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의 상속자-88화 (88/180)

<아포칼립스의 상속자 88화>

군락이 무력화됐다.

모체가 사라짐에 따라 종양 변이종은 마치 아이스크림처럼 녹아 소멸해버렸다.

요새를 점거하고 있던 감염체 무리 또한 밀집 통제가 풀리며 하나둘 와해했다.

수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재앙의 말로치고는 너무나 허무한 마무리.

우리는 훗날 위협이 될 수 있다는 판단하에 예정대로 요새를 소거하기로 했다.

퍼엉!

화르르륵!

아끼고 아껴두었던 소이탄을 전부 모아 블라디보스토크 요새를 향해 발사했다.

긴 역사를 자랑하던 도시이자 터전이던 요새는 그렇게 불꽃과 함께 타올랐다.

불로 정화해, 재로 돌아가리라.

갑판으로 나온 시민들은 그 광경을 보며 눈물을 흘렸고 또 마지막으로 기도했다.

부디 신이 육신과 영혼을 자유롭게 하여 죽은 이들은 보살펴주기를 빌며 말이다.

마지막 소거 작전을 끝으로 항구에 모여있던 모든 선박은 강릉을 향해 출항했다.

“정말 이렇게 둬도 되는 겁니까?”

“군락이 냉동식품도 아니고······.”

생포한 군락은 일단 감염체 치료제를 담는 동결 장치에 집어넣어 버렸다.

놈의 끔찍한 번식력을 생각하면 본체가 회복되는 것부터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어? 얘 잔다.”

하지만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우려와는 달리 군락은 멀쩡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아마 일정 온도 이하가 되면 몸을 보호하기 위해 가사 상태에 빠지는 모양이다.

진짜 생명력 하나는 끈질기구나.

모든 걸 얼게 만드는 동토도, 뜨거운 사막도 놈에게는 아무런 제약이 아니었다.

“이건 어쩌시게요?”

“미국에 넘겨야지.”

현재 감염체 연구와 백신 개발이 가능한 나라는 초강대국 미국이 유일하다.

이번 사태에 심각성을 느낀 나는 최대한 넘기는 쪽으로 협상을 진행할 생각이다.

거래도 여유가 있을 때 하는 거지 망해가는 가게를 붙잡고 흥정할 수는 없으니까.

치익.

그 순간 아래층에서 요새 시민들과 면담중이던 송지영으로부터 무전이 날아왔다.

[선배!]

“어.”

[조합장님이 면담을 원하세요.]

인원 체크, 감염 여부 등등을 확인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일행들이다.

그래도 업무와 분류가 점점 정리되는 분위기인지 조합장 쪽에서 나를 찾았다.

“금방 갈게.”

안 그래도 할 말이 많다.

나는 금방 가겠다는 말과 함께 모자를 쓰고 나섰다.

지하 1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자 마중 나온 송지영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선배! 여기예요!”

생활 공간으로 개조한 화물칸에는 수많은 시민이 모여 웅성웅성 떠들고 있었다.

다들 하나같이 얼굴이 심각한 것을 보아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모양이다.

다들 불안한가 보네.

하긴 정들었던 고향을 떠나 먼 타지에 정착한다는 게 그리 쉬운 선택은 아니었다.

탁, 탁, 탁.

내가 모습을 드러내자 한참 심각하게 떠들던 시민들이 일시에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고마움, 존경, 동시에 깊은 호의가 가득 담겨 있는 눈동자로 다가왔다.

“강릉 시장!”

그중 가장 바쁘게 주민들을 챙기던 조합장은 다짜고짜 다가와 내 손을 붙잡았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예! 좋다마다요!”

그동안 영양실조와 과로로 고생해서 그렇지 원체 기본 신체조건이 좋은 양반 같다.

금세 기운을 되찾은 조합장은 내 손을 꾹 붙잡은 채 연신 고마움을 표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아뇨, 할 일을 한 겁니다.”

타이후 해적 토벌 당시 블라디보스토크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그들이 강릉을 기꺼이 도왔듯 강릉 또한 그들을 위해 기꺼이 나선 것뿐이었다.

“일단 앉으시죠.”

경태를 향해 커피 두 잔을 부탁한 나는 조합장을 데리고 구석 자리에 앉았다.

일단 큰 위기를 넘겼으니 이제는 앞으로의 일을 한번 생각해볼 시간이었다.

“혹시 계획은 있으십니까?”

“······아직 결정된 건 없습니다.”

그래, 이해한다.

조합장은 현재 요새는 물론 그동안 비축한 물자, 선박, 거래처까지 모두 잃어버렸다.

사실상 맨손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다른 지역 정착이 그리 쉬울 리가 없었다.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역시 강릉으로······.”

“아뇨,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강릉이 흡수하기에는 문화 언어가 너무 달라 주변을 겉돌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느니 차라리 강릉 지배하에 있는 영토로 그들을 정착시키는 게 좋았다.

“동해시 아래 남는 땅이 있습니다. 저희는 삼척이라 부르는 곳인데 현재는 비어있죠.”

영동 지방에 속해있는 삼척은 다른 지역에 비해 그 면적이 무척 넓다.

하지만 지난 감염체 사태로 인해 현재는 사람이 살지 않고 있는 땅이 되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나는 마치 집을 파는 중개업자처럼 한반도 지도를 꺼내 조합장에게 보여주었다.

“삼척시 바로 옆이 바로 이 태백이라는 곳입니다. 과거, 석탄 광산이 있던 곳이죠.”

“아아!”

세월이 지남에 따라 생산량이 줄어들었지만, 태백은 분명 석탄을 캐냈던 곳이다.

베테랑 광부와 기술을 소유한 이들이라면 충분히 광산을 운용할 능력이 있었다.

“원래 매입하던 가격 그대로 1년 치 납부금을 선지급하겠습니다. 물론 지역 방위와 태백 진출 또한 저희가 지원할 거고요.”

현재 동해시 하나를 흡수하는 것 만해도 슬슬 힘에 부치고 있는 강릉이다.

하지만 만약 이들이 삼척에 정착해 지역개발을 대신해 준다면 말이 달라진다.

“그럼 시장님께 남는 건 뭡니까?”

“친구가 남습니다.”

“친구?”

“같은 피를 흘린 전우 말입니다.”

석탄 국내 생산, 인구 증가, 영향권 확대와 영동 지방 전체를 아우르는 공권화.

강릉은 단순 요새 연합을 넘어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지역 패권자가 될 것이다.

“······친구라.”

오랜 시간 요새를 이끌었던 조합장은 형제라는 단어를 조용히 곱씹어보았다.

그리고는 곧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세르게이와 나탈리를 향해 바삐 손짓했다.

“세르게이! 나탈리!”

깜짝 놀란 그 둘은 봇짐에서 보드카와 잔 두 개를 꺼내 바삐 테이블로 달려왔다.

뽕! 뚜껑을 딴 조합장은 한가득 보드카를 채우며 잔을 내밀었다.

이것이 블라디보스토크의 방식인 걸까.

나는 기꺼이 잔을 받아들었다.

“건배합시다.”

죽어간 이들을 위해, 앞으로 살아가야 할 이들을 위해 오늘만큼은 건배합시다.

챙!

잔을 부딪친 조합장과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안으로 술을 털어 넣었다.

* * *

이번 블라디보스토크 원정으로 인해 감염체 치료제의 성능이 확실히 입증되었다.

감염체를 직접 상대했던 방위군 쪽에서 무려 80개가 넘는 치료제가 사용된 것이다.

80개가 소모되었다.

그 말인즉슨 80명이 넘는 이들의 목숨을 건졌다는 뜻이다.

그래.

그냥 깔끔하게 인정하기로 하자.

만약 이솔하가 치료제를 뇌물로 주지 않았다면 이번 원정은 실패했을 것이다.

‘치료제 잘 썼습니다.’

나는 직접 전화를 걸어 감사 인사를 전했고 동시에 이번 성과를 조금 공유해주었다.

강릉을 제외하면 오직 미국밖에 알지 못하는 포자 군락에 대한 중요한 정보다.

그 가치를 알고 있는 이솔하는 크게 기뻐하며 더 많은 치료제를 공급해주려 했다.

‘선약이 있어서······.’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제 그 정도 뇌물로는 이 몸을 놀라게 할 수 없었다.

우리 ‘물건’을 가져갈 진짜 고객이 현재 바다를 건너 이곳으로 오고 있었으니 말이다.

원정이 끝나고 정확히 사흘 뒤, 미연방이 드디어 거대한 엉덩이를 움직였다.

끽해야 요원 몇몇 보내고 생색내던 과거와 달리 강릉으로 직접 협상단을 보냈다.

“델타포스······?”

“진짜 작정했나 봐요.”

협상단은 무려 델타포스의 호위를 받으며 입국했고 곧 우리와 마주하게 되었다.

“반갑습니다, Mr 박.”

“저도 반갑습니다, 하트만 씨.”

끽해야 팀장급 요원이나 엠마의 상관인 정보국 부장을 보내올 줄 알았다.

하지만 우리 눈앞에 있는 건 무려 의회 배지를 달고 있는 진짜 하원 의원이었다.

예상치 못한 거물의 등장.

김춘식 회장과 태식 씨는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식은땀을 삐질 흘리고 있었다.

“먼저 협상이 급히 진행된 점, 연방을 대신해 사과드립니다. 현재 저희가 의전에 신경 쓸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혹시 보관 중인 물건부터 직접 볼 수 있겠습니까?”

얼굴이 어두운 하트만 의원 말대로 절차를 하나하나 따지고 있을 여유가 없다.

나는 도리어 그쪽이 편하다고 대답한 뒤 밖에서 대기 중인 대원들을 불렀다.

쿵! 덜컹!

그리고 군락이 담겨 있는 동결 장치를 바닥에 내려놓고 잠금장치를 개방했다.

그 속에는 치료제를 맞고 무력화된 군락 본체가 고스란히 잠들어 있었다.

“군, 군락 본체가 맞아요.”

이에 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한 중년 여성이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연구소장을 맡고 있다고 했던가, 그녀는 반짝이는 눈으로 군락을 살폈다.

“생성된 지 얼마 안 된 군락입니다. 본체를 두 눈으로 보는 건 저희도 처음이에요.”

하긴 어떤 미친놈이 군락에 치료제를 꽂아 냉동 상태로 가져올 생각을 했겠는가.

그만큼 희귀한 사례이고 동시에 반드시 확보해야 할 중요한 생체 표본이었다.

텅!

“아······!”

내가 손가락을 까닥이자 대원들은 다시 동결 장치를 닫고 잠금장치를 걸었다.

이에 연구소장은 안타까운 신음을 내뱉으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이제 생산적인 대화를 나눠보시죠.”

그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또 앞으로도 많은 도움을 받게 될 미연방이다.

하지만 마냥 호구처럼 달라는 걸 막 줘버릴 만큼 우리 사정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원하는 게 뭡니까.”

“딱 하나면 됩니다.”

나는 표정을 굳힌 협상단을 향해 오직 '하나’를 강조하며 동결 장치로 손을 올렸다.

“백신.”

감염체 바이러스로부터 인간을 보호할 백신이야말로 현시대의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백신을 확보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것이고 또 파괴된 문명을 재건할 수 있다.

“으음.”

이를 충분히 예상하였을 하트만 의원은 무거운 한숨과 함께 미간을 찡그렸다.

덩달아 분위기는 차갑게 식었고 불편한 침묵이 우리와 협상단 사이를 오갔다.

이에 답답함을 느낀 연구소장이 감정에 호소하려는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감히 값을 매길 수 없는 물건이에요. 협상이 지체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목숨값입니다.”

“네?”

“이거, 제가 받아야 하는 목숨값입니다.”

제대로 가격을 쳐주지 않는다면 강릉을 위해 죽어간 이들을 볼 면목이 없다.

내가 맞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무슨 일이있어도 강릉 전체에는 백신을 보급할 거다.

“꼭 백신이어야 합니까?”

“예.”

하트만은 협상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마지막 물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결국 이 자리를 떠나는 것이 아닌 우리에게 손을 내미는 것을 선택했다.

“좋습니다.”

탁!

긴장의 끈이 풀렸다.

김씨 일가와 상대측 협상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백신이 개발되는 즉시, 강릉 전체 인구가 맞을 분량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차후 정확한 수량은 연락을 통해 상의해보시죠.”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큰 결정을 해준 하트만 의원과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일행들은 이에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느꼈는지 조용히 코를 훌쩍였다.

한낱 소형 요새였던 강릉에서 미국 다음으로 백신을 확보하는 순간이었다.

“그럼 물건 운송은 어떻게?”

“아, 말씀드리는 걸 깜빡했군요. 혹시 근처 양양 공항을 사용해도 되겠습니까?”

“단순 활주로라면 가능합니다. 그런데 굳이 양양에서 출발할 이유가······.”

하트먼은 난감하다는 얼굴로 눈썹 한쪽을 찡그리더니 이내 조용히 속삭였다.

“계속 정보가 새서 말입니다.”

“정보요?”

“일본이 이상하게 모든 상황을 알고 있더군요. 내부를 조금 살피는 게 좋겠습니다.”

사각, 사각, 사각.

[보물을 탐내지 않는 이는 없다. 특히 그게 세상에서 제일 희귀한 보물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하지만 보물이 스스로 빛을 낸다고 하기엔 소문이 퍼지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마치 누군가 이를 보고 있는 것처럼.]

[정보를 밖으로 빼돌리는 주범을 찾아야 한다. 놈들은 이미 강릉 내부 깊숙한 곳에 숨어들어 본격적인 혼란을 기다리고 있다. 사태가 더욱 심각해지기 전 ‘그’는 이를 뿌리뽑고 마땅한 대가를 치르게 해줘야 한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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