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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의 상속자-54화 (54/180)

54화

아포칼립스의 요새 상속자 54화

굳은살이라고 한다.

하나는 피부가 지속적인 마찰과 압력을 받아 두껍고 무디게 변하는 것을.

또, 하나는 하도 찢어지고 무너져 더 이상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마음을 말이다.

단언컨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생존자라면 그 누구나 아픈 굳은살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사상자가 속출한 날이면 병원 앞은 항상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그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줄을 서며 오직 피를 나눠주기 위해 순서를 기다린다.

아무리 굳은살이 생겼다고 한들 그들이 마음으로 울고 있다는 걸 우리는 안다.

끼익.

공동체가 나눠준 피로 기운을 되찾은 나는 병실 의자에 가만히 앉아 손을 움직였다.

아직도 수백 발의 총알을 쏟아내던 손이 그 반동에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동장님.”

그 순간 의사들과 함께 밤새 중환자를 수술한 차지철 씨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무려 반나절 넘게 시달린 그의 표정은 피곤과 안도감이 공존하고 있었다.

“수술 무사히 끝났습니다.”

이진석을 포함한 중환자 전원이 모두의 노력으로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그제야 긴장이 탁하고 풀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차지철과 손을 맞잡았다.

“감사합니다.”

전장이 군인들의 무대였다면 수술실은 의사들의 치열한 전쟁터였을 것이다.

나는 진심 어린 마음을 담아 차지철을 포함한 의료진들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이제 표정 좀 푸세요.”

“예?”

“동장님 얼굴 말입니다. 다들 무서워서 접근도 못 하고 멀리서 걱정만 하고 있어요.”

내 표정? 아. 작게 탄식한 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밤 있었던 일 때문인지 자신도 모르게 표정을 굳히고 있었던 모양이다.

“잠깐 걸을까요?”

마침 드물게 날이 좋다.

우리는 그대로 병실을 빠져나와 햇살이 내리쬐는 병원 복도를 천천히 걸어갔다.

“모자란 약품이나 장비는 없습니까?”

“아뇨, 모두가 신경 써주신 덕분에 양양에 있을 때보다 훨씬 좋습니다. 아산 병원 의료진과도 점차 손발을 맞춰가고 있고요.”

“그래도 항상 건강 염려하셔야 합니다.”

아무리 의료진이 있다고 해도 실력 좋은 외과 의사인 차지철은 늘 바쁜 법이다.

그는 말없이 빙긋 웃더니 그제야 쓰고 있던 수술실 모자를 벗어 주머니에 넣었다.

“동장님.”

“예?”

“혹시 복무 시절 정신감정이나 제대로 된 치료를 받으신 적 있으십니까?”

“정신과 치료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관련으로요.”

글쎄. 총상도 제때 치료하면 다행이라고 여길 만큼 열약했던 시절이다 보니,

대부분 군인이 그저 옆자리 전우와 담배로 흔들리는 멘탈을 붙들었던 게 다였다.

뭐, 죽을 놈을 일찍이 죽었고.

어떻게 버틴 놈만 살아남았다.

내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차지철을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동장님. 사람 몸도 계속 쓰다 보면 닳고 병듭니다. 정신이라고 다르겠습니까?”

“그게 또 살다 보니······.”

“예. 신경 못 쓰셨겠죠.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게 치료하셔야 합니다.”

당장 업무를 볼 시간도 모자라는데 언제 정신과 의사랑 앉아서 상담하고 있나.

그러나 애절한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하기도 그래 일단 알겠다고 대답했다.

치익.

[동장님, 잠깐 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짧은 산책 시간도 허용되지 않는다.

또 호출받은 나는 오늘 하루 고생해준 차지철과 악수하며 복도에서 헤어졌다.

차지철은 헤어지기 직전, 의사답지 않은 철학적인 말로 가는 길을 배웅해주었다.

“제가 종교인은 아니지만, 그들이 말하는 안식이라는 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걸 죽음에서 찾지는 마세요.”

* * *

위성 전화기에 불이 들어온다.

작게 숨을 내쉰 나는 통화 버튼을 눌러 서울 요새에서 온 전화를 받았다.

[······박범석 중위.]

“오랜만입니다, 사령관님.”

옛 상관이자 이젠 요새 방위사령관인 김태하 소장이 전화를 받는다.

그가 아니었다면 내가 서울 요새에서 온 전화를 받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정말 미안하네. 할 말이 없어.]

“됐습니다. 헬기나 한 대 보내주십시오.”

[헬기는 왜?]

“가서 칼춤이나 한번 추려고요.”

경고했었다. 강릉 상대로 허튼짓했다가는 내가 직접 침실로 찾아가겠다고.

그건 단순한 허세가 아니라 헬기 한 대만 있으면 충분히 정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니네. 기무사령관은 일단 군법회의에 회부하기로 했어.]

“잘못된 명령을 내린 죄입니까?”

[············.]

“아뇨, 헬기 두 기랑 최정예 대원들 여럿 날려 먹은 죄겠죠. 만약 성공했으면 이런 전화도 안 왔을 거 아닙니까? 됐고, 헬기 안 보내주시면 그냥 제가 직접 갑니다.”

전화기 너머로 깊은 한숨이 들려온다.

같은 피는 같은 피로 갚게 했던 지난날의 작전 방식을 떠올렸던 모양이다.

[알겠네.]

어차피 말로는 해결될 일이 아니다.

결국, 김태하 소장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도움을 주려 했다.

[우리도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니라고 최종 결론 내렸어. 방위사령부뿐만 아니라 정보사까지 합쳐서 전방위로 압박할 거야.]

그가 숨을 크게 들이쉰다.

[하지만 그래도 만족하지 못한다면 증인 신청을 해주겠네. 적어도 서울 요새로 와. 그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의 전부야.]

서울 요새로 찾아와 증인으로 참석해라. 그 뒤는 묵인해주겠다는 말과 같다.

나는 그제야 만족하며 그 새끼 대가리에 박아줄 총알을 뭐로 할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이번 일은 각하께서도 강하게 유감을 표했어.]

“성공했으면 안 했을걸요.”

[······그래, 그럴 양반이지. 하지만 피해보상은 별개 영역이니까, 들어나 봐.]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데 산 사람이 보상받아봤자 뭘 하겠는가.

하지만 내 미지근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김태하 소장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일단 서울과 강릉을 오갈 수 있는 디젤 열차 한 대를 무상으로 증여하기로 했네. 무장까지 할 수 있는 완전 신품이야.]

“중계무역 안 할 겁니다.”

[이해해. 나 같으면 진즉 찢어버렸어. 대신 원하면 언제든지 서울 요새에서 물자를 무역하고 수입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어. 물론 강릉 요새는 100% 면세야.]

“············.”

[자네가 안 받으면 뭐라 할 말은 없다만, 같이 싸운 사람들을 생각해. 적어도 그들에게 보상하고, 달래줄 무언가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범석아, 너도 이제 지도자잖아.]

틀린 말이 아니다. 아니, 도리어 내가 떼쓰고 그가 조언해주는 격이다.

어느새 범석아, 내 이름을 부른 김태하 소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열차는 근시일 내로 강릉에 도착할 거야. 그때가 되면 서울 요새에서 보자고.]

“알겠습니다.”

[부디 몸 건강하게 있게나.]

“······사령관님도 건강히 지내십시오.”

나는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미세한 손 떨림은 진정이 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 *

새해가 밝았다.

강릉항 습격이 있고 얼마 안 된 시기라 신년 분위기는 제대로 낼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해, 새로운 기분으로 맞은 새해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우리는 있는 쌀 없는 쌀 탈탈 털어서 떡국을 끓이고 커다란 만두를 만들고,

심지어 평소에는 구경도 못 할 재료들과 달걀까지 구해 고소한 전도 지졌다.

당연히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주민들은 떡과 만두가 퍼지거나 말거나 국 한 그릇, 전 한점에 행복해했다.

아마 그 맛보다는 과거를 추억할 수 있는 순간이 그들을 행복하게 했을 것이다.

“자, 먹자.”

“잘 먹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음식을 배급받아온 나와 일행들은 사이좋게 둘러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주변에는 벌써 2기까지 뽑은 희망 요새 자경단원들도 즐겁게 웃고 떠들고 있었다.

냠냠.

역시 통조림 요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신선한 재료로 만든 음식에 작게 감탄한 나는 상식 아저씨를 향해 말했다.

“아저씨, 지난번에 말한 비료랑 씨감자 있잖아요? 아마 내일쯤 들어올 거에요.”

“벌써 구한겨?!”

“강릉항도 봄 농사를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조금만 나눠달라고 했어요. 저희도 대파랑 마늘 이런 것도 좀 심어볼 수 있어요?”

“종자만 있으면 문제없지! 여름에는 고추! 배추가 있으면 배추도 부탁해야 한다!”

“설마 김치······?”

“김치!”

맨날 일제 기무치 통조림만 먹다가 김치 소리가 나오니까 군침이 싹 돈다.

김치라는 말에 저절로 반응하는 일행들을 보며 나는 한 가지 목표를 세웠다.

올해는 꼭 농사에 성공해 요새 안에서 김장하는 대업을 이뤄보리라.

“다른 사람은 뭐 건의 사항 없습니까?”

그 말에 요즘 등장이 적었던 이경태의 누나 이은서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저요!”

자경 단원 인구가 충원됨에 따라 요즘 전공인 기계 시설 관리로 빠진 그녀다.

“태양광 패널 두 개가 완전히 맛이 갔어요. 나머지도 효율이 절반도 안 나오고요.”

“수리가 가능한 겁니까?”

“여태 수리해서 쓰고 있었어요.”

하긴 발견 당시에도 워낙 오래된 물건이라 이제 슬슬 맛이 갈 때가 됐다.

강릉항에는 없다고 하는데 아마 서울 요새를 갈 때 구해보든가 해야겠다.

“최대한 빨리 공수해드릴게요.”

“헤헤, 감사합니다!”

“다음 필요한 건?”

내가 운을 띄우자 조용히 입 다물고 있던 일행들이 하나둘 손을 들기 시작했다.

“차량 부품이랑 엔진오일이요.”

“방한복이랑 양말도 필요해요.”

오케이. 다 수입해야 하는 물품이구나.

우린 뭐 수출하는 거 없나? 흑자는 바라지도 않고 적자만이라도 면했으면 좋겠다.

나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건의 사항을 다 받아주며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그래, 경태야.”

“만화책은 안됩니까?”

뜬금없는 만화책 타령에 사방에서 떡국을 퍼먹던 숟가락과 비난 야유가 쏟아졌다.

“에라이, 화상아!”

“언제 철들래!”

이에 경태는 날아오는 숟가락을 필사적으로 막으며 다급히 자기변호를 했다.

“아니, 요즘 초소 대기 시간이 너무 길단 말이에요! 다른 주민들도 심심해하고······.”

당장 내일 굶어 죽을지 얼어 죽을지 걱정해야 할 과거야 이게 문제가 안 됐지만,

의식주가 어느 정도 해결된 지금은 어느 정도 오락거리가 있어야 하는 게 사실이다.

아무래도 겨울이다 보니 숙소에 죽치고 있는 나날이 길어진 것도 한몫하고 말이다.

“좋아.”

“예? 진짜요?”

“대신 만화책 말고 책만.”

“············.”

책은 수입할 것도 없이 강릉 시내에 있는 도서관들만 털어봐도 구할 수 있을 터.

이참에 책들을 모조리 털어와 주민들을 위한 도서관을 만들어도 괜찮을 것 같다.

경태야, 책이라는 마음의 양식을 먹으렴. 맨날 밥 두 공기씩 처먹지 말고.

치익.

[동장님, CB 무전기입니다.]

“말씀하세요.”

[강릉항에서 온 무전입니다. 직접 연결할 것 없이 의중만 전달해달라고 하시네요.]

“예, 듣고 있습니다.”

[러시아 쪽 요새에서 저렴하고 품질 좋은 석탄 수입처를 하나 찾았다고 합니다.]

“무연탄입니까?”

[아니요, 역청탄이라고 하네요.]

무연탄이야 가공해서 난방용으로 쓸 수 있다지만, 역청탄은 조금 까다로운 편이다.

기대하고 있던 나는 강릉항 쪽에서 알아서 결정하라는 대답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가만히 떡국을 퍼먹고 있던 상식 아저씨가 툭 하고 의견을 냈다.

“화력 발전에는 쓸 수 없나?”

“예?”

“아니, 저기 안인 쪽에 화력 발전소만 두 개 있거든. 거기까지 연결되는 철로도 깔려있으니까, 옮기기만 하면 되는 거 아녀?”

화력 발전소? 장난 아니고?

나는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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