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스의 상속자 77화>
사실 미국 정도는 되니까, 이런 국제적인 첩보 활동을 꾸준히 이어나가고 있는 거지,
현재 국가라는 틀을 유지 중인 대부분 나라는 자국 상황을 관리하기도 벅찬 상황이다.
하지만 아무리 대단한 미국이라도 바다 건너 동아시아까지 신경 쓸 여력은 없었다.
엠마 쪽 상부는 아무래도 저렴하고 확실한 방법으로 이번 일을 처리하려는 것 같았다.
‘충분한 보상을 약속하겠습니다.’
제임스를 통해 우리 강릉 요새에 협력을 요청한다는 비공식 제안이 도착했다.
내용은 그쪽으로 파견된 요원들과 함께 상황을 파악하고 엠마를 구해달라는 것.
당연히 맨입은 아니고 내가 원하는 무기 구매 건에 도움을 주겠다는 조건이 붙었다.
‘무조건 우리가 해야 합니다.’
엠마뿐만이 아니라 우리 물건을 싣고 오던 화물선이 몽땅 나포당한 상황이다.
당장 되찾으러 가도 모자란 마당에 미국에서 지원과 보상까지 약속했다?
나는 즉각 제안을 받아들였고 제임스는 준비가 끝나는 대로 합류하겠다고 답했다.
그렇게 양측 모두 약속 일정을 앞두고 서로 바쁘게 자기 할 일에 집중했다.
“어지럽거나 그러시지는 않으시죠?”
“예, 괜찮네요.”
병실에만 3달 넘게 갇혀 있던 나는 2주 전 드디어 휠체어 신세에서 벗어났고,
짧은 재활 기간을 거친 뒤 오늘 드디어 두발로 바닥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나마 하반신은 ‘비교적’ 덜 다쳐서 그런지 움직이는 것에는 큰 불편함이 없었다.
내가 좋다고 낄낄 웃자 차지철은 깊은 한숨을 푹 내쉬며 재차 당부했다.
“몸보다는 머리 쪽에 문제가 생기실 수도 있습니다. 혹시나 어지럽거나 두통이 생기시면 바로 저한테 말씀해주세요.”
“에이,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하게 하니까 말씀드리는 겁니다.”
날개 없는 천사 차지철은 어디 가고 환자를 쪼아대는 악마 차지철만이 남았다.
나는 금방이라도 입원을 시킬 것 같은 그를 향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좀 뛰고 와도 됩니까?”
“시장님!”
“하하, 농담이에요.”
그동안 병실에만 박혀 있느라 뼈마디마다 누런 석회가 끼는 기분이다.
그래도 산책 정도는 허락받은 나는 오랜만에 제 발로 걸어 병원 밖을 나섰다.
“으그극!”
긴 잠을 자다가 지금 일어난 기분이다.
탁 트인 하늘 아래서 길게 기지개를 켠 나는 벌써 바뀌는 계절을 체감했다.
겨울은 그렇게 길더니 봄은 왜 이리 짧은지,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초여름인 걸 보아 참 오래 누워있기는 했던 모양이다.
나는 옷차림이 가벼워진 사람들을 구경하며 그렇게 한가한 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탁! 탁! 탁! 탁!
“같이 가!”
“안돼! 늦었단 말이야!”
그런데 그 순간 저기 아래서부터 아이들이 병원으로 열심히 뛰어오고 있었다.
녀석들은 하나같이 산과 들에서 따온 예쁜 꽃으로 품을 한가득 채우고 있었다.
맨날 병실 꽃을 바꾸는 범인이 누군가 했더니 이 귀여운 악동들이었구나.
나는 벤치에서 일어나 이쪽으로 힘겹게 뛰어오는 보육원 아이들을 반겼다.
“어흥!”
“으악!”
“시장님이다!”
아이들은 병실에만 있던 내가 갑자기 밖으로 나오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휠체어가 없다는 걸 발견하자마자 우르르 내 쪽으로 달려온다.
“휠체어가 없어!”
“시장님 이제 안 아파요?”
초등학생 저학년부터 이제 막 유치원에 들어간 아이들까지 구성원은 다양하다.
그래도 모두 친구처럼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에 구김 없는 순수함이 느껴졌다.
나는 다리 바짓단을 잡는 녀석들 머리를 하나둘 쓰다듬어주며 피식 웃었다.
“오늘은 누구 꽃이 제일 이쁘냐?”
누구 꽃이 제일 이쁘냐는 말에 아이들은 심각한 얼굴로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자기들끼리 결론을 내렸는지 한 아이를 가리키며 꺄르륵 웃었다.
“다은이!”
“맞아요! 다은이!”
동생과 함께 소심하게 숨어 있던 다은이랑 아이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저, 저기.”
얼굴이 익숙하다 싶더니 KLF 사태 당시 내가 구해서 데려온 남매가 분명했다.
이후로 잘 지낸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순간 몰라볼 만큼 얼굴 빛이 많이 좋아졌다.
“잘 지냈어?”
혹여나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하던 남매의 얼굴이 한순간 밝아진다.
“읏차.”
나는 아이가 들고 있는 앙증맞은 꽃을 받고 동생을 번쩍 들어 목말을 태웠다.
“나도! 나도!”
“우와!”
번쩍 목말을 태워주자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신이 나서 우르르 뒤따라온다.
항상 조용하던 병원이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에 한순간 시끌벅적해진다.
하지만 소란을 듣고 급히 달려 나온 의료진들도, 우연히 창밖을 바라본 다른 환자도,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가만히 앉아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 * *
제임스가 강릉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환자복에서 활동복으로 갈아입은 나는 병원을 나와 차량에 탑승했다.
그러자 호위를 자처한 경태와 가은이가 기다렸다는 듯 옆자리에 탑승했다.
“너 키가 더 컸냐?”
“예?”
“아니, 그래 보여서.”
“키는 그대론데······.”
요즘 개인 훈련을 받는다고 도통 얼굴을 볼 기회가 없었던 경태 녀석이다.
그런데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가뜩이나 크던 체구가 더욱 커져 있었다.
아니, 내가 알던 애송이 경태는 어디 가고 문 상사 복제 버전이 여기 있냐.
“얘, 요즘 장난 아니에요.”
“그래?”
“진짜 미친놈처럼 훈련한다니까요.”
평가가 박한 가은이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정말 훈련에만 전념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러다 스파링에서 지는 거 아니야?
“살살 해 인마.”
나는 부끄러워하는 경태 어깨를 툭 쳐준뒤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한참을 달린 차량은 강릉과 정동진을 넘어 약속 장소인 동해로 향했다.
끼익, 덜컹!
“이쪽이에요.”
“응.”
마지막으로 볼 때만 해도 텅 비어있던 동해항이 오고 가는 사람들로 북적했다.
대부분 무역을 위해 온 상선이거나 거래를 위해 온 각 지역 캐러밴 상인들로 보였다.
나는 이 광경이 익숙하다는 듯 걷고 있는 가은이의 허리를 쿡 찌르며 물었다.
“사람이 원래 이렇게 많아?”
“에이, 오늘은 조금 없는 편이에요. 바쁜날은 이렇게 돌아다니지도 못하거든요.”
이게 한가한 편이라고?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사이 강릉 요새에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나는 마치 시골에서 방금 올라온 촌놈처럼 엉거주춤 약속 장소로 걸어갔다.
선착장 바로 앞 창고에는 제임스와 김씨 일가가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시장님.”
“Mr. 박?”
나는 먼저 김춘식 회장님과 태식 씨에게 인사한 뒤 제임스와 손을 맞잡았다.
“오랜만입니다.”
한시가 급한 상황인 만큼 안부를 나누는건 간략하게 넘기고 일단 자리에 앉는다.
임시로 가져다준 작전 테이블 위에는 이미 지도와 중요 정보들이 잔뜩 쌓여있었다.
준비할 시간이 조금 필요하다고 하더니 이미 사전 조사를 다 끝내놓은 모양이다.
“실종 지점은 확보했습니까?”
“연락이 마지막으로 끊긴 지점이 여기입니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오는 항로죠.”
요코하마에서 동해항으로 오는 모든 선박은 보통 이 항로를 이용하는 편이다.
그런데 하필 그날, 그 지점에서 엠마가 타고 있던 화물선만 기습, 나포당했다.
“정보가 샜군요.”
“······예. 그런 거 같습니다.”
쯧, 중개상을 끼고 움직일 때부터 정보가 밖으로 새는 걸 주의했어야 했다.
나는 작게 혀를 찬 뒤 화물선이 사라진 항로 지점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노린 게 뭐였을까.’
범인은 정확히 화물선만을 노렸다.
그렇다면 그 안에 실려있던 무기가 목적일까, 아니면 엠마가 목적이었을까.
함부로 짐작하기 힘들다.
이건 현장으로 직접 가서 수색을 해봐야 알 것 같았다.
“일단 움직이죠. 인원은?”
“저를 포함해서 요원 셋입니다.”
너무 날로 먹으려는 거 아니야?
나는 한소리 할까 하다가 그냥 태식 씨를 불렀다.
“특전대 좀 호출해주십시오.”
“근처에서 대기 중입니다.”
육지에선 많이 싸워봤어도 해상에서 작전을 벌이는 건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이참에 해상 작전 경험이 있는 특임대와 함께 실전을 지켜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우리는 현장 수색이 결정되자마자 장비를 챙겨 준비된 선박 위에 탑승했다.
“형님도 가시게요?”
“······멀리서 참관만 할게.”
“그러셔야 할 거예요.”
물론 특전대 틈에서 장비를 챙기다가 딱 걸린 나는 경태한테 강제로 업혀 가야 했다.
* * *
철썩! 철썩!
내가 개인 소유하고 있는 요시다 호를 선착장으로 끌고 와 임시로 개조했다.
물론 말이 임시지 배 선수에 중기관총을 달고 경기관총을 세 방향에 거치해뒀다.
그리고 혹시 몰라 유탄 발사기까지 챙겼으니 웬만한 적은 접근도 못 할 것이다.
페인트까지 깨끗하게 새로 바른 요시다호는 빠른 속도로 바다를 가로질렀다.
“문제없겠죠, 어르신?”
“내가 이 길만 4년째야! 마침 파도랑 날씨도 딱 좋으니까, 걱정하지 말아.”
강릉항 출신 선장 중 경력이 가장 긴 어르신과 선원분들께 항해를 부탁했다.
그래도 이 바닷길만 4년째라고 하니 걱정없이 요시다 호를 맡겨도 될 것이다.
그렇게 어르신과 바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누군가 종이컵을 내밀었다.
“중위님, 커피 드십쇼.”
“엥, 문 상사? 너 언제 탔냐?”
아직 복귀가 한참 남은 걸로 알고 있는데 왜 여기서 커피를 타고 있는 거지.
나는 일단 얼음이 동동 떠다니는 시원한 커피를 받아 문 상사와 함께 앉았다.
“의사가 퇴원하래?”
“가만히 있자니 몸이 근질근질해서요.”
“미친놈.”
“중위님이 할 말은 아니죠.”
군락에 끌려갔던 이들 대부분은 신체 부상보단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어했다.
하지만 문 상사는 그런 건 개뿔 신경도 안쓴다는 듯 모든 복귀 테스트를 통과했다.
잘됐네.
마침 경험 많은 선두가 한 명 필요하던 참이었는데 문 상사가 와줘서 다행이다.
“너 해상 작전 몇 번 뛰어봤지?”
“같이 했잖습니까.”
“이번에 네가 선두 좀 서줘야겠다.”
“그러죠, 뭐.”
잠시 고민하던 문 상사는 이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 시장! 잠시 이쪽으로 와봐야겠어!”
그 순간 한참 선박 키를 붙잡고 있던 선장 어르신이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무슨 일입니까?”
“저기 한번 봐봐.”
나는 망원경을 꺼내 선장 어르신이 가리키는 3시 방향 바다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자 바다에 선박이 지나간 것으로 추정되는 하얀 포말이 쭉 이어지고 있었다.
“어선입니까?”
“어선치고는 너무 가벼워. 한 20분 전부터 계속 따라오는데, 뭔가 수상해서 말이지.”
어선이 아닌 게 계속 우리 뒤를 밟는다.
어르신 말대로 수상한 티를 팍팍 내고 있다.
치익, 칙.
저쪽에서 교신이 왔다.
선장 어르신은 들어나 보자는 말과 함께 선박 무전기 볼륨을 조심스럽게 올렸다.
“- - - - - -!!”
그러자 듣기만 해도 짜증이 몰려오는 시끄러운 중국어가 무전을 통해 들려왔다.
뭐라는 거야, 시발.
아무리 영어로 대답해도 상대는 똑같은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이쪽으로 가지 말라는데요?”
“너 중국어도 할 줄 아냐?”
“조금요.”
“뭐라 지랄하는지 들어봐.”
조용히 팔짱을 낀 문 상사가 무전기 너머로 들려오는 중국어를 대충 번역했다.
“뭐, 키를 돌려라. 이쪽으로 계속 가면 쏴버리겠다. 이런 뜻인 거 같은데요.”
뜬금없이 중국 놈들이 나타나 우리 배를 따라오더니 이쪽으로 가지 말란다.
“뭐냐, 이 새끼들. 해적이야?”
“그러게요. 답신해볼까요?”
“잠깐, 혹시 모르니까······.”
나는 벌써 준비를 끝낸 대원들을 향해 대응 사격을 준비하라 지시하려 했다.
퍼엉!
삐이이이이이- - -슈웅!
그런데 그 순간 선교 바로 앞으로 발사체 하나가 날아와 아슬하게 스쳐 지나간다.
그 궤적을 눈으로 따라가 본 나와 대원들은 발사체의 정체가 무엇인지 눈치챘다.
“저거 RPG-7 맞지?”
“······그런 거 같은데요.”
“야야! 야야야야! 나가나가나가!”
중국인? 해적? 선제공격?
순간 대원들 눈에 불꽃이 튀겼다.
빡이 나간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선교를 빠져나와 냅다 총구를 겨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