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상대는 금세 상황을 파악했는지 목소리를 위협적으로 깔며 내 이름을 불렀다.
[박범석.]
“눈치 빠르네.”
[그 전화기를 왜 네가 가지고 있지?]
“방금 잡았으니까.”
[그 직원들은 엄연히 부산에 소속된······.]
“혓바닥 놀리지 말고, 십새꺄.”
알면서도 모르는 척 시치미 떼는 게 아주 인중을 쳐서 평평하게 만들어주고 싶다.
나는 짜증에서 몰려오는 욕설을 시원하게 뱉으며 그냥 대놓고 이유를 물었다.
“왜 그랬어?”
[······오해가 있었다.]
“아~ 그래? 오해가 있으셨어요?”
전화기를 스피커폰으로 돌려 현장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그대로 전해줬다.
살, 살려줘!
사방에서 비명이 난무한다.
인간이 내는거라고는 믿을 수 없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오해 좀 풀렸어?”
그 어떠한 협박보다 확실한 경고에 상대는 드디어 말귀를 알아듣기 시작했다.
[정신이 나갔군. 지금 전쟁이라도 하자는 건가?]
“꼬우면 와서 덤비던가.”
[이런 개새끼가!]
이미 한쪽에서 피를 본 이상 둘 중 하나는 꼬리를 말 때까지 계속 물어야 한다.
나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욕설에 피식 웃으며 조용히 목소리를 낮췄다.
“양양 공항.”
[뭐?]
“원래 목적 따로 있잖아?”
잠입한 스파이들은 미국에서 온 협상단과 군락 본체에 대한 정보를 계속 수집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시기를 입수하기 전, 다른 미끼를 물어 이 모양이 이 꼴이 나버렸다.
그들을 보낸 당사자는 지금 기분이 어떨까.
전화기 너머 남자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숨기며 아닌 척 변명을 시작했다.
[억측이 심하군.]
“미국이 직접 알려준 거야.”
[그게 무슨······.]
“거기에 델타포스 와 있다고.”
부산이 한낱 꼬리고 일본이 진짜 몸통이라는 거, 알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미국이 몰라서 안 막는 게 아니라 알고도 침묵했다는 걸 놈들은 알아야 한다.
불편한 침묵이 흐른다.
이 통화가 마지막이라는 걸 직감한 나는 놈을 향해 두 번은 없다는 경고를 남겼다.
“다음엔 얼굴 보면서 이야기하자.”
뚝.
상대방이 먼저 전화를 끊는다.
콰직!
나는 위성 전화기를 반으로 뚝 분지른 뒤 저 멀리 출렁이는 바다로 던져버린다.
“다 끝났습니다.”
“시체는 어떡할까요?”
그사이 현장 정리를 끝낸 경태와 문 상사가 사이좋게 대걸레를 들고 다가와 묻는다.
“부산으로 보내.”
그동안 명분이니 정의니 다 챙기면서 일했더니 우리가 정말 우습게 보였나 보다.
이참에 두 번 다시 같은 사례가 생기지 않도록 주변에 경고장을 남겨 줄 생각이었다.
“선배.”
나머지 대원들이 뒤처리하는 사이 얼굴에 피를 묻힌 송지영이 다가와 물었다.
“아마 보복하기 힘들 거에요.”
“······나도 알아.”
일단 전력 면에서 우리가 열세일 뿐만 아니라 부산 뒤에는 일본이 버티고 있었다.
섣불리 먼저 움직였다가는 나뿐만이 아닌 강릉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전쟁이 두렵다는 이유로 손을 놓고 상황을 방관해서는 안 된다.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대로 갚아 줄 절호의 기회가.
나는 깊게 흐르는 바다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다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 * *
“시발!”
쨍그랑!
황급히 전화를 끊은 다나카는 신경질적인 욕설과 함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고여 있었으며 억지로 참고 있던 숨 또한 무척 거칠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겨우 정신을 차린 다나카는 부하 직원을 부르며 급한 대로 위스키를 꿀꺽 삼켰다.
“부르셨습니까, 형님!”
“와카슈 애들 어디까지 갔어.”
‘그’ 물건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마자, 일본에서 날고 긴다는 애들을 약탈자로 위장시켜 양양 공항으로 보냈다.
타이후 새끼들이 하던 짓을 고스란히 답습해 ‘그’ 물건을 빼 오려는 목적이었다.
“아마 곧 도착할 겁니다.”
“뭐? 벌써?!”
하지만 미국은 이미 이를 알고 있었고 무려 델타포스를 협상단의 호위로 보냈다.
만약 교전이라도 일어났다가는 큰일 난다.
다나카는 빠르게 복귀 명령을 내렸다.
“당장 돌아오라고 해!”
“알, 알겠습니다!”
명령받은 부하가 허둥지둥 밖으로 나갔다.
뒤이어 소식을 듣고 온 이레즈미 남성이 흥분한 다나카 곁으로 다가와 묻는다.
“형님, 무슨 일이십니까?”
“놈들이 다 알고 있었어.”
“네?”
“이쪽에서 정보가 샜다고!”
그 누가 일본이, 그리고 부산이 먼저 움직일 거라는 걸 알고 있었겠는가.
자신만만하게 외부 공작을 계획했던 다나카는 마치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후우, 진정하자.
하얀 가루가 떠다니는 위스키를 삼키며 일단 숨을 안정시킨다.
“알아 오라는 건 어떻게 됐어.”
“박범석 말입니까?”
“그래, 그 새끼.”
상대는 실실 웃고 있었지만, 목소리에 담긴 살기와 피 냄새가 장난이 아니었다.
다나카는 아직도 마르지 않는 식은땀을 닦으며 부하가 건네는 태블릿을 받았다.
“겨우 이게 다야?”
“대부분 탐문으로 구한 정보입니다. 자세한 신상 정보에는 대부분 락이 걸려있습니다.”
당시 서울 요새에선 박범석을 전쟁영웅으로 취급했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도대체 어느 정도길래 고작 중위 전역인 신상에 락을 걸어둔단 말인가.
쉽게 믿을 수 없었던 다나카는 부하가 구해온 정보를 조용히 정독하기 시작했고,
그 의심은 곧 경악으로 바뀌었다.
“······이 새끼 뭐야.”
감염체 전쟁 초기 사병으로 입대해 파주 공방전, 남양주 8.4 후퇴, 서울 진격전과 같은 굵직한 전쟁에 빠짐없이 참전했다.
거기에 중국이 본토에 핵을 쐈을 당시에는 무려 감염체로 득실거리는 북한으로 올라가 여러 비밀 작전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군사 쿠데타, 서울 요새 건설, 특임대 창설과 같은 사건에 모두 관여한 박범석 중위.
겨우 중위가 아니라 이런 인물이 고작 중위였다는 게 이 서류가 내리는 결론이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다나카는 들고 있던 서류를 힘없이 내려놓으며 자리에 앉았다.
안색이 왜 좋지 않으시지?
방금 박범석과 통화했다는 사실을 모르는부하만이 영문을 몰라 할 뿐이었다.
* * *
스파이 색출이 있었던 이후 강릉에는 비밀리에 내부 단속이 이루어졌다.
“열어.”
쾅!
먼저 놈들이 머물렀던 자택과 비밀기지를찾아내 내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마약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가장 먼저 발견된 건 유통을 위해 가지고 온 대량의 마약이었다.
한반도 모든 마약이 부산을 통해 들어온다고 하더니 역시 본고장 출신들은 다르네.
이를 전부 폐기한 순찰대는 장부에 남은 기록을 토대로 대대적인 수사를 벌였고
놈들과 연루되어 있던 딜러와 구매자들까지 모조리 붙잡아 시청으로 끌고 갔다.
그날 잡혀 온 범죄자들만 해도 80명이 넘는다고 하니 시장 규모가 꽤 컸던 셈.
강릉 시청은 이에 놀라 제대로 된 치안 조직과 시스템에 대해 논의를 시작했다.
그리고 본격적인 호적조사와 제대로 된 신분 등록제를 만들어 재발을 방지했다.
실수는 할 수 있다.
하지만 두 번은 실수가 아니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 지나간 스파이 사건은 강릉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입추와 처서가 지나고 본격적인 가을이 우리를 찾아왔다.
“어렵네.”
이번 일을 내 손으로 직접 처리하면서 그동안 참 안일했다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
강릉이라는 단체가 점점 커짐에 따라 이런 일도 충분히 예상했어야 했는데 말이야.
이 땅에서 일어난 일을 내가 아닌 미국이 먼저 알았다는 게 자존심이 상했다.
역시 특전대만으로는 부족했나.
점점 서울 요새 정보사나 미국 CIA처럼 전문적인 정보 단체가 절실해지고 있었다.
똑똑.
“열려 있어.”
“선배, 저번에 부탁하신 정보요.”
문을 노크한 송지영이 출력한 서류를 가지고 와 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곳에는 부산 요새에 대한 각종 정보와 지리, 건물 배치가 빼곡하게 쓰여 있었다.
“3년 전 특임대에서 직접 조사했던 자료에요. 아마 크게 바뀐 건 없을 거예요.”
서울 요새 군 내부에 연줄이 많은 송지영답게 이런 자료 구하는 건 금방이다.
나는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10장 남짓한 종이 서류를 빠르게 읽어내렸다.
“생각보다 규모가 크네.”
“겉만 다국적이지, 거의 일본이나 마찬가지예요. 따지고 보면 범죄 카르텔이죠.”
원주가 그냥 떨거지들 모아놓은 지역이라면 부산은 조금 상위호환이라고 보면 된다.
야쿠자 출신인 수뇌부가 예전부터 일본재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리 강릉이 많이 성장했다고 해도 부산에 비하면 조금 모자란 감이 있었다.
동해 때처럼 경제 보복은 힘들겠고, 또 흑색 작전을 펼치자니 위험성이 너무 크다.
나는 벌써 며칠째 고민 중인 방법을 구상하며 볼펜 끝을 우물우물 씹었다.
“지난번 일 때문에 그러시죠?”
“엉.”
“선배도 머리 아프시겠네요.”
똑똑.
그런데 그 순간 바로 옆방에 있는 태식 씨가 노크와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시장님.”
“예, 들어오세요.”
송지영과 눈인사를 한 태식 씨는 마찬가지로 종이 한 장을 내밀며 내게 말했다.
“서울에서 보낸 서한입니다.”
“이솔하가 보냈습니까?”
“예.”
진짜 이솔하랑은 너무 엮이기 싫은데 계속 공식 서한이라며 연락을 보내온다.
차단할 수도 없고 진짜.
나는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려던 서한을 펼쳐 피곤한 한숨과 함께 읽어 내려갔다.
뭐, 주절주절 안부 인사, 또 오고 싶다는 말, 등등 이런 건 빠르게 지나친다.
본론은 변이 군락의 등장에 따라 우리 한반도도 본격적인 대비를 해야 한다는 점.
그 대비를 하기 위해선 서울 요새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힘을 합치자는 말이었다.
“요새 정상 회담?”
각 지역을 대표하는 요새 지도자끼리 모여 한반도의 미래를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그 의도가 너무 대놓고 보이는 서한 내용을 읽다가 이내 길게 하품했다.
“읽어보실래요?”
마침 자리에 있는 송지영과 태식 씨에게도 이솔하가 보낸 서한을 공유해주었다.
“취지는 좋네요.”
“나름대로 노력 중인가 봅니다.”
지난 강릉 방문 이후 본인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꿈을 꿨는지 깨달은 모양이다.
그래도 모든 계획을 백지화하고, 이런 협력과 교류를 통해 한반도 통합화를 차근차근 진행해 나가려는 게 눈에 보였다.
그 모습에 흐뭇함을 느끼는 나와 일행들.
태식 씨가 종이를 치우며 말했다.
“세절할까요?”
“이면지로 쓰세요.”
물론 그 능글능글한 속내를 아는 우리 강릉에게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다.
이솔하를 유난히 싫어하는 태식 씨는 콧노래를 부르며 종이를 세절하려 했다.
아니, 이면지로 쓰라니까.
‘어?’
그런데 그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문득 머릿속을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갔다.
“잠, 잠시만요!”
“예?”
“거기 부산도 온다고 쓰여있습니까?”
종이를 세절하기 직전, 가까스로 밀어 넣지 않은 태식 씨가 종이를 다시 확인한다.
그리고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초대장이 간 명단을 보여주었다.
“참가한다는데요?”
쾅!
나는 그 즉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위성전화기를 꺼내 이솔하와 통화했다.
[여보세요?]
“접니다, 박범석.”
[어, 차단하신 줄 알았어요!]
“제가 안 받은 겁니다.”
[······너무해요, 정말.]
“됐고, 이번에 저도 가겠습니다.”
[정, 정말요? 회담에 참석하시려고요!?]
“네. 대신 부탁 하나만 합시다.”
나는 참가자 명단 맨 뒤에 쓰인 ‘다나카’라는 일본 이름을 노려보며 말했다.
“저희가 참가하는 거 비밀로 해주십시오.”
비열하고 쓰레기 같은 짓.
누가 더 잘하는지 한번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