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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의 상속자-94화 (94/180)

94화

강릉에서 공식 일정을 전부 소화한 하트먼 하원 의원은 곧장 군용기에 올랐다.

아무래도 전 세계 순방을 도는 중이다 보니 여유를 부릴 틈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너무 짧게 머물 다 가게 된 것을 아쉬워하며 곧장 호주 시드니로 출국했다.

'반갑습니다.'

내가 요청한 미연방 영사관은 공항과 멀지 않은 양양 시내에 자리를 잡았고,

덩달아 일본에서 지부를 옮겨온 CIA 또한 멀리 않은 곳에 임무 센터를 설립했다.

강릉은 그들이 살 관사와 교통, 기본적인 치안을 위해 양양을 정돈해주었다.

삼척에는 블라디보스토크 사람, 양양에는 미국 사람, 어째 점점 다국적이 되어갔다.

졸지에 외국인 이웃들을 맞이하게 된 강릉 주민들은 무척이나 신기해했다.

‘우리도 시작해봅시다.'

미연방이 약속을 지켜줬으니 우리도 슬슬 정해진 일정을 이행할 차례가 왔다.

나는 영사관이 설립된 그 즉시 휴가를 즐기고 있던 특전대를 다시 호출했다.

곧 장기간 체류할 수 있는 물자와 훈련 장비를 모두 챙긴 뒤 대관령으로 떠났다.

대관령.

가을임에도 불구하고 기온이 낮으며 기본적인 지형 자체가 가파른 산악지대이다.

인간이 살기에는 혹독하지만, 반대로 전지훈련을 하기에는 참 좋은 환경이었다.

우리는 한때 감염체와 교전이 벌어졌었던 대관령 휴게소를 베이스캠프로 삼았고,

약 3주간 합동 훈련을 함께 진행하게 될 미연방 특수 파견팀 대원들과 마주했다.

“반갑습니다.”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특수부대에서 또 날고 긴다는 대원들만 뽑아 데려왔다.

솔직히 말해 순수한 기량 면에서는 이들이 더 뛰어나거나 일부 압도할 것이다.

파견팀도 그걸 아는지 굉장히 무심한 얼굴로 기립한 채 인사도 안 해주었다.

뭐, 첫날이니 어쩔 수 없지.

나는 그냥 형식적인 말과 함께 일정을 진행하려 했다.

“앞으로 저희는 여기 대관령 캠프에서 약 3주간 합동 훈련 일정을 소화할 예정입니다. 유의미한 결과를 얻기 위해······.”

“잠깐.”

그런데 그 순간 제일 앞에 기립하고 있던 한 백인 남성이 대뜸 말을 끊었다.

“그래서 바디캠은 언제 공개하지?”

3대 500은 웃으면서 칠 것 같은 근육질에 온몸이 흉터로 가득한 그린베레 대원이다.

그는 형식적인 절차를 무척이나 싫어하는지 대뜸 대원들의 바디캠 기록을 요구했다.

“시간 낭비하지 말자고. 우리 모두 댁들이 꽁꽁 감춘 현장 정보가 필요해서 온 거지, 이런 훈련이나 받자고 온 게 아니니까.”

뭐, 이 정도는 충분히 예상했다.

다들 베테랑이고 프라이드이란 게 있을 테니까.

아마 이들 대부분 공동 훈련을 진행해야한다는 상부 지시에 불만을 품은 것 같았다.

“······이 새끼가 장난하나.”

나를 무시하는 처사에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문 상사가 욕설을 읊조린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다른 대원들 또한 금방이라도 싸울 기세로 인상을 찡그렸다.

첫날부터 개판이다.

한숨을 푹 내쉰 나는 헬멧이랑 방탄복을 벗고 그린베레 대원을 향해 다가갔다.

“좋습니다.”

그리고 날을 갈지 않은 나이프를 그에게 툭 던져주며 나 또한 다른 나이프를 들었다.

“이기는 쪽이 뭘 할지 결정하죠.”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치챈 그린베레 대원은 무덤덤한 얼굴로 나이프를 주웠다.

어차피 이 바닥이야 실력만 입증하면 지나가는 개새끼 말도 들어주는 곳이다.

다른 파견 대원들은 굳이 말릴 생각은 없는지 흥미진진한 얼굴로 이를 지켜봤다.

스으으.

앞니 사이로 숨을 내쉰다.

각자 자세를 잡고 거리를 10m 안쪽으로 좁혀들어갔다.

후웅!

선공은 상대다.

그는 순식간에 앞으로 다가와 급소로 나이프를 찌르고 들어왔다.

속도, 중심, 힘, 그 어느 하나 모자람이 없는 정석적인 나이프 파이팅이었다.

턱! 티잉!

재빨리 패리한다.

동시에 서로가 베기 타점을 지르며 순식간에 합을 교환했다.

가벼운 찌르기, 당겨 베기, 급소를 노리고 들어오는 타점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후웅, 탁! 까앙!

여태 상대해온 적들과는 차원이 다른 숙련도 차이에 쉽사리 승부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속도와 힘에선 몰라도 순수한 기술 쪽에선 이쪽이 더 우위에 있었다.

상대도 이에 놀란 눈치인지 곧 유리한 신체조건을 이용해 내 옷깃을 붙잡았다.

턱!

이 순간을 기다렸다.

나는 옷깃이 잡히자마자 그대로 상대를 뒤로 끌어당겼다.

“- - - - - -!!”

둘 다 중심이 무너진다.

하지만 중심을 먼저 잡는 건 나다.

그대로 정강이를 걷어차 넘어트리고 옷깃을 잡은 팔을 돌려 엎어치기를 가했다.

쿠웅!

육중한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퍼진다.

크윽! 인상을 찡그린 상대는 서둘러 일어나려고 했지만, 이미 승패는 결정이 났다.

나는 목에 나이프를 겨눈 채 한동안 그를 노려보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또 있습니까?”

우습게 보았던 동양인을 상대로 그린베레대원이 1분을 채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우리 대원들은 남몰래 웃음을 지었고 파견팀은 소속을 대표해 앞다투어 나왔다.

콰직!

“큭!”

쿠웅!

“컥!”

하지만 달려드는 족족 다른 방법으로 제압해주자 곧 훈련장이 조용해진다.

“······중위님, 요즘 저 몰래 뭐 먹습니까?”

한참 신체 전성기 시절을 함께 했던 문 상사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묻는다.

확실히 요즘 몸이 가벼운 게 개처럼 뛰어다녔던 초창기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탁!

기분 좋게 땀 흘린 나는 바닥에 쓰러져 끙끙거리는 이들을 일으켜 세웠다.

아이러니하게도 잔뜩 처맞은 파견팀 인원 모두가 무척 만족하는 얼굴이었다.

짝!

“자!”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한 손뼉을 한 번 쳐준 뒤 본격적인 합동 훈련을 재개했다.

“그럼 이제 시작하죠.”

* * *

다들 철저하게 능력주의라 그렇지, 성격이 나쁘거나 괴팍한 이들은 아니었다.

그걸 증명하듯 이후 일정은 파견팀 대원들 모두 군소리 없이 따라와 주었고

앞으로 함께하게 될 우리 특전 대원들과도 점차 교류를 트기 시작했다.

원래 모든 건 경험해야 봐야 아는 것.

처음에는 우리 대원들을 무시하던 그들도 감염체 대응법에 엄청난 관심을 보였다.

특히 그 관심은 우리가 그동안 찍어온 바디캠을 공개하면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지옥 그 자체군.”

“여길 들어간다고? 제정신인가?”

엠마가 어떤 대가를 주더라도 미국으로 가져가려고 했던 대원들 바디캠이다.

우리가 어떻게 싸웠는지, 군락을 어떻게 죽였는지 전부 여기 영상으로 기록되어있다.

생생한 현장 기록을 심각한 얼굴로 시청하며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던 그들.

마지막으로 내 바디캠이 공개되자 한 장면을 10번씩 돌려볼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방향감각은 어떻게 잡았습니까?”

“9분 12초쯤 판단 근거가 궁금합니다.”

영상을 프레임 단위로 쪼개면서 나온 의문에 또 내가 일일이 답변해줘야 했고,

그것도 모자라 그 당시 판단을 분석한 대응 데이터를 텍스트화 해줘야 했다.

새로운 문물에 잔뜩 흥분한 파견팀은 밤늦게까지 나와 대원들을 붙들고 있었다.

“진짜 끝내주는 양반들이네.”

“쟤는 올림픽을 나가는 게 맞지 않나?”

하지만 무의미한 시간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순수한 기량면에서는 특전대보다 우위에 있는 미국 파견팀이다 보니,

다양한 전술과 특수 작전 때 써먹을 수 있는 여러 노하우를 전수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정신없던 2주 차 일정이 지나고 훈련도 슬슬 마무리 일정에 들어가고 있었다.

“우욱, 이게 도대체 뭡니까?”

“3일 썩힌 인분이랑 소똥 그리고 진흙과 썩은 낙엽을 골고루 섞은 겁니다.”

마지막 모의 훈련을 위해 당시 군락 둥지와 비슷한 환경을 한 곳 조성해봤다.

“왜 그런 끔찍한 짓을······.”

“우웨에에엑!”

당연히 반응은 폭발적이었으며 여기저기서 역겨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발생했다.

진짜 냄새 맡아보면 아주 기절하겠는데?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낄낄 웃다가 곧 우우웅 전화기 진동이 울리는 걸 느꼈다.

“형님?”

“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

강릉 시청에서 연락이 왔다.

나는 곧장 훈련장에서 벗어나 위성 전화기를 받았다.

[시장님? 저 김태식입니다.]

“예, 듣고 있습니다.”

[감염체 군락이 발견됐습니다.]

“다행이군요. 고성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미국이 직접 무인기를 보내서 자세한 위치까지 파악했답니다.]

입국할 때 뭘 포장해서 들고 오더니 그게 공군에서 쓰는 무인기였던 모양이다.

성능 하나는 진짜 확실하네, 고성 전체를 뒤져 자세한 군락 위치까지 찾아내다니.

나는 또 한 번 기술력에 감탄하며 1주 뒤에 돌아가겠다고 말하려 했다.

[저, 근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문제요?”

[군락 근처를 비행하던 무인기가 갑자기 지상으로 불시착했습니다. 조종사 말로는 꼭 전파방해(ECM)를 당한 거 같답니다.]

“다른 세력이 있는 겁니까?”

[아뇨, 분명 별다른 흔적은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수색이 먼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인간이 살지 않는 고성에서 멀쩡하게 날던 무인기가 전파방해를 받고 불시착했다.

확실히 우연이라고 치부하고 넘기기에는 찝찝한 구석이 한둘이 아니었다.

“바로 가겠습니다.”

훈련 종료를 일주일 앞둔 특전대와 미국 파견팀은 그대로 강릉으로 복귀했다.

미국 펜타곤이 그토록 원하던 실전 경험의 기회는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 * *

고성 운봉산에 자리 잡은 감염체 군락은 이제 막 생성된 초기형 군락이었다.

그만큼 보유 감염체도 적었으며 변이종 또한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말 그대로 위험성이 적은, 파견팀이 군락을 몸소 경험해보기 딱 좋은 정도였다.

부우우우웅, 끼익!

덜컹! 척, 척, 척!

이번에도 우리의 엄호를 맡아줄 강릉 방위군이 서둘러 탄약과 물자를 하역했다.

그리고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소수 감염체를 정리하고 도학초등학교를 점거했다.

여기서 군락 둥지가 있는 운봉산까지는 불과 3km.

끌고 온 곡사포의 충분한 사정권이며 동시에 기지를 세우기도 좋았다.

“준비 끝났습니다.”

“정문으로 모이라 하세요.”

방위군이 자리를 잡았으니 늘 그렇듯 우리 특전대가 작전 직역으로 움직일 차례다.

미국 파견팀과 함께 기지를 빠져나온 우리는 하나둘 무장 트럭에 올라탔다.

부우우우우웅 -!!

차량 행렬은 한적한 시골길을 달려 무인기가 마지막 신호를 보냈던 장소로 향했다.

전쟁 이후 인간이 살지 않는 곳으로 알고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뒷좌석에 앉은 나는 무인기를 담당하고있는 기술 대위에게 간략한 설명을 들었다.

“원래라면 기지와 연결이 끊기는 즉시 자동 비행 상태로 전환되는 게 정상입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아예 먹통이었어요.”

“시스템 오류일 확률은요?”

“이 녀석만 2년째 만졌습니다. 이게 전파방해인지 오류인지는 제가 더 잘 압니다.”

볼이 주근깨로 가득한 기술 장교는 확신에 찬 얼굴로 전파방해를 주장했다.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고, 일단 불시착한 무인기를 찾는 게 최우선인가.

빠른 속도로 운봉산 부근으로 달려간 차량 행렬은 곧 목적지 부근에 도착했다.

치익!

[전방에 감염체 발견!]

[2시 방향에도 다수 있습니다.]

무인기가 불시착한 운봉산 초입에는 이상하게도 감염체 무리가 득실거리고 있었다.

끼이이이이익- -!!

전후방 안 가리고 동시다발적으로 들려오는 무전에 나는 즉각 공격 명령을 내렸다.

투두두두두두두두- -!

대기하고 있던 기관총 사수들이 즉각 총구를 돌려 달려오는 감염체를 저지한다.

나머지 대원 또한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이 방아쇠를 당겨 주변을 청소했다.

끼익, 덜컹!

한참 속도를 줄이던 차량 행렬은 곧 감염체들이 모여 있던 공터에 정차했다.

“이쯤이에요.”

무인기가 불시착하는 소리를 듣고 몰려든걸까?

생각보다 감염체 숫자가 많다.

“잠시 대기해.”

나와 1팀은 좌표를 딴 기술 장교를 따라 천천히 운봉산 초입으로 다가갔다.

유인기까지는 아니어도 꽤 비싼 걸로 아는데 제발 멀쩡히 살아있으면 좋겠네.

“어, 어?”

하지만 아무리 주변을 수색해도 무인기는커녕 불시착한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자신만만하게 길을 안내하던 기술 장교는 곧 당황한 얼굴로 태블릿 화면을 쳤다.

“여기 정말 맞습니까?”

“예! 분명 이곳이어야 하는데······.”

불길하기 짝이 없는 징조다.

운봉산을 조용히 노려본 나는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일단 무인기가 사라진 것을 확인했으니 이 일대를 수색해 주원인을 찾아야 한다.

치이익, 치익. 치이익!

“???”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작동하던 소형 무전기가 갑자기 먹통이 되었다.

“이게 왜 이래?”

그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현장에 함께 있는 대원들 또한 같은 현상을 겪고 있었다.

아무리 배터리를 교체해보고 다른 주파수로 돌려봐도 짙은 잡음만 들리는 무전기.

순간 산에서부터 불어온 서늘한 공기가 나와 대원들 사이를 핥고 지나간다.

“······일단 합류합니다.”

우리는 그 즉시 현장에서 벗어나 공터에서 대기 중인 다른 대원들과 합류했다.

어쩌면 원인이 인간이 아닐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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