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의 상속자-85화 (85/180)

<아포칼립스의 상속자 85화>

정말 아슬아슬했다.

마지막으로 방공호 개폐 장치까지 꼼꼼하게 확인한 나는 그제야 뒤를 돌아봤다.

짧은 거리를 전속력으로 뛰어온 대원들은 방독면 안이 이미 땀으로 범벅이었다.

“증상 있는 사람 있습니까?”

아무리 방독면을 쓰고 있었다고 해도 혹시 포자가 피부나 옷에 닿았을 수도 있다.

빠르게 정신을 차린 대원들은 겉옷을 벗고 신발 밑창까지 꼼꼼히 검사했다.

“없습니다.”

“진짜 죽는 줄 알았네······.”

마음 같아서는 방독면을 벗고 잠시 한숨 돌리라고 하고 싶지만, 상황이 좀 그렇다.

나는 땀으로 젖은 장갑을 벗으며 퇴로에서 대기 중인 최 대위를 호출했다.

치익.

“최 대위.”

[도착하셨습니까?]

“예. 근데 문제가 조금 생겼습니다.”

원래라면 즉각 시민들을 데리고 화물선이 있는 선착장으로 합류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예고 없이 등장한 종양 변이종으로 인해 졸지에 여기 함께 갇히고 말았다.

[포자 구름을 쏜다고요······?]

“영상 속 그 변이종과 흡사합니다. 혹시 주변에 더 있을지 모르니 일단 후퇴하세요.”

포자 구름을 퍼트리는 종양 변이종을 상대로는 총도, 폭탄도 의미가 없다.

최 대위와 방위군에게는 일단 후퇴하라고 지시한 뒤 추가 연락을 약속했다.

머리가 아프다.

나는 입김으로 흐려진 방독면 유리 안면을 콩콩 두드리며 무전기를 소중히 챙겼다.

“그, 그게 정말이야?!”

한참 나탈리와 끌어안고 울고 있던 세르게이가 상황 설명을 듣자마자 깜짝 놀란다.

그는 자신들을 도와주러 왔다는 말에 우리와 차례차례 포옹하며 고마움을 표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움푹 들어간 볼과 퀭한 눈동자를 보아 그동안 정말 어지간히도 고생한 모양.

그래도 희망으로 차오르는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여기까지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곧 정신을 차린 세르게이는 우리를 요새 방공호 안으로 천천히 안내해주었다.

“이쪽으로 오시죠!”

전력을 최소화로 유지하고 있는지 방공호로 내려가는 계단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특히 금방이라도 귀신이 나올 것 같은 낡은 시설은 버려진 지하철을 연상케 했다.

“환기시설은 잘 작동합니까?”

“예. 보기와는 달리 주기적으로 점검합니다. 구소련 때 만들어진 곳이에요.”

구소련? 아, 그럼 걱정 없겠다.

나는 빠르게 수긍하며 세르게이 뒤를 따라갔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미약한 조명 불빛과 함께 방공호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치는 일단 이상 없습니다.”

오염 측정 결과 정상이다.

작게 환호한 대원들은 쓰고 있던 방독면을 서둘러 벗었다.

아무리 체력적으로 뛰어난 그들일지라도 온종일 방독면을 끼고 있는 건 답답했다.

나는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닦으며 방공호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다들 여기 모여 있었구나.’

방공호 한쪽에는 거지꼴을 한 블라디보스토크 시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들은 때아닌 소란에 몸을 무기력하게 움직여 생소한 동양인들을 바라봤다.

어색한 기류가 흐른다.

가족과 고향을 잃었다는 충격에 빠져 그들은 외부 변화에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보다 못한 세르게이와 나탈리가 앞으로나서 침울한 분위기를 환기했다.

“다들 앉아서 뭐 합니까! 일어나들 봐요!”

“강릉에서 오신 분들이래요!”

웅성웅성.

바깥 상황을 너무나 잘 아는 시민들은 처음에는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대원들이 갖춘 장비와 팔 한쪽에 달린 소나무 문장을 보자 점점 믿기 시작했다.

“······정말 강릉에서 왔다고?”

“진짜래! 저기 나탈리잖아!”

웅성거림이 점차 퍼져나갔다.

하나둘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시민들로인해 어느새 대원들 주변은 바빠졌다.

우는 사람, 웃는 사람, 그들은 하나 같이 고마움을 표하며 우리에게 몰려들었다.

어어, 이러면 곤란한데!

생각보다 격한 반응에 우리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다들 뭐합니까! 물러나요!”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나탈리가 나서자 시민들은 곧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반가움을 참지 못하고 잠시 몰려왔을 뿐 결코 예의를 모르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조합장님께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일단 블라디보스토크 지도자를 만나 상황을 설명해주는 게 우선이다.

인파를 헤치고 나온 우리는 세르게이의 안내를 따라 내부 시설로 걸음을 옮겼다.

“야, 좋았냐?”

“으, 으응?”

몰려온 인파 중에는 손을 잡는 노파도 있었고 격하게 포옹하는 아저씨도 있었다.

그중 한 젊은 여성에게 볼 뽀뽀를 받은 경태는 아직도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퍽!

가은이는 냅다 엉덩이를 걷어찼고 대원들은 그 모습에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분위기가 나쁘지 않다.

다들 말은 안 하고 있어도 시민들의 격한 환영 인사에 보람을 느낀 모양이다.

“이쪽입니다.”

나는 소총과 장비를 대원들에게 잠시 맡긴 뒤 안내를 따라 집무실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머리와 수염이 모두 하얗게 센 노인이 미간을 찡그린 채 앉아 있었다.

“무슨 일이냐, 세르게이! 내가 밖에서 소란 일으키지 말라고 분명히······.”

“외삼촌!”

노인. 아니, 블라디보스토크 요새의 조합장은 익숙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나탈리?”

둘이 친척 관계였구나.

조합장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힘껏 끌어안았다.

“살, 살아있었구나! 정말 살아있었어!”

살아남기만 했나.

무려 강릉까지 화물선을 몰고 와 지원을 요청하기까지 했다.

감동적인 재회를 잠시 기다려준 나는 드디어 만난 조합장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분은?”

“강릉에서 지원 요청을 받고 왔습니다. 저희랑 함께 요새 밖으로 탈출하시죠.”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강릉의 등장에 조합장은 순간 인지부조화가 와버리고 말았다.

“아아!”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쓰러질 듯 비틀비틀 다가와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신, 신이시여, 정말 감사합니다······!”

미약한 떨림이 느껴진다.

웅얼웅얼 입술을 달싹인 조합장은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외삼촌!”

“조합장님!”

깜짝 놀란 세르게이와 나탈리가 다가와 힘이 풀린 조합장을 황급히 부축한다.

나는 다급히 다가가 맥을 체크 했고 곧 밖에서 대기 중인 의무병을 불렀다.

“일단 소파로.”

“예!”

그동안 정신력 하나로 버티고 있던 몸이 그만 기력을 다해 힘이 풀려버린 모양이다.

나는 꽉 잡혀 있는 손을 겨우 떨어트린 뒤 의무병에게 조합장의 상태를 맡겼다.

“저희는 잠시 나가 있죠.”

여기 있어봤자 방해만 된다.

세르게이와 나탈리를 데리고 일단 집무실을 나섰다.

그가 깨어날 때를 기다려주면 좋겠지만,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 * *

“일단 기력부터 되찾아야 합니다.”

나는 현지 상황을 고려해 챙겨온 비상식량을 사람들 앞에 전부 꺼내놓았다.

최대한 압축한 분유 덩어리는 물에 타서 끓이면 부담 없이 쉽게 섭취할 수 있다.

세르게이와 나탈리는 즉각 묽은 죽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공평히 배급해주었다.

싸늘함이 감돌던 방공호는 오랜만에 뜨거운 열기와 맛있는 냄새로 가득 찼다.

“다 왔죠?”

시민들이 식사하는 사이 나와 대원들은 방공호 한쪽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우리 앞에는 세르게이가 건네준 블라디보스토크 요새 지도가 놓여 있었다.

“대부분이 노약자나 어린아이들이에요. 그중에는 거동이 불편한 이들도 있고요.”

“아무리 지름길로 찾아간다고 해도 항구까지는 최소 1~2시간은 걸릴 겁니다.”

살아남은 이들이 생각보다 많다.

그 말인즉슨 대열이 무척이나 길어진다는 것이다.

과연 거동이 불편한 이들을 데리고 항구 선착장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까.

촉박한 시간은 그렇다고 쳐도 종양 변이종의 존재는 너무나 큰 변수였다.

“시발, 뜬금없이 어디서 나타난 거야.”

“자기들끼리 쉐어라도 한답니까?”

나탈리는 분명 포자 구름을 보지 못했고, 그건 세르게이와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는 건 종양 변이종이 사태 이전이 아닌 이후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뜻이었다.

군락이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나는 미래 일기의 경고를 조용히 곱씹어보며 요새 지도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생각보다 이동 속도가 느렸지.’

마치 감염체를 망치로 다져다가 함박스테이크처럼 노릇하게 구워놓은 모습이다.

그만큼 이동 속도가 형편없었고 주변 지형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아 보였다.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대입해보던 나는 결국 한 가지 결과를 도출해냈다.

“요격합시다.”

“예?”

“접근하기 전에 처리하자고요.”

중요한 건 하나다.

놈이 피난 행렬에 접근하기 전 반드시 저지해야 한다는 것.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우리에게 있어 유일한 방법은 변이종을 먼저 요격하는 것이다.

“건물 옥상마다 요격팀을 배치할 겁니다. 단순히 한 자리에 계속 머무는 게 아닌 인솔팀을 수시로 엄호하는 게 목적입니다.”

“이동이 잦겠군요.”

“예. 인솔팀이 갈 구역을 먼저 확보함과 동시에 후방을 마지막까지 막고 올 겁니다.”

높은 옥상에서 시야를 확보해주고 다가오는 변이종을 먼저 처리해주는 임무다.

상당한 난이도와 높은 위험성에 대원들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갈게요.”

“재밌겠다. 저도 끼워주세요.”

은서가 먼저 지원했다.

뒤이어 이동 속도가 빠른 송지영과 일부 대원들이 자원했다.

물론 이에 포함될 나는 최 대위와 직통으로 연결되는 무전기를 문 상사에게 넘겼다.

“부탁한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 * *

끼이이익.

한참 바깥소리에 집중하던 세르게이가 조심스럽게 방공호 문을 열고 밖을 살폈다.

곧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확인했는지 나와 대원들을 향해 손짓했다.

“나오셔도 됩니다.”

다행히 어젯밤 내린 비로 인해 잔존하고 있던 포자 구름은 전부 사라진 상태였다.

다른 대원들보다 30분 먼저 작전을 시작한 우리는 정화통과 장비를 점검했다.

“이따 뵙겠습니다.”

“예, 예!”

그리고 세르게이가 문을 닫을 동안 기다려준 뒤 빠르게 이 구역을 벗어났다.

아직 해가 덜 뜬 새벽이다.

하지만 10분 전 포격을 시작한 방위군 덕분에 요새는 깨끗하게 비어 있다.

달칵.

소총의 안전장치를 푼 나는 뒤따라오는 대원을 향해 마지막 수신호를 보냈다.

‘목표 지점으로.’

그러자 대원들은 기다렸다는 듯 2명씩 찢어지며 미리 약속한 장소로 달려갔다.

물론 나 또한 이번 파트너인 가은이와 함께 저 멀리 보이는 번화가로 달려갔다.

탁! 탁! 탁! 탁!

달릴 때마다 등에 달고 있는 스나이퍼 라이플과 유탄 발사기가 무겁게 흔들린다.

하지만 차마 곡소리는 낼 수 없었던 나는 양보하는 척 가은이 뒤를 힘겹게 따라갔다.

치익.

[도착했습니다.]

[저희도 금방입니다.]

우리가 목표 지점에 도착할 때쯤 다른 요격팀에게서도 하나둘 교신이 전해졌다.

철컥!

나는 가은이와 함께 양각대를 거치한 뒤 건물 옥상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리고 미리 오물과 진흙을 묻혀놓은 위장막으로 몸을 가려 냄새마저 차단했다.

[도착! 정문 개방하겠습니다!]

요새 정면으로 접근한 송지영 중위가 굳게 닫혀 있던 정문을 개방하는 데 성공했다.

치익! 치익!

이 소식은 즉각 무전기를 통해 빠르게 전해졌고 인솔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아직 급할 필요가 없어.’

굳게 닫혀 있던 방공호 문이 열리자 몸을 웅크린 시민들이 빠져나오기 시작했고,

인솔팀은 정말 바쁘게 뛰어다니며 장벽너머에 있는 선착장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이제 시작이다.

조준경을 바삐 옮겨 언제 바뀔지 모르는 주변 기류를 꼼꼼하게 살폈다.

그사이 부지런히 방공호를 빠져나온 피난 행렬은 바로 앞 번화가로 진입했다.

치익.

[아직 이상 없습니다.]

치익.

[정문도 조용해요.]

이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좋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이라는걸 아는 만큼 주변 수색을 멈추지 않는다.

찌릿!

그 순간 사고 이후로 예민해진 감각이 갑자기 고개를 들어 나를 자극한다.

그쪽으로 조준경을 돌려보니 골목길로 한 이상한 형체가 기어 나오고 있었다.

‘찾았다!’

종양 변이종이다.

놈과 피난 행렬의 거리는 대략 500m.

나는 즉각 무전으로 이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주 사수인 가은이를 향해 방향을 알려주고 대구경 탄을 장전하게 했다.

철컥!

스으. 스으.

한 발로 끝내야 한다.

잔뜩 긴장한 가은이는 내 버릇을 똑같이 따라 하며 이빨 사이로 숨을 내쉬었다.

“쏴!”

투쾅 - - -!!

방아쇠를 당겼다.

바닥이 꾸웅 울린다.

총구에서 뻗어나간 대구경 총알은 허공을 빠르게 가로질러 정확히 목표를 관통했다.

펑!

종양 변이종이 폭발했다.

하지만 그때와는 달리 포자 구름은 채 50m를 넘지 못하고 가라앉았다.

“잘했어!”

“헤헤.”

무전기로 작은 환호성이 들려왔다.

우리는 이에 호응해준 뒤 다음 저격 포인트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갔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