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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의 상속자-93화 (93/180)

93화

우려와는 달리 오후 늦게 재개된 정상 회담은 무척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그간 세월과 고집에 막혀 풀지 못한 오해가 하나둘 쌓이기 시작했을 뿐이지,

정작 대화의 장을 마련해주자 지도자들은 금세 화해하고 또 공감대를 형성했다.

같은 언어, 문화, 민족이라는 주된 소속감이 너무나 쉽게 벽을 허문 것이다.

‘디저트는 입에 맞으세요?’

특히 이솔하는 다나카가 사라지자마자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상황을 주도했다.

그간 악의적인 공격과 비난에 유난히 약한 모습을 보였을 뿐이지, 타고난 친화력과 입증된 유능함은 이목을 끌기 충분했다.

그렇게 2시간이 넘는 회담을 끝으로 우리는 굵직한 조약 몇 가지를 체결했다.

그중에는 와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파격적인 조약도 두 가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상호방위조약.’

이제부터 우리는 한반도 요새 중 한 곳이라도 적이나 감염체의 공격을 받을 시, 군사적으로 지원해야 할 의무가 생겼다.

이는 상호라는 이름이 붙은 만큼 우리 강릉도 다른 지역도 모두가 적용된다.

‘감염체 치료제 공급안.’

그리고 올해 가장 큰 이슈였던 감염체 치료제를 서울에서 매달 공급해주기로 했다.

물론 넉넉한 양은 아니겠지만, 당장 쓸 수 있는 치료제가 있다는 게 어디인가.

판매나 외부 반출은 금지라는 조건 아래 지도자들은 흔쾌히 조약에 서명했다.

‘5년 전과는 다르다.’

지난 5년 전 서울 요새는 오직 본인들 안위와 권력 유지에만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이솔하가 정권을 잡은 지금은 진심으로 한반도 통합을 목표로 두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정말 가능하지 않을까?

그 진심에 동한 요새 지도자들은 다음 회담을 기약하며 술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

“여기 있었군.”

시끌벅적한 회담장을 잠시 빠져나와 충주호가 보이는 한 공원으로 향했다.

그러자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김태하 소장이 담뱃불을 붙이며 다가왔다.

찰칵, 찰칵.

너무나 자연스럽게 한 개비를 받아 출렁이는 충주호를 앞에 두고 벤치에 앉는다.

바로 옆 회담장에선 이솔하와 요새 지도자들이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떤가?”

“많이 변했네요.”

그동안 천방지축 날뛰던 이솔하는 어디가고 노련한 정치인이 되어 돌아왔다.

이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을 김태하 소장은 끌끌 웃으며 연기를 내뿜었다.

“박범석을 따라 하고 싶다더군.”

“······예?”

“농담 아니야. 네 이야기를 많이 해줬더니 그동안 행동과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

이 양반이 큰일 날 소리를 하시네.

나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바라보며 물었다.

“아니, 그걸 안 말리고 뭐 했습니까?”

“누구에게나 롤모델은 있는 법이잖나. 잘난 것 같은 이솔하도 따라갈 사람은 필요해.”

“소장님이 계시는데 뭘······.”

“나는 지도자가 아니라 군인이야. 이 중 진짜 지도자는 범석이 너 하나뿐이지.”

김태하 소장은 많이 탁해진 눈으로 깊게 흐르는 충주호를 조용히 내려다봤다.

마치 파도처럼 흔들렸던 그의 인생과 마음은 어느새 잔잔한 호수가 되어 있었다.

“부산은 어쩌기로 했습니까?”

“이번 달 안으로 끝을 볼 거다.”

“협력이라도 구하시죠.”

“안 그래도 경상 쪽에서 돕겠다더군. 이번건으로 아예 관계를 끊으려는 모양이야.”

서울 요새에 이어 경상 쪽 요새들까지 합류한다면 사실상 승패는 결정되었다.

나는 머리로 전쟁 양상을 그려보며 유일한 변수인 섬나라 새끼들을 언급했다.

“일본은요?”

“엠마 양에게 조언을 구했어. 미연방이 한 경고를 알아먹었으면 눈치껏 빠지겠지. 뭐, 굳이 관여하겠다면 물러날 생각은 없다.”

성향이 수비적인 김태하 소장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정말 작정한 것이다.

점점 커지기 시작하는 스케일에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어보았다.

“도와드려요?”

“처음부터 끝까지 강릉이 다 해 먹으면 우리는 뭐하나? 이번 건은 서울에 맡겨둬.”

하긴, 우리 방위군을 끌고 가봤자 전천후 포격만 넋 놓고 구경하고 올 것이다.

전차를 굴린다니 참 부럽습니다?

나는 새삼 느껴지는 체급 차이에 작게 투덜거렸다.

“끝난 모양이군.”

밤늦게까지 이어진 연회가 드디어 끝이 났는지 이솔하가 해맑게 밖으로 나온다.

나는 술 취한 이솔하가 다가오기 전 서둘러 김태하 소장과 악수하며 다음을 기약했다.

“또 보죠.”

“좋은 소식 기다리겠네.”

참수 작전과 회담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나는 강릉으로 향하는 열차에 올랐다.

하지만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 충격적인 소식 하나가 한반도 전역을 강타했다.

미연방이 핵을 투하했다.

* * *

현재 미국 본토 상황은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애리조나에 자리 잡은 군락이 엄청난 속도로 증식하며 캘리포니아를 집어삼켰고,

변이 바이러스를 통해 도시를 장악, 그대로 LA 한가운데 커다란 둥지를 만들었다.

저 안에 얼마나 많은 군락과 변이종 감염체가 웅크려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네바다 방어선을 몰아치는 수백만마리 감염체를 통해 수를 가늠해볼 뿐.

미국은 결국 고민 끝에 인접한 주에 시민들을 모두 대피시킨 뒤 핵을 발사했다.

쾅!

우리는 엠마가 가져온 영상 속 버섯구름을 보며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껴야 했다.

오래전 중국에서 발생한 수많은 핵폭발의 악몽이 다시 재현되는 것 같았다.

삑.

“현재까지는 움직임이 없어요.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낙관적이지만은 않네요.”

얼굴이 침울한 엠마는 노트북을 조작해 또 다른 사진 하나를 영상기에 띄었다.

“롱아일랜드 연구소에서 발표한 자료에요. 보시면 현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군락은 거리와 위치 관계없이 전부 연결되어있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 같은 생각, 같은 사고를 하며 동시에 진화한다고 쓰여있죠.”

“그럼 변이 바이러스도······.”

“예. 이미 모든 군락이 변이 진화를 끝냈을 거예요. 뭐,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미연방이 위성과 항공 정찰로 촬영한 여러 가지 사진이 한 장 한 장 지나간다.

“군락도 상위와 하위라는 개념이 존재하는 걸 발견했어요. 위로 갈수록 지능도 높고, 만들어낼 수 있는 감염체도 많죠. 그리고 특히 상위 군락은 이런 식으로······.”

미 육군이 가까스로 저지한 군락 둥지의 사진이 동시에 여러 장 화면에 떠올랐다.

“엄청난 깊이로 토굴을 만들죠. 방공호 같은 둥지에 조금만 남아도 재생하는 끈질긴 생명력. 소멸시키려면 벙커버스터를 사용하거나 치료제를 투여할 필요가 있어요.”

“사람이 직접 들어가서 말입니까?”

“네. 정말 미친 소리 같겠지만, 그걸 두 번이나 성공시킨 사람들이 여기 있잖아요?”

어, 생각해보니 그렇네.

우리 나름 감염체 특수 대응팀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나와 옛 서울 특임대 동료들을 서로를 바라보다 이내 피식 웃고 말았다.

우리가 한 짓 때문에 앞으로 군락과 싸울 미국 특수부대원들만 죽어나게 생겼다.

“언제까지 핵에만 의존할 수는 없어요. 펜타곤도 이를 충분히 자각하고 있고······.”

엠마는 잠시 숨을 고른다.

그리고 한자리에 모인 우리를 바라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상부에서도 곧 정식으로 제안할 겁니다. 여러분들의 군락 작전 경험과 감염체 전투에 대한 노하우가 필요해요.”

흔히 우리가 갓 전입해온 병아리들을 가르칠 때 반드시 강조하는 것이 있다.

바로 너희가 배우고 있는 모든 작전 수칙과 대응 방법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그동안 이곳을 거쳐 간 수많은 대원이 흘린 피와 비명으로 쓰였다는 걸 말이다.

“가르쳐 달라 이 말입니까?”

“네.”

어찌 보면 현명하다 할 수 있다.

앞으로 시행착오와 수많은 희생을 감수하며 데이터를 쌓는 것보다는 누군가에게 부탁해 경험을 직접 배우는 편이 나을 테니까.

나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엠마와 우리 대원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우리가 얻는 건 뭐죠?”

“그에 상응하는 대가요.”

엠마는 빈 종이를 내밀었다.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그 종이는 미국이 제시할 수 있는 한 장의 백지수표였다.

“쓰세요, 아무거나.”

엠마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뭐든지 드릴게요.”

* * *

“잠깐!”

내가 차에서 내리려던 그 순간 함께 온 상식 아저씨가 다급히 옷을 붙잡았다.

“넥타이가 풀렸어!”

그리고 능숙한 손길로 다시 넥타이를 메주며 마지막까지 옷매무새를 살폈다.

“중요한 자리라며. 옷이라는 게 원래 사람의 얼굴이라고, 늘 깨끗하게 다녀야 해.”

“1시간이면 끝나는 걸 가지고······.”

“이런 건 또 제 할아버지를 똑 닮았네. 그 양반도 정장은 절대 안 입고 다녔지.”

상식 아저씨는 그때를 회상하는지 흐뭇함 웃음과 함께 내 어깨를 탁탁 털었다.

아파트로 들어온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 강릉시장이 되어 모두의 존경을 받고 있다.

박동구 동장님이 이 모습을 보셨다면 정말 좋아하셨을 텐데 세월이 야속할 뿐이다.

“늙어서 주책이구먼.”

코끝이 찡해진 아저씨는 눈가를 황급히 비비며 아무렇지 않은 척 빙긋 웃었다.

“가요.”

“그래, 가야지.”

덜컹!

내가 차에서 내리자, 호위를 자처하고 따라온 대원들이 순식간에 주변을 둘러싼다.

오른편을 보자 마찬가지로 차에서 내린 일행들이 하나둘 합류하기 시작했다.

“가, 가은아. 내가 와도 되는 자리야?”

“언니답지 않게 왜 그래요.”

“태식아, 나 청심환 하나만 다오.”

“혹시 모르니 두 알 드세요.”

미국에서 보낸 정상 인사를 강릉에 정식으로 초청해 환영해주는 중요한 자리다.

그런 중요한 자리에 일행들을 부른 것이야말로 내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예우였다.

와아아아아아!!

공항에는 많은 인파가 몰렸다.

지난번 협상이 조용히 치러진 비공식 만남이었다면 이번 초청은 그 반대다.

강릉이 한낱 시골 요새에서 미국과 외교관계를 맺는 세력으로 거듭나는 순간.

이에 자긍심을 느낀 강릉 주민들은 미국에서 온 손님들을 기꺼이 환영해주었다.

덜컹!

활주로 한가운데로 옮겨진 군용기 문이 열리더니 곧 한 익숙한 남성이 내렸다.

다름 아닌 지난 협상 때 강릉에 비밀리로 방문했던 하트먼 하원 의원이었다.

“이렇게 또 뵙게 될 줄 알았으면 조금 더머무르다 갈 걸 그랬습니다, 하하.”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젠 그냥 하원 의원이 아니다.

조금만 더 있으면 하원의장이 될 중요 인물이다.

나는 그와 반갑게 악수한 뒤 미리 준비된 차량을 향해 함께 걸음을 옮겼다.

“설마 영사관 설립을 요구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서울 요새에선 반응이 없습니까?”

“이미 서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저희로선 최대한 빨리 일정을 진행하는 게 최우선입니다.”

핵이라는 카드까지 꺼낸 미국으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돌파구를 찾고 싶어 했다.

그중 하나인 특수팀 설립을 위해서는 우리의 도움이 꼭 필요한 실정이었다.

이렇게 화려한 쇼를 보여줬으니 나도 그에 상응하는 제스처를 취해줘야 할 때다.

“구성원은 어떻게 됩니까?”

“델타포스, ISA, 그린베레, 네이비실, 레인저 연대 RRC에서 성적이 우수한 대원들만 선별해 팀을 꾸렸습니다. 하나 같이 최정예 대원들이며 열의 또한 충분합니다.”

하나 같이 티어1, 티어2를 넘나드는 미국의 유명한 특수부대들 뿐이다.

거기다 성적이 가장 우수한 자들만 뽑았다고 하니 어떤 괴물들일지 궁금하다.

뭐 이 정도면 한 3주 훈련하면 대부분 이론과 교리 정도는 습득할 것 같다.

갑자기 기가 팍 죽네.

굳이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우리 대원들과 합숙 훈련부터 들어가면 될 것 같았다.

“Mr 박.”

“예?”

“별개로 이건 사령부에서 직접 요청하신 부탁입니다. 혹시 앞으로 기회가 생긴다면 실전 훈련도 꼭 부탁드린다고 하더군요.”

“실전 말입니까?”

“한반도에는 아직 하위 군락만 발생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약 이에 대응해야 할 일이 생길시, 저희 파견 팀도······.”

어어, 아니지?

나는 ‘만약’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피가 싹 식어버리는 것을 느꼈다.

지금 당장 할아버지 집으로 달려가, 미래일기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사각, 사각, 사각.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다. 적이 성장하기전 싹을 잘라 버리는 것 또한 하나의 방어법이다. 마침 미래의 재앙이 될 불씨가 저 멀리 ‘고성’에 자리 잡았고, 이를 막을 절호의 기회가 또 한 번 ‘그’에게 찾아왔다.]

[군락은 현재 오만해져 있다. 인간은 한낱 먹잇감이며 언젠가는 자신들이 이곳을 지배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 이젠 그 생각을 바꿔줄 차례다. 놈들을 통째로 불태워 진정한 공포를 뇌리에 각인시켜주자.]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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