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의 상속자-84화 (84/180)

<아포칼립스의 상속자 84화>

강릉의 모든 업무가 일시 정지됐다.

현재 여력이 되는 기술자와 행정 직원들은 전부 동해항으로 투입되었고,

이번 블라디보스토크 원정을 위한 대규모 작업 현장에 사활을 걸고 매달렸다.

‘제대로 만들어봅시다.’

지난번 타이후 해적을 토벌하기 위해 임시 개조했던 상선들로는 턱도 없다.

이번 원정의 중요성을 아는 기술자들은 아예 작정하고 개조 작업에 들어갔다.

치이익, 칙!

마치 조선소를 방불케 하는 현장과 빠른 속도로 개조를 끝내가는 원정용 선박들.

그들이 밤낮없이 일해준 덕분에 걱정했던 운송 준비는 채 사흘이 걸리지 않았다.

‘동해항으로 집결!’

그리고 그 노력에 호응하듯 강릉 방위군의 첫 번째 원정 투입이 결정되었다.

그동안 거점을 방어하고 작전을 보조하던 2선급 역할에서 벗어나 당당히 주 전력으로 전투에 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려와는 달리 방위군 사기는 하늘을 찔렀고 주민들 또한 이를 기꺼이 지지해주었다.

‘인명이 최우선이다.’

이번 블라디보스토크 원정은 지난 벌여왔던 전쟁과는 그 성향이 사뭇 다르다.

우리는 인원 한 명당 신형 방독면, 예비용 전면부 하나, 예비 정화통을 보급했고,

이번에 증여받은 감염체 치료제를 의무병이 아닌 각 개인에게 모두 지급해주었다.

아까울 것 없다.

물건이 아무리 귀하다고 한들 사람의 목숨보다 존귀하겠는가.

나는 자가 주사기 형태로 된 감염체 치료제를 언제든지 투여할 수 있도록 교육했다.

그렇게 시간은 지나 8월 중순.

여름 내내 내릴 것 같은 지겨운 장맛비가 서서히 그치며 곧 바다가 잠잠해졌다.

드디어 출발할 때가 온 것이다.

에에에에에에에에엥 - -!!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를 듣자마자 막사에서 쉬고 있던 방위군이 우르르 쏟아져나온다.

“빨리! 빨리!”

“늦으면 놓고 간다!”

그들은 신속하게 탄약과 장비를 챙겼고, 곧 정해진 선박에 빠르게 탑승하기 시작했다.

수십 번 반복했던 과정이다.

방위군은 첫 실전임에도 불구하고 한 치의 실수 없이 모든 준비를 끝 맞췄다.

“장비 마지막으로 점검해!”

“이상 무! 준비됐습니다!”

마찬가지로 무장과 장비를 챙긴 특전대 또한 블라디보스토크 화물선에 탑승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자리에 앉아 작게 심호흡했고 이내 우렁찬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출항!”

부우우우우우웅 - - - -!!

우렁찬 뱃고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선박들은 일제히 동해항을 벗어나기 시작한다.

항구에는 그들의 가족, 연인, 친구들이 무사 귀환을 바라며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떠오르는 일출과 바다를 빼곡하게 채운 선박 행렬.

동해는 마치 우리의 개선을 환영하듯 드넓은 바다 위로 햇빛을 흩뿌려주었다.

* * *

수많은 사람을 태우고 먼바다를 항해한다는 건 그리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목적지도 어디 섬이 아닌 무려 바다 건너 블라디보스토크가 아닌가.

이런 먼 원정은 처음이었던 나와 일행들은 항해 초기에는 무척 걱정이 많았다.

치익.

[어이 박 씨! 너무 뒤처지는 거 아니야?]

[장거리 첨 뛰어봐? 기름 아껴야지!]

하지만 걱정과는 달리 강릉항 선장들은 별 무리 없이 화물선을 따라오고 있었다.

바다를 업 삼아 살던 그들에게 이런 장거리 항해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다.

덕분에 험난했던 원정길은 낙오하는 이 한 명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치익.

[형님?]

어둠이 내려앉은 늦은 새벽이다.

한참 선실에서 새우잠을 자던 나는 오늘 당직인 경태의 호출에 잠에서 깨어났다.

“으응. 일어났어.”

[곧 도착이랍니다.]

예상 시간보다 반나절이 늦었다.

그래도 도착한 게 어디냐는 생각에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나 선교로 올라갔다.

선교 조종실에는 화물선 선장인 나탈리와 경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쪽입니다.”

망원경을 건네받고 나탈리가 가리키는 오른쪽 3시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보인다.

블라디보스토크 요새다.

어둠이 짙게 깔린 지상에는 수많은 감염체가 바퀴벌레처럼 우글거리고 있다.

나는 이미 지옥을 변해버린 요새를 조용히 바라보다 이내 망원경을 내리며 말했다.

“당직들 불러서 보고해.”

어차피 일정이 반나절 밀린 마당에 굳이 무리하면서까지 진입할 이유는 없다.

나는 작전 시작을 일출로 설정해 둔 뒤 피곤해 보이는 경태의 어깨를 툭 쳤다.

“넌 들어가서 잠깐 쉬어.”

“예? 하지만······.”

“그럼 이 꼴로 나가게?”

최상의 컨디션이어도 모자랄 마당에 피곤한 몸으로 작전을 수행할 수는 없다.

경태를 억지로 돌려보낸 나는 간이의자에 앉아 대신 마지막 당직을 서주었다.

한 3시간 남았나?

졸음을 쫓기 위해 타온 커피믹스를 마시고 주섬주섬 꺼낸 담배를 물려고 했다.

치익, 치이익!

“음?”

그런데 그 순간 선교 무전기에 블라디보스토크 요새로 추정되는 신호가 잡혔다.

[여, 여기는 블라디보스토크 요새입니다.혹시 아무도 없습니까? 이 방송을 듣고 계신다면 제발 응답해주십시오. 저희는 현재 감염체 사태를 피해 급히 도시 방공호로 대피한 상황입니다. 식량이 없습니다. 벌써 이틀째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있어요.]

“세르게이? 세르게이 나야!”

서로 아는 사이인지 얼굴이 환해진 나탈리 선장이 다급히 교신에 응답했다.

하지만 세르게이라는 남성은 울먹이는 마지막 음성을 끝으로 무전을 끊었다.

[누구라도 좋습니다. 이 방송을 들은 아무나 제발 블라디보스토크 상황을 밖으로 알려주세요. 신이 우리와 함께하시길······.]

뚝.

이미 과거에 녹음된 무전이었는지 이후 내용은 구해달라는 구조 신호뿐이다.

허무한 외침만을 이어가던 나탈리는 결국 어두운 얼굴로 무전기를 내려놓았다.

‘좋지 않아.’

수용 인원이 너무 많은 탓에 방공호에 비축된 식량은 이미 모두 소진됐다.

식수라도 있으면 어떻게든 버텨볼 텐데 목소리를 보아 그것도 여의찮은 모양.

어쩌면 우리가 도착한 지금이 그들의 마지막 골든타임이 될지도 모르겠다.

털썩.

나는 묵묵히 자리에 앉아 단맛이 느껴지지 않는 맹맹한 커피를 입 안에 머금었다.

쓴내가 조금은 가시는 기분이다.

그렇지 않은 기분에 비해서 말이다.

* * *

드디어 새벽이 밝았다.

나는 대기 중인 대원들 틈바구니에 앉아 마지막으로 개인 장비를 점검했다.

“껌 줄까?”

“씹던 거잖아.”

“두 번밖에 안 씹었는데.”

다들 사지로 들어가는 사람치고는 비교적 침착하게 상황을 기다리고 있었다.

쿠르르르르릉 - - -!!

그 순간 저 멀리서 진동이 느껴진다.

요새와 2km 떨어진 해변에 상륙한 방위군이 본격적인 포격을 가한 것이다.

[놈들이 움직입니다!]

당연히 시끄러운 폭음에 요새를 점거하고 있던 감염체들이 즉각 반응한다.

놈들은 요새 후문으로 우르르 쏟아져 나와 해변을 향해 빠르게 몰려가기 시작했다.

투쾅! 투쾅!

하지만 강릉 방위군은 침착하게 2차 포격을 가하며 몰려오는 감염체를 상대했다.

[특전대 투입하세요!]

“가자!”

“다들 살아서 봅시다!”

우렁차게 기합을 내지른 특전대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고무보트에 탑승했다.

촤악!

모터를 단 고무보트는 순식간에 바다를 가로지르며 요새를 향해 빠르게 나아갔다.

철컥!

화물선이 배를 대는 동안 선착장을 확보하는 것이 우리의 첫 번째 임무다.

나와 대원들은 노리쇠를 당겨 장전한 뒤보트 밖으로 다리 하나를 걸쳤다.

끼이이이이익! 끼긱!

따다닥! 따닥!

폭음을 따라가지 않은 감염체 몇 놈이 선착장 부근을 어슬렁거리고 있다.

총알 몇 발로 깔끔히 집에 보내준 대원들은 서둘러 고무보트에서 내렸다.

[이상 무!]

[여기도 비었습니다!]

남은 적을 일소하고 공간을 확보하며 사각지대와 퇴로를 빠르게 확인한다.

대원들은 마치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여 선착장을 순식간에 점거했다.

이에 안전하다는 교신을 받은 화물선은 천천히 항구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최 대위!”

[맡겨주십시오.]

아무리 무사히 시민들을 구출했다고 해도 화물선에 못 태우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는 믿음직한 최 대위에게 퇴로를 맡긴 뒤 나머지 대원들을 이끌고 앞으로 나아갔다.

“- - - - - -.”

감염체를 유인하는 역할을 맡은 방위군은 적당히 싸우다가 후퇴할 예정이다.

그때까지 방공호에 도착하려면 조금 무리해서라도 빨리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덜컹, 덜컹!

정문에 도착했다.

개방되어 있던 후문과는 달리 요새 정문은 두꺼운 쇠사슬로 굳게 닫혀있었다.

“다른 길을 알아요.”

하지만 다행히도 통역을 위해 따라와 준 나탈리가 다른 쪽 길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그녀의 안내를 따라 장벽 바로 옆, 숲이 우거진 한 공원으로 빠르게 들어섰다.

그리고 머지않아 요새 내부로 이어지는 적당한 크기의 배수구 구멍을 찾아냈다.

덜컹!

나탈리가 나무판자를 옆으로 치운다.

나는 가장 먼저 그 안으로 들어가 물이 졸졸졸 흘러내리는 배수구를 통과했다.

그러자 매캐한 연기와 함께 블라디보스토크 요새 내부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다.

“- - - - - -.”

쑥대밭이다.

이미 거리와 곳곳은 감염체놈들이 싸지른 더러운 오물로 가득하였다.

이미 둥지 화가 진행되고 있는지 건물 내부에는 오물과 쓰레기들이 가득 차 있었다.

아마 모르고 내버려 뒀다가는 또 다른 군락의 탄생을 예기했을지도 몰랐다.

“이쪽이에요.”

대원들이 전부 안으로 들어왔다.

지도를 일일이 확인할 것 없이 나탈리의 안내를 따라 요새 내부로 진입했다.

취익, 취익.

요새 중심지와 가까워질수록 유독 가스수치가 갑자기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나는 정화통을 수시로 확인하라고 지시한 뒤 더러워진 방독면 안면부를 닦았다.

간혹 보이던 까마귀도 사라진 번화가.

거리 곳곳에 남아있는 핏자국과 쓰레기들만이 지난 참상을 대변하고 있었다.

치익!

[300m 전방에 감염체 무리에요.]

시야가 넓어 지정 사수를 맡고 있던 가은이가 저 멀리 적을 발견해냈다.

이상하게 폭음을 따라가지 않은 감염체가 20마리 넘게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저기가 방공호 입구에요.”

아, 냄새를 맡은 모양이구나.

역시 표지판보다 확실한 지표는 바로 감염체다.

나는 방공호와 150m까지 접근했고 곧 수신호와 함께 총구를 들어 올렸다.

끼익?

따다다다닥! 다닥!

대원들이 방아쇠를 당긴다.

답답한 소음기 소음과 함께 놈들이 픽픽 쓰러진다.

이 정도는 몸풀기도 안 되지.

사격 한 번으로 깔끔하게 현장을 정리한 우리는 곧 방공호로 접근하려 했다.

[잠, 잠시만요!]

그런데 그 순간 버려진 차량 위에서 주변을 살피던 가은이가 무언가를 발견해냈다.

[11시 방향! 11시 방향이요!]

감염체인가?

다급한 목소리에 반응한 대원들은 서둘러 총구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저게······뭡니까?”

그곳에는 종양을 연상케 하는 끔찍한 살덩어리가 건물 사이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철퍽!

바닥에 떨어진 그 종양 덩어리는 곧 꾸물거리며 갑자기 움직임을 멈춘다.

찌릿!

그 순간 신경이 찌르르 울려댔다.

깜짝 놀란 나는 대원들을 뒤로 당기려고 했다.

퍼엉! 푸슈슈수숙!

종양 덩어리가 폭발했다.

폭발한 살점과 체액에서는 주황빛 포자가 발생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뛰어! 방공호로 뛰어!”

“가은아, 빨리!”

영상으로만 봤던 주황색 포자 구름이 엄청난 속도로 차도를 집어삼키고 있다.

이에 기겁한 우리는 유일한 대피소인 방공호를 향해 빠르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후우우우우웅 - - - -!!

포자는 엄청난 속도로 다가왔다.

나와 대원들은 전속력으로 방공호입구로 달려가 문을 부여잡았다.

쾅쾅! 쾅!

“세르게이 나야! 문 열어!”

나탈리가 연신 방공호 문을 두드리며 안에 있는 일행들 이름을 급히 불렀다.

그러자 내부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지더니 한 남성이 작은 틈을 열고 외쳤다.

“누, 누구십니까?”

“나라고 나탈리! 닥치고 문이나 열어어어!!”

포자가 80m 앞까지 다가왔다.

이러다 다 뒤진다고!

다행히 말귀를 알아먹는 남성은 서둘러 방공호 문을 개방하기 시작했다.

“들어가! 빨리!”

“우와아악!”

문이 열리자마자 나탈리와 대원들은 재빨리 방공호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몸을 집어넣으며 남자와 함께 방공호 문을 닫았다.

쿵!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