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목표를 달성한 협상단은 곧바로 미 공군 군용기를 불러 본토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양양 공항의 활주로 상태가 생각보다 좋지 않았던 탓에 출발은 지체되었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인력과 물자를 투입해 시설을 새로 보수해주어야 했다.
나 같으면 진즉 요코하마로 경유해 나갈텐데 일본을 어지간히도 경계하는 모양.
뭐, 그만큼 신중히 움직이겠다는 뜻이니 우리도 기꺼이 협력해주기로 약속했다.
이제 슬슬 여름도 막바지다.
한창 바쁘게 달려온 강릉은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한 휴식기에 들어가는 듯했다.
“프락치가 있다 이 말이지?”
오랜만에 믿을만한 원년 멤버를 전부 모아 강릉항 허름한 횟집으로 모였다.
모인 이유는 당연히 내부에서 정보를 수집해 유출하는 스파이에 대한 문제였다.
KLF 때도 그렇고 내부 첩자는 항상 우리를 위협하는 중대 사항이었으니까.
도대체 이 쥐새끼가 어디에 숨어있을까.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춘식 회장이 가장 먼저 용의 선상을 좁혀갔다.
“번영회 직원들은 아닐 거야. 만약 있었다면 태식이나 내가 먼저 눈치챘겠지.”
과거, 정보를 유출했던 박 대리 사건 이후 강릉항에는 감사팀이 만들어졌다.
그 총괄이 김춘식 회장인 걸 생각하면 번영회 내부에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저희 대원들도 마찬가지예요.”
원정 첫 진입부터 마지막 후퇴까지 모두 함께한 특전대 또한 말해봐야 입 아프다.
거의 24시간 함께 붙어있다시피 한 대원들이 그랬다면 분명 낌새가 있어야 했다.
“우린 무슨 일이 있는지도 몰랐어.”
뭐 상식 아저씨가 관리하는 지역 순찰대야 애초에 바깥일은 아예 모르는 상황.
용의 선상을 점점 좁혀가던 일행들 머릿속에는 자연스레 한 집단이 떠올랐다.
“······방위군.”
강릉에서 제일 큰 규모를 가진 집단에 인원 대부분이 난민 출신으로 구성되어있다.
접근성이 좋은 만큼 내부로 숨어들거나 정보원을 심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이 정도면 용의선상이 충분히 좁혀졌다.
“쯧, 하필 이럴 때.”
하지만 문제는 일이 밝혀진 현재 시기다.
그동안 실전 경험이 없었던 방위군이 이번 원정을 통해 성공적인 성과를 이뤘다.
당연히 병사들 사기는 하늘을 찔렀고 내부 조직력은 더욱 견고해진 상태다.
그런데 하필 이럴 때 방위군으로 들이닥쳐 내부 스파이가 있는지를 조사한다?
의도와는 상관없이 난민 출신에 대한 안좋은 소문과 인식이 생길 수도 있었다.
예전처럼 주먹구구식으로 해결하기에는 현재 강릉은 너무나 커지고 복잡해졌다.
“비밀리에 움직일 수 있을까요?”
“꼬리를 자르고 도망칠 수도 있어.”
한밤중 시작된 회의가 길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뜻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일행들 얼굴에서 피곤함을 느낀 나는 어쩔 수 없이 상황을 정리하고자 나섰다.
“그럼 굳이 헤집지 맙시다.”
“그냥 넘기시려고요?”
“설마요.”
맑은 물속 진창을 헤쳐 괜히 다른 물고기들까지 도망치게 할 필요는 없었다.
보통 내부 프락치들이 가장 조급해지는 시기가 보물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거든.
늘 그렇듯 미끼를 던진다.
우리가 가장 잘하는 낚시질을 하기 위해서.
* * *
“시장님께서 특별히 내리신 휴가다! 사고치지 말고, 무사히 복귀할 수 있도록!”
늘 자식처럼 자신들을 챙겨주던 선임 간부의 말에 방위군 병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술 약속을 한 전우 혹은 부대를 찾아온 가족과 함께 연병장을 빠져나갔다.
원정을 성공적으로 끝마친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 같이 뿌듯한 웃음이 맺혀있었다.
“······시발, 시끄럽게.”
하지만 왁자지껄한 분위기 한가운데 유독 어울리지 못하는 한 남성이 있다.
왜소한 체구에 두꺼운 뿔테안경을 쓴 그는 작은 욕설과 함께 미간을 찡그렸다.
하나 같이 마음에 안 든다.
자기들이 영웅이라도 된다는 마냥 떠드는이 새끼들도 또 이 촌구석 강릉도 말이다.
세상 모든 게 좆같이 보일 뿐인 그는 인파를 거칠게 헤치고 연병장을 빠져나왔다.
터벅, 터벅, 터벅.
뭐, 맨날 이상한 암호로 주고받느라 답답해 죽는 줄 알았는데 마침 휴가라니 잘 됐다.
주변을 두리번거린 뿔테 남성은 시내를 가로질러 한적한 산길로 걸음을 옮겼다.
쓸데없이 넓기만 한 이 강릉에는 몰래 사람을 만날 공간 정도는 충분하고도 넘쳤다.
끼익.
“······꼬리를 달고 온 건 아니겠지.”
“혼, 혼자 왔습니다.”
미리 접선하기로 한 장소에는 한국말이 어눌한 노인이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인인지, 아니면 중국인인지 모를 인상 험한 노인을 보며 뿔테 남성은 긴장했다.
숨길 수 없는 피 냄새가 난다.
벌써 여러 차례 정보를 팔고 있는 그였지만, 이 분위기는 당최 적응되지 않았다.
“그래서, 정보는?”
“협상단이 한동안 양양 공항에 체류할 예정이랍니다. 물론 그 물건도 가지고 있고요.”
“구체적인 날짜를 말해라.”
“그, 그것까진 모르겠습니다. 활주로 보수가 끝나는 대로 떠난다고는 했는데······.”
노인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 이내 가방에서 물건을 꺼내 툭 던졌다.
그 안에는 뿔테 남자가 정보를 물어줄 때마다 건네준 알약들이 소량 담겨 있었다.
“이게 답니까?”
“모자라다 생각되진 않는데.”
아무리 정확한 날짜를 모른다지만, 그동안 들인 수고에 비해 너무 모자라지 않는가.
젠장, 이걸로는 서울로 도망치긴커녕 여태 빚진 사채에 이자조차 갚지 못한다.
“잠시만요!”
용건을 끝낸 노인이 떠나려는 분위기이자 뿔테 남성은 황급히 뒤를 붙잡았다.
“치료제! 치료제에 대한 정보가 있습니다.”
출처가 확실하지 않은 정보다.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 뿔테 남성은 일단 지르고부터 봤다.
“······말해봐.”
“이번 원정 때 인당 하나씩 치료제를 보급받았습니다. 그때 사용하지 않은 재고를 수거해 정동진으로 옮긴다고 들었습니다.”
노인이 아무런 말이 없자 뿔테 남성은 다급한 목소리로 설득을 시작했다.
“어차피 곧 본대와 합류하시지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한탕 제대로 하셔야죠.”
감염체 치료제.
그 어떠한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귀한 보물이자 전략 물자다.
노인은 사뭇 흥미가 동했는지 가방에서 봉지 하나를 더 던져주며 경고했다.
“거짓말이면 너도 죽는다.”
“분, 분명합니다. 믿어주십시오.”
비굴하게 고개를 숙인 뿔테안경은 허겁지겁 봉투를 챙겨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이제 지긋지긋한 쫄따구 생활에서 벗어나 서울에서 새 인생을 시작할 것이다.
그는 앞으로 다가올 운명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시덕 웃으며 숙소로 돌아갔다.
참방!
찌가 움직인다.
미끼를 던진 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끼익!
방위군 물자 창고에서 출발한 트럭이 어둠이 짙게 깔린 정동진항으로 들어간다.
하역장에 차를 주차한 인부는 오늘 당직인 경비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보가 진짜였군.”
이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노인, 아니 시게루는 조용히 입맛을 다셨다.
그 병신 같은 애새끼 말대로 놈들이 치료제 재고를 정동진항으로 옮기고 있었다.
“모두 할 일은 알고 있겠지?”
정찰을 끝낸 시게루는 내부 스파이로 함께 잠입한 동료들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정말 머릿수대로 나누는 거죠?”
“나중에 딴말하기 없는 거요.”
오늘 새벽 강릉을 떠나 전부 부산으로 복귀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어기는 일이다.
하지만 그들 모두 한몫 두둑이 챙길 생각에 상부의 지시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부르르릉!
짐을 모두 내린 트럭이 정동진항을 빠져나와 유유히 강릉으로 복귀한다.
시게루와 그의 동료들은 그 즉시 풀숲을 빠져나와 정동진항을 향해 달려갔다.
멍청한 강릉 촌놈들.
스파이가 숨어들었다고는 상상도 못 했는지 항구 경비가 허술하기 짝이 없다.
시게루는 동료들과 사방으로 흩어지며 물건이 보관된 하역 창고로 접근했다.
능숙한 움직임이다.
마치 고양이처럼 담과 창문을 넘은 시게루는 어두운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 짓도 이제 끝이군.’
이 나이 먹도록 말단 조직을 전전하며 더러운 쥐새끼 행세를 해온 게 벌써 수년이다.
지칠 대로 지친 시게루는 드디어 바로 눈앞까지 다가온 은퇴를 위해 조금 서둘렀다.
‘찾았다.’
저 멀리 동결 장치로 추정되는 초록색 치료제 상자가 보물 금고처럼 놓여 있다.
입꼬리를 삐죽 올린 시게루는 동료들 몰래 치료제 몇 개를 먼저 챙기려고 했다.
찰칵, 찰칵.
그런데 그 순간 라이터를 당기는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불빛이 반짝였다.
스으읍, 타오르는 담뱃불 사이로 모자를 눌러쓴 한 남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기척조차 안 느껴졌다.
아니, 애초에 있는 줄도 몰랐다.
이 바닥에서 나름 실력자로 인정받던 시게루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긴장했다.
“······누구야, 너.”
어떻게 되먹은 인간이 이 바닥에서 수십년을 구른 자신보다 피 냄새가 진하다.
스릉!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낀 시게루는 재빨리 날붙이를 뽑아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후웅!
빠르게 치고 들어가는 일격이다.
보통 이 움직임에 반응한 이들은 없었다.
탁!
하지만 상대는 너무나 쉽게 공격을 흘려내며 무심한 눈동자로 자신을 노려본다.
경악!
정체불명의 남자와 시게루는 마치 다른시간, 다른 공간에서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것은 명백한 실력 차이였다.
콰직!
팔이 반대로 꺾여 으스러진다.
동시에 뺏긴 날붙이가 어깻죽지를 그대로 찔렀다.
“끄아아아악 - - -!!”
시게루는 끔찍한 비명과 함께 무릎 꿇었고 곧 충혈된 눈으로 남자를 마주한다.
“박, 박범석?”
그래, 박범석.
강릉 시장이라는 놈이 미끼를 던진 채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 *
“형님, 이쪽도 끝났어요.”
“이야~ 새끼들 살벌하던데요.”
실력이 제일 좋은 1팀과 예전 특임대 출신 대원들을 정동진항에 곳곳에 깔아뒀다.
아니나 다를까, 제 발로 기어들어 온 첩자놈들은 하나둘 피떡이 된 채 잡혀 왔고,
그중 대장으로 보이는 이 노인 또한 힘줄이 모두 끊긴 채 우리 앞으로 끌려왔다.
“으, 으으으······.”
“제, 제발 살려줘.”
오늘 일망타진한 스파이만 총 8명.
일일이 찾으려 했으면 정말 개고생 좀 할뻔했다.
나는 놈들에게서 뺏은 장비와 위성 전화기를 살피며 무심한 얼굴로 툭 내뱉었다.
“부산 요새?”
“- - - - - -!!”
부산 요새라는 말에 끙끙 고통을 호소하던 스파이 놈들이 눈에 띄게 당황한다.
맞나보네.
어렴풋이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직접 당해보니 기분이 불쾌하다 못해 더럽다.
나는 헛웃음을 터트리며 대기 중인 대원들을 향해 두 놈을 지목해주었다.
“잠, 잠깐!”
“히이이익!”
저승사자처럼 다가온 문 상사가 다리를 하나씩 잡고 포로 두 마리를 끌고 간다.
뒤이어 비명이 들려온다.
동료들이 지르는 비명에 노인을 제외한 놈들은 불안한 얼굴로 덜덜 떨기 시작했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보면 몰라?”
“당, 당신 강릉 시장 아니야? 시장이라는 사람이 이래도 되는 거냐고! 겉으로는 멀쩡한 척 돌아다니더니…악마 같은 새끼!”
새로운 발상이네.
뭐, 자기들은 음지 사람이다. 이건가?
악에 받친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이마를 긁적이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콰직!
“끄, 끄아아아악!”
뼈를 하나 더 부러트린다.
머리채를 잡아 우리와 시선이 마주 할 수 있도록 했다.
내 뒤에 기립한 모든 대원은 감정이 없는눈으로 노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시 잊고 있었구나.
지금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왜 그래. 아마추어같이.”
서걱.
소원대로 목숨을 끊어준 나는 손에 묻은 피를 털며 나머지 놈들도 가리켰다.
“한 마리만 남겨.”
대원들은 기다렸다는 듯 날카로운 나이프를 뽑아 현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살, 살려줘!”
“안돼에에에!”
오늘따라 유독 밤이 길다.
경태가 새로 건네준 담배를 입에 문 나는 현장을 정리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다.
삐리리리.
그런데 그 순간 노인이 들고 있던 위성 전화기가 울리며 적막함을 깨트렸다.
나는 마치 원래 가지고 있던 전화기인 마냥 자연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뭐냐, 너?]
“곧 찾아갈 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