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아포칼립스의 상속자 61화
정보사 헬기를 타고 새벽 늦게 호텔로 복귀해 거의 오후 2시가 돼서야 일어났다.
이렇게 늦잠을 자본 게 얼마 만인지.
비몽사몽 떠날 채비를 끝내고 로비로 나오자 일행들이 나를 반겨주었다.
“형님 푹 주무셨어요?”
“너 피부가 왜 이렇게 반들거려.”
“그 사우나가 있길래 조금······.”
어째 얼굴이 까무잡잡하던 경태 녀석이 무슨 탈피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내가 등장하자 가은 씨가 후다닥 뛰어와 곱게 칠해진 페디큐어를 자랑했다.
“동장님! 이거 봐요.”
“응, 이쁘네.”
“헤헤, 무료로 해주는 곳이 호텔에 있더라고요. 이럴 줄 알았으면 은서도 데려올걸.”
귀빈을 모시는 호텔답게 기본적인 인프라는 물론 서비스 시설까지 유지하고 있다.
다들 얼굴빛이 밝은 게 그 짧은 기간 동안 열심히 호캉스를 즐긴 모양이다.
나는 종업원이 가져다준 찐 미국산 콜라를 홀짝이며 일행들을 향해 물었다.
“돌아가기 아쉽지?”
인간이라는 게 원래 낮은 곳에서 높은 곳은 얼떨떨하게 느껴도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가면 본인 처지를 체감한다.
물 한잔조차 아껴 써야 하는 강릉 생존자들로선 정말 서울을 떠나기 싫을 것이다.
“오늘 가는 거 아니었어요?”
“분명 업무 펑크 났을 텐데······.”
하지만 그 둘은 턱도 없다는 듯 하루빨리 터전인 강릉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나는 새어 나올뻔한 웃음을 가까스로 삼키며 단맛이 부담 가는 콜라를 내려놨다.
겨우 얼마나 있었다고 상식 아저씨가 타주는 밍밍한 커피 믹스가 그리웠다.
“중위님.”
“선배.”
내가 일어났다는 소식에 송지영 중위와 문 상사가 깨끗한 군복 차림으로 찾아왔다.
그리고 지난번에는 하지 않던 경례를 붙이며 절도 있는 몸짓으로 예의를 갖췄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철저하게 비밀리에 진행된 작전이라고 해도 특임대 소속은 이미 다 알고 있다.
아마 이 경례는 그에 대한 보고와 감사 인사, 그리고 수고했다는 표현일 것이다.
경태와 가은 씨가 눈치껏 자리를 피해 주자 그 둘은 옆자리로 다가와 앉았다.
“열차는 깨끗하게 보수했습니다, 중위님. 오늘 오후쯤 출발하시면 될 것 같아요.”
“가지고 온 물자는?”
“적당한 가격에 전부 판매하고 주문하신 물건들도 채워놨어요. 근데 이렇게 싸게 파셔도 돼요? 시세차익 좀 보셔도 될 텐데.”
“생필품으로 돈 버는 거 아니야. 앞으로 계속 공급할 테니까, 애들 밀린 월급부터 주고 일부 배식이라도 운용하라고 해.”
거리에 아사자가 속출하고 부모 잃은 아이들이 엉엉 울고 있는 것을 봤다.
여력이 되는 이들이야 진즉에 빠져나갔겠지만, 아닌 시민들이 더 많은 상황.
그런 그들의 골수를 쪽쪽 빨아먹으면서까지 혼자 호의호식하고 싶지는 않았다.
“······감사합니다, 중위님.”
“됐어.”
미우나 고우나 어차피 서울 요새가 건재해야 주요 생존 지역이 통제된다.
나는 고개를 숙이는 둘에게 손사래를 친 뒤 아직 못다 했던 이야기를 나눴다.
“군락 건은 이야기 해봤어?”
“단장님께 직접 보고 올렸습니다. 아마 이번 달 내로 인원을 파견할 것 같더군요.”
“그 양반이 웬일이래.”
“감염체라고 하면 치를 떠는 인간 아닙니까. 일단 조사해보고 연락드리겠답니다.”
그 목석같은 인간이 오랜만에 제대로 된 감염체 냄새를 맡고 흥분한 모양이다.
어쨌든 귀찮고 위험한 일을 대신해준다고 하니 우리로서는 그냥 감사하면 될 일.
그렇게 시국 관련해서 바삐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송지영 전화기가 짧게 울렸다.
삐릭.
“선배.”
“응?”
“아무래도 지금 출발하셔야 할 것 같아요.”
“무슨 문제 있어?”
“시위대가 서울역 부근까지 진출했나 봐요. 혹시 모르니 먼저 보내시라는 지시에요.”
김태하 소장의 강력한 명령으로 현재 본격적인 시위 진압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 일은 알 수 없기에 외지인인 우리는 이쯤에서 빠져줘야 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줄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고생해라.”
나와 옛 동료들은 서로 손을 맞잡는 것을 끝으로 아쉬운 작별 인사를 대신했다.
이제 강릉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 * *
[술 한 잔도 못 나누고 보내는군.]
“가서 마시죠, 뭐.”
[하하, 이젠 친구가 많이 생겼다 이건가? 이럴 때 보면 자네도 참 많이 변했어.]
위성 전화기 너머로 껄껄 웃던 김태하 소장이 이내 거칠게 기침을 시작했다.
한참 동안 들려오던 기침 소리가 가시자 그의 목소리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괜찮으십니까?”
[요즘 밤에 움직일 일이 많아서 말이야.]
“돌아가는 꼴이 심상치 않던데요.”
[마지막 발악이지, 뭐. 진즉에 팔다리 다 잘린 양반이 뭘 더 하겠나. 저러다가 괜히 사람들만 다치는 건 아닌지 걱정되는군.]
“먼저 나서지 그러셨습니까.”
[총칼로 쟁취한 권력을 총칼로 바로 세운다고 의미가 있을까. 이제 이 요새도 시민들 곁으로 돌아갈 때가 된 거지. 걸출한 인물들이 나오고 있네. 변화도 금방이야.]
거기까지 말한 김태하 소장은 다시 거칠게 기침하며 조용히 앓는 소리를 냈다.
지난 시절 전장을 전전했던 후유증이 다시금 찾아와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언제쯤 편해질 수 있을까. 아픈 곳이 몸이 아닌 마음이란 걸 알기에 입을 다물었다.
[그나저나 자네도 슬슬 결정해야지?]
“네?”
[강릉 말이야. 듣자 하니 이제 치안도 안정화됐고 사람들도 얼추 모였다며. 원래 요새에는 든든한 지도자가 필요한 법이다.]
“전 아파트 동장인데요.”
[겸직 모르나 겸직? 생판 모르는 놈이 앉기 전에 빨리 시장 자리 낚아채야지.]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다 비슷해지나 갑자기 상식 아저씨랑 비슷한 말씀 하시네.
나는 이번에도 한 귀를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예, 예, 건성건성 대답해주었다.
“형님, 곧 도착한대요.”
그러자 마침 경태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곧 강릉역에 도착한다는 걸 알려주었다.
나는 벌써 1시간 넘게 통화하고 있던 김태하 소장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곧 도착한답니다. 몸조심하시고요.”
[그래, 또 연락하지.]
뚝.
위성 전화기를 끊고 기념품이 가득 든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열차 복도에는 이미 모든 채비를 끝낸 일행들과 대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두쿵, 두쿵.
두쿵, 두쿵.
열차가 지하로 진입한다. 그리고 점차 속도를 줄이며 천천히 강릉역으로 진입했다.
우리가 올 거라는 연락을 받았는지 벌써 역에 마중을 와 있는 강릉 사람들.
문이 열리자 상식 아저씨와 김태식이 가장 먼저 웃으며 다가와 반겨주었다.
“동장, 어서 와!”
이제야 집으로 돌아온 기분이다.
함께 왔던 강릉항 대원들은 여기까지 마중 온 가족들을 따라 사방으로 흩어졌고,
나와 일행들 또한 아저씨와 태식 씨를 따라 옛 모습을 찾은 강릉역을 빠져나왔다.
“어? 불이 들어오네요?”
“오늘 오신다길래 하나만 잠깐 켜뒀습니다. 곧 있으면 다시 꺼질 거예요.”
손봐야 했을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을 텐데 이런 서프라이즈를 준비했을 줄이야.
일행들은 겨우 빛이 들어오고 있는 가로등을 바라보며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감수성이라곤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는 나는 태식 씨를 향해 말했다.
“일단 필요한 부품은 전부 구해왔습니다. 나머지 부품은 서울에서 계속 수급 해올 테니 시가지 전체 복구를 목표로 해보죠.”
“생각만 해도 떨리네요.”
“장기 프로젝트라고 생각하세요. 완벽히 전부 복구하려면 2~3년은 더 걸릴 겁니다.”
맥 빠지는 소리를 들은 탓일까, 그 말을 끝으로 작게 빛나던 가로등이 꺼졌다.
하지만 이 자리에 모인 사람 중 마음속 빛마저 꺼져버린 이들은 없었다.
우리는 오늘보다 나아질 내일을 기약하며 집, 터전, 둥지인 요새로 돌아갔다.
* * *
문명의 시작이 언제일까라는 질문에 많은 사람은 낚싯바늘, 토기, 간석기를 생각했다.
하지만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는 문명의 첫 번째 징조를 ‘부러졌다 붙은 흔적이 남은 인간 다리뼈’ 화석이라고 답변했다.
다리가 부러지는 그 순간 야생에서 절대 살아남을 수 없는 여타 짐승과는 다르게,
타인이 곁에서 지켜주고 다리를 치유할 때까지 기다려줄 수 있는 같은 인간.
그게 바로 이 인류 문명의 시초이자 우리가 가장 먼저 재건할 시스템 메커니즘이었다.
“이, 이거 정말 무료로 주는 겁니까?”
“무료는 아닙니다. 지정한 장소에서 정해진만큼만 일해주시면 전부 제공해드려요.”
“그럼 혹시 병원도······?”
“가서 번호표 뽑고 기다리세요.”
이번 겨울이 유독 추워짐에 따라 강원도 전역에서 이주민들이 발생했다.
그들은 살만하다는 소문을 따라 자연스럽게 강릉으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일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주는 시스템에 경악하며 근로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그 덕분일까. 두 달을 예상했던 확장 사업은 겨우 보름 만에 마무리를 할 수 있었다.
“거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가 더 감사하죠.”
거기다 서울 간 육로 거래가 뚫리면서 강릉항 무역량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났다.
서해보다 안전하다는 말에 무역이 필요한 여러 국적 선박이 강릉으로 찾아온 것이다.
김태식이 말하길 지난 한 달 거래량이 거의 지난 1년 치에 필적한다고 하는데,
수치상으로만 봐도 얼마나 많은 물류가 오고 갔는지 체감이 될 정도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서울에 추가 열차를 요청해 정말 열심히 뛰어다녀야 했다.
늘어나는 인구, 넓어지는 생활권, 치안 안정화가 본격적인 도시 인프라 복구.
그렇게 정신없는 1, 2월이 순식간에 지나 평년기온이 올라가는 3월이 찾아왔다.
똑, 똑.
처마 밑 고드름이 녹고 있다.
손을 뻗어 물방울 닦은 나는 햇볕이 오늘따라 따뜻하다는 걸 피부로 느꼈다.
항상 눈이 쌓여있던 아파트 공원에는 많은 주민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겉옷을 입고 1층으로 내려가자 아니나 다를까 상식 아저씨가 경비실에 있었다.
“오늘은 좀 따뜻하지?”
“이제 좀 살겠네요.”
1월이 진짜 추웠다면 2월은 와, 사람이 얼어죽겠구나 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아무리 난방을 틀어도 속출하는 동사자에 우리도 진짜 겨울 동안 고생이 심했다.
“좀 걷죠.”
“그려.”
나는 상식 아저씨와 함께 증축 공사가 한차 진행 중인 현장으로 걸어갔다.
거기, 형씨! 안전모는 어디에다 뒀어!
하나, 둘, 셋! 던져!
날씨가 많이 풀림에 따라 요새 증축 계획도 본격적으로 진행이 되기 시작했다.
단순히 장벽을 높이는 게 아닌 희망 아파트라는 보금자리를 확장하는 공사인 만큼
생존자들은 본인들이 거주할 집을 짓는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시멘트를 섞고 있었다.
“다들 기술자라 믿고 맡겨도 될겨.”
“저야 뭐 항상 믿고 있죠.”
공사하는 인원이 부담되지 않도록 주변만 둘러본 우리는 장벽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뷰가 가장 좋은 자리에 사이좋게 앉아 담배 한 개비씩 나눠 물었다.
치익.
푸우우.
“이 짓도 올겨울이 마지막 일 줄 알았는데 어떻게 또 여기까지 살아왔네. 동장이 처음 문 두드리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여.”
“그때 진짜 쏘려고 했어요?”
“아니, 나는 그냥 딱 보자마자 알았다니까? 우리 박동구 동장님 손자분이 오셨구나!”
“입에 침 좀 바르고 거짓말해요.”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만약 강릉으로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때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사람이 상식 아저씨가 아니었다면, 경태와 은서를 만나지 못했다면, 가은 씨를 찾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어차피 우연의 연속이라지만, 나는 가끔 이 모든 게 운명처럼 느껴졌다.
나는 기분 좋게 웃는 상식 아저씨를 따라 웃으며 조용히 강릉 풍경을 바라봤다.
그 순간 또 무전기가 울린다.
치익.
[동장님?]
“응. 또 강릉항이야?”
[아니요, 이번에는 발전소 쪽입니다. 동장님이 빨리 와보셨으면 좋겠다는데요.]
“무슨 일인데?”
[동해 쪽에서 사람들이 찾아왔답니다.]
“동해? 거긴 우리랑 교류 없잖아.”
[예. 근데 발전소 소유권을 주장한답니다.]
으음, 향기로워. 시발 또 똥내가 나네. 나는 그 즉시 담배를 비며 끄며 일어났다.
“또 가는겨?”
“예. 이젠 아침이 아주 기대되네요.”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오랜만에 책을 만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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