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스의 상속자 87화>
턱.
시간이 얼추 지났다.
맨홀 뚜껑을 살짝 들어 올려 바깥 풍경을 살폈다.
다행히도 도로를 덮쳤던 주황색 포자 구름은 완전히 물러난 상태였다.
끼기긱, 끼익.
하지만 거리는 이미 폭음을 듣고 돌아온 감염체 무리로 완전히 가득 차 있었다.
탄약이 떨어진 방위군이 후퇴함에 따라 놈들이 다시 요새 내부로 돌아온 것이다.
귀소 본능?
자기들이 무슨 연어야?
놈들 숫자가 가지고 있는 총알보다 많다는 걸 깨달은 나는 깔끔하게 탈출을 포기했다.
치익.
“밖으로는 못 나갑니다.”
무전으로 상황을 중계받고 있던 모든 대원이 울분에 찬 탄식을 내뱉었다.
마찬가지로 뒤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경태와 가은이 또한 한숨을 푹 내쉰다.
‘젠장.’
요새 안에 완벽하게 고립됐다.
방위군이 재보급을 받고 돌아오지 않는 이상 빠져나가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시간이 넉넉한가?
아니, 현재 수중에 있는 거라고는 수통에 남아있는 미지근한 물이 고작.
흘린 땀과 소모한 체력을 생각하면 다섯 사람이 마시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치익.
[저희만 일단 남죠.]
[조금만 더 버티면 되는 거 아닙니까?]
내가 아무런 말이 없자 대원들은 당장 화물선에서 내려 찾아올 기세였다.
우리를 이대로 두고 간다는 가정은 아예 생각조차 안 해본 모양이다.
“시끄럽고, 일단 대기하세요.”
아무런 대책 없이 구조 작전을 펼쳤다가는 다른 대원들까지 개죽음당한다.
그들을 단호하게 저지한 나는 잠시 눈을 감은 채로 앉아 생각에 빠졌다.
‘정면 돌파는 불가능하다.’
현재 맨홀 근처에는 감염체와 종양 변이종으로 득실거리는 상태다.
여기서 만약 억지로 나갔다가는 100m도 가지 못해 저지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문득 무언가가 떠오른 나는 지하 깊숙이 이어진 하수도를 노려보았다.
“혹시 나탈리나 세르게이 씨 있습니까?”
무전기 너머가 소란스러워진다.
곧 호출받고 달려온 나탈리가 무전을 받았다.
[시, 시장님?]
“혹시 하수도가 밖으로도 연결이 됩니까? 구체적인 구조까지는 몰라도 됩니다.”
[잠시만요!]
보아하니 꽤 오래전 지어진 하수도 같은데 혹시 원로들은 알고 있을지 모른다.
나탈리는 급히 무어라 외치며 하수도에 대해 아는 시민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블라디보스토크 요새를 가장 잘 아는 인물이 무전을 대신 받았다.
[시장님, 저 조합장입니다.]
“예, 듣고 있습니다.”
[하수도가 워낙 예전에 만들어진 곳이라 출구가 어딘지는 정확히 모릅니다. 하지만 근처 바다로 이어진다는 건 분명합니다.]
하긴 제대로 된 정화 시설이 없는 이상 오수 대부분은 바다로 흘러나갈 것이다.
그나마 보이기 시작하는 가능성에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연락할게요.”
배터리를 아껴야 한다.
우린 정해진 시간에 다시 연락하기로 하고 교신을 끊었다.
잠시 목을 축이고, 총을 점검하고, 얼마 없는 장비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훌쩍.
뒤쪽이 부산스럽다.
드디어 의식이 돌아온 아이들이 눈물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경태 품에 안겨 있다.
샤샤랑 올가라고 했던가?
어린 나이에 비해 의젓하고 머리도 영특했다.
“애들 잘 챙겨. 정화통 수시로 확인하고.”
“네, 형님.”
구했으면 끝까지 책임져야지.
나는 경태의 어깨를 툭 치며 앞으로 걸어갔다.
이제 출발할 시간이다.
참방, 참방, 참방.
적막하다. 어둡고 눅눅하다.
물은 발목 아래 고여있고 지독한 냄새를 풍긴다.
하지만 일행들은 묵묵히 내 뒤를 따라오며 끝이 보이지 않는 하수도를 걸어갔다.
‘막막하군.’
현재 가지고 있는 거라곤 대략적인 방향만 알 수 있는 나침반이 전부다.
일단 방향은 감으로 잡고 가고 있는데 그게 바로 목적지일 확률은 낮았다.
운이 좋길 빌어봐야 하나.
나는 점점 체력적 한계를 느끼며 오물로 더러워진 방독면 유리를 닦아냈다.
후욱, 후욱.
10분.
20분.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어?”
갑자기 맨 뒤에서 따라오던 가은이가 깜짝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방금 무슨 소리 못 들었어요? 분명 아기 우는 소리가 들렸는데······.”
아무도 못 들었다.
아니, 애초에 하수도에서 아기가 울고 있을 리가 없지 않나.
슬슬 한계가 오는 모양이구나.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는 가은이를 향해 다가가 얼굴을 꾹 잡고 눈을 마주쳤다.
“심호흡해.”
“네, 네?”
“심호흡하라고.”
보통 이렇게 산소가 희박한 공간에선 환청을 듣고 헛것을 보는 일이 많다.
이러다 무너지는 전우들을 많이 봤기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정신을 다잡아준다.
후우, 후우.
그리고 숨이 안정될 때쯤, 체력이 고갈된 가은이를 업고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으으, 제가 걸을게요.”
“됐어.”
의지하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다.
나도 이둘에게 정신을 의지하고 있으니까.
이젠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잠시 숨을 고르며 재정비한 우리는 다시 어두운 하수도를 향해 걸어갔다.
첨벙, 첨벙, 첨벙.
우회전, 좌회전, 어디쯤 왔지?
이대로 못 찾고, 끝인가.
공간 감각이 먼저 사라지고 슬슬 시간의 흐름조차 점차 무뎌지고 있던 찰나였다.
“형님!”
그 순간 묵묵히 뒤따라오던 경태가 갑자기 내 어깨를 붙잡고 발목 아래를 가리켰다.
“- - - - - -!!”
아까보다 고여있던 물의 유속이 빨라졌다.
점점 아래로 내려가는 경사?
물이 어딘가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출구다!’
대충 나침반만 보면서 때려 맞춘 길이 정말로 출구와 이어지는 통로였다.
첨벙! 첨벙! 첨벙! 첨벙!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저 멀리 보이는 출구를 향해 바쁘게 뛰어갔다.
미세한 빛이.
미세한 빛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덜컹!
하수도 출구는 녹슨 철근과 오래된 거름망으로 막혀 물만 겨우 빠져나가고 있었다.
“비켜봐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경태가 있다.
아이를 잠시 맡긴 경태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출구를 향해 몸을 들이박았다.
쿵! 터엉!
그러자 녹슨 철근이 떨어져 나가며 신선한 산소가 정화통을 통해 들어왔다.
허억, 허억.
철썩! 철썩!
바로 아래는 깎아지는 해안 절벽이고 그 위로 높은 파도가 넘실거리고 있다.
출구가 요새 반대편이었다.
나는 무전기를 꺼내 출구를 찾았다는 기쁜 소식을 대원들에게 알렸다.
[금, 금방 가겠습니다!]
됐다!
기어코 탈출에 성공한 우리는 환한 웃음과 함께 거지꼴이 된 서로를 끌어안았다.
“살았다······!”
“으아아! 드디어 밖이다!”
덜컹!
“우왁!"
그런데 그 순간 너무 격하게 좋아하던 경태의 몸이 아래로 갑자기 훅 꺼진다.
깜짝 놀란 나는 떨어질 뻔한 경태를 간신히 잡고 뜬금없이 생긴 구멍에서 멀어졌다.
“뭡, 뭡니까!?”
“구멍이잖아, 멍청아.”
구멍치고는 좀 많이 큰데?
나는 라이트를 켜 그 구멍 안을 비춰봤다.
그러자 유독 가스 수치가 급격히 올라가며 익숙한 물체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둥지?’
감염체가 싸지른 오물과 나뭇가지 그리고 진흙더미가 서로 범벅이 되어있다.
치악산 군락 토굴 때 봤던 군락 둥지의 특성이 여기서 또 발견된 것이다.
순간 적막이 흐른다.
나는 경태와 가은이를 번갈아 바라보다 이내 홀더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쉿. 잠깐 여기 있어.’
‘혼자 가시게요?’
'금방 돌아올게.'
소리에 민감한 놈들이다.
혹여나 선박이 접근하는 소리가 들리면 어딘가로 도망쳐 버릴지도 몰랐다.
나는 입술 위로 검지를 올린 뒤 조심스럽게 구멍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차박.
위쪽보다 훨씬 넓은 하수도다.
하지만 위험한 군락 둥지치고는 그 어디에도 감염체나 변이종이 보이지 않았다.
철컥.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한 나는 거의 무음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둥지를 살폈다.
‘큰일 날뻔했구나.’
왜 군락이 안 보이나 했더니 이런 깊숙한 하수도에 은신처를 숨기고 있었다.
이러면 아무리 포격을 가한다고 한들 군락을 소거할 수가 없지 않은가.
소름이 쫙 돋은 나는 그 교활함에 놀라면서도 미래 일기를 떠올리며 감탄했다.
‘호위가 없어.’
알비노 변이종과 같은 개체가 없으니 감염체 통제가 제대로 이뤄질 리가 없다.
놈들은 지상에서 사냥감을 찾는 데만 혈안이 되었고 정작 중요한 군락은 뒷전이다.
그렇다면?
두 눈을 반짝인 나는 중앙으로 이어진 하수구를 따라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찾았다.’
그리고 발견했다.
둥지 중심부에는 오물과 흙으로 감싼 군락 고치가 너무나 무방비하게 놓여있었다.
끼이익?
군락이 침입자의 출입을 감지한다.
깜짝 놀란 고치는 머리가 어지러울 만큼 끔찍한 고주파와 사념을 보내왔다.
경악, 두려움, 공포!
같은 동족을 살해한 천적의 냄새가 놈의 생존 본능을 노골적으로 위협하고 있었다.
스릉!
하지만 나는 아랑곳 하지 않고 도끼 날을 날카롭게 갈아둔 토마호크를 뽑았다.
서걱! 서걱!
그리고 주변을 감싸고 있는 고치를 하나하나 끊어내며 군락 본체를 끄집어냈다.
“나와, 새끼야.”
철퍽!
블라디보스토크 요새를 집어삼켰던 군락의 정체는 겨우 축구공만 한 살덩이였다.
이 살덩이 하나 때문에 수만 명이 넘는 사람이 끔찍한 감염체로 변해버린 것이다.
끼이이이······
망설일 이유가 있는가?
나는 토마호크를 높이 들어 살덩이를 돈가스 다짐육처럼 만들어주려고 했다.
아니, 했었다.
‘잠깐.’
분명 엠마가 군락이나 변이종의 새로운 표본 데이터를 부탁한 기억이 있다.
그러면 샘플을 가져가는 것보다 원형 그대로인 상태로 가져가면 더 좋지 않을까?
이대로 가져가자니 너무 위험하고 한 90% 죽여놓은 다음 데려가면 될 것 같은데······
흉측한 토마호크 도끼와 군락을 번갈아 바라보던 나는 곧 좋은 방법을 떠올렸다.
‘혹시.’
전해 들은 바로는 중화항체가 아닌 항바이러스를 개발해 만든 치료제라 했다.
만약 그 감염체 치료제를 군락 본체에 투여하면 도대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뽁!
짧게 고민한 나는 꿈틀거리는 군락 살덩이에 치료제 주사기를 꽂아 넣었다.
삐이이이이이이익- - -!!
걱정과는 달리 놈은 엄청난 고통을 호소하며 서서히 수분을 잃기 시작했다.
[어, 어어? 변이종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러자 곧 지상에서는 종양 변이종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는 보고가 들려왔다.
어.이게 되네?
* * *
애리조나가 지도에서 사라졌다.
이를 시작으로 변이 바이러스는 유타, 네바다, LA로 빠른 속도로 번져나갔다.
특히 서부 인구 대부분이 모여있는 LA는 공기 중 감염에 너무나 취약했다.
“핵이라뇨! 거기 인구가 몇 명인데!”
[우리도 일단 필사적으로 말리고는 있네. 하지만 그만큼 본토 상황이 좋지 않아.]
이미 수많은 미군이 동원되어 방어선을 만들고 몰려오는 감염체를 저지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시민들과 그사이에 섞인 바이러스 보균자다.
여차하면 중부는 물론 최후의 보루인 동부마저 변이 바이러스가 퍼질 수 있는 상황.
그동안 완전 통제를 고수해오던 펜타곤은 진지하게 핵 공격을 생각하고 있었다.
“다들 미쳤어!”
공포로 이성이 마비된 나머지 중국이 어떻게 망했는지를 잊고 있는 모양이다.
엠마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을 애써 참으며 상관을 향해 다급히 물었다.
“치료제는요? 그게 제일 중요하잖아요!”
[LA에 있던 생산 시설을 급히 옮기는 중이야. 시기는 나도 장담할 수가 없군.]
최악이다.
그나마 유일한 방법이었던 치료제마저 보유 물량이 턱없이 부족하다.
엠마가 아무 말이 없자, 그의 오랜 상관 또한 피곤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나마 있던 항공편도 전부 끊겼어. 자네들한테는 미안하지만, 한동안은 그쪽에 남아있어 주게. 소식 있으면 다시 연락하지.]
화상 통화는 허무하게 끊겼다.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엠마는 벽을 빼곡히 채운 글자와 사진들을 노려보았다.
바이러스 변이.
단순히 한 군락이 공기 중 감염으로 진화했다면 상식선에서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진화는 미국 전역은 물론 전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견되었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지구 반대편에 있는 군락이 같은 형태로 진화를 한다는 게?
오랜 시간 이를 쫓아왔던 엠마로서는 마치 놈들이 하나의 군체처럼 느껴졌다.
토독, 톡.
또 비가 온다.
이틀 전 강릉으로 돌아온 엠마는 저 멀리보이는 바다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공기 중 감염이 발생한 블라디보스토크로 원정을 떠난 그녀의 또 다른 친구.
아무리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지만, 전화 한 번 해주지 않은 건 조금 너무했다.
이솔하 그년이 준 치료제에 홀린 건가······
엠마는 자존심 때문에 걸지 못한 위성 전화기를 노려보며 입술 한쪽을 삐죽였다.
삐리리리리 - -!!
하지만 그 순간 위성 전화기가 시끄럽게 울리며 박범석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깜짝 놀란 엠마는 서둘러 전화를 받았고 곧 믿을 수 없는 소식 하나를 접하게 된다.
“군락을······생포했다고요?”
잭팟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