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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의 상속자-62화 (62/180)

62화

아포칼립스의 상속자 62화

사각, 사각.

[한반도 각 곳에서 지역을 통합하는 세력들이 등장하는 사이, 강원도는 의외로 평화로운 나날이 지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평화롭다고 해서 두각을 드러내는 집단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강릉이 겨우내 엄청난 발전을 이룸에 따라 인구수가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는 당연히 소문을 통해 빠르게 퍼져나갔고 다른 영동지방 지역들을 긴장하게 했다. 그들도 지역 패자의 등장을 예감한 것이다.]

[그중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다름 아닌 가장 비슷한 규모였던 동해-삼척 간 요새 동맹이다. 그들은 빠른 속도로 발전한 강릉을 보며 놀라면서도 강릉이 희생을 통해 취한 과실에 군침을 흘리기 시작했다.]

[전쟁인가, 아니면 외교인가. 은근슬쩍 엉덩이를 밀고 들어오는 불청객들을 어떻게 상대할지는 온전히 ‘그’의 선택에 달렸다.]

동해-삼척 요새 동맹이라.

그간 외부 세력을 상대하느라 같은 영동지방은 눈길조차 주지 못하고 있었다.

이쪽 정보에는 빠삭한 상식 아저씨 말로는 꽤 오래전부터 있던 곳이라는데,

발전소와 20k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이면 이웃이라는 호칭으로 불러도 됐다.

근데 문제는 그 이웃이 반갑다고 떡을 돌리는 게 아니라 땅을 탐낸다는 거다.

‘일단 가봅시다.’

책을 통해 대략적인 경위를 확인한 나는 일행들과 함께 화력 발전소로 향했다.

그래도 초면에 총구를 들이미는 것보단 역시 대화로 해결하는 게 나은 방법이겠지.

제발 말이 통하는 상대이길 빌며 우리는 발전소 앞 안인역에 차량을 주차했다.

부우웅, 끼익

덜컹!

역 앞은 이미 한발 먼저 도착한 강릉항 대원들이 주변을 지키고 있었다.

분위기가 살벌한 것을 보아 그들과의 첫 조우가 결코 호의적인 편은 아닌 모양이다.

그들과 가볍게 눈인사한 나는 어느덧 옛 모습을 되찾은 발전소를 향해 걸어갔다.

그곳에는 무장한 두 집단이 서로를 노려본 채 어색한 기류를 나누고 있었다.

“동장님!”

긴장한 얼굴로 서 있던 태식 씨가 나를 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쟤들입니까?”

“예에. 동해에서 왔답니다.”

구형 트럭 세 대, 인원은 스무 명, 고작 반절만이 단발 총기로 무장하고 있다.

꼴을 보아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닌 것 같고 딱 초기 민병대 수준.

아니,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강릉항 대원들이랑 대치하고 있는 거야?

내가 뚜벅뚜벅 다가가자, 리더로 보이는 한 남성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당신이 이 발전소 책임자······.”

“댁들 뭡니까?”

“네?”

“도대체 누구시길래 남의 영역에 함부로 들어옵니까? 아니, 동해에선 이게 예의인가?”

엄연히 강릉 영역권 아래인 발전소를 무장한 단체가 버젓이 돌아다니고 있다.

발견 즉시 사살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 정도면 많이 양보해준 거지.

내 서슬 퍼런 경고에 상대 리더도 함께 온 동해 생존자들도 표정을 굳혔다.

“······자극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됐고, 용건이 뭡니까.”

책을 통해 내막을 알고 오긴 했지만, 또 어떤 말을 해올지는 일단 들어봐야 안다.

내가 가만히 팔짱을 끼고 기다리자 상대 리더는 땀을 삐질 흘리며 대답했다.

“동해 시장님께서 영동 화력 발전소에 소유권 문제를 두고 상의하자 하셨습니다.”

“소유권?”

“예. 당시 이곳을 관리하던 직원들이 저희 쪽에 이 건물을 양도했습니다. 그러니 100%는 아니어도 일부 소유권은······.”

“강덕수 씨!”

내가 말을 끊고 대뜸 소리치자 뒤쪽에서 기다렸다는 듯 사람이 뛰쳐나왔다.

이미 화가 날 대로 난 강덕수 씨는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유니폼을 입고 왔다.

“이 말 진짜입니까?”

“당연히 아닙니다! 누가 그딴 개소리를 했는지는 몰라도 여기는 우리 직원들 땀과 피가 서린 곳이에요! 이보쇼! 동해에 있다던 그놈들 이름이 뭡니까? 직급은요!”

우연히 흘러 들어간 직원 하나 말 믿고 찾아온 모양인데 이미 선객이 있다.

“할 말 있으면 해보세요.”

열변을 토하는 강덕수 씨 앞에 상대 리더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들을 것도 없습니다, 박 동장님!”

발전소가 관련된 일이라 그런지 평소 얌전하던 강덕수 씨가 유독 흥분했다.

마찬가지로 어울려 줄 생각이 없었던 나는 길 반대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시간 이후로 발전소 근처를 배회하거나 발견되면 즉각 사살 조치할 겁니다.”

“우리는 그저 대화를 원했습니다.”

“정식으로 요청해서 다시 오세요.”

내가 워낙 단호하게 나온 탓일까, 주변 분위기가 순간 싸늘하게 식어버린다.

방아쇠 위에 손가락을 올려둔 대원들과 자존심이 상한 듯 인상을 찌푸리는 상대측.

“그만! 물러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표정이 복잡한 남성이 신호를 보내자 대치 상황도 끝이 났다.

덜컹, 부우우우웅!

그들은 구형 트럭에 탑승해 자신이 왔던 길을 따라 발전소 지역을 벗어났다.

그러자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김태식이 머리를 긁적이며 다가왔다.

“충돌 없이 끝나서 다행이네요.”

“아마 계속 기웃거릴 겁니다. 정동진 쪽으로 대원들 보내서 경계하게 하시고 조만간 그쪽에도 철책 설치하겠다고 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근데 괜찮겠죠?”

“걱정되십니까?”

“뜬금없이 동해 시장이라는 이름이 튀어나와서 말입니다. 저희도 전쟁 초기 때는 강릉 시장 권한이 막강했거든요.”

“나라가 망한 마당에 시장이 뭔 상관입니까. 급한 건 저쪽입니다. 아마 그 시장이라는 놈이 직접 찾아올 거예요.”

긴가민가해 하는 태식 씨 뒤로 얼굴이 상기된 상식 아저씨가 갑자기 난입했다.

“아니, 태식이 말은 그게 아니지! 동장이 동해 시장이랑 비교하면 직급이 딸리잖아! 우리도 강릉 시장을 뽑아야 한다고!”

“예.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아니, 이 사람들 이상한 약이라도 먹었나 갑자기 왜 이렇게 시장 타령이야.

나는 갑자기 동조하기 시작한 사람들을 막기 위해 강력한 수를 꺼내 들었다.

“그럼 투표하던가요.”

하지만 들려온 대답은 다수결이라는 막강한 명분을 어이없이 무너트렸다.

“투표요? 행정력 낭비 아닙니까?”

“에잉, 쯧. 동장도 참 인정머리 없구먼.”

아니, 다들 정상이 아니야.

이거 나만 이상한 거야?

* * *

“영동에서 쌀농사를 지을 줄 몰랐네요.”

“뭐, 다른 지방이랑 비교하면 애들 장난이지. 그래도 이렇게 해놓으면 쏠쏠해.”

마침 발전소로 간 김에 철도 근처에 있는 논밭을 한 번 방문해보았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겨울도 끝나니 이제 농사도 본격적으로 준비를 해야 할 때.

무역량이 늘어난 덕분에 종자도, 비료도 넉넉히 구해놨으니 올해 농사는 걱정 없었다.

나는 따스한 햇볕에 조금씩 기지개를 켜는 흙을 손으로 매만져 보았다.

“농사는 해본 적 없지?”

“그죠.”

“누구나 처음은 있는 거야. 그래도 할아버지 닮았으면 농사도 잘하겠지.”

평생 무언가를 죽이기만 했지, 내 손으로 무언가를 살려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하지만 나와 반대로 할아버지는 매해 이곳으로 나와 열심히 논밭을 일궜고,

손수 키운 작물로 형제와 친구, 수많은 주민과 아이들을 직접 먹여 살리셨다.

흙이 참 곱네.

잠시 축축한 감상에 젖었던 나는 손에 묻은 흙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나저나 축하해 동장? 아니 이제 강릉 시장님이라고 불러야겠구먼.”

“아저씨까지 왜 그래요.”

“내가 무슨 주책이라도 떨었나? 아무리 임시라도 시장님은 시장님이지 뭘!”

저번 일들을 계기로 강릉 요새 연합에도 대표자가 있어야 한다는 걸 체감했다.

당연히 김씨 일가와 강릉 생존자들의 적극 추천으로 내가 임시 자리에 앉았다.

훗날 제대로 된 투표를 하겠다고 약속받기는 했는데 이게 진짜 옳은 건가?

평생 강릉에 헌신만 하신 할아버지가 보면 머리를 깡 내려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렇게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는데 마침 무전기가 울리며 태식 씨가 날 호출했다.

치익.

[시장님?]

“예, 예. 임시 시장입니다.”

[시장님 예상이 맞았습니다. 현재 동해 시장이 정동진까지 와 있다고 합니다.]

“뭐랍니까?”

[시장님을 직접 만나고 싶답니다.]

어째 무리하게 진출하려 한다 싶더니 발전소가 어지간히 탐나기 시작한 모양이다.

“곧 간다고 전해주세요.”

[굳이 만날 필요 있겠습니까? 협상한다 해도 저희 쪽에서 이득 볼 게 없는데요.]

“피 보기 싫어서 그렇습니다.”

[······아,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현재 강릉 요새 연합은 이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무장 집단을 운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 크고 작은 전쟁이 너무 잦았던 탓에 베테랑 전투 인원의 손실이 컸다.

이제 막 PTSD 치료에 들어간 대원들이 다수인데 또 나서서 싸우라기도 미안하다.

이번에는 책 말대로 최대한 외교 중점으로 풀어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아저씨도 같이 가실래요?”

“오랜만에 정동진도 가보는구먼. 드라마 모래시계 찍었던 곳이 바로 거기여.”

이야, 90년도 드라마를 아직도 기억하시나. 갑자기 세대 차이 확 느껴지네.

나는 상식 아저씨. 아니, 상식 어르신을 모시고 준비된 차량에 몸을 맡겼다.

* * *

“시장님.”

“수고하십니다.”

“시장님!”

“예, 고생하십니다.”

내가 간이 철책을 지나가자 주변을 경계하던 대원들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 많은 거로 보아 이번에 지원자를 받아 새로 뽑은 모양.

우리 희망 요새 자경 단원들도 슬슬 태를 갖춰야 하는데 어째 짬이 나지 않는다.

나는 정동진 임시 철책을 넘어 대원들이 안내하는 길을 빠르게 걸어갔다.

“저 짝도 전부 모였나 보네.”

“급히 채운 티가 나죠?”

무슨 휴전선처럼 경계면을 세운 동해 쪽에도 마찬가지로 전투 인력들이 결집했다.

일단 닥치는 대로 인원을 모은 거 같은데 그럴수록 오합지졸인 게 티가 났다.

“저기 보이는 호텔입니다.”

“썬 크루즈요?”

“예. 안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니, 그냥 가까운 지상에서 만나면 될 것이지 꼭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네.

나는 투덜투덜 대원들을 따라 배를 호텔로 개조한 썬 크루즈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이미 강릉항 김씨 일가와 상대 쪽 수뇌부들이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끄덕.

나는 그 둘과 가볍게 눈인사를 나누고 양측 지도자가 앉는 상석으로 자리에 앉았다.

반대편에는 동해 시장으로 추정되는 나이 많은 여성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반가워요.”

어쭈, 모피코트?

짙게 칠한 화장과 이 세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신구들이 의아함을 자아냈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일단 인사를 받았다.

“예, 반갑습니다. 바쁜 건 피차일반이니 서로 용건만 이야기하고 빨리······.”

그런데 갑자기 무언가를 확신한 상대측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다.

“박대식. 아버지 성함 맞으시지?”

박대식.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아버지 성함에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뭡니까?”

“애도 참. 고모 얼굴 기억 안 나니? 우리 어릴 적에 몇 번 본 적 있잖아.”

친가랑 연을 끊은 지가 오래긴 한데 이상하게 어릴 적 기억은 조금 남아있다.

얼굴이 꽤 익숙한 것으로 보아 아버지가 큰누나라 부르던 그 여자가 맞았다.

이걸 과연 운명의 장난으로 봐야 할까.

설마 내게 고모 되는 사람이 동해로 내려가 시장직에 앉아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잠깐 정신이 멍해진다.

“아버지 뵈러 한번 갔어야 했는데, 세상이 참 야속하다 그치? 그래도 이렇게 잘 커서 만나니 고모 기분이 참 묘하네.”

“············.”

“아버지 피가 참 대단하긴 한가 봐. 딸은 동해 시장에 그 손주는 요즘 잘나가는 강릉 시장. 대식이가 참 한심하게 살긴 했어도 자식새끼 하나는 정말 잘 키웠어.”

“제가 있다는 거 알고 접근한 겁니까?”

“우연히 소문을 들었어. 정말 우연히.”

설마 여기서 내 친가가 등장할 줄은 몰랐던 김씨 일가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협상에서 이득 관계를 뛰어넘는 유일한 변수가 혈연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대도 처음부터 이를 이용할 생각이었는지 실실 웃으며 말을 이었다.

“참 어려운 시기야. 그리고 어려운 시기에 혈연만큼 믿을만한 사람도 없지. 힘들 때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고. 아마 돌아가신 네 할아버지도 그걸 원하지 않으실까?”

“그러시겠죠.”

“그래서 말인데, 요즘 고모가 참 힘들다. 어려울 때 먹이고 재워줬더니 좀 살만하니까 기어오르는 애들이 많아. 혹시 우리 조카가 같은 식구들 좀 도와줄 수 있겠니?”

테이블 위 서류를 읽어본다.

그곳에는 무기 증여, 물자 지원, 연료와 전력 제공 등 강릉을 순식간에 호구로 만들 수 있는 목록들이 잔뜩 쓰여있었다.

평소라면 이거 가지고 꺼져 마녀 같은 여자야 외칠 태식 씨는 눈치를 봤다.

“이거면 돼요?”

“아! 나중에 필요하면 더 말할게.”

“나중에 가서 말하지 말고 지금 다 말하세요.”

“응? 왜?”

초조한 초읽기. 한동안 서류를 읽던 나는 모두가 보란 듯이 종이를 들어 올렸다.

부욱.

그리고 망설임 없이 종이를 찢었다.

두 개로 갈라진 종이 사이로 웃고 있던 고모의 얼굴이 매섭게 일그러진다.

“그때 가서 또 찢어달라 하지 마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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