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의 상속자-82화 (82/180)

<아포칼립스의 상속자 82화>

그날 회담 내용을 듣고 있던 번영회 직원들로 인해 소문은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그 덕분에 서울에 호의적이던 강릉 주민들은 순식간에 싸늘한 얼굴로 태도를 바꿨다.

그동안 있는 살림, 없는 살림 꾸려가며 꾸역꾸역 얼마나 힘들게 버텨왔던가.

KLF, 군락, 기무사, 동해, 타이후 해적까지 전부 강릉 스스로 힘으로 이겨 내왔다.

나를 무시함으로써 그걸 전면으로 부정당했으니 주민들이 좋게 생각할 리가 없었다.

‘서울 놈들이 뭘 안다고.’

‘우리끼리도 잘 살아왔어!’

한반도 통합에 가장 중요한 숙제나 다름없었던 강릉 여론을 적으로 돌렸다.

이솔하가 구상하던 원대한 계획은 그렇게 초장부터 물거품으로 돌아가 버렸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이솔하는 도망치는 게 아닌 일단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

다음 날 호텔에서 나오자마자 희망 아파트와 강릉항을 직접 방문해온 것이다.

‘정말 죄송합니다.’

수수한 화장과 복장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가장 먼저 내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그리고 김춘식 회장을 포함한 일행들에게 일일이 고개를 숙이며 잘못을 청했다.

정말 그사이 반성이라도 한 걸까.

하룻밤 사이에 수척해진 얼굴에는 쉽게 연기할 수 없는 진정성이 느껴지고 있었다.

‘됐네. 이만 나가주게.’

하지만 어젯밤 일로 마음이 이미 떠나버린 사람들이 그 사과를 받아줄 리 없었다.

김춘식 회장은 이솔하와 완전히 선을 그으며 이 이상 이야기하기를 거부했고,

나머지 일행들 또한 무심한 얼굴로 사과만을 받고 그녀와 완전히 선을 그었다.

다들 반응이 살벌하네.

정작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은데 주변에서 이러니 함부로 나설 수가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인간 박범석이 아닌 강릉 시장으로서 나서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수습하고 일을 진행하는 데 집중했다.

어쨌거나 요새 대표자가 직접 사과를 한것이니 그에 맞는 대응을 해야 했으니까.

‘비즈니스나 마저 합시다.’

그래도 다행히 이솔하는 더 이상 무리하게 요구하지 않고 남은 일정을 치르기로 했다.

아마 이번 협정은 양측간 무역 협정을 조정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끝날 것 같았다.

그 뒤로는?

모르겠다. 아마 영원히 만날 일 없겠지.

그렇게 정신없었던 회담 둘째 날이 지나고 또 한 번 평화로운 여름밤이 찾아왔다.

“소주 드십니까?”

“없어서 못 먹지.”

김태하 소장과 함께 강릉항 부둣가로 나와 오랜만에 소박한 술자리를 마련했다.

술 한잔하자는 지난 약속을 계절이 한 번 바뀌고 나서야 지킬 수 있게 됐다.

짠!

막 썰어서 가져온 막 회에 상식 아저씨 몰래 훔쳐 온 두꺼비 소주 한 잔을 따른다.

여기에 고즈넉한 어둠이 내려앉은 바다까지 곁들여지니 고급 술집이 부럽지 않았다.

“서해랑은 또 다르군.”

“다들 오면 그 소리부터 합니다.”

복잡한 세상만사에 치여 살다 끝없이 펼쳐진 동해를 보면 사뭇 가슴이 떨리곤 한다.

오랜만에 군복을 벗고 나온 김태하 소장도 그러한지 복잡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고맙다, 범석아.”

“예?”

“사태 수습해 준 거 말이야.”

자칫하다가는 협정은커녕 아무런 소득 없이 서울 요새로 돌아갈 뻔한 이솔하였다.

내가 상황을 수습해준 걸 아는 김태하 소장은 미안함과 동시에 고마움을 표했다.

“충청도 쪽 성과가 워낙 좋다 보니 자신감이 넘쳤던 모양이야. 강릉도 똑같이 진행하면 무조건 성공하겠다고 착각한 거지.”

길거리 고아부터 시작해 대통령 자리까지 오직 본인 능력으로만 올라왔다.

그 프라이드가 얼마나 강할 것이며 여태 쌓아온 자신감은 또 얼마나 충만하겠는가.

아마 나였어도 주변 충고나 각 지역 사정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반성하던 눈치던데요.”

“충격받았을 거야. 여태 탄탄대로를 달리다, 처음으로 실패한 거니까. 그나마 본인이 깨달은 걸 다행이라 해야 할지······.”

어차피 강릉과 관계가 파탄 난 이상 한반도 통합은 물 건너갔다고 봐도 좋다.

하지만 이솔하와 김태하 소장에게는 앞으로 서울의 미래를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었다.

여기서 만약 깨달은 게 없다면 강릉 때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고,

만약 깨달은 게 있어 변화한다면 언젠가는 다른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너무 큰 걸 놓쳤어.”

바다를 보며 한탄한 김태하 소장은 연거푸 소주를 마시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앞으로 나설 수도, 그렇다고 뒤로 빠질 수도 없는 그는 몹시 지쳐있어 보였다.

“소장님.”

“음?”

“강릉으로 언제든지 오셔도 됩니다.”

손에 너무 많은 걸 쥐고 있으려만 하면 정작 필요한 것을 줍지 못할 때가 있다.

목표도, 신념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가끔 흘러가는 운명에 순응할 필요도 있었다.

“······그럴 날이 꼭 왔으면 좋겠군.”

취기가 오른 김태하 소장은 그제야 표정을 풀며 강릉항의 풍경을 만끽했다.

바다는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름이라는 계절과 함께 철썩이고 있었다.

“소주 좀 더 가져올까요?”

“그래.”

부둣가에 앉은 우리는 경태가 데리러 올때까지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나눴다.

* * *

엠마는 납치 사건 이후 강릉항에 한 상가 건물을 빌려 임무 센터로 대신 사용했다.

물론 일본에 있는 동아시아 지부와 비교하면 규모도, 장비도 형편없었지만,

그녀는 한적한 바다가 넘실거리는 이 강릉이라는 지역이 점점 마음에 들었다.

“날씨 너무 좋다.”

한가한 일상이다.

오늘도 향긋한 커피 한 잔으로 하루를 시작한 엠마는 콧노래를 부르며 출근했다.

늘 그래왔듯 여유롭게 커피 한잔과 함께 업로드된 정보지나 읽을 생각이었다.

그래야 강릉이 서울 요새를 걷어차고 우리와 미연방과 협력한 보람이 있을 테니까.

“······응?”

하지만 한참 컴퓨터 화면을 들여보던 그녀의 두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잠, 잠깐.”

이게 무슨 말이야?

엠마는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모니터를 붙잡고 긴급 정보를 빠르게 읽어내렸다.

잘못 본 게 아니다.

본부에서 업로드한 정보지에는 애리조나지역이 레드 코드로 붉게 칠해져 있었다.

초록색도, 주황색도 아닌 붉은색.

그것은 곧 감염으로 인한 통제 구역을 의미했다.

달칵, 달칵.

입술이 바짝 마른 엠마는 빠르게 마우스를 움직여 애리조나와 관련된 정보를 찾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누군가 올린 30초짜리 동영상 파일을 하나 찾을 수 있었다.

[까야아아아악!]

[도, 도망쳐! 젠장, 도망가라고!]

경찰관 바디캠으로 추정되는 동영상에는 아비규환이 된 도시가 고스란히 찍혔다.

그곳은 피닉스, 다름 아닌 인구가 백오십만 명이나 되는 애리조나의 대도시였다.

[후퇴해! 도로에서 빠져나와!]

[시, 시발! 저기 몰려온다!]

대규모 감염 사태가 터졌는지 도로에는 감염체 무리가 우르르 쏟아졌다.

그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 아무리 융단 폭격을 가해도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엠마의 시선은 놈들이 몰려오는 정면이 아닌 그 끄트머리에 꽂혀 있었다.

[끄르륵, 큭!]

‘물리지 않았어.'

한 군인이 갑자기 호흡곤란을 호소하더니 바닥에 쓰러지며 검은 피를 토했다.

[끼이이이익!]

그리고 곧 몸을 기괴하게 비틀며 일어나 주변 군인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우연이 아니다.

똑같은 증세가 계속 이어진다.

[쿨럭! 쿨럭!]

달려드는 감염체를 쏴죽인 바디캠 주인이 검은 피를 뿜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 순간 모래 폭풍 같은 주황색 포자가 덮쳐오는 것을 끝으로 영상은 끝이 났다.

“- - - - - -.”

30초 동안 화면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엠마는 하얗게 질린 얼굴을 쓸어내렸다.

‘공기 중 감염으로 변이했다.’

치명적인 치사율을 보유하고 있던 바이러스가 이젠 치명적인 전염력까지 겸비했다.

그나마 대응이 가능했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이젠 정말 재앙이 되어 찾아온 것이다.

달칵, 달칵.

이미 사태를 파악한 미연방은 서둘러 기자 회견을 열고 빠른 대처에 들어갔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생겨난 줄도 모르는 바이러스 변이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

엠마는 지금도 실시간으로 퍼져나가는 레드 코드를 보며 겨우 정신을 차렸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당장은 아닐지 몰라도 바이러스 변이가 시작된 이상 한반도도 안전하지는 않다.

엠마는 황급히 전화기를 들어 회담으로 한창 바쁠 박범석을 빠르게 호출했다.

그녀가 가장 중요한 본부에 연락하는 건 그에게 모든 걸 설명하고 난 후였다.

* * *

미국 애리조나의 요제프 시티 군락에서 공기 중 감염을 일으키는 개체가 발견됐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첫 발견이지, 첫발생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파악하지 못한 군락에서 치명적인 변이가 진행 중일지도 모른다.

한참 회담 중이던 나는 급히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임시 시청으로 달려갔다.

“오늘 12시를 기점으로 보행 통제에 들어가겠습니다. 강릉으로 넘어오는 모든 장벽을 차단하고 난민은 따로 분리하세요. 항구로 들어오는 모든 선박도 마찬가지입니다.”

“알겠습니다!”

하루에도 수백 명이 넘는 캐러밴 상인과 다국적 상선이 오가는 곳이 강릉이다.

지금부터 철저하게 대비하지 않으면 나중에 가서 애리조나와 같은 꼴이 날 수 있다.

“신형 방독면은 얼마나 있습니까?”

“방위군 전체가 쓸 만큼은 충분합니다. 혹시 몰라 발주를 더 넣고 있어요.”

“잘하셨습니다. 틈나는 대로 주민들이 쓸 마스크랑 소독 용품도 확보해주세요.”

“혹시 공식 발표도 하실 겁니까?”

“숨겨봤자 오래 못 갑니다. 곧 발표할 테니 라디오 방송국에 미리 이야기하세요.”

아무런 설명 없이 구역을 통제하거나 움직임을 제한하면 도리어 역효과만 나온다.

차라리 모든 정보를 풀고 주민들과 주변상인들에게 협력을 구하는 편이 나았다.

“형님!”

“출발 준비 끝났습니다.”

그사이 벌써 출격 준비를 끝낸 경태와 최대위가 빠르게 추가 지시를 기다렸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책상에 쌓인 서류들을 치우며 지도를 그 위에 올려뒀다.

“동해랑 삼척은 순찰대가 대신 갈 겁니다. 특전대는 양양과 속초, 그리고 대관령과 그 부근을 전부 정찰해주시면 됩니다. 만약 군락으로 의심되는 무리나 그 정황이 보이면 다가가지 말고 위치만 기록해오세요.”

혹시 봄과 여름 동안 강릉 부근에 새로운 군락이 발생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미국처럼 위성을 쓸 수 없고 역시 직접 뛰어다니면서 찾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맡겨주세요.”

위험한 임무임에도 불구하고 그 둘은 든든한 대답과 함께 밖으로 뛰어나갔다.

삐리리!

진짜 정신이 하나도 없다.

나는 떨어진 서류를 줍다 말고 시끄럽게 울리는 위성 전화기를 꺼내 받았다.

“엠마.”

[연락이 늦어서 미안해요. 그래도 부탁하신 감염체 치료제는 소량 확보했어요.]

공기감염 사례가 발생한 순간부터 치료제와 백신의 중요성은 한없이 높아진다.

특히 이미 개발이 끝나 생산 중인 치료제는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전략 물자가 되었다.

다행히 이를 아는 엠마가 동아시아 지부로 먼저 움직여 치료제를 확보해주었다.

“몇 개나 됩니까?”

[23개요. 아마 이게 전부일 거예요.]

겨우 23개?

처음 약속했던 물량보다 한참 모자란다.

하지만 그 난리가 난 미연방을 상대로 툴툴거리기에는 내 담이 그렇게 크지 않다.

“혹시 백신 소식은 없습니까?”

[죄송해요. 그건 저도······.]

“괜찮습니다. 강릉에서 뵙죠.”

아무리 친구라도 국가 보안으로 취급되는 중요한 정보를 턱턱 던져줄 수는 없다.

현재 백신이 개발되냐 안 되냐에 따라 미국은 물론 인류 전체의 명운이 걸렸다.

전화를 끊은 나는 습관처럼 볼펜을 입에 물려 할아버지의 미래 일기를 떠올렸다.

‘아직이냐.’

틈이 날 때마다 희망 요새로 돌아가 미래일기가 집필되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녀석은 무슨 이유인지 끝까지 침묵을 지키며 아무런 미래도 예언하지 않았다.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나는 그 침묵이 제발 이유가 있기를 빌며 어느새 먹구름이 낀 하늘을 올려다봤다.

장마가 오고 있다.

사각, 사각, 사각.

[블라디보스토크 요새에 공기감염으로 인한 대규모 소요 사태가 발생했다. 주의! <검열! 삭제 예정> 주의! <검열! 삭제 예정>]

사각, 사각, 사각.

[<검열 거부>]

[다음 화 계속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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