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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의 상속자-63화 (63/180)

63화

아포칼립스의 상속자 63화

혈연.

사실 이보다 설명이 쉽고 간단하게 정의할 수 있는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 주변만 해도 김씨 일가로 이뤄진 상가 번영회, 경태 은서 남매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내게 있어 일찍이 연이 끊긴 친가 사람들은 남보다 못한 존재였다.

“너 진심이니?”

“예.”

“고모 얼굴 몰라? 대식이가 평소에 말 안 해줬니? 하나뿐인 식구한테 어떻게······.”

“하나뿐인 아버지 죽기 전에 오시지 그랬어요. 고모 많이 보고 싶어 했을 텐데.”

뼈를 때리는 대답에 한참 열변을 토하던 고모가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그래도 최소한 염치는 남기고 살았는지 닥쳐야 할 때를 아시는 모양이다.

나는 테이블 위에 올려둔 검지를 톡톡 까닥거리며 본래 용건을 꺼내 들었다.

“영동 화력 발전소 저희가 공동으로 재건하고 소유한 시설입니다. 만약 전력이 필요하면 정당한 대가를 내고 일괄 구매하세요.”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고모. 아니, 동해 시장. 저희 지금 친목회나 하려고 여기 모인 거 아닙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만났다면 코딱지만큼 남아있는 혈육의 정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불순한 의도를 알게 된 지금은 일말의 정조차 떨어지고 말았다.

혈연?

내게 있어 피가 섞인 관계보다 중요한 건 바로 피를 같이 흘렸던 강릉 사람들이다.

“······운 좋게 할아버지 유산 하나 물려받았다고 기세등등하구나. 네가 이러시는 거 알면 우리 아버지가 참 좋아하시겠어.”

더 이상 비빌 틈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고모는 이죽거리며 무리한 도발을 해왔다.

그 태도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동석하고 있던 동해 측 수뇌부들이 경악했다.

“시, 시장님!”

아니, 이 여자가 미쳤나. 강릉의 전력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도 이런 도발을 한다고?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닌지 그들은 필사적으로 고모를 말리며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

“······정말 미쳤군.”

“저희도 그만하시죠, 시장님.”

하지만 한 번 뱉은 말은 이미 엎어진 물과 같아 절대 주워 담을 수 없다.

김춘식 회장이 가장 먼저 불쾌감을 표했고 태식 씨는 아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불과 5분 만에 파탄 나 버린 분위기.

웃음도 안 나온다. 이미 정도를 넘어선 무례에 나는 그냥 깔끔하게 마음을 접었다.

“너! 너, 당장 와서 앉아! 내가 네 아버지한테 해준 게 얼마인데! 이 은혜도 모르는 새끼가! 제 아빠를 꼭 빼닮아서는······!”

“고모.”

내가 서늘한 목소리로 경고하자 일행들은 기다렸다는 듯 권총 위로 손을 올린다.

그러자 시끄러운 고성이 오가던 상대측에선 꿀 먹은 벙어리처럼 침묵이 흘렀다.

“제가 원래 경우가 없는 인간입니다.”

“뭐······?”

“근데 앞으로는 한 번 따져봐야겠네요.”

이 이후로는 혈육이고 뭐고 없다.

내가 경고를 끝으로 자리에서 돌아서자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고모는 미쳐 날뛰었다.

“비켜! 이거 놓으라고!”

“시장님 제발!”

아마 앞을 막아선 보좌진들이 아니었다면 꼴에 또 달려들어 명을 자초했을 것이다.

터벅, 터벅, 터벅.

돼지 울음소리 같은 고성을 뒤로하고 호텔을 나서니 쓸데없이 날씨가 좋다.

나는 김씨 일가와 함께 아름다운 정동진 바다가 훤히 보이는 조각 공원으로 걸어갔다.

“크흠!”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김춘식 회장이 헛기침과 함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선 이런 일은 흠도 아니지. 저런 막말 귀 기울여 듣지 마.”

“괜히 폐 끼친 것 같아서요.”

“주변 지역과 다툼은 원래 흔한 일입니다, 시장님. 이 정도면 괜찮게 끝난 거예요.”

KLF나 기무사 사건 때야 그들이 선제공격을 가했기에 당연히 대응해야 했었다.

하지만 이번 일 같은 경우는 공이 아닌 사적으로 분란이 생겨버리고 말았다.

앞으로 동해-삼척 동맹과는 불편한 이웃으로 고착될 확률이 굉장히 높을 터.

가뜩이나 전투 인원도 부족한데 정동진까지 경계선을 확장해야 할 상황이다.

현재 여력으로 가능할까.

아무래도 잠시 미뤄뒀던 전투 조직 개편을 조금 서두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오늘 안건 하나만 올립시다.”

그렇게 나는 취임 후 올리는 첫 번째 안건에 대대적인 조직 개편을 포함했다.

이제 슬슬 번데기에서 탈피할 차례다.

* * *

현재 강릉 요새 연합의 전투 인력은 크게 두 가지 무리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순찰대 일과 그 일대 방위를 담당하기 시작한 우리 희망 요새 자경단원들과

또 하나는 웬만한 전투, 대치 상황에 무조건 투입되는 강릉항 대원들이다.

물론 그동안 굵직한 전투에 동원된 예비 인력은 현재 민간인이니 제외하고·········.

전체 인원, 과거 경력, 그동안 치러온 전투를 쭉 훑어본 나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대대적인 인원 확충이 있을 겁니다.”

현재 강릉이 전체를 커버하려면 지금보다 두 배는 더 많은 인원이 필요했다.

그 말인즉슨 그동안 한두 명씩 아는 사람 위주로 지원자를 받던 방식으로 버리고 본격적인 모집을 할 필요가 있었다.

예상치 못한 폭탄 발언에 임시로 마련한 회의실 내부는 금세 시끄럽게 변했다.

“난민 출신도 받나요?”

“그렇게 하나하나 다 따져서 뽑으면 진짜 한세월 걸릴 겁니다. 출신 상관없이 지원자 인성이랑 실력만 보고 뽑으세요.”

“강릉항 대원들은 어떻게 됩니까?”

“새로운 이름을 달고 특수임무 쪽으로 뺄 겁니다. 인원은 앞으로 기초 훈련소에서 성적이 좋은 이들만 추려 충원하도록 하죠.”

용역 사무실도 아니고 시답지 않은 일까지 대원들을 데리고 가 고생시켰다.

앞으로 괜찮은 이름 하나 지어준 뒤 실력에 걸맞은 임무에 투입할 생각이었다.

상식 아저씨가 손을 번쩍 들었다.

“동장! 희망 자경단도 포함이야?”

“자경단은 전원 순찰대로 편입됩니다. 강릉 내부 치안을 담당하신다고 생각하면 돼요.”

친화력 끝판왕 상식 아저씨가 이끄는 자경단답게 그동안 실적이 장난 아니다.

주민 간 소통 능력이 중요한 만큼 순찰 임무를 맡기면 그 누구보다 잘 해낼 것이다.

아까부터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춘식 회장이 돋보기안경을 벗었다.

“이러면 정작 본대가 없지 않나?”

“예, 아직은 없습니다.”

내가 갑자기 입꼬리를 올리자 평소 업무에 치여 살던 직원들은 입을 헤 벌렸다.

설마? 아니지?

“강릉시 방위군을 창설하겠습니다.”

언제까지 통일되지 않은 이름으로 부르며 주먹구구식으로 운용할 것인가.

개편하기로 마음먹었으면 진짜 방위군 하나 정도는 만들어야 하는 법이다.

“아아······!”

직원들이 절규한다. 눈그늘이 짙어진 혜지 씨는 꺄아악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하지만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즐겁게 손뼉을 짝짝 치며 앞으로 계획을 설명했다.

“고등학교 세 곳을 선정해서 기초 훈련소를 만들 겁니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총 5주로 하죠. 스읍, 근데 병과는 어쩌죠? 혹시 좋은 생각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시, 시장님. 일단 진정하시죠.”

“아! 박격포나 견인포 운용 인원은 훈련 기간을 더 추가하면 되겠네. 지난번 성산리 전투 때 활약한 분들 명단 좀 가지고 와보세요. 직접 입대하시거나 조교를······.”

“시장님!”

왜! 나 하나 시장 자리에 앉혀 놓고 본인들은 이래저래 놀 수 있을 줄 알았나 보지?

어림도 없다. 부하들이 제일 싫어했던 FM이 뭔지를 어김없이 보여줄 생각이다.

나는 그날 밤, 미운 직장 상사가 되어 회식까지 따라가는 만행을 저질러 줬다.

와!

즐겁다!

* * *

“요령 부리지 마, 이 새끼야!”

퍽!

한 우락부락한 남성이 겨우 자기 허벅지까지 밖에 오지 않는 아이를 걷어찼다.

아이는 당연히 들고 있던 무거운 짐을 떨어트리며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평소 먹은 것이 없어 비명을 지를 힘조차 남아있지 않은 꼬질꼬질한 아이.

하지만 주변 그 누구도 우락부락한 남자를 제지하거나 일으켜 주는 사람은 없었다.

“- - - - - - -.”

왜냐면 그들 또한 같은 모습, 같은 짐을 옮기는 같은 노예 신세였기 때문이다.

“쯧, 거지 같은 새끼들.”

퉤!

작게 혀를 찬 남성은 가래가 섞인 침을 뱉은 뒤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아이는 그제야 몸을 파르르 떨며 욱신욱신 아려오는 복부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사박, 사박, 사박.

“괜찮니?”

그런데 그 순간 근처에 숨어 있던 한 갈색 머리 여성이 아이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움직이지 못하는 아이를 끌어안은 뒤 허름한 창고로 후다닥 도망쳤다.

“수아 씨 여기야!”

“빨리, 빨리!”

그 안에는 마찬가지로 거지꼴인 사람들이 갈색 머리 여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허억, 헉.”

재빨리 안으로 들어온 여성, 아니 박수아는 데려온 아이를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무리 중 한 남성이 다가와 붉은 멍이 생긴 아이의 복부를 어루만졌다.

“개새끼들! 이게 사람이 할 짓이야!”

“흑, 아직 열 살도 안 된 애한테······.”

세상이 정상이었다면 뉴스 특보를 탈 만행이 공사 현장 이곳저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점차 그 수위를 높여가는 폭정 앞에 삼척 사람들은 점차 분노하기 시작했다.

“장기 출혈이 있는 거 같습니다. 지금 빨리 병원으로 옮겨서 수술받아야 해요.”

수술. 그 단어가 남성의 입에서 나오자 아이를 걱정하던 사람들은 절망한다.

부상은 곧 죽음과 직결되는 이 삼척 공사 현장에서 병원 치료란 오직 저기 동해 주민들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이었으니까.

“······제가 몰래 데리고 나가볼게요.”

하지만 이중 유일하게 동해 병원으로 데려갈 수 있는 사람이 딱 한 명 있다.

바로 아이를 구해온 장본인인 박수아.

동해 시장인 박춘자의 친딸임과 동시에 어머니와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이었다.

“가능하겠어요?”

“노력해볼게요.”

무려 햇수로만 3년째 삼척 사람들을 돕고 밖으로 빼돌리는 일을 하는 그녀.

처음에는 경계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박수아를 진심으로 따르며 협력하고 있었다.

“이봐! 다들 여기 있어!?”

그 순간 저 멀리서 뛰어온 한 중년 남성이 숨을 헐떡이며 창고 안으로 들어왔다.

“쉿! 조용히 다녀 김 씨!”

“지금 바쁜 거 안 보여?”

그리고 쏟아지는 질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들은 소식을 알려줬다.

“지, 지금 바쁜 게 문제가 아니야! 강릉이 이번에 정동진에 병력을 배치했다잖아!”

“강릉? 그쪽에서 왜?”

“동해 시장이랑 친척 관계라며?”

남성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쿵쿵 쳤다.

“다들 소문 좀 듣고 살아! 거기 강릉 시장이 그 유명한 박범석이야! 전쟁영웅! 강릉의 요새 상속자! 아니, 이런 것도 몰라?”

소문은 와전되고 왜곡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남진하는 KLF를 막아내고 군락을 처리한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 사실이다.

박범석 본인이 모르는 사이 그는 이미 공명정대하고 자비로운 지도자가 되어있었다.

“동해랑 전쟁이라도 하려나?”

“그럼 우리한테는 희소식이네!”

매일 이어지는 절망스러운 나날에 한낱 희망조차 품지 못했던 삼척 사람들이다.

그들은 본인이 믿고 싶은 대로 상황을 받아들이며 얼굴에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물론 그들과는 달리 아이를 품에 안은 박수아는 복잡한 표정으로 침묵하고 있었다.

“근데 박범석이라는 사람이 동해 시장 조카면 우리 수아 씨랑도 사촌지간 아니야?”

순간 시선이 쏠린다.

사람들은 반쯤 기대가 서린 얼굴로 박수아가 입을 열기를 기다려주었다.

“······네, 맞아요.”

이에 그녀는 순순히 사실을 인정하며 사막처럼 말라붙은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사촌 오빠예요.”

살면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사촌 오빠가 그 유망한 강릉에 시장으로 앉아있다.

이에 동경, 부끄러움, 기대감을 동시에 느낀 박수아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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