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스의 상속자 83화>
블라디보스토크 요새.
현재는 무정부 상태인 러시아 영토로 함경북도와 그리 멀지 않는 거대 요새이다.
또 우리와는 석탄을 거래하며 동시에 교류를 꾸준히 이어가는 우호 관계이기도 했다.
그런데 하필 그곳이 변이 바이러스의 두번째 발원지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위험해.’
바다 너머가 아니다.
블라디보스토크와 한반도는 육로로 연결이 되어있다.
과거, 중국 본토에서 발생한 감염체 웨이브가 억 단위로 몰려왔던 것을 떠올리면 우리라고 마냥 안심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남아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나는 혼자 미래를 알고 있다는 답답함에 끙끙 앓으면서도 정책 방향을 변경했고,
언제든지 사태에 대응할 수 있도록 온갖 변수를 고려하며 만반의 준비를 했다.
쏴아아아아.
그렇게 폭풍 전야와 같은 시간이 지나, 눅눅한 여름 장마가 강릉을 적실 때쯤이었다.
“시장님!”
태식 씨가 다급히 집무실을 찾아왔다.
“블라디보스토크입니까?”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당황하는 태식 씨와 함께 집무실을 나섰다.
“예? 그걸 어떻게······.”
“일단 갑시다.”
원래 오기로 했던 블라디보스토크 소속 화물선이 하루 늦게 도착한 상황이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뻔하기에 나는 상황 설명 없이 즉각 동해항으로 향했다.
“이쪽으로 오시면 안 됩니다!”
“빨리 자택으로 돌아가세요!”
정동진 진입로에는 방독면을 쓴 방위군이 출입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그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치며 인사한 나는 해안 도로를 가로질러 동해항에 도착했다.
“이쪽입니다!”
항구에는 이미 한발 먼저 도착한 직원들이 바쁘게 방역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들을 따라 몸과 손을 소독한 나는 방독면을 챙겨 선착장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통제 명령이 떨어진 동해항 부둣가에는 늘 보던 석탄 화물선이 외롭게 서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대규모 감염 사태가 발생했답니다. 이미 도시 전체가 함락됐고 시민들은 모두 방공호로 대피했습니다.”
응 알고 있다.
“저들은요?”
“지원 요청을 하기 위해 목숨 걸고 빠져나온 모양입니다. 현재 격리 중이고 감염 증세가 있는지 면밀하게 살피고 있습니다.”
역시 꼼꼼한 태식 씨답게 하나부터 열까지 차근차근 잘 대응하고 정리해 왔다.
나는 그간 인재들을 키워온 보람을 느끼며 한쪽에 마련된 임시 천막으로 걸어갔다.
“시장님.”
“오랜만입니다.”
차지철을 포함한 강릉 의료진이 하얀색 방역복을 입은 채 나를 반겨주었다.
가볍게 눈을 마주치는 것으로 안부를 나눈 우리는 격리실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상태는 어떻습니까?”
“탈진한 몇몇 인원을 빼면 별다른 증세는 없습니다. 다들 건강한 상태예요.”
저들 중 한 명이라도 보균자가 있었으면 이렇게 침착하게 반응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다시 한번 온몸을 소독한 뒤 그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격리실로 다가갔다.
톡톡.
투명막을 두드리자 불안한 얼굴로 앉아있던 선원들이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내부와 연결된 무전기를 흔들며 이쪽으로 와보라는 듯 작게 손짓했다.
치익.
“강릉 시장 박범석입니다. 저희 구면이죠?”
방독면을 벗자 내 얼굴을 알아본 화물선 선장이 두 눈을 크게 뜨며 다가왔다.
그녀는 무어라 말을 더듬더니 이내 러시아 억양이 잔뜩 섞인 영어로 다급히 외쳤다.
[시, 시장님! 제, 제발 저희 좀 도와주십시오! 블라디보스토크가 지금······!]
“일단 진정하세요.”
감염 경로가 어디인지, 피해 규모는 어떠한지부터 알아야 사태를 파악할 수 있다.
나는 진정하라고 답한 뒤 격리실 내부로 말보루 담배와 독한 보드카를 넣어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곧 안정을 되찾았으며 드디어 투명한 막을 두고 나와 마주 앉았다.
“이제 말해보세요. 자세히.”
한숨을 푹 내쉰 화물선 선장 나탈리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증언을 시작했다.
[······평소와 별반 다를 게 없는 날이었습니다. 한창 농사철이라 바쁘고 어제보다 원정 캐러밴이 많이 찾아온 정도였어요. 그런데 그날 밤, 여관과 술집이 있던 건물에서 갑자기 대규모 감염 사태가 발생했어요.]
“상인들이 원인이었군요."
[네. 감염이 퍼져나가는 속도가 비이상적으로 빨랐습니다. 그나마 남아있던 자경대는 한순간에 전멸해버렸고 시민들도 겨우 방공호로 도망치는 게 고작이었어요.]
“그때 빠져나오신 겁니까?”
[마침 화물선에서 저랑 선원들이 탑승 중이었거든요. 일단 바다로 나오기는 했는데, 도움을 청할 곳이 강릉밖에 없었습니다.]
천만다행이다.
만약 거기서 이들이 화물선에 타고 있지 않았다면 블라디보스토크는 아무런 소식 없이 연락이 끊겼을 테니까.
나는 괴로워하는 나탈리와 선원들을 조용히 바라보다 이내 곰곰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아직 생존자들이 있다.’
자경대가 버텨준 덕분에 블라디보스토크 시민들은 방공호로 대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방공호가 있는 곳이 감염체가 득실거리는 도시 앞이라는 것이다.
한정된 식량과 물,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시민들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내가 아무런 말이 없자 불안감을 느낀 나탈리와 선원들이 울먹이며 고개를 숙였다.
[시장님. 제발······.]
난처하다.
생판 모르는 남이었다면 그러거나 말거나 강릉을 지키는 데 집중했을 것이다.
하지만 블라디보스토크는 요새는 남이라고 하기엔 무척 중요한 무역 파트너였다.
동시에 타이후 해적을 토벌하는 일에 선뜻 나서준 고마운 친구들이기도 했다.
물론 망설이는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다.
‘분명 경고해주려고 했어.’
미래 일기가 검열 거부라는 초강수를 두면서까지 무언가를 알려주려고 했다.
보통 그렇게까지 해주던 녀석이 아니었던걸 생각하면 무척이나 놀라운 변화였다.
스노우 볼의 냄새가 난다.
이번만큼은 적극 호응을 해줘야 한다.
반쯤 마음을 굳힌 나는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는 나탈리와 선원들을 향해 물었다.
“혹시 포자 같은 건 못 보셨습니까?”
[포자요······? 아니요. 못 봤습니다.]
엠마가 알려준 정보에 의하면 변이 바이러스의 주 근원지는 군락의 포자다.
그걸 목격하지 못했다는 건 보균자끼리 바이러스를 옮긴 2차 감염이 원인이라는 것.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이 같은 경우는 증세가 보인 즉시 치료제를 투여하면 충분히 회복할 수 있었다.
그래도 일말의 가능성을 찾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번 일은 저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닙니다. 하지만 최대한 지원을 보내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푹 쉬고 계십시오."
나탈리와 선원들을 안심시킨 나는 격리실을 빠져나와 다시 강릉으로 돌아갔다.
* * *
그날 밤, 정찰을 떠났던 특전대까지 전부 불러들여 시청에서 긴급회의를 개최했다.
우리는 증언을 통해 얻어낸 정보를 바탕으로 개인적인 의견을 자유롭게 나눠보았다.
“위험하군요.”
“처음 겪는 환경입니다.”
처음으로 나온 반응은 당연히 원정이라는 부담감과 공기 감염을 향한 경계심이었다.
배를 타고 원정을 나가 감염체가 득실거리는 도시에서 사람을 구해와야 한다니.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겠는가.
거기다 여차해서 방독면이 벗겨지거나 파괴되어 감염체가 돼버릴 수도 있었다.
나와 대원들이 최우선으로 걱정하는 건 역시 사상자가 발생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충분히 할만합니다.”
하지만 작전이 쉽지 않다는 것이지 그렇다고 완전히 불가능하다는 건 아니었다.
아무래도 공기 중 감염을 막을 수 있는 신형 방독면이 충분히 있다는 점과.
최후의 보루나 마찬가지인 감염체 치료제를 소량이나마 소유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현재 도시를 점거한 감염체가 군락의 지휘를 받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생각보다 파고들 틈이 많다.
대원들은 의외로 긍정적인 의사를 보이며 자기들끼리 바쁘게 상의하기 시작했다.
“그럼 유인하는 건 어떻습니까?”
“마침 지형이 괜찮네요.”
군락의 지휘가 없는 놈들이야 어차피 소음을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멍청이들이다.
요새 밖에 자리를 잡고 포를 펑펑 쏴준다면 분명 우르르 밖으로 몰려나올 것이다.
“그럼 팀을 두 개로 나누죠.”
“현지인과 동행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사이 인솔 팀은 시민들이 대피한 방공호로 접근해 문을 열고 항구로 빼내 온다.
그리고 화력 팀이 시선을 끌어주는 사이 시민들을 선박에 태워 바다로 빠져나간다.
이렇게 되면 교전 거리가 가까운 것도 아니고, 굳이 무리할 필요도 없어진다.
거의 정공법이나 다름없는 작전에 대원들이 벌써 구체적인 경로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다행이다.
혹시나 반대하면 어쩌나 걱정이었는데 다들 하나 같이 적극적으로 나서주고 있었다.
나는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열중하는 대원들 사이를 괜히 기웃거렸다.
“아, 맞다! 도시는 어쩌실 겁니까?”
블라디보스토크 요새는 강릉의 주 석탄수입처이자 유일한 러시아 영토의 항구다.
하지만 감염체가 득실거리는 오염지역이 된 이상 이미 요새로서 의미는 사라졌다.
“소거하기로 했습니다.”
혹여나 군락으로 진화하기 전에 불로써 정화해 흔적조차 남기지 말아야 한다.
나는 망설임 없이 파괴할 거라고 답한 뒤 마지막으로 작전 날짜를 확인하려 했다.
치익.
[시장님,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그런데 그 순간 한참 동해항 현장을 정리중인 태식 씨가 무전을 보내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서울로 가는 귀빈 열차가 1시간 뒤 출발한다고 합니다. 만약 귀찮으시면······.]
“아닙니다. 제가 갈게요.”
아, 갑자기 상황이 이렇게 돼버린 탓에 마지막 인사도 없이 서울로 돌려보낼 뻔했다.
나는 나머지 정리는 대원들에게 맡긴 뒤 서둘러 강릉역을 향해 급히 차를 몰았다.
* * *
환영 행렬로 가득했던 첫날 모습과는 다르게 오늘 강릉역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강릉 주민들에게 제대로 밉보인 탓에 제대로 된 배웅조차 받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강릉 시장인 나마저 그럴 수는 없었기에 서둘러 승차장으로 뛰어갔다.
마침 열차 입구에는 김태하 소장과 이솔하가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둘은 이미 많은 것을 내려놓았는지 슬프면서도 무척 아쉬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늦었네요.”
나는 이솔하와 먼저 가볍게 악수한 뒤 김태하 소장과 주먹을 꽉 맞잡았다.
“바쁘지 않나? 안 와도 됐는데 말이야.”
“또 어떻게 그럽니까.”
“다음에는 서울로 한번 놀러 오게. 이번에는 서해에서 조개랑 같이 한잔하자고.”
당장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세상에서 지키고 싶은 약속만큼 귀중한 것은 없다.
나는 이번에도 김태하 소장과 소박한 술약속을 하며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눴다.
“먼저 들어가지.”
그리고 나와 이솔하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이내 먼저 열차에 탑승해버렸다.
아마 그녀가 내게 할 말이 있다는 걸 알고 눈치껏 자리를 피해준 모양이다.
“- - - - - -.”
어색한 기류가 흐른다.
이솔하는 생각이 많은지 계속해서 입술을 달싹였다.
나는 기다려줄까 하다가 곧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걸 깨닫고 미간을 찡그렸다.
“할 말 없으면······.”
“범석 씨.”
하지만 그 순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이솔하가 무언가를 결심한 얼굴로 다가왔다.
일정 내내 기죽어 있던 그녀는 처음 신문에서 볼 때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 사실 되게 부끄러웠어요. 이 자리까지 올라오면서 그렇게 무시당해 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거든요. 근데 더 분했던 이유가 뭔지 아시나요? 제가 틀렸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는 게 더 분하고 힘들더라고요.”
이솔하는 크게 숨을 훅 들이켰다.
“나는 이렇게 힘든데 박범석이라는 인간은 왜 아무렇지 않은 걸까? 나를 미워했으면 원망이라도 할 텐데 이미 관심 밖으로 밀려났어요. 그제야 알았죠. 아, 이 사람 눈에는 내가 애초에 경쟁 상대가 아니었구나.”
하고 싶은 다 내뱉은 이솔하는 카드키 하나를 꺼내 내 앞주머니에 냉큼 넣어버렸다.
“뭡니까?”
“저기 보이세요?”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열차 화물을 모아놓는 하역장이 보였다.
그곳에는 내가 모르는 사이 옮겨진 녹색 동결 상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저희가 미국으로부터 받은 감염체 치료제에요. 총 300회 투여할 수 있는 분량이고, 동결 장치로 안전하게 보관해뒀어요.”
뭐? 감염체 치료제?
23회를 아득하니 뛰어넘는 300회라는 분량에 나는 순간 깜짝 놀라 돌려주려고 했다.
“잠깐······!”
덜컹!
하지만 이솔하는 내가 하역장을 보고 있던 사이 이미 열차에 탑승한 지 오래였다.
“뇌물이에요! 강릉 분들께 꼭 죄송하다고 전해주세요!”
삐이이익! 경적이 울린다.
열차는 점점 속력을 내며 역과 빠르게 멀어졌다.
“야! 야 이 미친년아!”
졸지에 뇌물을 받게 된 나는 떠나가는 열차를 향해 카드키를 집어 던지려고 했다.
“아오, 시발!”
물론 못 던졌다.
나는 한 대 맞은 것처럼 얼얼한 뒤통수를 만지며 카드키를 꾹 쥐었다.
이래서 태생이 로비스트들인 인간은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