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스의 상속자 80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화물선을 지원한다 길래 처음에는 구조 목적인 줄 알았다.
끽해야 석탄을 싣고 나르는 화물 선박에 큰 기대를 한다는 것부터 이상한 거였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곧, 자신들이 바다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투쾅! 투쾅!
비행기에다 105mm 포를 달고 다니는 건쉽이 있다는 건 들어봤어도, 화물선에 곡사포를 달아 개조한 건 또 처음 본다.
함포도 아니고 기관포도 아닌 것이 퉁퉁 날아와 크루즈 선에 그대로 내리꽂힌다.
당연히 맞는 족족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고 선체에는 화염과 검은 연기가 솟아올랐다.
와!
항모랑 미사일이 없으니 거함·거포의 시대가 되돌아오고 만 것일까.
우리는 낭만을 자극하는 그 광경에 홀려 도망치는 것도 잊고 구경하고 있었다.
“뭐합니까! 도망쳐야죠!”
하지만 그것도 잠시 최 대위가 뭐하냐는듯 외치며 우리를 빠르게 끌고 데려왔다.
맞다, 도망쳐야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나는 대원들과 함께 황급히 퇴로 지점을 향해 달려갔다.
그곳에는 이미 출발 준비를 끝낸 요시다호가 마지막 인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착!
다친 대원들을 시작으로 우리는 재빠르게 밧줄을 타고 내려가 선박에 올라탔다.
마지막으로 인원 체크.
좋아, 다 탔다.
출발하라는 지시가 떨어지자 선장 어르신은 호쾌한 외침과 함께 키를 돌렸다.
“꽉들 잡으라고!”
검은 연기를 풀풀 내뿜은 요시다 호가 빠르게 작전 지역을 이탈하기 시작한다.
그 모습에 일부 해적 놈들이 분통을 터트리며 총을 난사했지만, 선박은 이미 사정거리 밖으로 벗어나 도망친 지 오래였다.
부우우우우웅!
요시다 호는 마치 약 올리듯 뱃고동을 울리며 강릉항 상선들과 무사히 합류했다.
진짜 죽는 줄 알았네.
그제야 긴장의 끈을 놓은 나는 갑판 바닥에 털썩 앉아 욱신거리는 몸을 두드렸다.
“형님, 물 좀 드릴까요?”
“고마워.”
온몸이 아주 땀과 바닷물로 범벅이 됐다.
내가 방탄복과 윗옷을 벗자 경태는 시원한 물을 가져와 머리에 뿌려주었다.
그 모습에 나머지 대원들도 열기와 목마름을 식히며 멀어지는 크루즈를 바라봤다.
치익!
[시장님! 괜찮으십니까?]
“타이밍 죽였습니다.”
[늦지 않게 왔다니 다행입니다! 저 크루즈 선은 어떡할까요? 나포합니까?]
나포? 저 벌레처럼 바글거리는 해적들을 하나하나 처리할 생각에 머리가 아프다.
처음에는 초대형 크루즈 선을 탐을 냈던 나도 그냥 정해진 운명을 따르기로 했다.
“바다로 보내줍시다.”
[알겠습니다.]
놈들이 바다로 던져넣었던 무고한 자들의 원한을 고스란히 갚아줄 생각이다.
섬멸 명령이 떨어지자 우리 진영 선박들은 기다렸다는 듯 집중 공격을 가했다.
투두두두두두!!
투쾅! 투쾅!
화물선에선 105mm 곡사포가 연신 불을 뿜으며 크루즈 선을 걸레짝으로 만든다.
나머지 상선도 이에 지지 않겠다는 듯 중기관총으로 놈들을 벌집으로 만들었다.
폭발과 반짝이는 예광탄의 향연!
마치 거대한 고래를 사냥하듯 상선들은 크루즈 선박의 숨통을 서서히 조여갔다.
콰르르릉!
그렇게 화력을 투사한 지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크루즈 선 내부에서 연료탱크로 추정되는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그 여파로 끝까지 버티던 선체는 옆으로 기울었고 이내 침몰이 시작되었다.
펑!
커다란 소용돌이가 맴돈다.
불길과 검은 연기가 하늘로 치솟는다.
끄아아아악! 히익!
구명정조차 구비 하지 않은 해적들은 무전을 통해 연신 항복 의사를 밝혔지만,
[구조 요청입니다. 항복한다네요.]
“무시하세요.”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용납하지 않는 잔혹한 처사에 하나둘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다.
[사격 중지!]
더 이상 공격은 무의미하다.
화물선과 상선들은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도록 점차 작전 지역에서 물러난다.
꼬르륵.
시커먼 바닷물은 비명을 지르는 놈들의 입을 틀어막고 심연으로 끌고 갔다.
[복귀합니다.]
하늘에 적막함이 깔리고 바다는 영원한 침묵을 선사한다.
우리는 살아남은 해적들이 없나 마지막으로 확인한 뒤 동해항으로 돌아갔다.
* * *
쨍그랑!
한참 즐겁게 술을 마시던 요새 지도자 다나카가 험악한 표정으로 잔을 깨트렸다.
꺅!
시중을 들던 여자들은 비명을 질렀고 사용인들은 눈치껏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의 살벌한 눈빛은 방금 소식을 전해온 부하 조직원들을 향해 고정되어있었다.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온몸을 이레즈미 문신으로 도배한 직속 부하 하나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제가 애들 보내서 직접 확인한 내용입니다. 거의 확실하다고 보셔도 됩니다.”
부하들이 직접 사람을 보내 확인했다는 건 뜬 소문 따위가 아니라는 소리다.
처음에는 믿지 못하던 다나카도 곧 현실을 받아들이며 허무한 웃음을 터트렸다.
“병신 같은 새끼들.”
부산 요새를 지배하는 다나카 산하에는 수많은 사업체가 조직을 이루고 있다.
타이후 해적 또한 그들이 직접 자금을 지원하는 불법 사업체 중 하나였는데,
보통 무력을 동원하거나 더러운 일을 대신 처리하는 용병 집단으로 쓰고 있었다.
‘기회인 줄 알았는데.’
하지만 고작 촌구석 요새 하나 따위에게 이리 허무하게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시발!
이렇게 되면 서해에 이어 동해 물류를 마비시킨다는 계획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나.
이번 서울 내전을 기회라고 생각했던 다나카는 신경질적으로 다리를 떨었다.
“그래서 이유가 뭐야? 정신병자들이긴 해도 그렇게 허술한 새끼들까지는 아니었잖아.”
“욕심을 좀 부린 모양입니다.”
“욕심?"
“요코하마에서 미연방 요원이 움직인다는 정보가 하나 있었습니다. 근데 거기 엮어있던 게 꽤 중요한 물건이었나 봅니다.”
“그게 뭔데.”
한참 주절주절 설명하던 부하는 여자들을 모두 내보낸 뒤 조용히 속삭였다.
그러자 다나카는 곧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한번 되물었다.
“······진짜야?”
“예. 확실합니다.”
감염체 치료제!
일본 본토에 소문으로만 돌던 그 신의 물방울을 미연방이 기어코 만들어냈다.
하긴 그 정도는 됐으니 타이후 새끼들이 주인 뒤통수를 치고 혼자 움직였겠지.
다나카는 평소 그답지 않게 흥분한 모습을 보이며 한쪽 다리를 탁탁 떨어댔다.
“근데 왜 하필 강릉이냐고.”
“······어디까지나 추측입니다만.”
“말해봐.”
“박범석이라는 인물과 미연방이 서로 협력하는 관계가 아닌가 싶습니다.”
아니, 도도하기 짝이 없던 그 양키 새끼들이 겨우 그 촌구석과 협력하고 있다고?
평소 미연방에 줄을 대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던 다나카는 순간 허탈해졌다.
“그래?”
하지만 동시에 감염체 치료제라는 단어를 계속 되새기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
자신이 파는 마약도, 장기도, 감염체 치료제라는 물건 앞에선 똥값에 불과하다.
만약 확보만 할 수 있다면 일본 구미초 새끼들이 웃돈을 주고라도 사 갈 것이다.
“여태 알아낸 정보 있으면 다 가져와.”
“알겠습니다.”
권력, 더 강한 권력!
부산 요새를 차지하고도 만족하지 못한 다나카는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늘 그렇듯 흑막을 자처하고 숨어 상대를 삼킬 비열한 계획이 머리에 떠올랐다.
사각, 사각, 사각.
하지만 안타깝게도 강릉에는 장막을 들추고 정해진 운명을 바꾸는 존재가 하나 있었다.
오랜만에 잠에서 깨어난 미래일기는 주인이 바쁜 사이 열심히 스토리를 구상했다.
사각, 사각, 사각.
사각, 사각, 사각.
* * *
삐익! 삐익! 삐익!
부우우우웅, 끼익! 덜컹!
동해항에 존재하는 모든 크레인과 중장비가 전부 한 화물선에 집중적으로 배치됐다.
한참 물자 하역으로 바쁠 시기라 원래라면 컴플레인을 받아도 할 말이 없지만,
선착장으로 모인 캐러밴 상인들을 불만을 표하기는커녕 현장을 구경하기 바빴다.
“똥포를 트럭에다 실었네?”
“무식한 양반아, 저게 풍익이라는 거야.”
한때 대한민국 예비역들의 동반자였던 국군 장비들이 하나둘 화물선에서 내렸다.
그 모습에 민방위는 진즉에 끝났을 아저씨들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떠들었다.
이번에는 빌리는 게 아니다.
선착장을 가득 채운 저 든든한 지원 화기들이 이제 전부 강릉의 소유가 되었다.
“어때요?”
“끝내주네요.”
미연방이 직접 주머니를 털어 일본 암시장에 있는 국군 장비를 싹 쓸어왔다.
엠마 말로는 상태 좋은 것만 골라왔다고 하는데 내 기준으로는 전부 신품이었다.
역시 그레이트 아메리카!
평소 깐깐하게 굴기는 해도 한 번 도와줄때 역시 통 크게 쏴주는 게 특징이었다.
“기술 지원도 필요하세요?”
“농담이죠?"
“너무 들떠있으시길래 물어봤어요.”
우리가 굳이 국군 장비를 강하게 원한 이유는 바로 숙련도와 유지 보수 때문이다.
말마따나 저기서 구경 중인 아저씨 몇 명만 데려와도 견인포 운용이 가능한데,
지원 화기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강릉 방위군에 가져다주면 어떻겠는가.
아마 따로 훈련이나 교리를 걱정할 것 없이 바로 실전 배치가 가능할 것이다.
좋아.
이제 걱정은 한시름 덜었다.
하역하는 장비를 전부 돌아본 나는 곧 엠마와 함께 선착장을 빠져나왔다.
끼룩끼룩!
더운 여름이 찾아온 동해안은 바다가 보이는 항구를 걷기 딱 좋은 장소였다.
오랜만에 평상복을 입은 나와 엠마는 방파제를 걸으며 못다 한 이야기를 했다.
“강릉에 남기로 하셨다면서요?”
“네. 제가 귀국한다고 했더니 차라리 강릉에 체류하는 건 어떠냐고 하더라고요.”
이번 납치 사건으로 심적으로 많이 지친 엠마는 정신적으로 불안감을 호소했다.
아마 동아시아 지부인 일본에서 정보가 샜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상부의 배려로 귀국이 아닌 강릉에 남아 쭉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 자주 보겠네요?”
“가끔 봅시다. 아주 가끔.”
나는 밝은 얼굴로 콩콩 뛰어와 손을 내미는 엠마와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첫인상이 속내를 연기하는 가짜였다면 지금은 한결 편한 친구를 보는 것 같았다.
삐리리리리.
“음?”
그렇게 동해항을 산책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위성 전화기가 울렸다.
김태하 소장? 요즘 내전이 정리되나 싶더니 전화할 여유가 생긴 모양이다.
“소장님?”
[잘 지냈나?]
“저야 늘 같죠. 서울은 어떻습니까?”
[슬슬 정리되는 분위기야. 아마 가을이 오기 전에 수원도 마무리가 될 것 같더군.]
서울 내전 상황은 문 상사와 송지영을 통해 거의 실시간으로 전해 듣고 있다.
생각보다 오래 끌지 않은 내전에 안도한 나는 진심을 담아 축하 메시지를 전했다.
“축하드립니다.”
[고맙네. 자네들 덕분이야.]
처음은 삐거덕거렸어도 서울과 강릉은 이제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사이다.
부디 시민들이 아픔을 잘 견디고 일어나 새로운 서울을 세우기를 기도할 뿐이다.
[아, 그나저나 소식 들었어. 타이후를 토벌했다며? 인천 수협과 시민 단체들이 훈장이라도 줘야 한다고 아주 난리야.]
“운이 좋았죠.”
[내가 거듭 말하지만, 운도 실력이지. 덕분에 서해 물류도 슬슬 정상화될 예정이야. 강릉이 괜히 서울 좋은 짓만 했군, 그래.]
“고마우면 돈으로 주십시오.”
한반도를 시끄럽게 했던 여러 굵직한 사건이 해결되어 그런가, 기분이 좋다.
나와 김태하 소장은 한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며 오랜만에 휴식을 즐겼다.
그러다 마침 여름휴가 이야기가 나왔고 김태하 소장이 조용히 본론을 꺼냈다.
[요즘 바쁜가?]
“덜 바쁜 편입니다.”
[그럼 오랜만에 얼굴이나 좀 보자고.]
일 중독자 그 자체인 양반이 웬일이래.
슬슬 퇴임할 각이라도 보는 건가.
나는 뜬금없이 얼굴 좀 보자는 김태하 소장의 말에 아무 생각 없이 답했다.
“강릉이나 한 번 오세요.”
[그럴까?]
“오시면 뭐 낚시나 같이······.”
[그럼 두 자리 맡아놓게.]
“예?”
[자네한테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 생각하는 게 비슷해서 잘 어울릴 것 같더군.]
“제가 아는 사람입니까?”
[이솔하라고 아나?]
?
[같이 가겠네. 그럼 수고.]
???????
내가 연신 물음표를 띄우는 사이 김태하 소장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사각, 사각, 사각.
[강릉이라는 신흥 강자가 당당하게 링 위로 올라와 타이후 해적을 넉다운 시켰다. 이 대결의 결과는 강릉이 단순히 체급뿐만이 아닌 한반도 패권을 다툴 충분한 실력자라는 걸 증명하는 출사표이기도 했다.]
[한참 선거를 준비 중이던 이솔하는 시선을 부산에서 강릉으로 돌렸다. 그저 흥미로운 상대로만 봤던 '그'가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을 연달아서 해내며 성장하자 잠재적 두려움과 가능성을 동시에 느낀 것이다.]
[그렇기에 이솔하는 ‘그’가 어떤 인간인지 알아내려 한다. 만약 한반도 재통합의 걸림돌이 된다면 과감하게 쳐내고, 친구가 될 수있다면 먼저 손을 잡기 위해서다. 양자택일 앞에 또 한 번 선택의 시간이 왔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