때 움직였는데, 애초에 예의주시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제발 지나가라. 제발 그냥 지나가라. 나는 제임스와 함께 조용히 숨죽였다.
“저기요! 거기 누구예요?”
그런데 하필 오늘 사무실에서 당직을 서던 혜지 씨가 비몽사몽 복도로 걸어 나왔다.
“여기 함부로 들어오시면 안 돼요. 화장실 찾으시는 거면 저기 건물 밖에······.”
철컥!
“에?”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소음기가 달린 권총을 겨누는 실루엣이 보인다.
이런 미친 새끼가!
나는 조건 반사적으로 방을 뛰쳐나와 유리문 밖으로 보이는 놈을 향해 몸을 날렸다.
쾅!
따악, 딱!
방아쇠가 당겨지기 직전 오른손을 낚아채 총구를 위로 강제로 올렸다.
총알은 천장에 꽂혔고 놈은 갑작스러운 방해에 재빨리 보위 나이프를 꺼내 든다.
서걱!
탁!
목젖을 노리고 나이프를 찌른다.
거의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낸 나는 강제로 팔을 붙잡고 벽으로 밀쳤다.
쿵!
하지만 놈은 당황한 기색은커녕 능숙하게 육박전을 펼치며 공격에 대응했다.
콰직, 퍽!
까앙!
여러 차례 합이 오간다. 기어코 한 번씩 공격을 주고받은 자리에 피가 터진다.
프로 중 프로. 여태 만났던 적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인간 백정 그 자체다.
나는 처음으로 완력에 밀리는 것을 느끼며 어깻죽지에 공격을 허용했다.
푹.
“꺄아아아악! 사장님!”
혜지 씨가 비명을 지른다. 나는 시야가 붉게 물드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덜컹!
퍽!
그 순간 방에서 힘겹게 걸어 나온 제임스가 놈을 향해 달려들어 바닥에 넘어트렸다.
스릉!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나는 홀더에서 재빨리 토마호크를 뽑아 힘껏 휘둘렀다.
콰직!
“커억!”
도끼날이 반쯤 목에 박혔다. 아무리 프로라도 목을 자르면 죽는 건 똑같다.
까드득!
마지막 숨통을 끊은 나는 어깻죽지에 느껴지는 고통을 참으며 이를 악물었다.
“피, 피, 피가.”
정신이 반쯤 나간 혜지 씨가 손을 덜덜 떨며 출혈을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혜지 씨를 진정시키며 복도 끝에 있는 방송실을 가리켰다.
“침입 경보부터 올려요.”
“사장님 피가······.”
“빨리요!”
내 커다란 고함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녀가 비틀비틀 방송실로 뛰어간다.
마찬가지로 제임스도 뒤따라가게 한 나는 놈이 떨어트린 권총을 줍고 일어났다.
그리고 마침 1층에서 총소리를 듣고 달려온 또 다른 기무사 군인과 마주친다.
“- - - - - - -!!”
딱! 따악!
쓰러진 동료를 보고 깜짝 놀란 놈이 재빨리 총구를 돌려 방아쇠를 당기려 했지만,
한발 먼저 조준을 끝낸 내가 가슴 한 발, 머리 한 발 깔끔하게 박아넣는다.
놈이 이마가 뚫린 채 바닥에 쓰러지자 마침 강릉항에 시끄러운 침입 경보가 울렸다.
에에에에에에에에에엥 - - - - -!!
“후욱, 훅.”
오랜만에 들어보는 침입 경보다.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이미 상반신을 반쯤 적신 출혈 부위를 틀어막았다.
투두두두두두!
하지만 밖에서 들려오는 다수의 헬리콥터 소리는 몸을 강제로 일으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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