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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의 상속자-55화 (55/180)

55화

아포칼립스의 요새 상속자 55화

세상이 망해도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바로 한국은 석유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연히 강릉도 100%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며 제일 중요시 되는 자원이다.

발전기부터 시작해 차량과 실내 난방 등 이제 없어서는 안 되는 기름 연료.

하지만 그 일부분은 조금이라도 대체 할 수 있는 다른 자원이 생긴다면 어떨까.

앞으로 목표인 문명 재건에 있어 적어도 열 발자국은 넘게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연락받자마자 지역 지식이 빠삭한 상식 아저씨와 함께 강릉항으로 달려갔다.

“엄청나게 크구먼.”

“저게 제일 큰 화물선이랍니다.”

선착장에는 그동안 봤던 선박과 비교도 되지 않는 커다란 화물선이 정박해 있었다.

주민들과 캐러밴 상인들은 그 광경을 구경하기 위해 인사 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인파를 헤쳐 번영회 직원들이 모여 있는 장소로 걸어갔다.

“동장님 오셨습니까?”

“물건 상태는 어떻습니까.”

“역청탄 맞습니다. 질도 좋고요.”

보통 탄소 함유량이 80% 이하면 갈탄, 그 이상이면 역청탄이라고 부른다.

물론 함량이 더 높은 무연탄도 있지만, 화력 발전용으로는 유연탄이 가장 적당하다.

내가 검은 광택을 띠는 역청탄을 하나하나 만져보자 김태식이 다가와 말했다.

“만약 전량 매입하겠다고 하면 저쪽에서도 지속해서 공급해주겠답니다.”

“믿을 수 있겠습니까?”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꽤 규모가 있는 요새입니다. 저희랑도 가끔 거래합니다.”

신용도 적당하고 공급량도 충분하다.

지역 하나를 커버칠 정도는 아니라도 강릉 하나가 쓸 만큼은 충분히 공급할 수 있다.

검은 석탄재를 손가락으로 비벼본 나는 손을 탈탈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저씨, 혹시 예전에도 발전소 돌린 적 있어요?”

“없다고 봐야지. 다들 해본다고 말만 하고 실제로 돌아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하긴 화력 발전소라는 게 석탄만 있다고 해서 저절로 돌아가는 게 아니다.

적어도 전문적인 운용 인원과 노후화된 시설을 수리할 부품과 장비가 필요했다.

‘할만해.’

하지만 현재 강릉은 각자도생하기 바쁘던 예전과는 달리 여력이 충분하다.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앞으로 미래를 위해서 추진해볼 가치는 충분했다.

“네. 이미 알아봤습니다.”

역시 척하면 척, 나와 같은 생각이던 김태식은 수소문한 정보를 말해주었다.

“정년퇴직하셨던 한 분, 당시 마지막으로 재직 중이던 분 두 분을 찾았습니다.”

“그분들 의견은 어떻답니까?”

“안전한 운용이 문제죠. 적어도 각 파트당 한 팀씩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쉽지 않군요.”

“그래도 당시 함께 일했던 동료분들이 아직 강릉에 살고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렇지. 강릉항에만 3명이 살고 있는데 다른 곳이라고 없으란 보장은 없으니까.

잠깐 실망할뻔했던 나는 어떻게 수소문해볼 방도를 고민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품은 어떻습니까?”

그런데 그 순간 러시아 억양이 묻어나는 영어와 함께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석탄을 실어 온 러시아 측 선박 주인이었다.

“훌륭합니다.”

“다행이군요. 만약 강릉항에도 팔지 못하면 그냥 요새로 돌아갈 생각이었습니다.”

“네? 이 좋은 상품을 가지고요?”

“그놈의 감염체 웨이브 탓이죠. 저희 거래처만 해도 두 곳이 없어졌습니다.”

아니, 얼마나 큰 웨이브가 왔길래 무역항이 딸린 요새가 하루 만에 멸망하는가.

내가 의아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녀는 진짜 모르냐는 듯 물어봤다.

“요즘 감염체 이상 현상이 발견되지 않았습니까. 강릉항도 마찬가지였을 텐데요.”

있었다. 우리도 불과 며칠 전만 해도 군락 감염체를 상대로 대전쟁을 벌였으니까.

하지만 승리한 우리와는 다르게 함락당하는 요새들이 생각보다 많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심각했습니까?”

“인구가 2만 명쯤 되었나? 일본 요새 중 하나가 통째로 소멸하는 광경을 직접 봤습니다. 아마 지옥이 있다면 거기겠죠.”

그녀는 아직도 그때가 생각난다는 듯 작은 술통 속 보드카를 꼴깍거렸다.

흐릿한 눈동자에는 2만 명이 감염체로 변하는 끔찍한 기억이 담겨 있었다.

‘지옥.’

바다 건너라고 사정이 다르지는 않았다.

만약 책이 군락의 존재를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 지옥은 이곳 강릉이 되었을 터.

나는 새삼 욕하고 탓했던 책과 만년필의 존재를 떠올리며 묘한 고마움을 느꼈다.

악수를 마지막으로 러시아 거래처를 떠나보낸 나는 김태식을 향해 물었다.

“혹시 오늘 휴무세요?”

“저희한테 휴무가 어딨습니까.”

“그럼 저랑 출장 좀 다녀오죠.”

“············.”

사령관이 이른 시일 내로 열차를 보내겠다고 했으니 그에 맞춰 집안일 좀 해야겠다.

나는 싫은 티를 팍팍 내는 김태식과 상식 아저씨와 함께 발전소 출장길에 올랐다.

* * *

부우우우우웅 - - - -!!

강릉항을 출발한 무장 트럭 세 대가 시내를 지나 곧바로 외곽 도로로 빠진다.

그러자 한적한 시골 풍경이 펼쳐지며 조금 생소한 동네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쪽에도 사람이 삽니까?”

“아마 있긴 할 겁니다만, 저희도 순찰 지역 밖이라 사정이 어떤지는 잘 모릅니다.”

강릉 생활권을 미묘하게 벗어난 곳이라 지난번 밀수 사건 때 말고는 나도 처음이다.

가벼운 출장이라고 생각했던 대원들은 진지한 얼굴로 사방을 경계하기 시작했고,

나 또한 소총 위에 손을 올려둔 채 휙휙 지나가는 주변 풍경을 유심히 살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차량 행렬은 어느새 상시동리를 지나 안인리로 접어들었다.

“도착한 거 같네요.”

점점 문명의 흔적이 희미해진다.

우리가 기다리고 있던 것은 녹색 우림이 집어 삼켜진 옛 기억의 흔적이었다.

“저기 굴뚝 보이지? 저게 화력 발전소고 저 앞에 보이는 게 바로 안인역이여.”

바닷길을 통해 수입한 석탄을 철로로 운송해 안인역이 있는 발전소로 가져온다.

물론 지금은 그 흔적만이 남아있기에 상식 아저씨는 그리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덜컹.

한 팀은 무장 트럭을 지키고 나머지 두 팀은 나를 따라 안인역으로 접근했다.

터벅, 터벅, 터벅.

고요하다. 잡초와 넝쿨로 우거진 안인역은 당연히 손님도, 직원들도 보이지 않았다.

“불 피운 흔적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사람이 남긴 흔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불 피운 흔적이라는 말에 나는 역사 내부로 걸어가 다 타고 남은 재를 만져봤다.

슥슥. 온기가 남아있다.

추운 날씨를 고려하면 아마 새벽이나 어젯밤 늦게 피웠을 확률이 높았다.

유랑민인가? 아니면 여기 근처에 생존자들이 캠프를 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역시 먼저 와보길 잘했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지시했다.

“일단 발전소까지 가보죠.”

우리는 그렇게 안인역을 빠져나와 화력 발전소를 향해 천천히 접근했다.

마찬가지로 관리하나 되지 않은 발전소 외부는 버려진 폐시설을 보는 것 같았다.

딱 한 곳만 빼고.

“막혀있습니다.”

“최근에 옮긴 거네요.”

발전소 입구에 외부 접근을 차단하는 목재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어 있다.

대원들은 주변을 경계하는 나는 홀로 대열을 빠져나와 입구로 접근했다.

웅성웅성.

안쪽에선 분주한 인기척과 함께 당황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온다.

내가 공격할 의사가 없다고 밝히자 발전소 2층에서 한 남성이 고개를 내밀었다.

“거, 거기 누구냐!”

“강릉 요새 연합에서 왔습니다.”

소개로는 거창하지만, 연합이라는 이름만큼 공신력과 신뢰를 주는 게 없다.

이는 상대도 마찬가지인지 귀를 어지럽히던 웅성거림은 더욱더 커지기 시작했다.

“무슨 볼일로 찾아온 거지?”

“그쪽 캠프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혹시 이곳 책임자가 따로 계십니까?”

내가 캠프 리더를 찾자 잠시 침묵이 길어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번에는 다른 남성이 나와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

“우린 연합과 할 말 없다.”

체구가 크다. 옷깃 사이로 문신이 보인다. 사납게 생긴 인상, 입가 옆 회색 침 자국, 그 짧은 사이 나는 많은 걸 관찰했다.

“당신이 책임자입니까?”

“할 말 없다고 했을 텐데.”

“뭘 뺏거나 싸우려고 온 게 아닙니다. 저희 양측 다 도움이 되는 제안을······.”

내가 조곤조곤 대화를 시도하자 갑자기 문신 남성이 문을 쾅 치며 급발진한다.

“꺼지라고! 여기서 한 발자국만 더 다가오거나 주변을 기웃거리면 발포하겠다!”

발포라는 말에 주변을 경계하고 있던 대원들의 눈이 서늘하게 찢어진다.

자칫하다가는 교전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뒤로 천천히 물러났다.

“일단 안인역으로 돌아가죠.”

“이대로 포기합니까?”

아무리 발전소가 필요하다고 해도 다른 생존자 캠프를 뺏을 수는 없다.

“아뇨.”

하지만 나는 포기하냐는 말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목소리를 낮췄다.

“얘들 생존자 아닙니다.”

* * *

약탈자라고 해서 얼굴에 이름이 쓰여 있거나 무슨 자격증이 필요한 건 아니다.

겉모습이 불량해도 생존자일 수 있고, 반듯한 사람이 악랄한 약탈자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약탈자만 수백 명을 죽여본 경험자라면 보는 순간 딱 오는 촉이 있다.

아 이 새끼 사람 좀 죽여봤구나.

아주 악랄한 짓을 밥 먹듯이 했구나.

특히 연합이라는 말에 급발진하던 놈의 태도는 그 출신을 짐작하게 했다.

“물증 좀 찾아오겠습니다.”

물론 아무리 정확한 촉이라도 심증은 어디까지나 물증이 있을 때 힘을 발휘한다.

심증만으로 사람을 죽이면 그건 그냥 살인 집단이지 정규군이 아니지 않는가.

하늘이 점점 어두워진다.

차량에서 내린 나는 가볍게 몸을 풀어준 뒤 날카로운 나이프와 야투경을 챙겼다.

“정말 혼자 가시려고요?”

“그게 편해요. 혹시 놈들이 도망칠 수도 있으니까, 길목에서 진 치고 있으세요.”

놈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위치를 들킨 본거지에서 죽치고 있지만은 않을 거다.

나는 대원들에게 길목 점거를 지시한 뒤 혼자 지역을 빠져나와 발전소로 접근했다.

“- - - - - - -.”

곳곳에 횃불이 보인다.

우리를 떠나보내고 영 불안했는지 경계병 몇몇도 배치한 게 눈에 띄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약탈자 수준, 야투경을 착용한 나는 여유롭게 우회했다.

쉬익, 탁!

있으나 마나 한 담을 빠르게 넘고 발전소 후방으로 접근해 몸을 웅크렸다.

킁킁, 담배 냄새.

보초 선다는 새끼가 하는 꼬라지 하고는.

나는 구시렁구시렁 뒷마당을 걸어가는 경계병을 먼저 보낸 뒤 등산 밧줄을 꺼냈다.

휘익, 탁!

2층 창문으로 정확히 던져 안착시킨다.

그리고 마치 산책하러 가는 사람처럼 여유롭게 벽을 올라 건물 안으로 진입했다.

탁.

밧줄을 수거한다. 숨을 죽인다. 자세를 낮춘 채 살금살금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러자 1층 로비에는 벌써 한바탕 난리가 난 놈들이 황급히 짐을 싸고 있었다.

“형, 형님. 이것도 챙길까요?”

“총알이랑 무기만 챙기라고 등신들아! 어차피 잠잠해지면 다시 올 거야!”

로비 곳곳에는 약탈한 것으로 추정되는 물자들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하지만 그걸 옮길 여력이 없는 놈들은 귀한 총알과 무기만을 황급히 챙기고 있었다.

그 순간 뱀을 연상케 하는 한 대머리 약탈자가 우두머리를 향해 물었다.

“돼지들은 어쩌죠?”

“······풀어놓으면 귀찮아진다. 죽이고 와.”

돼지. 아마 진짜 돼지는 아닐 거고 납치된 생존자를 지칭하는 은어일 것이다.

전부 죽이고 오라는 명령에 대머리 약탈자는 2층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탁!

까드득!

2층 계단을 올라온 놈을 그대로 낚아채 입을 틀어막고 목을 꺾어주었다.

그리고 주머니를 뒤져 열쇠를 챙긴 뒤 자물쇠로 잠겨 있는 창고로 다가갔다.

이 정도면 물증 확보겠지?

일단 생존자부터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공격 허가를 내리든가 해야겠다.

철컥.

끼이이익.

자물쇠를 풀고 문을 열었다.

그러자 퀴퀴한 오물 냄새와 함께 겁에 질린 생존자들이 하나로 뭉쳐 덜덜 떨었다.

나는 일단 목을 꺾어놓은 약탈자 시체를 창고에 처박은 뒤 손전등을 켰다.

‘뭐야, 뭐가 이렇게 많아?’

약탈자 규모를 생각하면 끽 해봐야 노리개로 쓸 생존자 3~4명쯤 잡아둔 줄 알았다.

하지만 이 좁은 창고에 갇혀 있는 사람만 해도 10명이 훌쩍 넘어가고 있다.

그중 나이가 가장 많은 한 나이 많은 노인이 사람들 앞을 가로막으며 물었다.

“누, 누구십니까?”

“강릉 요새 연합에서 왔습니다.”

“혹시 구조대가······?”

“구조대는 아닌데, 뭐 비슷한 겁니다.”

순간 두려움에 떨던 분위기가 급변한다.

자신들을 구하러 왔다는 말에 누군가는 기뻐하고 또 누군가는 울음을 터트렸다.

“조용히 해 이 사람들아.”

하지만 노인만큼은 그런 사람들을 진정시키며 소음을 내지 못하도록 막았다.

“저희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나가는 길을 찾을 겁니다. 놈들이 1층을 점거하고 있으니까 아무래도······. 응?”

그 순간 야투경을 벗은 내 눈으로 노인이 입고 있는 한 낡은 점퍼가 보였다.

상식 아저씨가 쓰고 있는 경비 모자처럼 그 세월과 고집이 느껴지는 오래된 골동품.

그 점퍼에는 분명 영동 화력 발전이라는 글자와 함께 노인의 이름이 쓰여있었다.

“강덕수 씨?”

“예?”

“혹시 발전소 직원이셨습니까?”

대뜸 직원이었냐고 묻는 말에 노인은 주변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설비 쪽을 담당하긴 했습니다.”

순간 머리에 폭죽이 터진다.

나는 즉각 자세를 공손하게 바꾼 뒤 밖으로 나가는 길을 양손으로 안내했다.

“가시죠. 사랑으로 모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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