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스의 상속자 66화>
가끔은 이 미래일기가 나를 도우려는 건지 시험하려는지 헷갈릴 때가 있다.
거창해서 재수 없는 뉘앙스도 그렇고 문제만 툭 던지고 빠지는 태도도 그렇고,
일기 주인인 나까지 등장인물로 취급해 절대적 시점으로 내려다보는 느낌이다.
내가 주인공이 맞기는 하냐?
몇 대 더 때려줄까 하다가 이게 뭐 하는짓인가 싶어서 그냥 힘없이 앉았다.
‘그래도 얻을 정보는 다 얻었다.’
사실 이렇게 욕을 하긴 해도 녀석이 책을 덮어버리기 전에 일부 내용을 봤다.
그곳에는 분명 ‘대규모 감염체 사태 발발’이라는 중요 키워드가 쓰여있었다.
뭐, 나머지 내용이야 검열되지 않은 앞 내용을 보면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아마 대규모 감염체 사태는 동해나 삼척쪽에서 발발할 가능성이 매우 크겠지.
하지만 문제는 그 원인.
신의 천벌이라는 이름이 붙으려면 적어도 대규모 웨이브 정도는 돼야 할 텐데,
우리가 관찰하기로는 그 부근에서는 웨이브라 할 법한 감염체 무리가 없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혹시 내가 발견하지 못한 변수가 존재하는 걸까.
매번 찾아오는 위기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 없는 건 똑같았다.
똑똑!
덜컹, 끼이익.
“시장?”
그러자 마침 돌아오지 않는 나를 데리려 옥상으로 올라온 아저씨가 침묵을 깼다.
“닭죽 안 먹어? 다 식는다니까.”
“수저 좀 찾느라고요.”
나는 원래 목적이었던 수저를 챙겨 집까지 찾아온 아저씨와 함께 걸어 나왔다.
안개가 낀 듯 복잡한 머리와는 다르게 강릉 봄 날씨는 화창하기 짝이 없었다.
“저, 아저씨.”
“응?”
“혹시 저희 할아버지가 뭐 앞날을 읽는 혜안 같은 게 조금 있으셨습니까?”
편지에는 언급하지 않으셨지만, 저 미래일기도 분명 할아버지의 유산이다.
낡은 만년필이 여러 개 남아 있었던 걸 보면 할아버지도 일찍이 사용하셨을 것이다.
“으음.”
상식 아저씨는 마치 과거를 회상하듯 뒷머리를 긁적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을 하든 다 되는 분이셨지. 말마따나 우리 박 동장님 없으셨으면 아파트는 물론이고 이 강릉도 진즉 사라졌을 거여.”
“그 정도였어요?”
“욕심이 원체 없으셨던 분이셔서 그렇지 다들 강릉 시장으로 추대한다 뭐다 할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참, 우리 시장이 박 동장님을 빼다 닮은 거 같어.”
한참 과거를 회상하던 상식 아저씨는 기특하다는 듯 내 등을 툭툭 두드렸다.
새삼 아저씨의 얼굴 주름과 흰머리가 그간 겪어온 세월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근데 왜? 요즘 일이 뭐 잘 안되나?”
“아뇨, 그냥 궁금해서요.”
나 혼자만이 아니다.
할아버지는 이미 미래일기와 다투며 강릉을 죽는 그 순간까지 지키고 계셨다.
그런 상상을 하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불안하던 마음에 작은 확신이 생겼다.
“닭죽이나 먹으러 갈까요?”
“수아가 생각보다 잘 먹던디······.”
그날 저녁, 상식 아저씨는 씨암탉은 물론 아껴두었던 달걀까지 털어놔야 했다.
* * *
끼익, 쾅!
털썩!
인상을 찡그린 민병대 둘이 피떡이 된 사람 하나를 끌고 와 수용소에 처넣는다.
그리고 마치 더러운 것을 만졌다는 듯 손을 털며 두꺼운 수용소 문을 닫아버린다.
쾅!
“으, 으으······.”
얼마나 맞았는지 얼굴이 알아볼 수 없는 형태로 뭉개진 마지막 수용자.
문이 닫히기만을 기다렸던 삼척 수용자들은 우르르 몰려나와 그를 챙겼다.
“이봐요! 정신 좀 차려봐요!”
“여기 빨리 물 가져와!”
지난 사건 이후 동해 시장은 삼척 주민들을 전부 모아 수용소에 가둬두게 했다.
하지만 그중에는 탈출을 시도하기는커녕 집에만 있었던 사람들이 대다수였으며 삼척 주민이 아닌 동해 사람도 꽤 있었다.
사실상 탈주라는 죄는 명분일 뿐, 이성이라는 걸 상실해버린 동해 시장은 체제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을 잡아들이고 있었다.
“오늘만 몇 명 째야.”
“이러다가 서서 자야겠어.”
이 넓은 삼척 종합 운동장에는 강제로 끌려온 수용자들이 우글거리고 있다.
소문에 의하면 삼척 내부에만 이런 수용소가 두세 군데가 더 있다고 하는데,
도대체 후폭풍을 어쩌려고 이런 만행을 벌이는지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시체도 그냥 매장하고 있다며?”
“산 사람 죽은 사람 구분 안 하다잖아.”
마음 같아서는 그 마녀 년을 때려죽여 시장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싶지만,
약탈자 출신들인 민병대가 총을 독점하다시피 해 그것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언제까지 갇혀 지내야 하는 걸까.
그나마 서로 도우며 버텨오던 수용자들도 점점 표정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취익, 칙.
[아아, 2분 뒤 전체 소등합니다. 모든 수용자는 정해진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요즘은 전력조차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지 저녁 시간이 지나면 칼같이 소등한다.
지겨운 방송 소리에 인상을 찌푸린 수용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진다.
“으, 끄으으······.”
그런데 마지막으로 끌려온 수용자는 일어나지 못하고 갑자기 고통을 호소했다.
고열, 땀, 발작, 불길한 증세가 연달아 이어지며 끝내 입에는 하얀 거품을 물었다.
탁!
불이 꺼진다.
이를 발견하고 대처할 마지막 기회는 허무하게 사라져 버렸다.
수용자는 어둠이 깔린 바닥에서 버둥거리며 인간으로서 완전한 죽음을 맞이했다.
“끄르륵, 끅.”
그리고 곧 감염체로 되살아나 기괴한 울음소리와 함께 바닥을 기어갔다.
끼기긱, 끽.
산으로 도주하던 중, 감염체에 물렸다는사실을 알리지 않은 한 수용자의 만행.
그 만행은 수용소 전체 인구를 감염시켜버리는 대참사로 번지고 말았다.
* * *
매번 미래일기의 도움을 받으면서 힘들었던 점은 바로 나만 미래를 본다는 것이다.
이걸 솔직하게 말하자니 전쟁 초기, 판을 쳤던 사이비로 몰릴까 봐 걱정이고.
또 알리지 않으려니 혼자 힘으로는 또 한계가 있기에 움직이는 것에 제약이 있었다.
특히 이번 경우가 그랬다.
우리 강릉이야 정동진 방어선을 확충하고 병력을 더 동원하면 끝날 일이다.
하지만 초기 진압에 나서줘야 할 동해는.
‘근처에서 감염체 움직임을 포착. 대규모 감염 사태가 걱정되오니 제발 주의 바람.’
‘오만방자한 패륜아 후레자식, 혈육을 외면한 대가는 언젠가 반드시 치르게 될 것!’
와 같은 이북 아나운서 식 도발을 해오며 우리 경고를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었다.
아, 시발 고모!
나는 목 끝까지 차오르는 욕설을 애써 참으려 정동진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미래일기의 예언은 절대적이다.
대규모 감염체 사태가 발발한다면 우리 강릉도 그 준비를 해둬야 했다.
부르르릉!
끼익, 쿵!
강릉항에서 투입된 중장비들이 흙을 파고 또 파내 기다란 구덩이를 만든다.
그 뒤에선 인부들이 철책과 바리케이드를 설치하며 방어선을 견고하게 보강한다.
이젠 다들 방어선 구축에 도가 텄구나.
나는 일사불란하게 공사가 이뤄지고 있는 현장을 태식 씨와 함께 시찰했다.
“방어선이 길어지는군요.”
“그나마 최대한 줄인 게 이겁니다. 여기서 더 줄이려면 아예 뒤로 빼야 해요.”
지리적 이점을 이용했던 성산리 전투 때와는 다르게 지형이 평탄하고 넓다.
이렇게 되면 방어선은 자연스럽게 길어지고 화력을 집중적으로 투사할 수 없게 된다.
“그럴 필요 있습니까? 아예 팍 줄이세요.”
“그럼 공백이 생길 텐데.”
“군락을 상대하는 게 아니잖아요.”
“아!”
군락의 지배를 받지 않은 감염체들은 소리를 맹목적으로 쫓는 습성이 있다.
방어선을 넓힐 것 없이 소음을 유발하는 것으로 놈들을 유인하면 될 일이었다.
“이것 참······.”
“하하, 생소하죠?”
그동안 재앙급 적들을 상대하느라 난이도 체감이 확 낮아져 버리고 말았다.
원래 이렇게 쉬운 거였나?
그런데 그 순간 약간 버터를 첨가한 어색한 한국어가 저 앞에서 들려왔다.
“여긴 왜 뾰족하게 만드는 거죠?”
“이러면 놈들이 몸이 걸려서 움직이지 못합니다. 죽이면 쌓이고, 죽이면 쌓이는 식으로 감염체가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 거죠.”
뭐야, 저 여자가 여기 왜 있어?
분명 항구에 있어야 할 CIA 여성이 가벼운 차림으로 작업 인부와 대화하고 있었다.
“당신 뭡니까?”
“어? 반가워요, 범석 씨.”
아니, 외지인이 방어선과 같은 중요 구역을 이렇게 자유롭게 돌아다녀도 되는 거야.
내가 미간을 찡그리며 노려보자 어쩔 줄 몰라 하던 번영회 직원이 식은땀을 흘렸다.
“허, 허락받으신 거 아니었습니까? 시장님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다고 하셔서······!”
그러면 그렇지.
이 뻔뻔한 여자가 아주 거짓말을 천연덕스럽게 해서 큰일이네.
나는 거의 울기 직전인 직원을 돌려보낸 뒤 CIA 여성을 따로 불러 뒤로 데려왔다.
“안 돌아갑니까? 제임스는요?”
“이미 배 떠났어요. 저는 상부에서 대답을 듣고 오라고 해서 여기 혼자 남았죠.”
“아니, 그런 건!”
생각해보니 전화기를 안 받았네.
빙긋 웃은 그녀가 내게 대뜸 손을 내밀었다.
“엠마라고 부르세요.”
“위성 전화기나 주십시오.”
사실 그녀가 처음 제안해올 때부터 그래야겠다고 반쯤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굳이 다른 말 하는 것 없이 나는 엠마가 내미는 위성 전화기를 받아 챙겼다.
“이제 가세요.”
“친구끼리 너무 매정한 거 아니에요?”
“여기 바쁘다니까요.”
“다음 배편이 일주일 뒤에 올 거예요. 그때까지만 좀 참관할 수 없을까요? 네?”
진짜 이마에 딱밤 한 대 때리고 싶다.
하지만 이 여자 뒤에 버티고 있는 미연방을 생각하면 또 그럴 수도 없다.
“조용히 다니세요. 직원들 괴롭히지 말고.”
“네!”
졸지에 동행이 생긴 나는 다시 철책 쪽으로 올라가 나머지 현장을 살폈다.
엠마는 그런 내 뒤를 바짝 따라오며 연신 미국식 감탄을 터트렸다.
“노하우가 대단하네요!”
“이런 건 미국도 다 하지 않습니까?”
“대응 방법이 조금 달라요. 저희는 보통 이런 상황이면 폭격기를 부르는 편이거든요.”
아아, 그러시군요.
폭격기를 동원해주는 미연방 소속이라 정말 부럽습니다.
나는 손을 비행기 모양으로 만들어 투투투 거리는 엠마를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효율이 높지 않았죠.”
하지만 그녀는 곧 얼굴에 장난기를 싹 지우며 진지한 목소리로 뒤따라왔다.
“우리는 적이 인간이 아니라 감염체라는걸 간과했어요. 폭격기 한 대 띄울 돈으로 155mm 견인포를 쏘는 게 더 효율적이라는걸 좀 늦게 알았어요. 안 그런가요?”
“그걸 왜 저한테 묻습니까?”
“당신이 올린 보고를 기반으로 만들어진게 감염체전 교리였으니까요. 서울 요새가 현재까지 전선을 유지하는 이유가 뭐겠어요.”
그녀가 목소리를 낮춘다.
빙글빙글 웃던 실눈에는 묘한 감정이 맴돌고 있었다.
“현재 상부는 체질 변화가 필요하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어요. 하지만 지난 10년 이후로 늘 인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죠.”
“찾아온 용건이 그거였습니까?”
“거짓말은 하지 않을게요. 다만, 미연방은 친구를 공짜로 부려 먹을 생각은 없어요.”
엠마는 다시 빙긋 웃었다.
그리고 이제 끝이 보이는 방어선을 앞둔 채 제안했다.
“서울 요새는 저희가 치료제만 개발했다는 걸로 알고 있더군요. 사실 2년 전에 EU와 공동으로 백신 개발도 진행 중이에요.”
머리에 무언가를 얻어맞은 기분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실용화는······.”
“긍정적이에요. 그것도 아주 많이.”
치료제를 개발한 전적이 있으니 백신 개발이라는 말도 허언이 아닐 것이다.
엠마는 연락처가 적힌 명함 한 장을 내 앞주머니에 끼우며 조용히 속삭였다.
“나쁜 제안은 아니잖아요? 강릉을 위하신다면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언제 이런 제안을 했냐는 듯 또 푼수 같은 얼굴로 방어선을 돌아다녔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이틀째 되는 날 방어선 완공과 함께 보고가 전해졌다.
그 보고는 다름 아닌 동해 쪽 민병대가 줄어들기 시작했다는 불길한 징조였다.
확실하다.
그들이 초기 진압에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