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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의 상속자-57화 (57/180)

57화

아포칼립스의 요새 상속자 57화

두쿵, 두쿵.

두쿵, 두쿵.

열차가 달린다는 호들갑도 잠시일 뿐 어느덧 소음과 진동에 익숙해진다.

처음에는 긴장하던 일행들과 대원들은 어느새 여객 칸에서 편히 쉬고 있었다.

“괜찮은데?”

“얼마 없는 신형이에요. 구형 하나 던져준다는 거 사령관님이 억지로 받아왔습니다.”

사람을 태울 수 있는 여객 칸은 물론 화물칸까지 별도로 제공하고 있다.

특히 혹시 모를 외부 공격을 상정해서 개조한 이 방어 옵션들은 정말 최고였다.

“경유 많이 먹지?”

“그 정도는 고려하셔야죠.”

하긴, 성능이 이렇게 좋은데 연비 효율까지 바라는 건 조금 과한 욕심이다.

한동안은 물자를 가져다 팔면서 연료가 보이는 족족 사다가 쟁여둬야겠다.

그 순간 문 상사가 쉬고 있는 강릉항 대원들을 향해 힐끗 시선을 던졌다.

“자경단입니까?”

“비슷해.”

“자경단치고는 수준이 높네요. 웬만한 전방 부대 애들보다 군기가 잡혔습니다.”

확실히 강릉항 대원들 정도면 이런 촌구석에서 보기 힘든 수준이긴 하다.

실전 경험과 숙련도야 말해봐야 입 아프고 하나 같이 성실하고 근면하니 말이다.

“훈련 시켜보세요. 쓸만할 것 같은데.”

“됐어. 그런 사람들 아니야.”

가족과 고향을 지키겠다는 숭고한 정신으로 똘똘 뭉친 강릉항 대원들이다.

여기서 괜히 특임대 색을 물들여 끔찍한 인간 백정으로 만들 필요는 없었다.

쩝. 내 단호함에 기회를 엿보고 있던 문 상사가 아쉬운 얼굴로 입맛을 다신다.

이 새끼 조교 시절 버릇 나오네.

나는 서둘러 대화 주제를 돌렸다.

“그래서 서울 요새는 좀 어때?”

“좆같죠, 뭐. 언젠 좋은 적 있습니까.”

문 상사 얼굴이 일그러진다. 나는 담배를 꺼내 녀석과 하나씩 나눠 물었다.

“영토 수복은 진즉에 포기한 지 오랩니다. 줏대 없는 새끼가 대통령 자리에 앉아있으니 뭐가 되겠습니까. 각하께서 요즘 취미가 예술 작품 수집하는 거랍니다. 병신.”

“군대는?”

“멀쩡하겠습니까. 군내 조직 개판 나서 파벌끼리 싸우기 바쁘지, 또 미연방은 괜히 건드렸다가 항로 개판 났지. 이젠 보급도 제대로 안 나와서 굶어 죽을 판입니다.”

그래도 부대 내 중요도 1~2순위를 다투는 특임대까지 보급이 제대로 안 된다고?

상황이 안 좋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데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치료제 훔친 건 누구 생각이야?”

“기무사 개새끼들이죠, 뭐. 그때 정보사 애들 미쳐서 그냥 거품 물었습니다.”

물건도 마음대로 훔쳐, 훔친 물건 잃어버려, 그걸 또 다른 부대에 짬 때리고 이번에는 관련 없는 민간인까지 죽이려고 했다.

아무리 힘이 막강한 기무사라지만, 이런 폐급 짓은 그냥 넘기기 힘들어 보였다.

“근데 웃긴 게 뭔 줄 압니까? 기껏 샘플 훔쳐놓고 보안 장치를 못 풀고 있답니다.”

“뭐야, 임상 3상까지 통과했다며?”

“우리가 했겠습니까? 미국 애들 다 해놓은 거 그냥 홀라당 훔쳐 온 거죠.”

아니 무슨 구국의 결단을 한 것처럼 말하더니 결국 훔쳐 오기만 한 거였어?

송지영 이 새끼 어딨어. 나는 분명 여객 칸 어딘가에 있을 그녀를 노려보았다.

“중위님. 근데 그거 진짜입니까?”

“응?”

“CIA랑 접촉했다면서요.”

“뭐, 잡아 오긴 했지.”

기무사가 독단으로 강릉항 습격해오면서 제임스의 역할이 조금 붕 떠버렸다.

그래서 지금은 일단 안전 가옥에 보호하면서 신변을 보호해주고 있는 상태였다.

“고민 중이신 가 봅니다.”

“내가 들고 있긴 애매한 카드거든.”

“그래도 일단 가지고 계십시오. 중위님도 빠져나갈 구멍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맞는 말이다. 아무리 강릉이 있더라도 시국이라는 건 언제 변할지 모른다.

치익.

담배를 비벼끈 나는 길게 하품했다.

“피곤하십니까?”

“요즘 잠을 못 자.”

“지금이라도 푹 주무십시오. 원주역에 도착하면 제가 깨워드리겠습니다.”

“고맙다.”

얼마 만에 휴식인지 모르겠다. 나는 자리에 누운 지 1분도 안 돼서 깊은 잠에 빠졌다.

그 사이 열차는 길고 긴 터널을 달려 서원주역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 * *

열차가 서원주역으로 진입하기 10분 전 문 상사는 장비를 챙기는 내게 다가왔다.

“근데 원주에는 무슨 볼일입니까?”

“그냥 좀 알아볼 게 있어. 기왕이면 이쪽 수뇌부랑 이야기할 수 있으면 더 좋고.”

굳이 곧바로 가지 않고 원주를 경유한 이유는 바로 감염체 군락 때문이다.

혹여나 놈이 영서 지방으로 넘어왔다면 그에 대한 세밀한 정보와 경고가 필요했다.

“아마 수뇌부는 만나기 힘들 겁니다.”

“왜. 까다로운 사람이야?”

“요새 지도자라는 게 딱히 없거든요. 지금 원주는 그냥 범죄 카르텔 소굴입니다.”

요새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서울 요새처럼 군벌이 정권을 자처한 곳, 강릉 요새처럼 여러 생존자가 모인 곳.

그리고 여기 원주처럼 약탈자 무리가 크기를 키워 카르텔 소굴이 된 곳까지 말이다.

“서울이 그걸 그냥 두고 봐?”

“놈들도 눈치가 있는지 밖에서는 사고 안 치거든요. 아마 주기적으로 물자도 상납하고 뇌물도 찔러주고 그럴 겁니다.”

하기야 경기도권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관심도 가지지 않는 수뇌부 놈들이다.

알아서 꼬리도 흔들고 고기까지 물어다 주는 들개를 굳이 때려죽일 필요가 있을까.

우리 눈에는 참 역겹고 가증스러워 보여도 원래 정치 관계라는 게 냄새가 좀 난다.

끼이이익, 덜컹.

취이익.

그렇게 간략한 지역 정보를 듣는 사이 열차는 어느덧 서원주역에 멈춰 섰다.

열차 책임자인 문 상사는 우리를 역 앞까지 마중해주며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그래도 미친놈들 많으니까, 2~3시간 내로 끝내십시오. 밤에는 출발해야 합니다.”

“응. 열차 잘 지키고 있어.”

나는 함께 온 경태, 가은 씨 그리고 송지영 중위를 데리고 열차에서 내렸다.

손을 흔드는 문 상사의 모습은 곧 역을 지나치는 인파에 묻혀 사라진다.

“장난 아니네요.”

“촌놈처럼 왜 그래.”

한적한 강릉에서 살다가 유동 인구가 많은 원주에 오니까 정신을 못 차리겠다.

경태는 잔뜩 긴장했고 가은 씨는 나무라는 말과 다르게 잔뜩 기죽은 게 보인다.

서울 가면 어쩌려고? 그런 둘이 귀여웠는지 송지영 중위가 작게 웃는다.

“넌 몇 번 와봤지?”

“아무래도 임무 때문에 자주 오죠.”

“아는 현지인 좀 있으면 소개해 줘. 거창할 필요는 없고 주변 소문만 좀 들으면 돼.”

그나마 다른 지역을 조금 돌아다녀 본 송지영 중위가 가이드로 결정됐다.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인 그녀는 아는 술집이 있다며 우리를 번화가로 안내했다.

“오빠! 놀다가!”

“형님! 오늘 진짜 물 좋거든요!”

길바닥엔 오물이 굴러다닌다. 하수구 물에선 온갖 악취와 지린내가 진동했다.

거리는 당연히 멀쩡할 리 없고 사람들 또한 음습한 골목과 한 몸이 된 지 오래.

호객하는 창녀, 바쁘게 뛰어다니는 어린 삐끼와 골목에 가득한 굶주린 고아들은 현재 이 도시가 어떤 곳인지를 알려주었다.

“눈 마주치지 마, 피곤해진다.”

“예에.”

외지인은 특히 눈에 띈다. 벌써 시선이 느껴지는 거로 보아 이목을 끈 지 오래다.

나는 충격받은 것 같은 일행들을 재촉하며 빠르게 번화가 거리를 지나쳤다.

“여기에요.”

송지영 중위가 우리를 안내한 곳은 주변에서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살롱 술집이었다.

하수구 악취 때문에 머리가 아파진 우리는 서둘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끼익, 덜컹!

해가 저문 만큼 술집 안은 만석이다.

하지만 바텐더 자리에서 술잔을 닦고 있던 살롱 여주인이 송지영을 금세 알아봤다.

“오랜만에 오네. 또 임무야?”

“아뇨, 오늘은 개인적인 일이요.”

“으응, 휴가구나. 이쪽은 일행?”

“지금은 전역하신 선배님이세요.”

“어머, 잘 부탁해~”

풍기는 분위기가 보통이 아니다. 아니, 저기 찬장에 걸려있는 산탄총 때문인가?

우리가 자리에 앉아 여주인은 송지영이 주문한 맥주를 한 잔씩 내려놓았다.

순간 경태와 가은 씨가 눈동자를 반짝인다.

“한 잔만 마셔.”

“아싸!”

특별히 일탈을 허용한 나는 호호 웃고 있는 여주인을 향해 조용히 속삭였다.

“정보를 조금 찾고 있습니다.”

“응? 여긴 술 마시는 곳인데.”

술 마시는 곳이니까 물어보지. 나는 주머니에서 총알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뒀다.

탁!

재생 탄도 아니고 싸구려 더미 탄도 아닌 공장에서 생산한 진짜 풀메탈 자켓이다.

이를 알아본 중년 여성은 하던 일은 잠시 멈추며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뭐가 궁금한데?”

목소리가 바뀌었다. 나는 흥미를 보이는 그녀 앞에 총알 하나를 더 올려뒀다.

그러자 조금 전 여유롭던 모습은 어디 가고 중년 여성은 군침을 꿀꺽 삼켰다.

“혹시 한 구역에서 사람이 계속 실종됐다거나, 시체가 대량으로 사라졌다거나 하는 뜬 소문 같은 거 없습니까?”

나는 총알을 가져가려는 중년 여성의 손을 턱 막으며 원하는 정보를 물었다.

“······그것만 알려주면 돼?”

“예.”

“난 또 뭐 대단한 거라고. 알 사람은 다 아는 내용이니까 하나만 받을 게. 오케이?”

의외로 양심적이네. 내가 손을 치워주자 그녀는 딱 한발만 챙겨 주머니에 넣었다.

“멀쩡한 사람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거야, 여기선 흔한 일이지. 근데 보통 이런 식으로 이상한 소문이 도는 건 흔치 않거든.”

“이상한 소문이요?”

“행구동에서 계속 사람이 사라진다잖아. 통나무 장사면 그냥 걸린 놈이 재수가 없겠거니 하는데 이번 건 조금 달라.”

행구동이면 치악산 바로 옆이다. 나는 목소리를 낮추는 그녀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한 5~60명쯤 되는 마을 사람들이 통째로 사라졌어. 이게 사람 짓이면 흔적이 남거든? 근데 아무것도 못 찾았다잖아.”

“시체도 말입니까?”

“그러니까 이상한 일이라는 거지!”

보통 인간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소문을 우리는 괴담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나는 이 기괴한 소문의 출처가 어디인지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군락이다.’

하나둘 실종되는 사람들, 남지 않은 흔적, 딱 봐도 알비노 변이종 특징이다.

어디로 도망쳤나 했더니 치악산에 자리를 잡고 군락을 회복 중인 모양이다.

“어머 다 주게?”

시간을 많이 절약했다. 나는 탁자 위 총알을 전부 주는 것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이제 빨리 열차로 돌아가서 이 정보를 강릉에 알리고 서울로 가는 일만 남았다.

콰직!

“꺼지라고, 이 미친 새끼야!”

그런데 그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욕설과 함께 의자가 날아왔다.

익숙한 찰진 욕에 고개를 돌려보니 아니나 다를까 이를 갈고 있는 가은 씨가 보였다.

“아, 존나 비싸게 구네.”

“술 한 잔만 하자니까?”

잔뜩 술에 취한 남성 여럿이 얌전히 술 마시고 있던 둘에게 시비를 걸고 있다.

뻔한 상황이다. 외지인으로 보이는 가은 씨에게 찝쩍거리기 위해 접근했겠지.

“이 새끼는 벙어리야? 왜 말이 없어.”

“깔 앞이라고 가오 부리잖아.”

하지만 판을 엎어도 진즉에 엎었을 경태는 의외로 묵묵히 자리에 서 있다.

얼굴은 폭발하기 직전인데 아마 사고 치지 말라는 당부 때문에 참고 있는듯하다.

기특한 녀석. 나는 일이 더 커지기 전에 그 둘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짜악!

그런데 그 순간 낄낄 웃고 있던 남성 하나가 경태 뺨을 강하게 후려쳤다.

뺨이 붉게 물든다. 덩치 큰 놈이 맞고만 있자 놈들 사이에서 조소가 새어 나온다.

“병신.”

이 정도 폭력이야 자경 단원인 경태에게 있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다.

다만, 문제는 고통이 아닌 구겨진 자존심.

자존심을 건드는 명백한 도발 행위에 술집 분위기는 한순간 싸늘하게 변해버린다.

“잘 참았다.”

하지만 나는 사태가 커지기 전 경태 어깨를 두드리며 놈들 앞을 가로막았다.

“······형님?”

그리고 의자를 밟고 점프해 뺨을 때렸던 놈의 안면을 그대로 군홧발로 찍어버렸다.

콰직!

얼굴이 뭉개진다. 코뼈가 으스러지고 냄새나는 치아가 팝콘처럼 튀어 오른다.

“어, 어어?”

졸지에 얼굴 병신이 된 동료를 바라보며 놈들은 멍하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나는 상식 아저씨가 선물로 준 시계를 풀고 놈들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이에 기겁한 송지영 중위는 상황이 좆된 것을 직감했는지 비명을 질렀다.

“선배! 죽이면 안 돼요오오오!”

안 죽인다. 차라리 죽고 싶게 만들지.

다른 건 참아도,

내 새끼 건드는 건 못 참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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