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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의 상속자-95화 (95/180)

95화

가까운 거리를 수신하는 무전기는 물론 차량에 설치된 CB까지 전부 먹통이다.

도대체 전파방해 출력이 얼마나 강하길래 아무리 채널을 옮겨봐도 소용이 없는가.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운봉산 일대를 벗어나 방위군이 있는 베이스캠프로 복귀했다.

치지직, 치직!

하지만 통신 장애를 겪고 있는 건 기지에서 대기 중이던 방위군도 마찬가지였다.

운봉사뿐만 아니라 3km 정도 떨어진 베이스캠프까지 모조리 먹통이 된 거다.

이건 누구 봐도 고의적이고, 또 우리를 겨냥한 전파방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일단 수색부터 합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성 일대, 시설이 있을 법한 지역을 모조리 정찰했다.

만약 이 정도 전파방해를 가하려면 적어도 눈에 보이는 시설이 있어야 하니까.

하지만 고성 그 어디에도 통신 시설과 같은 인위적인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전파방해를 쏘는 군락이라니.”

인정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었다.

현재 모든 정황증거가 저 운봉산 군락이 범인이라고 친절히 말해주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현실에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사실이라면 큰일입니다.”

무선 통신은 작전 시작부터 끝까지 명령을 하달하는 중요한 전투 장비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사실상 현장 지휘관 판단에 모든 걸 의존해야 한다는 건데,

단순 소대급이면 몰라도 그 이상으로 넘어가면 사실상 지휘는 불가능해진다.

특히 군락이 동시 진화한다는 걸 생각한다면 일시적인 현상으로 끝나지 않을 터.

나는 섣불리 의견을 내놓지 못하는 대원들 사이에서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일단 강릉에 상황부터 알리세요.”

“그럼 원래 일정은······.”

“실전 훈련은 여기서 종료합니다. 저희 강릉은 이 시간 이후로 운봉산 군락을 소거하기 위한 총공세에 들어가겠습니다.”

여기서 물러난다고 해서 운봉산 군락을 처리할 마땅한 수가 나오는 건 아니다.

고성이 강릉과 인접한 지역이라는 것과 군락의 진화 형태가 아직 초기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 대응하는 게 옳았다.

“알겠습니다!”

내가 드디어 결단을 내리자 대원들과 방위군 간부들 모두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졸지에 참관이 아닌 작전 투입이 결정된 미국 파견팀 또한 작게 환호성을 지른다.

하여튼 진짜 별종들이다.

나는 어느새 합을 맞추고 있는 연합팀을 뒤로하고 건물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군락이 둥지를 틀고 있는 운봉산에는 점차 짙은 어둠이 찾아오고 있었다.

찌릿!

그 순간 고개를 쳐드는 익숙한 감각과 함께 왼쪽 눈 흉터에서 고통이 느껴졌다.

둥지에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던 운봉산 군락이 서로의 존재감을 확인한 것이다.

“- - - - - -.”

하지만 그것도 잠시, 놈은 곧 언제 그랬냐는 듯 존재감을 지우며 사라졌다.

때마침 지평선 아래 고인 주황빛 일몰이 가라앉으며 완전한 어둠이 찾아왔다.

* * *

달칵, 달칵, 달칵. 철컥!

달칵, 달칵, 달칵. 철컥!

권총 탄알집을 꺼내 총알을 빼내고 다시 삽탄하는 과정을 천천히 반복한다.

염주를 돌리는 스님처럼 이렇게 가만히 반복하고 있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하지만 마음만 편안해질 뿐, 늦은 밤까지 잠이 오지 않는 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형님.”

침낭 위에 가만히 앉아 상념에 빠져 있는데 창문으로 빼꼼 경태가 고개를 내밀었다.

마침 불침번을 끝내고 복귀하는 길인지 완전무장 한 상태에 위장도 바르고 있다.

“안 주무세요?”

“잠이 안 와서.”

내가 졸려 보이는 기색이 아니자 경태는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에고고 앓는 소리와 함께 옆에 앉아 신기하다는 얼굴로 바라본다.

“문 상사님도 이게 버릇이시던데.”

“날 보고 배웠거든."

“송 중위님은 또 분해조립이시더라고요.”

“걔는 좀 유별나.”

특임대 출신이라면 대부분 나처럼 총기와 관련된 이상한 루틴이 하나씩 있다.

대부분 나처럼 총알을 삽탄 하거나 일부는 총기를 분해 혹은 손질을 하는데,

이렇게 루틴을 지켜줘야 다음 날 죽는 사람 없이 작전이 끝난다고 여기고는 했다.

“정해진 규칙 같은 거라도 있어요?”

“뭐 대단할 거라고. 아무거나 해.”

“오, 그러면······.”

관심을 보이던 경태는 한동안 무언가를 고민하더니 이내 방탄 헬멧을 벗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한 낡은 사진을 꺼내더니 진지한 얼굴로 무언가를 이야기하려 했다.

“잠깐!”

“네?”

“그건 아니야!”

아니, 루틴을 만들라고 했더니 돌아가신 부모님 사진은 왜 갑자기 꺼내는 거야?

이 장면을 어디서 많이 본 나는 황급히 녀석을 말리며 사진을 넣게 하려 했다.

“에이, 전쟁 영화 너무 많이 보셨다. 형님도 그런 이상한 미신 같은 거 믿으세요?”

“미신? 이 새끼야 여기선 과학이야!”

기어코 사진을 집어넣지 않은 경태는 피식 웃으며 재수 없게 검지를 들어 올렸다.

“절대 그런 일 없을······.”

삐이이이이익! 펑!

그 순간 우리가 설치한 저지선 트랩이 발동되며 하늘 높이 조명탄이 날아올랐다.

깜짝 놀란 보초들은 서둘러 그쪽으로 총구를 돌렸고 재빨리 침입 사이렌을 울렸다.

“감, 감염체다!”

“놈들이 몰려옵니다!”

에에에에에에엥-

어둠을 틈타 몰려온 감염체가 저지선을 넘어 기지로 우르르 몰려오고 있다.

시발, 어쩐지 잠이 안 오더라니!

나는 넋이 빠진 경태의 뒤통수를 빡! 때린뒤 서둘러 장비를 챙겨 일어났다.

“빨리 일어나, 새꺄!”

교실 밖은 이미 잠에서 깨어난 대원들이 밖으로 우르르 몰려 나가고 있었다.

이에 깜짝 놀란 경태는 곧 진지한 얼굴로 장비를 챙겨 내 뒤를 따라왔다.

투두두두두두 - - -!!

혹시 모를 야습을 대비하고 있던 대기조가 서둘러 거치 기관총을 발사한다.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방열을 끝낸 옥상 박격포 팀도 하늘 높이 조명탄을 쐈다.

퍼엉!

세상이 환해진다.

3시간 전만 해도 광활한 평지였던 주변은 어느덧 검은색 파도가 일렁이고 있었다.

저게 다 몰래 다가온 감염체라는 것에 나를 포함한 모든 이들이 놀라움을 느꼈다.

한참 전성기를 구사하던 대관령 군락 때와 규모가 그리 별 차이 나지 않았다.

“정신 차려, 새끼들아!”

“뭐해! 쏴!”

하지만 방위군 병사들은 금세 정신을 차리고 다시 화력을 투사하기 시작했다.

투두두두두두!

퐁! 퐁! 콰아아앙!

잠시 주춤했던 기관총 십자 사격과 박격포 포화가 이어지며 놈들을 쓸어 담았다.

나는 그사이 재빨리 옥상으로 올라가 감염체 무리의 움직임을 살펴보았다.

‘집단 지휘다.’

이 새끼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군락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나는 옥상과 창문에서 감염체 무리를 관측 중인 지정 사수들을 향해 크게 외쳤다.

“사수들! 주변 둘러봐!”

“안 보입니다!”

하지만 변이종을 찾는데 도가 튼 지정 사수들은 그 무엇 하나 관측하지 못했다.

젠장, 전파방해부터 시작해 변이종이 없는 지휘까지 상식을 모조리 파괴한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총구를 들어 다른 대원들과 함께 열심히 사격을 가했다.

타앙! 탕! 탕!

드르르륵, 드르륵!

그나마 다행인 점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탄약을 많이 챙겨왔다는 것일까.

감염체 무리는 그 많은 숫자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저지선을 넘어오지 못했다.

철컥!

나는 벌써 바닥을 드러낸 탄알집을 던지고 보급을 받기 위해 뒤로 뛰어갔다.

찌릿!

그런데 그 순간 다시 한번 왼쪽 눈 흉터가 아파져 오며 무언가를 강하게 경고했다.

한참 건물을 공격하던 감염체 무리 뒤편에서 알 수 없는 움직임이 관측되었다.

‘우회한다.’

밀도 높은 흐름 사이로 5분의 1쯤 되는 감염체 무리가 왼쪽으로 우회하고 있다.

놈들은 곧 저지선을 끼고 반 바퀴 움직이더니 건물 뒤편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후방! 후방 지원······젠장!”

버릇처럼 무전기를 든 나는 곧 채널이 먹통이라는 걸 깨닫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1팀 따라와!”

그리고 당장 통제가 가능한 1팀과 함께 후방 저지선을 향해 급히 달려갔다.

“총열부터 교체해!”

“젠장, 지원은 언제 옵니까!”

주변을 가득 메운 총성과 폭음 탓에 옆 사람 말도 잘 안 들리는 시끄러운 현장이다.

아무리 내가 먼저 움직였다고 해도 화력 분배에서 조금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끼이이이이익!

결국 후방 저지선이 순식간에 뚫리며 놈들이 건물 100m 앞까지 접근했다.

“쏴!”

급히 달려온 나와 대원들은 빈 화력을 채우며 감염체를 꾸역꾸역 밀어냈다.

경태를 급히 보냈으니 곧 옥상에 거치된 박격포가 이쪽으로 화력을 지원할 것이다.

“잠, 잠깐! 쟤들 어디 갑니까!?”

그런데 그 순간 저지선을 넘던 놈들이 갑자기 방향을 틀어 건물 한편으로 달려갔다.

그곳은 입구도, 창문도 아닌 우리가 탄약과 유류 저장 탱크를 묻어둔 임시 창고였다.

“쏘지 마!”

“사격 중지!”

저기에 총알 한 발이라도 잘못 튀었다가는 건물 전체가 날아가 버리는 수가 있다.

기겁한 우리는 서둘러 사격 중지 명령을 내렸고 놈들은 순식간에 창고를 가로질렀다.

“입구 막아!”

나와 1팀은 계단을 타고 내려가 건물 후문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갔다.

콰직! 끼이이이익!

아니나 다를까 무혈 입성한 놈들이 후문안으로 꾸역꾸역 밀고 들어왔다.

이를 악문 대원들은 복도를 달려오는 감염체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투두두두두두두!

총을 맞은 놈들이 꼬꾸라진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숫자가 빈자리를 채웠다.

“최 대위!”

“2층으로 올라가!”

내가 최 대위를 부르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후퇴하는 방위군을 위층으로 보냈다.

그리고 등에 메고 있던 자동 샷건 두 자루를 꺼내 나와 문 상사를 향해 건넸다.

“먼저 올라가십시오!"

“곧 오셔야 합니다!”

이 정도 버텼으면 전방 저지선에서 이변을 눈치채고 지원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나머지 대원들까지 위로 올려보낸 나는 문 상사와 함께 복도를 틀어막았다.

철컥!

드럼 탄창을 가득 채운 자동 샷건을 풀오토로 당겨 복도를 향해 쏟아붓는다.

투쾅! 투쾅!

투쾅! 투쾅!

그 막강한 화력 앞에 우르르 몰려오던 감염체들이 다진 고기가 되어 쓰러진다.

“가자!”

놈들이 잠시 주춤한다.

흥분한 문 상사를 잡아끈 나는 대원들을 따라 2층 계단으로 도망치려고 했다.

“살려······살려주세요.”

그런데 그 순간 1층 교실에서 피투성이가 된 한 방위군이 힘겹게 기어 나왔다.

까까머리에 앳된 기색이 가득한 그 병사는 우리에게 다급히 도움을 구했다.

“엄호해!”

우리는 한 치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돌려 도망쳤던 복도로 다시 뛰어갔다.

“뒤져, 이 씹새끼들아!”

투쾅! 투쾅!

이미 눈이 돌아간 문 상사는 자동 샷건 두개를 번갈아 가며 놈들을 도륙했다.

그사이 교실 앞까지 달려온 나는 바닥을 기는 병사를 계단으로 질질 끌고 왔다.

“저, 저 물렸습니다.”

물렸다는 말에 즉각 감염체 치료제를 꺼내 붉게 물든 허벅지에 꽂아 넣었다.

앳된 방위군 병사는 그제야 안심했는지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며 엉엉 울었다.

“젠장! 더 이상 못 버팁니다!”

그 순간 우리를 엄호해주던 문 상사가 가지고 있던 탄약이 전부 바닥났다.

쨍그랑!

하필 빈틈을 노린 감염체 놈들이 창문을 깨고 들어와 이쪽을 향해 달려들었다.

철컥!

문 상사가 급히 권총이라도 꺼내 든다.

나 또한 콜트 파이슨과 토마호크를 동시에 뽑아 들며 고립된 문 상사를 향해 달렸다.

스릉!

교전 거리가 불과 2m!

급박한 상황을 마주한 우리 둘은 이를 악물고 등을 맞댔다.

끼이이익, 끽.

“???”

그런데 그 순간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던 감염체들이 갑자기 자리에 멈춰 섰다.

방아쇠를 당기려고 했던 우리 또한 졸지에 멈추며 불과 1m 앞에서 대치했다.

끼이익, 끼기긱.

끼이이익······

“뭐, 뭡니까?”

주변을 맴돌며 무언가를 경계하던 감염체들이 조금씩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한 마리가 아니다.

놈들이 꼬리를 만 개처럼 순식간에 건물 밖으로 도망쳐버렸다.

허억, 허억.

숨이 거칠게 달아오른 나와 문 상사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방금 중위님 보고 도망친 겁니까?”

“······나한테서 냄새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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