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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의 상속자-91화 (91/180)

91화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는다.

흔히 복수는 무의미한 것이며 또 다른 악순환을 불러온다는 걸 말할 때 쓴다.

하지만 반대로,

복수를 할 거라면 적어도, 상대가 또 다른 복수를 낳지 못하게 하라는 말과도 같다.

칼을 휘둘렀다면 그 칼이 아니라 팔을 뽑아서 다시는 구실을 하지 못하게 한다.

단순히 경고라는 의미를 넘어 일어설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 보복의 메커니즘이다.

“날짜가 잡혔습니다.”

회담 참가 의사를 밝힌 이후, 구체적인 날짜와 장소가 비밀리에 전해졌다.

오늘을 기점으로 정확히 일주일 뒤, 회담 장소는 충주에 있는 충주호였다.

“회담 장소 4km 반경 안으로는 무장 인원이 진입할 수 없습니다. 동행은 지도자 포함 10명, 당연히 참가 전원 비무장입니다.”

“빡빡하네요. 다들 동의했답니까?”

“로비 실력 하나만큼은 쓸만하지 않습니까. 그동안 물밑 작업을 조금 한 모양입니다.”

이솔하가 정치나 눈치는 몰라도 로비 실력 하나는 모두가 인정하고 있다.

설마 부산을 포함한 지역 패자들을 회담자리까지 직접 끌고 올 줄은 몰랐다.

“겁이 많기로 유명한 새끼예요. 혼자 돌아다닐 때도 온갖 호위를 끼고 다녀요.”

“아마 정예 병력을 끌고 올 겁니다. 사실상 이동 중 습격은 불가능하다고 봐야죠.”

들리는 바로는 운용이 가능한 기갑 장비까지 몇 개 보유하고 있다고 들었다.

우리가 아무리 특전대라도 기갑 장비가 있는 군대를 상대로는 싸울 수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회담 장소, 거기 하나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정예 병력이라도 회담 장소 4km 반경 안으로는 진입할 수 없다.

만약 이를 어길 시 김태하 소장이 직접 개입한다 했으니 쉽게 움직이지는 못할 터.

비무장이 약속된 회담장은 사실상 참수작전을 벌이라고 파준 함정과도 같았다.

“문제는 서울입니다.”

하지만 이게 아무리 정당한 보복이라도 주변 관계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본인들이 직접 주최한 회담 자리에서 우리가 예고 없이 참수 작전을 벌인다?

아무리 이솔하와 김태하 소장이라도 불쾌함을 넘어 분노를 느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준비했다.

“하트먼 의원이 오늘 출국하기 전 넘겨준 기밀 자료에요. 모두 한번 읽어보세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조용히 참관만 하고 있던 엠마가 오랜만에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 특유의 미묘한 웃음과 함께 깔끔하게 정리한 서류철을 나눠주었다.

“타이후 해적?”

오래전 물고기 밥이 되어버린 그 쓰레기들이 왜 여기서 뜬금없이 등장한단 말인가.

한참 서류를 읽어 내려가던 일행들은 곧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묻는다.

“······이거 사실입니까?”

동아시아 일대 바다를 주름잡던 타이후 해적의 후원자가 다름 아닌 부산 요새였다.

아니, 이 정도면 단순한 후원 관계가 아닌 산하 집단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다.

“확실해요. 증거도 확보했습니다.”

무려 미국이 직접 건네준 자료다.

증거는 물론 그 공증까지 확실하다.

만약 이 자료를 최대 피해자인 서울과 그 일대 요새에 전해준다면 반응은 어떨까.

장담컨대 그날 우리가 벌인 참수 작전은 돌발행동이 아닌 정의로운 집행이 될 것이다.

“살려서 보내지 맙시다.”

남은 시간은 일주일.

보험도 준비되었다.

거기서 뱀의 모가지를 따고 다시는 사람을 물 수 없도록 철저하게 짓밟아야 한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일행들과 하나둘 시선을 마주치며 작전의 시작을 알렸다.

* * *

부우우우우웅 -!!

끽해야 생존자 마을 두세 개만이 평화롭게 살고 있던 충주 호수가 소란스러워졌다.

정상 회담에 초대받은 요새 지도자들이 모두 이 충주로 모이기 시작한 것이다.

군대는 곧 위세.

위세는 곧 자존심.

만만하게 보이기 싫었던 그들은 수많은 정예 병력과 함께 속속히 도착했고,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던 충주호는 어느새 다양한 인원들이 모인 주둔지로 변모했다.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여기 책임자 나오라고 해!”

각 지역 패자들이 모인 자리인 만큼 하나같이 개성이 뚜렷하고 자존심도 강했다.

“김태하 소장님이 책임자십니다.”

“······크흠! 실례했구먼.”

하지만 전쟁 영웅 김태하 소장은 그 존재만으로도 그들을 억제하기 충분했다.

여차하면 늙은 호랑이한테 물려 죽는다.

살고 싶으면 알아서 몸들 사려라.

처음에는 거들먹거리던 지도자들은 하나둘 질서에 순응하며 회담 장소로 향했다.

그렇게 모인 지도자는 서울, 대전, 광주, 목포, 군산, 대구, 포항, 부산으로 총 8명.

굵직한 도시를 하나씩 소유한 이들이야말로 한반도를 지탱하는 진짜 주축들이었다.

‘침착하자, 이솔하.’

여기서 어떻게 하냐에 따라, 향후 한반도 통합이라는 거대한 숙원이 결정된다.

항상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김태하 소장이 없는 자리, 이솔하는 마음을 다잡았다.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그녀가 먼저 입을 열자 침묵을 지키고 있던 지도자들이 제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받은 게 있으니 와야제.”

“전부 모이게 한 이유가 뭡니까?”

현재 서울과 우호적인 세력이라 할 수 있는 곳은 대전과 군산 이 두 곳이 전부이다.

나머지 지도자들은 당연히 경계심을 보이며 차가운 얼굴과 태도로 일관했다.

하지만 이솔하는 이러한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현재 바깥 상황이 어떤지는 여러분들도 잘 알고 계실 거예요. 멀리 볼 것도 없이 최근 사라진 블라디보스토크만을 봐도 알죠.”

블라디보스토크라 하면 그래도 동해에서는 꽤 알아주던 거대한 무역 요새였다.

그런데 그 정도 규모를 가진 요새가 변이 바이러스로 인해 한순간 멸망해버렸다.

“그 어떠한 징조도 없었어요. 갑자기 발발한 변이 바이러스가 수만 명을 죽이고 거대한 요새 하나를 끝장내버린 거예요.”

이솔하는 상석이 존재하지 않는 둥그런 원탁 위로 두 손을 가지런히 올려두었다.

공손하되 당당하게.

경고하면서도 공감을 끌어올려 설득력을 높여야 한다.

강릉 때 망신을 당했던 이솔하는 더욱더 노골적이고 더욱이 적극적으로 변해갔다.

“하지만 이게 블라디보스토크만으로 국한되는 문제일까요? 아뇨. 현재 한반도 어딘가에서는 변이 바이러스를 품은 군락이 요새를 습격할 날만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요.”

“군락이······?”

“네, 그것도 변이 바이러스를 퍼트리는 거대 군락이요. 미국조차 버거워하는 그 재앙을 우리가 과연 홀로 막을 수 있을까요?”

아니, 서울과 부산이라면 몰라도 나머지 요새들은 그러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처음에는 시큰둥하던 지도자들은 어느새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럼 어쩌자는 거요?”

“여기 모인 모두가 뜻을 하나로 모아야 해요. 연합을 결성하고, 앞으로 다가올 위기에 공동으로 대응할 힘을 갖추는 겁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다시 세우기 위한 통합이 아닌 생존을 위한 통합을 추구하자.

신념을 꺾고 드디어 현실이라는 걸 배운 이솔하는 당당하게 의견을 피력하려 했다.

“웃기는군. 다들 저 말을 믿나?”

하지만 그 순간 한쪽에서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나카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감추고 있던 존재감을 사방으로 퍼트리며 이솔하의 말에 찬물을 끼얹었다.

“말이 좋아 연합이지, 결국 서울 밑으로 알아서 기어들어 오라는 의미잖아.”

“예? 그게 무슨······.”

“다들 기억 안 나? 대한민국을 다시 세우겠다면서 별 지랄을 떨더니 정작 춘천이 공격받을 때 서울 이 새끼들은 코빼기도 안 보였던 거. 그게 겨우 5년 전이야!”

틀린 프레임이다.

5년 전 서울과 현재의 서울은 대통령도 총지휘관도 다르다.

하지만 다나카는 교묘하게 지도자들을 선동하며 5년 전 기억을 들춰내기 시작했다.

“거기에 통조림 하나 지원해주지 않을 거면서 세금은 1년 내내 집요하게 걷어갔지. 요새 사람들은 굶어 죽어가는데! 자기들 배만 불렸던 게 바로 이 서울 놈들이라고!”

당장 소리를 지르고 싶었던 이솔하는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곧 지도자들의 시선이 좋지 않다는 걸 알고 가까스로 화를 참았다.

“······원래 목적이 이거였군요?”

“내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닌 거 같은데? 봐봐, 다들 동의하는 눈치잖아. 너희가 얼마나 좆같이 굴었으면 이러겠어. 응?"

과장된 행동을 취한 다나카는 마치 모두 들으라는 듯 외치며 회담장을 나왔다.

그러자 부산과 인접한 요새 지도자들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함께 빠져나왔다.

“······기회는 또 있으니.”

“일단 내일 다시 모이는 걸로 하시죠.”

분위기가 처참하다.

눈치를 보던 나머지 지도자들도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솔하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모두가 떠나버린 원탁 앞에 앉아 있었다.

* * *

“그년 얼굴을 너희가 직접 봤어야 했다니까? 시발 얼빠진 얼굴이 얼마나 웃겼는데.”

회담장을 빠져나가는 길, 리무진에 탑승한 다나카는 담배를 입에 물며 낄낄 웃었다.

모욕 몇 번으로 이솔하를 침몰시킨 그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애초에 참석한 이유부터가 이번 정상 회담 자리를 파탄 내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뭐, 군락? 변이 바이러스?

우리가 알게 뭔가.

서울 요새의 영향력을 줄일 수만 있다면 요새가 망하든, 사람이 죽든 알 바 아니다.

“그래도 얼굴은 꽤 이쁘지 않습니까?”

“너 그런 취향이냐?”

하긴,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라 그런가 또 다루는 맛이 색다르기는 했다.

다나카는 부들부들 떨고만 있던 이솔하를 떠올리며 입술을 조용히 할짝댔다.

부우우웅, 끼익!

그런데 그 순간 잘 달리던 리무진 차량이 밖으로 나가는 검문소 앞에 멈췄다.

“뭐야?”

“알아보겠습니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부하 하나가 재빨리 창문을 내려 검문소를 향해 외친다.

“야! 문 열어!”

비무장 상태인 군인 한 명이 쪼르르 달려와 곤란한 얼굴로 상황을 알렸다.

“현재 산사태 때문에 길이 막혀서 말입니다. 여기서 잠시 기다리셔야 합니다.”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비 때문인지 비무장 지역 밖으로 나가는 길이 막혀버렸다.

안정상 어쩔 수 없기에 군인은 최대한 친절하게 설명하며 주차를 도와주려 했다.

탁!

그 순간 조수석에 타 있던 부하가 피고 있던 담배를 군인에게 툭 던진다.

“시발, 장난해? 그건 니들 사정이고. 우리 형님이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됐고, 가서 책임자나 불러. 하여튼 이 새끼들은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어.”

굳이 이럴 이유는 없다.

산사태가 이 군인 잘못은 아니니까.

하지만 다나카의 행동으로 이미 기세등등해진 그의 부하들은 정말 뵈는 게 없었다.

담배꽁초를 맞은 군인이 검문소로 돌아가자 놈들은 또 좋다고 낄낄 웃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 - - -!!

점차 빗줄기가 굵어진다.

지루함을 느낀 다나카와 부하들은 연초로 된 마약을 빨며 시끄럽게 수다를 떨었다.

확실한 성과, 이겼다는 우월감, 음담패설과 약 기운에 놈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 - - - - -?”

부하들과 한참 낄낄 웃고 있던 다나카는 분위기가 갑자기 이상해졌다는 걸 눈치챘다.

“잠깐, 저기 불 언제부터 꺼져있었어?”

“예?”

분명 가로등이 있었던 검문소는 불이 전부 꺼진 채 길을 통째로 막고 있었다.

깜짝 놀란 다나카는 서둘러 뒤를 바라봤고 이내 깜짝 놀라며 앞좌석을 걷어찬다.

“시발! 뭐해, 이 새끼들아! 가!”

10분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길이 앞은 물론 뒤까지 바리케이드로 막혀있다.

덩달아 놀란 부하는 서둘러 시동을 걸고 강제로 검문소를 뚫으려고 했다.

똑똑!

“- - - - - -?”

하지만 그 순간 누군가 리무진으로 다가와 뒷좌석 유리 창문을 똑똑 두드렸다.

다나카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고 창문 너머로 우비를 쓴 남성을 발견했다.

까닥, 까닥.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소름이 돋는다.

눈 한쪽이 흉터로 감긴 박범석이 자신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이고 있었다.

쾅! 쨍그랑!

주먹으로 유리 창문을 부순 박범석은 다나카의 머리채를 잡고 밖으로 끌어내렸다.

주변에는 마찬가지로 녹색 우비를 쓴 대원들이 유리 창문을 부숴 놈들을 끌어냈다.

“끄아아아악!”

피 냄새만 맡을 줄 아는 한낱 야쿠자 새끼들과 진짜 프로의 차이가 여실히 느껴진다.

다나카는 순식간에 목과 다리가 꺾여 죽는 부하들을 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곧 찾아가겠다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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