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스의 상속자 70화>
사각, 사각, 사각.
[모두가 은연중에 불안했다. 혹시 혈육이라는 이유로 자비를 베풀지 않을까, 또 법이라는 이름을 빌려 징역형에 취하는 건 않을까. 다들 아닌 척 고개를 돌리면서도 이번 처분에 대해 침묵이라는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그’는 총알 한 발로 모든 혼란을 종식했다. 혈육이 혈육을 죽인다. 상대에게도, 자신에게도 죄를 묻는 무거운 형별 앞에 사람들은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야말로 피웅덩이 위에 세울 근엄한 정의였다.]
[추위가 완전히 가셨다. 봄도 만연하다. 수많은 난민과 커다란 영토를 확보한 강릉은 이제 영동 밖으로 그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축이 뒤바뀌어 가는 한반도 정세속에 ‘그’는 친구의 경고를 잊지 않았다.]
사각, 사각, 사각.
[강릉이 지속해서 물자를 공급해 줌에 따라 서울 요새도 점차 식량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군부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은 여전히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거리로 나오는 시민들은 점차 늘어났다.]
[시위는 격화되었다. 하루에도 수십 명씩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군부와 시민들 간 갈등은 극에 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혼란은 분노한 서울 시민들을 하나로 엮는 새로운 지도자의 탄생을 알렸다.]
[생존을 위해 포기해야 했던 신념의 가치가 과연 빵 하나보다 못할까? 인간은 자유롭기 위해 태어났고 자유는 인간이 죽기 마땅한 가치이다. ‘그녀'의 외침에 시민들은 군부를 몰아내기 위해 하나로 뭉쳤다.]
펄럭.
파견 직원이 가져다준 어제 자 서울 요새 신문을 펼쳐 머리기사를 살펴본다.
한참 시위가 격화되는 것을 보여주듯 신문은 온통 특보로 도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당연히 책이 ‘그녀’라고 칭했던 한 여성의 사진도 포함되어 있었다.
‘생각보다 어리네?’
시민 지도자라고 하길래 나이 좀 있는 사람인가 싶었더니 이제 겨우 33살이다.
아마 쓰고 있던 뿔테 안경을 벗으면 20대 중후반으로 봐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아직 앳돼 보이는 얼굴과는 다르게 그 밑에 쓰인 이력은 무척 화려했다.
‘이름 이솔하.’
일단 머리가 대단히 좋으신지 박사 학위는 기본에 온갖 경력이 빼곡하게 쓰여있다.
거기다 전쟁 막바지에 보충 인원으로 참전해 작은 훈장을 하나 타기도 했다.
물론 여기까지는 군부에 들어가는 엘리트들 커리어와는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이러한 단순 경력 때문이 아니었다.
'남양주 학살 사건의 생존자.'
전쟁 초기 남양주에선 군부의 치명적인 실수로 수십만 명이 사망하는 참극이 있었다.
이솔하는 그중 몇 없는 생존자 중 하나였고 거기서 모든 가족과 친척을 잃었다.
그렇게 서울 요새에서 쓰레기를 주워 먹으며 살던 고아로 유년 시절을 보내다가,
이내 피땀이 어린 노력으로 학교에 입학해 무려 박사 학위까지 취득한 이솔하.
밑바닥에서부터 여기까지 올라온 과정이 얼마나 눈물겨운지 나조차도 감탄이 나왔다.
하긴 이 정도는 돼야지 김태하 소장이 쿠데타가 아닌 문민 통제를 생각한 거겠지.
나는 여전히 부재중인 김태하 소장과 송지영을 떠올리며 전화기를 만지작거렸다.
다들 바쁜 거겠지?
제발 무소식이 희소식이기를 빌며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는 문자 하나를 남겼다.
똑똑.
“시장님.”
그 순간 잠시 파견을 나가 있던 차지철이 조심스럽게 할아버지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내 건강검진 기록이 담긴 서류를 들고 다가와 조용히 맞은편 의자에 착석했다.
“어떻습니까?”
“몸은 아무 이상 없습니다.”
“음? 그럼 귀는 왜······.”
“정신적 충격이 원인입니다.”
그날 동해 시청으로 파견을 갔다 온 이후 이명이 계속되고 한쪽 귀가 먹먹하다.
처음에는 총성 때문인가 싶어 검사받았는데 원인이 정신적 충격 때문이란다.
내가 믿지 못하는 분위기이자 차지철은 유리잔 하나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뒀다.
“쥐어보세요.”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상반신을 기울여 오른손으로 유리잔을 잡으려고 했다.
탁!
하지만 이상하게도 초점이 맞지 않아 두번을 더 시도해야 유리잔을 쥘 수 있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나는 갑자기 찾아온 이명에 고통을 호소하며 들고 있던 유리잔을 내려놨다.
“이제 믿으시겠습니까?”
호흡이 거칠어졌다.
눈으로 본 증세 앞에 나는 힘 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이에 한숨을 푹 내쉰 차지철은 조용히 내 앞으로 다가와 동공 상태를 확인한다.
딱, 딱.
그리고 양쪽 귀 옆으로 핑거 스냅을 몇 번치며 미세한 신경 반응을 살펴보았다.
그의 표정이 좋지 않다.
차지철은 내 어깨를 꾹 쥐며 솔직한 소견을 내놓았다.
“당장 입원하셔야 합니다.”
입원이라고?
당장 내일부터가 동해와 삼척 건으로 중요 회의를 하기로 한 날이다.
사실상 모든 결정이 시장 권한으로 이뤄지는데 내가 빠지면 어떻게 되겠는가.
나는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대답을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시장님, 제발······.”
하지만 더 이상 넘어가면 안 된다는 차지철의 애원 앞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졸지에 단 한 번도 받아본 기억이 없는 휴가를 가장 바쁜 시기에 신청하게 됐다.
* * *
병원에서 귀빈을 모시기 위해 만들어둔 VIP 병실에 홀로 입원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형평성 문제로 다인실로 가려고 했지만, 다들 불편해한다나 뭐라나.
직원들 입장을 모르는 건 아니었기에 그냥 군소리 없이 짐을 챙겨 여기로 왔다.
뭐, 사실 말은 그렇게 해도 시설과 대우가 좋다는 건 부정 못 할 사실이다.
내가 살다 살다 가습기에 전신 안마기까지 있는 병실에 입원해본 건 처음이니까.
그래도 틈날 때마다 정신 상담도 받고 제대로 된 약물 치료도 꾸준히 받고 있었다.
펄럭.
사각, 사각.
물론 그 외 시간은 드론을 통해 몰래 들여온 서류를 결재하는 데 쓰고 있다.
나는 오늘도 윙윙이 2호가 배달해준 보고서를 보며 강릉 상황을 확인했다.
‘순조롭다.’
모집이 끝나자마자 기초 훈련에 들어간 방위군이 벌써 3주 차 접어들고 있다.
들려오는 보고에 의하면 그동안 총기 사고나 사상자 없이 잘 훈련 중이라 하는데.
부디 앞으로 남은 훈련도 무사히 수료해 내 손에 굴림 당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많이도 모으셨네.’
그 와중에 동해에서는 고모가 숨겨놓은 비밀 금고가 발견되어 난리라고 한다.
그동안 주민들을 쥐어짠 물자가 어디로 다 갔나 해더니 모조리 본인이 착복했던 모양.
비밀 금고에는 금, 은, 보석은 물론 온갖 미술품과 문화재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기왕 모으실 거 총알이나 잔뜩 쟁여놓으시지, 먹지도 못하는 거에 집착하셨을까.
그래도 썩어도 준치라고 어디 서울 갑부 양반들한테 싸게 팔아나 먹어야겠다.
나는 고모가 착복한 재산을 전부 처분한다는 사인을 끝으로 펜을 내려놨다.
똑똑.
그러자 한동안 병문안으로 바쁘던 병실문이 열리며 반가운 얼굴이 들어왔다.
“사장님!”
“혜지 씨?”
그동안 업무가 워낙 바빠 혜지 씨와는 한동안 얼굴도 보지 못하고 살았다.
그녀는 품에 꽃과 과일을 한 아름 안은 채 히히 웃으며 병상 옆으로 다가왔다.
삭막하던 병실에 봄꽃을 잔뜩 가져다 놓으니 금세 분위기가 화사해졌다.
“이 꽃은 보육원에서 보낸 거고, 과일은 총포상 할머님과 박강수 씨가 보냈어요.”
“두 분은 잘 계시죠?”
“네. 건강하게 잘 지내세요. 요즘 얼굴 통 못 봐서 많이 아쉬우신가 봐요.”
“조만간 강릉항으로 가야겠네요.”
할머님은 여전히 정정하시고 박강수 씨도 캐러밴 사업이 잘되는 모양이다.
그래도 한때 신세 졌던 분들인데 그동안 많이 소홀했던 감이 있었다.
아삭아삭.
꿀처럼 달다.
나는 혜지 씨가 깎아준 봄과일을 먹으며 편안하게 몸을 기댔다.
“아, 맞다. 사장님.”
“네?”
“저 이번에 묵호항으로 발령 났어요. 아마 승진해서 총관리자로 가게 될 것 같아요.”
뭐? 한참 말단에서 응애 거리던 혜지 씨가 묵호항 관리자로 발령 났다고?
나는 뿜을 뻔한 과일 조각을 황급히 삼키며 히히 웃고 있는 혜지 씨에게 물었다.
“진짜요?”
“네! 진짜요!”
앞으로 무역항으로 쓰일 동해항과 더불어 그 중요성이 더욱 커질 묵호항이다.
거기 총관리자로 발령이 났다는 건 번영회에서도 그녀의 실력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짝!
여태 노력해 온 보람이 있다.
나는 혜지씨와 손뼉을 마주치며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신나서 무용담을 펼치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앞으로 더 노력해서 시청까지 갈 거예요.”
"엥? 왜요.”
“그래야 사장님 옆에서 일하죠. 제가 나중에 전담해서 모실 테니까, 꼭 기다리세요!”
태식 씨 자리를 노리다니 포부가 엄청나다.
하지만 왠지 혜지 씨라면 가능할 것 같아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여줬다.
“이번에도 번영회 직원들 새로 뽑았는데 다 병아리 같은 거 있죠? 그래서 제가 선배로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교육을······.”
편안한 자세로 누워 혜지 씨가 조곤조곤 떠드는 수다를 옆에서 경청했다.
짜증 나는 일에는 같이 짜증 내고 좋은 일에는 같이 웃으면서 공감해준다.
그렇게 얼마나 수다를 떨었을까.
자세를 바꿔 자리에 편안하게 눕자 갑자기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후우.
몸이 편안하다.
정신이 몽롱하다.
어느새 말소리는 작아지고 숨이 곱게 쉬어진다.
약물도, 상담 치료도 어쩌지 못했던 이명과 불안은 어느새 사라진 지 오래였다.
“사장님?”
몸이 가벼워지는 부유감을 느끼며 점차 몰려오는 수마에 모든 것을 맡긴다.
이마에 쪽하고 닿는 축축한 감촉을 마지막으로 나는 완전히 잠에 빠져들었다.
“편히 쉬세요.”
이루 말할 수 없는 편안한 숙면이었다.
* * *
우우우우우우우웅!
경태 녀석이 코골이가 심한 편이라 공동숙소를 사용할 때도 혼자 독방을 썼다.
하지만 가끔 자신도 모르는 잠버릇 때문에 가끔 공동 숙소로 들어오고는 하는데,
그때가 되면 우리는 물론 옆방 사람들까지 잠에서 깨어 귀를 틀어막아야 했다.
우우우우우우우웅!
아씨, 경태야 또 왔니?
잠에서 깨어 뒤척인 나는 소리가 들리는 곳을 발길질했다.
툭!
하지만 그곳에는 경태가 아닌 나무 탁상하나가 발에 치여 흔들리고 있었다.
잠깐, 여기 지금 병실인데?
그제야 제정신이 돌아온 나는 진동이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우우우우웅!
전화기?
전화가 왔다.
나는 우당탕 침대에서 내려와 위성 전화기를 올려둔 탁상 위로 열심히 기어갔다.
탁!
‘김태하 소장.’
며칠째 답장이 없던 김태하 소장이 새벽3시라는 늦은 시간에 연락을 해왔다.
달칵.
“소장님?”
[혹시 통화 괜찮나?]
“이 늦은 시간에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아니, 그것보다 왜 답장이 없으셨어요.”
[미안하네. 그럴 겨를이 없었어.]
“무슨 일 있습니까?”
[지난번에 자네가 알려준 군락 건. 이번에 특임대가 직접 파견 가게 됐었어.]
워낙 작전 시간이 길다 보니 특임대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건 흔한 일이다.
다만, 송지영이나 문 상사가 아닌 김태하 소장이 직접 연락을 해왔다는 것은 설마.
[6시간 전에 소식이 끊겼네.]
쾅!
나는 벽을 쾅 치며 이마를 짚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일이 발생했다.
“병력 파견 안 하고 뭐 합니까? 6시간이나 지나도록 뭐 하고 계셨어요!”
[서울 상황이 어떤지는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여기서 병력을 빼면 대통령이 먼저 움직일 거야. 놈이라면 사람들을 다 죽여서라도 그 권력을 유지하려 들 게 뻔해.]
“그럼 이대로 내버려 두자는 소립니까!”
내 격한 반응에 김태하 소장 또한 겨우 잡고 있던 평정심이 무너져 내렸다.
이미 마음속으로 수백 번은 자책한 김태하 소장이 흔들리는 목소리로 부탁했다.
[내 실책이야. 작전을 허락하지 말았어야 했어. 하지만 그런 실수 한 번 때문에 특임대 전체를 죽일 수는 없잖나. 단순 정찰만이라도 좋네. 한 번만, 제발 한 번만 도와주게.]
여기서 움직이면 사람들이 죽는다.
그렇다고 움직이지 않으면 대원 전원이 죽는다.
김태하 소장에게 있어 모두를 구할 마지막 동아줄은 오직 나 하나뿐이었다.
“지원은요.”
[휴가 갔었던 팀 하나가 남아있어. 그들 모두 가겠다고 자원했네. 후속 지원은 정보사가 파견 인원들을 불러 모으고 있으니, 아마 24시간 내로 지원 갈 거야.]
24시간. 골든 타임을 넘은 시간이다.
그전에 누군가가 가서 도움을 줘야 한다.
나는 이젠 분신이나 다름없는 군번줄을 손에 꼭 움켜쥐며 힘없이 침대 위에 앉았다.
“마지막 위치 전송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