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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의 상속자-76화 (76/180)

<아포칼립스의 상속자 76화>

평소 동반자처럼 달고 다니는 게 부상이라 웬만한 건 그냥 참고 넘기는 편이다.

그런 것까지 하나하나 신경 쓰기에는 입원이라는 제약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몸 상태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지금은 도저히 웃고 넘길 수 없었다.

나 정말 죽을뻔했구나?

사람 몸에 철심이 이렇게 많이 박힐 수가 있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

듣자 하니 골절은 기본에 파열, 출혈, 쇼크까지 동반한 채 실려 왔다고 하는데

그 와중에도 이런 몸을 굴려 군락을 잡았다는 게 솔직히 믿기지 않았다.

장하다, 박범석.

대원들을 모아놓고 ‘나 때는 말이야!’ 연설할 생각에 벌써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간신히 건진 목숨 대신 다른 한 가지는 놓고 와야 했다.

“죄송합니다.”

당시 폭발 이후 보이지 않았던 왼쪽 눈이 회복 불가, 즉 실명 판정을 받았다.

운 나쁘게 날아온 수류탄 파편이 왼쪽 눈가를 아예 갈기갈기 찢어놓은 탓이다.

이를 말해주어야 했던 차지철은 고개를 들지 못했고 간호사들은 끝내 눈물을 보였다.

“괜찮습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원래는 죽을 운명이었던 걸 여러 사람의 노력 덕분에 여기까지 살아 돌아왔다.

원망은커녕 고마울 뿐이다.

나는 고생한 기색이 역력한 차지철의 손을 꾹 잡아주며 또 한 번 마음을 전했다.

“당분간은 안정을 취하세요.”

의식은 돌아왔지만, 내 몸은 아직 회복 중이고 면역력도 많이 약해진 상태다.

당연히 면회는 불가능해, 차지철이 가져다준 무전기로 일행들과 안부를 전했다.

경태랑 가은이 녀석 얼마나 울던지, 거의 1시간 동안 괜찮냐는 말만 들었다.

상식 아저씨도 마지막에는 엉엉 울며 내 사나이 자존심을 촉촉하게 만드셨다.

하지만 슬픔은 잠시일 뿐, 내가 회복세를 보인다는 말에 사람들은 기뻐했다.

봄은 곧 생명의 계절이 아닌가.

잔뜩 침체했던 강릉은 곧 쾌유를 기원하는 푸릇한 분위기로 환하게 빛났고,

병실 책상에는 항상 다른 꽃들이 놓여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 가는 봄을 알렸다.

“지루해 죽겠네.”

그렇게 재활 치료와 회복에 전념하는 사이 또 한 달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났다.

나도 이제는 병실 침상에 기대고 앉아 사람을 만나도 될 만큼 많이 회복했다.

“실례하겠습니다.”

“선배, 저희 왔어요.”

이미 많은 사람이 다녀간 지 오래인 병실로 송지영과 최 대위가 가볍게 찾아왔다.

나는 방긋 웃으며 다가오는 송지영을 보자마자 엉엉 우는 흉내를 내며 물었다.

“이번에는 안 울었냐?”

“제, 제가 언제 울었다고 그래요.”

경태랑 가은이가 워낙 임펙트가 강해서 그렇지, 송지영도 진상이 만만치 않았다.

나는 모른 척 잡아떼는 녀석을 낄낄 웃으며 사복 차림인 최 대위와 악수했다.

“강릉 생활은 어떻습니까?”

“이제 좀 사람답게 사는 기분입니다.”

이번 일로 해체된 특임대 인원 전원이 앞으로 우리 강릉과 함께하게 되었다.

물론 당시 군락에 잡혀갔던 인원 중 대부분의 대원은 현직에서 물러나기로 했지만,

문 상사는 남기를 원했고 은퇴한 이들도 훈련소 조교로 활약하게 될 것이다.

나는 앞으로 한 식구가 될 두 사람과 다시 한번 손을 맞잡은 뒤 마주 보고 앉았다.

이제 서론이 끝났으니 그들이 정보망을 통해 가져온 서울 소식을 들을 차례였다.

“내전 상황은?”

“김태하 소장 쪽이 우세해요.”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김태하 소장은 내가 본 지휘관 중 최고이고 그의 부하들도 충성심이 뛰어나다.

평소 훈련이나 장비에도 늘 신경을 써왔으니 그딴 놈들한테 질 리가 없었다.

“이솔하가 뒤에 있다고 합니다.”

거기다 시민 지도자라고 알려진 이솔하까지 김태하 소장 쪽 손을 들어주었다.

두 사람 모두 추구하는 이상향이 같은 이상, 앞으로 관계가 틀어질 일은 없을 터.

한쪽이 명분과 무력을 전부 쥐게 된 이상 내전 결과는 정해져 있다고 봐도 좋았다.

“부산에서 움직임이 감지됐어요.”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역시, 한반도 내 다른 세력도 이 냄새를 맡았다는 것이다.

'부산.'

현재 한반도에서 서울 다음가는 세력을 꼽으라 하면 바로 부산 요새가 있다.

하지만 아직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개념으로 묶여 있는 서울 요새와는 다르게

부산은 이미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바다 건너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아니, 종속이라 봐도 좋았다.

지도자가 다름 아닌 일본 사람이고 선상 난민으로 유입된 중국인, 동남아인과 같은 다양한 국적이 주 인구를 이루고 있으니까.

“목적은······.”

“입부터 벌리고 보는 거죠. 운 좋으면 통째로, 아니면 최소 한 입은 베어 무니까요.”

내전은 요새 전력의 약화를 불러오고 그건 곧 먹기 좋은 상태라는 것을 의미한다.

평소에도 야욕을 드러냈던 부산 요새는 현재 수읽기에 들어간 게 분명했다.

“계속 지켜봐 줘.”

“맡겨두세요.”

강릉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해도 간접적인 영향으로 번질 확률은 충분하다.

나는 미래 일기가 해준 조언을 다시 한번 머리에 되새기며 길게 하품했다.

약 기운이 도나?

슬슬 졸리다.

“그만 쉬세요.”

사과를 이쁘게 깎아놓은 최 대위와 송지영은 이만 자리에서 물러나려 했다.

“아, 맞다! 이거 태식 씨가 전해달래요.”

“웬 사진?”

“수료식 때 찍은 단체 사진이에요. 원래 예정에 없었는데 선배 때문에 찍었나 봐요.”

병원 신세를 지는 동안 훈련소에 입소했던 인원이 무사히 훈련을 마친 모양이다.

역사적인 1기 수료생들?

고작 나 하나 보여주겠다고 찍은 단체 사진을 보니 저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신병치고는 군기가 제대로 잡혔습니다. 특히 다들 의욕적인 게 마음에 들어요.”

“그렇습니까?”

“예. 아마 실전 경험만 조금 쌓이면 웬만한 적은 가뿐히 상대할 수 있을 겁니다.”

노련한 지휘관인 최 대위가 저렇게 말할정도면 신병들 수준이 정말 괜찮나 보다.

하지만 반대로 그는 강릉 방위군의 허점이 무엇인지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다만, 전체적인 화력이 너무 모자랍니다. 앞으로 있을 전투를 생각하면 인원 충원보단 지원 화기를 갖추는 게 급합니다.”

지난 군락 전투 때부터 쭉 이어진 화력 부족은 우리 강릉의 고질적인 문제다.

늘 숙제처럼 풀어야지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이참에 제대로 준비해 볼 생각이다.

“그럼 푹 쉬십시오, 시장님.”

나는 그들이 깎아주고 간 사과를 아삭아삭 씹으며 천천히 손을 흔들어주었다.

정신없이 사람들을 만나며 수다를 떨다보니 어느새 창밖은 어둑해져 있었다.

치익.

[시장님!]

그런데 그 순간 침대 위에 올려둔 무전기를 통해 태식 씨가 호출을 해왔다.

“무슨 일입니까?”

[잠시 밖을 봐달랍니다!]

갑자기 밖을 보라고?

나는 고개를 돌려 어둠이 내려앉은 창밖을 바라봤다.

해가 진 강릉은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을 지붕 삼아 적막함을 머금고 있었다.

반짝!

그런데 그 순간 고장 난 줄 알았던 병원앞 가로등에 갑자기 노란 불이 들어왔다.

그 빛은 내 시선을 뺏어가더니 이내 다른 가로등으로 하나둘 옮겨가기 시작했다.

반짝!

빛이 번져나간다.

잠시 잊고 있던 문명의 빛은 이내 강릉 시내를 물들이며 아름답게 반짝였다.

야경.

우리가 만들었던 지상의 별.

나는 들고 있던 무전기를 잠시 내려놓고 옛 모습을 되찾은 강릉을 조용히 감상했다.

[발전소에서 드리는 축하 선물이래요.]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아직 시설 보수가 끝나지 않은 탓에 전력 공급은 채 1분도 이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잠깐뿐이었던 그날의 풍경은 기억 속에서 쉽게 잊히지 않았다.

* * *

‘회복이 빠르시네요.'

조상 중에 파충류라도 있었는지 나는 남들보다 신체 회복이 빠른 편이었다.

덕분에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몸은 시간이 지나자 점차 회복세에 접어들었고,

지금은 휠체어에 타고 움직여도 될 만큼 전체적인 몸컨디션이 많이 좋아졌다.

드디어 병실 생활에서 해방된 나는 일단 그동안 밀려있던 업무부터 처리했다.

‘잘 진행 중이네.’

강릉은 한창 시작된 지역 농사와 무역항 사업으로 인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래도 그동안 노하우를 쌓아둔 덕분에 확장은 아무런 문제 없이 진행 중이었다.

삐빅!

그 순간 위성 전화기가 울린다.

나는 빠르게 수신 버튼을 눌러 상대방을 확인했다.

“엠마?”

[몸은 좀 어때요?]

“많이 좋아졌습니다.”

[다행이네요. 저희 쪽에서 도움을 드렸어야 했는데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서울 요새에서 내전이 터진 마당에 동아시아 담당인 엠마라고 한가할 리가 없었다.

뭐, 병문안을 안 왔다고 삐질 나이는 아니라서 일단 본론부터 꺼내고 봤다.

“부탁할 게 있어서요.”

[네, 말씀하세요.]

“무기를 좀 구매하고 싶습니다.”

[······의외네요. 가까운 공급처가 있으신거 같아서 저희도 제안하지 않았거든요.]

그래, 서울이 있긴 했다.

하지만 지금은 내전이 터져버려 무기를 팔 상황이 아니다.

러시아 산도, 일제도 모두 쓰기 싫은 상황에서 유일하게 남은 건 미제뿐이다.

[그래서 어떤 걸 원하시죠?]

“개인화기는 괜찮습니다. 화력 지원이 가능한 2선급 장비로 몇 개 알아봐 주십시오.”

비싼 거 줘봤자 유지하지도 못한다.

우리는 그냥 튼튼하고 잘 나가는 물건이면 된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엠마의 입에선 알겠다는 말이 아닌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저, 범석 씨?]

“예?”

[개인화기까지는 어떻게든 해보겠는데, 다른 장비는 반출이 불가능할 것 같아요.]

아니, 창고에 남아도는 게 퇴역 폭격기인 양반들이 2선급 장비 몇 개를 못 주나?

그래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지 엠마는 침울해진 목소리로 조곤조곤 설명했다.

[요즘 상부에서 군수 쪽을 예의주시하고 있거든요. 아마 퇴역 장비를 다시 꺼내오는 쪽으로 추진이 되고 있나 봐요.]

하긴 인간이 아니라 감염체를 상대로 하는 전쟁에서 무기를 가려 쓸 필요가 있을까.

2차 세계 대전에서 쓰던 자주포를 가져와도 쏘면 죽는 게 감염체니까 말이다.

“······그래요?”

그래도 실망스러운 건 어쩔 수 없다.

나는 섭섭한 티를 팍팍 내며 당장에라도 전화를 끊을 사람처럼 굴기 시작했다.

[잠, 잠시만요!]

그러자 눈치를 살피던 엠마는 깜짝 놀라며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혹시 자국 장비도 괜찮아요?]

“저희 거요? 당연하죠.”

국군 장비를 못 구해서 그 대안을 찾고 있는 건데 준다고 하면 도리어 환영이다.

[반년 전에 요코하마 항으로 밀반입된 한국 장비가 몇 개 있어요. 잠시만요. 지금 알아보는 중이니까······ 아직 남아있네요!]

밀반입 수준이 장난 아닌데?

나는 그녀가 읊어주는 장비 목록을 들으며 감탄했다.

기본 4.2인치 박격포에 KLF 사태 당시 빌렸다가 반납한 155mm 견인 곡사포, 거기에 105mm 차륜형 곡사포까지 있단다.

물론 개수는 많지 않지만, 우리 강릉에서 사용하기 딱 좋은 규모였다.

후우, 후우.

흥분하지 말자.

나는 전화기를 잠시 멀리 떼놓고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난 뒤 정말로 사기 싫은데 어쩔 수 없이 산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거라도 사야죠.”

[······죄송해요. 대신 제가 요코하마 쪽 중개인이랑 함께 방문하도록 할게요. 이참에 얼굴도 보고 이야기 좀 나눠요.]

엠마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분을 애써 삭히며 직접 배송까지 약속해주었다.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보름이면 충분해요.]

너무 다그쳤나?

이왕 얼굴 보고 만나는 거 군락에서 얻은 정보나 공유해줘야겠다.

나는 그럼 그때 만나자는 활기찬 대답을 끝으로 엠마와의 통신을 끊었다.

‘보름이면 충분해요?’

하지만 보름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엠마가 강릉으로 오는 일은 없었다.

[Mr 박? 저 제임스입니다.]

대신 다른 지역으로 발령 난 줄 알았던 미연방 요원 제임스가 소식을 전해왔다.

[동해항으로 향하던 화물 선박이 무장 집단에 의해 나포당했습니다. 엠마 요원도 그 선박에 타고 있다가 붙잡힌 모양입니다.]

하하.

농담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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