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아포칼립스의 요새 상속자 56화
빠르게 떠날 채비를 끝낸 나는 밖에서 대기 중인 일행들에게 무전을 보냈다.
“태식 씨?”
치익.
[듣고 있습니다.]
“잡혀 있던 생존자들이 있었습니다. 밖으로 먼저 빼낼 테니까, 신호하면 공격하세요.”
[적들 숫자는 확인했습니까?]
“초병까지 15명 정도 됩니다.”
잔뼈 굵은 베테랑들만 골라서 데려왔으니 공격과 진입은 알아서 할 것이다.
나는 이들을 밖으로 빼내는 것에 집중하기 위해 다시 야투경을 쓰고 문을 열었다.
터벅, 터벅, 터벅.
“이 새끼는 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 야!”
그러자 늦어지는 동료에게 짜증이 난 또 다른 약탈자가 2층으로 올라왔다.
나는 한 치 망설임 없이 나이프를 뽑아 복도로 걸어오는 놈을 향해 던졌다.
후웅, 푹!
어둠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나이프가 약탈자의 목젖을 뚫고 숨통을 끊었다.
비틀거리는 놈을 잡아당겨 바닥에 눕힌 나는 나이프를 회수하며 손짓했다.
“- - - - - - -.”
내 신호에 창고에 숨어 있던 생존자들이 조심스럽게 한 줄로 걸어 나온다.
그들은 순식간에 죽어버린 약탈자를 보며 또 한 번 놀라는 눈치였지만,
강덕수는 돌발 행동을 벌이지 않도록 제지하며 내 손짓을 따라 창문으로 이동했다.
‘없다.’
뒷마당을 거닐던 초병은 대충 둘러보다 합류했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올라올 때 사용했던 등산 밧줄을 아래로 툭 던지고 창문과 단단히 고정했다.
스르륵, 툭!
‘먼저.’
마른침을 꿀꺽 삼킨 강덕수 씨를 시작으로 생존자들이 밧줄을 타고 내려갔다.
물론 하나 같이 거북이를 연상케 하는 느린 속도였지만, 굳이 재촉하지는 않았다.
괜히 급하게 움직였다가 귀한 인재들이 다치기라도 하면 그게 더 낭패였으니까.
나는 낑낑거리는 생존자들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며 주변을 경계해주었다.
“뭐야, 두 놈이 왜 비어?”
“아까 2층으로 올라갔습니다, 형님.”
마침 낌새가 이상함을 눈치챈 약탈자들이 동료가 사라진 2층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로의 눈치를 살피더니 곧 조용히 무기를 챙겨 계단으로 다가왔다.
눈치가 빠른 친구들이구나.
나는 안절부절못하는 생존자들을 안심시킨 뒤 홀더에서 권총을 뽑아 장전했다.
철컥.
그리고 복도를 가로질러 놈들이 곧 올라올 2층 계단 옆에 몸을 숨긴다.
터벅, 터벅, 터벅.
엽총을 든 놈을 선두로 갖가지 무기를 든 약탈자들이 계단을 올라오고 있다.
타이밍을 계산한다. 나는 놈들이 중간쯤 왔을 때 재빨리 상반신을 내밀었다. 까꿍!
타앙! 탕! 탕탕탕탕!
“끄아아악!”
“시, 시발! 적이다!”
엽총을 들고 오던 놈이 깔끔하게 가슴 두 방으로 즉사해 계단을 구른다.
졸지에 바짝 따라오다가 머리가 뚫린 약탈자도 빠르게 저승사자를 만났다.
“뭐해 이 새끼들아! 도망치지 마!”
깜짝 놀란 약탈자들이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다 이내 1층 로비로 도망친다.
맨날 KLF랑 기무사 같은 놈들만 상대하다 보니 이런 모랄빵이 색다르게 느껴진다.
“이런 개새끼가!”
철컥, 펑! 콰직!
그래도 약탈에도 짬이 있다고 약탈자 보스가 산탄총을 난사하며 계단을 올라왔다.
철컥, 펑!
철컥, 펑!
철컥, 펑!
“죽어, 이 새끼야!”
가뜩이나 어두운 계단 끝, 이미 돌아가 버린 눈에 뭐가 제대로 보일 리가 없다.
한참 전에 엄폐물에 숨어 있던 나는 멍청한 행위가 끝날 때를 잠시 기다렸다.
철컥, 펑!
철컥, 철컥.
“어?”
끽해봐야 5~6발밖에 들어가지 않는 구형 산탄총을 너무 생각 없이 쏴 재꼈다.
철컥, 탕!
놈이 허겁지겁 총알을 꺼내는 사이 가볍게 총구를 돌려 머리통을 날린다.
멍청한 표정으로 총구를 마주한 보스는 그대로 이마가 꿰뚫려 계단 아래로 떨어졌다.
“형, 형님!”
“도망쳐!”
오합지졸인 약탈자들은 보스가 죽자마자 사방으로 흩어져 바깥으로 도망치려 했다.
드르륵! 드르륵!
타앙! 탕! 탕탕탕!
하지만 바깥에는 이미 명령을 전달받은 대원들이 출구를 포위한 지 오래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밖으로 뛰쳐나간 놈들은 곧 집중사격을 받아 벌집이 되어버렸다.
“항복! 항복! 컥!”
“으아아아아악!”
약탈자는 예외 없이 전원 사살이다.
교전이라 부르기에는 너무나 일방적이었던 전투는 금세 끝이 나버리고 말았다.
철컥.
이 정도면 몸풀기도 안 되지.
나는 벌써 정리되어 가는 현장을 확인하며 재빨리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모두 무사하십니까?”
“예, 예!”
악마나 다름없던 약탈자들이 교전 시작 2분도 되지 않아 모조리 죽어버렸다.
발전소 생존자들은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넋을 놓았다.
“올라오세요. 밥이나 한 끼 합시다.”
다 먹자고 하는 일이다. 나는 속이 허해 보이는 그들에게 밥이나 먹자고 외쳤다.
총성이 가득하던 발전소는 어느새 전투식량을 데우는 냄새와 열기로 가득해졌다.
* * *
부르르르릉!
삐익, 삐익, 삐익.
강릉항에서 출발한 개조 트럭들이 장비와 석탄을 싣고 속속히 도착했다.
재건에는 이골이 난 강릉 작업자들답게 오자마자 발전소를 정리하기 바쁜 모습이다.
잘 가동만 되어준다면 앞으로 강릉의 심장이 되어줄 소중한 화력 발전소.
그 중요성을 잘 아는 파견 인원들은 진지한 얼굴로 정리 작업에 임하고 있었다.
그렇게 혼자 현장을 쭉 둘러보고 있는데 모습이 깔끔해진 강덕수 씨가 찾아왔다.
“저기.”
“박 동장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네, 박 동장님.”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많이 좋아졌습니다.”
의사 소견으로는 영양실조는 기본에 몸 어디 하나 성한 구석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동안 잘 먹고 잘 치료 받은 덕분에 수척했던 얼굴색이 많이 좋아졌다.
“예전 직원분들은 만나보셨어요?”
“다 저희랑 같이 일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하, 다들 어찌나 반갑던지······.”
아무래도 직원 사택이 여기 있고 고향도 같다 보니 대부분이 한 건너 아는 사이다.
특히 수년간 같은 파트에서 일했던 사람들은 손발 맞출 걱정은 필요 없을 터.
아마 인원만 더 수소문할 수 있다면 안정적인 운용은 그리 먼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시간이 괜찮으시면······.”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현황을 설명해주겠다는 강덕수 씨를 따라 화력 발전소 내부로 들어갔다.
“총 1, 2호기로 나뉘어 있습니다. 1호기는 워낙 노후화가 되어 포기했지만, 2호기는 계속 유지보수를 해오고 있었습니다.”
“그럼 바로 가동할 수 있습니까?”
“완전 가동은 시간이 조금 필요합니다. 일단 노후화된 부품 교체가 필요한 부분도 있고 테스트도 확실히 거쳐봐야 하니까요.”
잘 보이기 위해 무조건 된다고 외치는 사람들보다 훨씬 믿음이 가는 대답이다.
강덕수 씨는 어느덧 활기를 되찾은 얼굴로 열심히 발전소를 안내하고 설명해주었다.
그는 아마 이 순간을 위해 불꽃이 꺼진 발전소를 끝까지 지킨 게 아닐까.
내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자 강덕수 씨는 멋쩍은 웃음과 함께 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너무 흥분했군요.”
“아니요, 유익한 설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시험 가동은 된다는 소리죠?”
“네! 정말 잠깐만 가동하고 끌 예정입니다. 혹시 저녁까지 있으실 예정이면······.”
“당연히 봐야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전쟁 이후 완전히 멈췄던 도시 문명의 심장이 다시 박동하는 역사적인 순간이다.
아무리 업무가 바쁘더라도 터빈이 움직이는 그 모습은 꼭 보고 돌아갈 것이다.
“동장님!”
그런데 그 순간 잠시 강릉항으로 돌아간 줄 알았던 김태식이 황급히 달려왔다.
“왔, 왔습니다!”
“예?”
“열차요! 서울 요새에서 보낸 열차가 방금 오대산 역을 지나쳤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오대산 역? 설마 진부역을 지나쳤다고? 그럼 강릉까지는 정말 금방이다.
아니, 시발! 올 거면 깜빡이를 켜고 들어와야지 이렇게 갑자기 오는 게 어딨나.
찡그린 미간을 꾹꾹 누른 나는 생각이 정리되는 대로 김태식을 향해 외쳤다.
“일단 순찰 인원을 제외한 전 병력 강릉역으로 집결하라고 하세요. 덕수 씨, 죄송하지만 시험 가동은 다음에 봐야겠습니다.”
“아이고, 아닙니다.”
하여튼 가만히 있는 꼴을 못 본다.
발전소를 나온 나는 곧바로 대기 중인 차량에 탑승해 강릉역으로 질주했다.
* * *
겨울은 유난히 해가 짧다.
이제 막 오후 다섯 시가 지났을 뿐인데 강릉에는 어느덧 어둠이 찾아오고 있었다.
원래라면 모든 생존자가 요새로 돌아가고 순찰대만 돌아다니고 있을 이른 저녁.
하지만 곧 열차가 도착할 강릉역 부근만큼은 대낮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거기 뭐해! 빨리 움직여!”
“통로는 막지 말라고, 새끼야!”
강릉 요새 연합 전 병력이 집결했다.
전투 인원들은 한 치의 틈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강릉역 전체를 포위했고,
근처 건물 옥상마다 기관총 사수와 박격포를 설치해 혹시 모를 공격을 대비했다.
이 정도 전력이면 아무리 서울 요새라도 함부로 공격 의사를 비치지 못할 것이다.
“선배.”
지난 부상 이후 강릉항 병원에서 신세를 지고 있던 송지영 중위가 합류했다.
“몸은 좀 어때?”
“선배가 그렇게 굴렸는데 아직도 빌빌거리고 있으면 되겠어요.”
“그럼 이진석 소위는······.”
“오늘 오전에 중환자실로 옮겨서 잘 회복 중이에요. 그렇게 걱정되세요?”
누가 걱정했다고 그래? 순간 머쓱해진 나는 코를 킁 삼키며 주변을 둘러봤다.
자, 준비도 끝났고 와야 할 사람들도 다 왔으니 이제 열차만 맞이하면 된다.
“갑시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켠 뒤 일행들과 함께 강릉역 내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얼마나 기다렸을까, 철로 끝을 살피고 있던 한 대원이 크게 외쳤다.
“들어옵니다!”
쿵쿵. 쿵쿵. 쿵쿵.
저 멀리 디젤 기관차 특유의 커다란 소음과 묵직한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삐이이이익!
선로 끝에서 조명 두 개가 반짝인다.
디젤 기관차는 그 존재감을 과시하듯 묵직한 경적과 함께 강릉역으로 진입했다.
취익, 덜컹!
문이 열리고 군복을 차려입은 서울 요새 군인들이 우르르 열차에서 내렸다.
하지만 나와 송지영 중위의 반응은 지난 기무사 때와는 완전히 상반됐다.
“문 중사?”
“크하하! 이제 상사입니다! 박 중위님!”
곰도 때려잡을 것 같은 거대한 체구의 남성이 쿵쿵쿵 내게 달려와 경례한다.
문태범 중사, 아니 이제 상사란다! 나는 반가움을 참지 못하고 녀석과 포옹했다.
“너, 너! 너 인마! 내가 단백질 적당히 처먹으랬지! 아주 시발 군복 터지겠다, 야!”
“흐흐. 박 중위님은 근육이 다 빠지셨습니다. 아직도 결혼 못 하셨습니까?”
특임대에서 복무하던 시절, 하사로 처음 만나 전역 전까지 함께 했던 녀석이다.
그만두고 고향인 인천으로 내려간 줄 알았는데 여기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나는 잠시 체면을 잊은 채 목숨을 함께 했던 옛 동료와 반갑게 해후를 나눴다.
“근데 네가 여긴 왜 왔어?”
“사령관님이 부르셔서 말입니다. 서울 요새까지 안전하게 데려오라는 명입니다.”
기무사 놈들로 인해 서울 요새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해있던 강릉 생존자들이다.
하지만 이렇게 옛 특임대 시절 동료가 와주니 그 긴장감도 한풀 꺾였다.
“충성! 문 상사라고 불러주십시오.”
“어, 어어. 만나서 반갑네.”
얼굴이 험하고 덩치가 곰처럼 커서 그렇지, 붙임성 하나는 최고인 녀석이다.
문 상사는 내 일행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며 공손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자 딱딱했던 분위기는 어느새 풀리고 진즉 해야 했었던 교류의 장이 열렸다.
“일단 가자. 바다 구경할래?”
“제가 앱니까?”
제일 걱정거리였던 요새 간 두 번째 조우는 아무런 충돌 없이 부드럽게 지나갔다.
그렇게 강릉에서 하룻밤을 보낸 나와 일행들은 이른 아침 서울 요새로 출발했다.
사각, 사각, 사각.
[할아버지의 유산을 받기 위해 혈혈단신 강릉으로 향했던 ‘그’는 이제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이들을 위해 서울행 열차에 탑승했다. 하지만 혼자였던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등을 맡길 수 있는 동료들이 함께였다.]
[한반도 최고의 요새 서울. 그만큼 많은 사람과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콘크리트 정글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이제는 고통으로 얼룩졌던 과거를 이겨내고 강릉과 자신을 위해 새로운 미래를 직면할 때였다.]
[다음 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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