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스의 상속자 75화>
현장에서 박범석을 발견했을 당시 이미 심정지가 온 위급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베테랑 의무병은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 CPR을 계속해서 이어나갔고,
김태하 소장이 급파한 헬리콥터에 탑승해 서울대 병원으로 급히 후송되었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를 보며 표정을 굳히고만, 병원 의료진들.
수많은 고비를 넘기는 대수술 끝에 박범석은 어젯밤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하지만 점점 좋아지는 경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틀째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끼이익.
한참 병원을 돌아다니던 김가은은 중환자실 앞 복도 의자에서 이경태를 발견했다.
그리고 곧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이경태 옆으로 다가가 함께 쭈그려 앉았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
“네 탓 아니라고 했잖아.”
당시 둥지 내부 상황은 그 누구 하나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급박했다.
그만큼 대원들은 이경태를 탓하기보단 미안하다는 말로 대신 위로를 전해주었다.
하지만 녀석을 괴롭히는 건 타인의 시선이 아닌 바로 스스로가 품고 있는 죄책감.
손을 놓쳤던, 박범석이 떨어졌던 그 당시 기억은 이경태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하아.
역시나 대답이 없다.
벌써 이틀째 아무것도 안 먹어 입술이 마른 게 보이는 데 말이다.
김가은 강제로 물을 먹일까 하다가 이내 포기하고 들고 온 종이컵을 내려놓았다.
삐 - - 삐 - -삐.
유리 너머 중환자실에는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박범석이 마치 죽은 사람처럼 누워있다.
무심코 그 모습을 바라본 김가은은 곧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도······.”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고성이 오가던 현장, 수시로 멈추던 심장과 꾹꾹 손으로 짜야 했던 피 묻은 혈액 팩,
1분이 1시간처럼 느껴졌고 머리에는 오직 죽음이라는 불길한 생각만이 들었다.
“나도 힘들단 말이야.”
잘 버텨오던 김가은은 결국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동안 수많은 절망과 위험에도 버텨오던 그 둘은 오늘 이 자리에서 무너졌다.
든든한 멘토이자 버팀목이었던 박범석의 공백은 그만큼 많은 이들을 상실케 했다.
쿠르르릉!
그 순간 천장이 흔들렸다.
가까운 곳에 포탄이 떨어진 모양인데 건물 전체가 흔들리는 것이 장난이 아니다.
덜컹!
복도 문이 다급히 열리며 이미 무장을 끝낸 송지영 중위가 그 둘을 불러냈다.
“둘 다 준비해요! 바로 떠날 거예요!”
군 내부에서 발발한 내전의 불씨가 점점 서울 요새 전역으로 번져가고 있다.
이에 대원들이 있는 서울대 병원도 언제 포격을 당할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
현 시간부로 강릉 특전대, 서울 특임대, 치료 중인 모든 인원을 경기도로 후송한다.
인력 하나가 간절한 상황에서 김가은과 이경태가 낙오되면 무척 곤란하다.
꿀꺽, 꿀꺽.
“어······!”
본인도 그걸 알고 있는지 이경태는 김가은이 가져온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가자.”
“으응.”
그리고 언제 넋을 놓고 있었냐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임시 막사로 복귀했다.
펄럭!
막사 분위기가 살벌하다.
총을 챙기는 대원들의 눈빛은 당장이라도 사람을 찢어 죽일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합류한 이경태와 김가은은 차가운 눈으로 장비를 챙겼다.
“······이따 뵐게요.”
잠시 호위를 걱정했던 송지영 중위는 그 모습에 안심하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혹여나 경기도로 가는 길, 그들을 건드는 미친놈들이 없기를 빌면서 말이다.
* * *
대통령이 사망했다.
김태하 소장은 공식적으로 자살이라고 발표했지만, 기무사는 당연히 이에 불복하며 소속 파벌과 함께 즉각 조치에 나섰다.
서로 협상할 마음은 애초에 없었던 양측은 당연히 군을 전진 배치했고,
서로를 향한 무자비 포격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서울 내전이 발발했다.
“이쪽입니다, 사령관님.”
하지만 김태하 소장이 가장 처음 소화한 일정은 한 인물과 접선하는 일이었다.
그는 부하의 안내를 따라 오직 소수만이 알고 있는 벙커 안으로 조용히 입장했다.
덜컹!
이솔하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김태하 소장을 보자마자 빙긋 웃으며 일어났다.
“김태하 사령관님?”
“으음, 맞네.”
“반가워요. 전화상으로만 연락드리기 조금 그랬는데, 직접 뵈니 마음이 놓이네요.”
되도록 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군인이고 그녀는 정치인이나 마찬가지이니까.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현재 이솔하와의 공조는 꼭 필요한 일이었다.
한동안 불편한 침묵이 오간다.
빙글빙글 가만히 웃고만 있던 이솔하는 결국 자신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지난번 부탁하신 내용은 내일 오전까지 전달될 거예요. 이 정도면 충분할까요?”
“상당히 빠르군.”
“저를 좋게 봐주시는 분들이 많으셔서요.항상 감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군부와 시민 간 갈등이 깊어지는 사이 이솔하는 정말 다방면으로 인맥을 만들어놨다.
그 덕분에 주요 언론사는 연신 김태하 소장을 옹호하는 기사를 써 내려갔고,
평소 군부에 불만이 있던 생산 공장들은 비밀리에 물자 지원을 약속받았다.
하지만 이 모든 게 공짜는 아니다.
그녀가 호의를 베푼 만큼 김태하 소장 측도 그에 대한 마땅한 성의를 보여야 했다.
“생각은 좀 해보셨어요?”
“이미 오랜 생각일세. 앞으로 군부가 정권을 차지하는 일은 다시는 없을 거야.”
김태하 소장은 대통령이 범했던 지난 실수를 다시 반복할 생각이 없었다.
내전이 끝나는 대로 정권은 이양될 것이며 군인은 군인의 역할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확실한 의사 표명에 안심한 이솔하는 가슴 위로 손을 올리며 후우 안도했다.
“정말 중요한 결심을 하신 거예요.”
“······부하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네.”
자신이 조금만 더 과감했다면 이런 참사는 애초에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망한 대원들과 혼수상태인 박범석을 떠올린 김태하 소장은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
“할 제안은 이게 끝인가?”
“사령관님 의지를 확인했으니 저희야 기다릴 뿐이죠. 다들 진심을 알아주실 겁니다.”
서로 손을 잡기로 한 이상 김태하 소장과 이솔하는 이제 한배를 탄 사이다.
그 둘은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하며 새로운 서울을 위해 협력했다.
“아, 맞아요.”
“음?”
“그, 강릉 시장이라는 사람 있잖아요? 사령관님의 옛 부하라고 알고 있는데, 혹시 괜찮으시면 다리 좀 놔주실 수 있으세요?”
이솔하의 입에서 박범석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김태하 소장은 표정을 굳혔다.
정치가 싫어 서울 요새를 떠났던 옛 부하는 이미 폭풍 한가운데 몸을 담그고 있었다.
* * *
서울에서 내전이 발발한 즉시 특전대는 경기도로 거점을 옮겨 치료에 집중했다.
하지만 예상보다 내전이 길어진 탓에 어쩔 수 없이 또 거점을 옮겨야만 했고,
그럴 바에 차라리 안전한 강릉이 어떠냐는 의견을 모아 서둘러 돌아갈 준비를 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김춘식 회장은 동인병원을 통째로 비워 중환자실을 마련했다.
그리고 열차를 통째로 개조해 박범석을 포함한 환자들을 전부 강릉으로 데려왔다.
무려 보름이 넘게 걸린 귀향길.
당당히 군락을 파괴하고 온 대원들은 드디어 가족, 친구들과 상봉할 수 있었다.
투둑, 툭, 투두둑.
하지만 봄비가 내리는 그날, 역에 모인 그 누구 하나 섣불리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사람들은 슬픈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묵묵히 맞았다.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고.
밤만 되면 술꾼들로 왁자지껄 시끄럽던 시내에는 이제 사람이 돌아다니지 않는다.
항상 행사로 떠들썩거리던 항구도 일이 끝나면 사람들의 발걸음이 딱 끊겨버렸다.
그저 하염없이 걷다 저 멀리 동인 병원이 보이면 잠시 걸음을 멈추는 사람들.
모두가 묵묵히 봄을 준비하면서도 환하게 웃지 못하는 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또 꽃이네.”
오늘도 병문안을 온 송지영 중위는 병원 1층에 놓인 아기자기한 봄꽃을 발견했다.
강릉항 보육원 아이들이 하루가 멀다고 봄꽃을 따와 이렇게 놓고 가고는 한다.
이젠 연례행사가 되어버린 그 행동에 송지영 중위는 슬픈 표정으로 벤치에 앉았다.
‘시간이 너무 빨라.’
그녀가 강릉에 거처를 마련한 지도 벌써 한 달 하고도 보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박범석은 회복세에도 불구하고 의식이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분명 검사 결과가 모두 정상이었을 텐데 어째서 선배는 일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우울함에, 답답함에, 송지영 중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런데 그 순간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아이고, 또 병문안 왔어?”
“안녕하세요, 아저씨.”
그사이 꽤 친해진 상식 아저씨가 고물 트럭을 덜덜 끌며 병원 앞에 주차했다.
그는 방금까지만 해도 밭일을 하다 왔는지 옷과 얼굴이 전부 흙투성이였다.
“논 다녀오셨어요?”
“지금 할 일이 태산이여. 조금만 더 있으면 이제 모내기해야 하는 철이 오거든.”
상식 아저씨는 장화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쓰고 있던 밀짚모자를 벗었다.
그리고 송지영 중위 옆에 털썩 앉아 아이들이 가져다 둔 꽃을 정성껏 정돈했다.
“그래서 안 돌아가기로 한겨?”
“······예. 다들 지쳐서요. 선배가 허락만해주시면 이참에 강릉에 정착하고 싶어요.”
“그래그래. 생각 잘했어. 복잡한 서울보다는 우리 강릉이 훨씬 살기 좋을 거야.”
원래라면 전역은커녕 마음대로 부대를 이탈했다는 죄로 징계를 받았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박범석에게 큰 빚이 있는 김태하 소장은 기꺼이 그들의 전역을 허가해주었다.
이제 군복을 벗고 민간인으로 돌아온 송지영은 상식 아저씨를 향해 물었다.
“아저씨.”
“응?”
“이제 괜찮으세요?”
박범석이 복귀했을 당시 그 누구보다 걱정하고 슬퍼했던 상식 아저씨다.
지금은 괜찮아 보여도 그 속은 다른 이들처럼 까맣게 타오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괜찮고말고.”
하지만 상식 아저씨는 도리어 환하게 웃으며 가지런히 정돈한 꽃을 내려놓았다.
“나는 항상 믿고 있거든.”
“네······?”
“봄이 오면 같이 농사짓기로 한 약속 말이여. 이번에도 그 약속 꼭 지킬 거여.”
대뜸 할아버지의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 찾아왔을 때도 그랬다.
부당한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려놓겠다고 할 때도 분명 그랬다.
온통 거짓부렁이인 세상에서 박범석만큼은 약속을 지키고 올바른 일을 이행했다.
희망.
그렇기에 지은 아파트 이름이 아닌가.
상식 아저씨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옷에 묻은 흙을 탈탈 털었다.
그리고 녀석이 늘 해오던 일상을 지키기위해 오늘도 트럭에 올라탔다.
“보육원 하수도가 오늘 또 터졌다고 하더라고! 이번 기회에 아예 싹 바꿔버려야지.”
밀짚모자 아래로 환한 웃음이 보인다.
송지영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털털털 나아가는 트럭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가 정리해놓고 간 봄꽃은 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람을 따라 같이 흔들렸다.
가끔은.
가끔은 모든 게 동화처럼 행복하게 끝나기를 바랄 때가 있다.
송지영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 강릉의 봄을 내려다보며 눈물을 닦았다.
예쁜 화병이 어디 없을까?
봄꽃을 옆에 가져다주면 꽃을 싫어하는 선배가 조금은 일찍 일어날지도 모르겠다.
사각, 사각, 사각.
[한반도 전체를 집어삼킬 운명이었던 군락이 ‘그’에 의해 완전한 죽음을 맞이했다. 덕분에 치악산 생태계는 다시 옛 모습을 되찾았으며 불안에 떨던 원주 또한 평화를 맞이했다. 그날의 상처는 곧 잊혀질 것이다. 잿더미 위에 봄이 찾아온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 불씨는 꺼지지 않고 고스란히 서울로 옮겨붙었다. 이번 내부 공작의 배후가 대통령이라는 게 밝혀지면서 내전이 발발한 것이다. 이어지는 포격에 도시 곳곳이 폐허가 되었고, 사람들은 죽어갔다.]
[한반도 정세가 빠르게 변하고 있다. 서울요새에 내전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퍼지며 각 지역 군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이를 예의주시하고 있는 건 잠시 한발 물러나 있던 미연방과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상황을 주도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이 약육강식 속에서 이제 막 링 위로 올라온 강릉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깊은 잠에 빠져있던 ‘그’가 이제 눈을 뜰 차례다.]
“으, 시발 머리야. 숙취인가?”
“꺄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