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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의 상속자-98화 (98/180)

98화

후방으로 실려 오는 날이면 같은 신세가 된 동료들끼리 이런 농담을 하고는 했다.

아~ 이 새끼 죽지도 않고 또 왔네.

너는 슬슬 그만 올 때도 되지 않았냐?

그러면 보통 제일 많이 다친 동료가 먼저 크게 웃고 나머지는 따라 웃어주었다.

이 지긋지긋한 전쟁, 매일 누군가를 붙잡고 우는 것보다 이렇게 웃는 게 나았으니까.

그때만 해도 다 함께 버티고 또 버티면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거라 믿고 있었다.

‘죽지도 않고 또 왔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침상이 비어갔다.

전우들 웃음에는 힘이 없어졌고 유일하게 하던 농담도 슬슬 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생판 모르는 신병들이 채워갈 때쯤 내 얼굴에선 웃음이 사라졌다.

죽지 않았다는 것.

누군가에게는 축복처럼 들리는 그 말이 누군가에는 끔찍한 저주나 다름이 없다.

가끔은 조용히 두 눈을 감아 먼저 떠난 동료들과 만나고 싶을 때가 있었다.

하하! 이 새끼 드디어 죽었네!

그런데 아쉽게도 이 야속한 몸뚱어리는 또 한 번 살아남아 병실에서 눈을 떴다.

‘질기다, 질겨.’

듣자 하니 후방으로 급히 후송되는 와중에 치료제만 4방을 넘게 맞았다고 한다.

원래 한 방이면 되는 걸 이성을 잃은 대원들이 냅다 꽂기부터 한 것이다.

딱 봐도 가은이랑 경태 짓 같은데 치료제 아깝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시장님, 정신이 드십니까?’

그래도 후송팀이 서둘러준 덕분에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기 전 병원에 도착했고

점차 신의 영역에 가까워지고 있는 차지철 씨 도움을 받아 이렇게 목숨을 건졌다.

뭐, 연례행사도 아니고 매번 응급실로 끌려오는 강릉 시장이 얼마나 미우실까.

나는 이번만큼은 멸균실에 양전히 누워 몸을 치료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렇게 한 일주일 정도가 지나자 슬슬 컨디션이 정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나는 곧바로 병실을 옮겨 태식 씨가 가져다준 전후 보고 서류를 읽어 내려갔다.

‘많이들 다쳤네.’

이번 군락 소거 작전으로 방위군과 연합 팀에서 꽤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물론 감염체 치료제 덕분에 죽은 이들은 겨우 한 자릿수에서 마무리되었지만,

사망자 숫자가 적다고 해서 그 죽음의 무게가 결코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늘 그렇듯 짧게 쓰인 명단을 읽고 또 읽으며 그들을 위해 조용히 기도했다.

‘고성 쌍둥이 군락.’

이번 군락 소거 작전은 실전 경험이라는 명목치고는 너무나 힘들고 또 위험했다.

설마 사례가 없었던 변이를 3번이나 겪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 말이다.

하지만 반대로 리스크가 컸던 만큼 돌아 온 보상은 그 어떤 때보다 대단했다.

특히 미국은 몸이 달아오르다 못해 한시라도 빨리 데이터를 넘겨받으려고 했고,

의례적으로 일본과 유럽까지 관심을 보이며 엠마에게 접촉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들도 아는 것이다.

빠르게 진화하는 군락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빠른 연구가 필요하다는 걸.

이제 감염체 데이터는 그 어떠한 대가를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보물이 되었다.

하지만 이 모든 성과도 '그' 발견에 비교하면 한낱 서브 이벤트에 불과하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뭐, 살만합니다.”

미국으로 급히 출국했던 엠마가 정확히 일주일 뒤에 내 병실을 찾아왔다.

그리고 잔뜩 상기된 얼굴로 옆에 앉더니 곧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내밀었다.

“축하드려요. 전 세계 최초로 바이러스 항체 보유자가 되셨네요. 기분이 어떠세요?”

신의 농간인지 아니면 운명의 장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시발 항체 보유자란다.

그걸 피검사를 통해 알아낸 게 아니라 물려서 알게 됐다는 게 웃기는 일 아닌가.

기분이 어떠냐는 말에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서류를 옆으로 치워버렸다.

그러자 잔뜩 상기되어 있던 엠마는 입술을 삐죽이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내가 기대했던 반응이 아닌데······.”

그래, 대단한 일이긴 하다.

여태 백신이 개발되지 않은 세상에서 스스로 항체를 만들어낸 첫 번째 차례이니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죽어간 이들을 생각하면 기분이 그리 썩 좋지만은 않았다.

고생했던 건 다들 마찬가지인데 왜 나만 이런 행운이 깃들었는지 모르겠다.

“상부에선 뭐랍니까?”

“강릉에 또 다른 연구소를 세우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어요. 아무래도 주기적으로 방문하려면 그편이 편하시지 않겠어요?”

“그렇게 하시죠.”

한참 백신 개발이 진행되는 와중에 항체 보유자의 탄생은 엄청난 소식이었다.

본격적으로 연구가 된다면 난항을 겪고 있는 백신 개발에도 박차가 가해질 것이다.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해서다.

겨우 피 몇 번 뽑아가는 거 가지고 까탈스럽게 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시장님 혹시······.”

“예.”

“미국으로 귀화할 생각은 없으세요?”

현재 강릉 요새 연합은 사실상 서울보다 미국과 더 많은 교류를 하고 있다.

그 중요성이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와중에 이런 귀화 제안이 올 법도 했다.

하지만 저기 흰색 집에 앉아계신 분은 더 큰 스케일을 생각 중이신 모양이다.

“시장님 뜻만 확고하시다면 강릉 주민분들도 이에 모두 포함될 수 있어요.”

“자치령이라도 되라 이 말입니까?”

“어떤 형태로든 변하는 건 없을 거예요.”

동맹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속하게 되는 건 아니다.

말 그대로 해외 자치령, 미연방에 속해 운명을 같이하게 된다는 뜻이다.

잠자코 귀화 제안을 듣고 있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단호히 거절했다.

“됐습니다.”

“서울 요새 때문에 그러세요? 현재 강릉과 영동지방은 엄연히 독립된······.”

“그만하죠.”

여기까지만 하자는 말에 재차 설득하려던 엠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공은 공, 사는 사.

그녀는 상부에서 지시 한 일을 할 뿐이지 개인적인 감정은 없었다.

“그렇게 전달하도록 할게요.”

“······미안해요.”

“에이, 친구끼리 왜 그래요.”

능글맞게 웃은 엠마는 가지고 온 꽃다발을 병실 한쪽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곧 상처투성이인 내 손을 꼭 잡아 준 뒤 마지막 인사와 함께 병실을 나섰다.

꽃 냄새가 좋다.

어느덧 가을도 막바지로 향하는 모양이다.

* * *

이번 군락 소거 작전을 벌이며 느낀 점은 내가 너무 안일했다는 것이다.

전술과 감염체 대응 기술은 5년째 고착되어가는데 군락은 진화하는 상황.

이에 상응하는 유동성을 갖추지 못한다면 우리는 언젠가 패배할 수도 있었다.

나는 적어도 이에 상응하는 대처를 보이거나 새로운 대안을 내놓으려고 했고,

그중 가장 만만한 것은 역시 군락을 상대 할 새로운 무기의 개발과 선정이었다.

“쓸까요?”

“응.”

크로스 보우를 건네받은 가은이가 저 멀리 보이는 표적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푹!

그러자 볼트는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 표적 정중앙에 제대로 꽂혀버린다.

AR-15으로 기반으로 한 택티컬 크로스 보우답게 뛰어난 정확도와 무소음이다.

다만, 소총을 대신하기에는 장전이 확연하게 느려 실전에선 쓰기 힘들어 보였다.

그런데도 이걸 가져와 굳이 시범까지 보인 이유는 바로 이 치료제 때문이었다.

“정확하게 주입되는데요.”

“웬만한 표피는 다 뚫을 겁니다.”

소총으로도 상대가 안 되던 진화 군락을 겨우 치료제 하나가 완벽하게 제압했다.

이를 고려해 처음에는 공기압 마취총, 활과 화살 등등 여러 개 시험해봤지만,

압도적으로 1등을 한 건 바로 볼트 속에 치료제 캡슐을 넣은 크로스 보우였다.

“이거 누구 아이디어입니까?”

“시장님도 아실걸요? 철물점 김 씨요.”

김 씨? 강릉항에 딱 하나 있는 철물점에 손재주 좋은 노총각으로 기억하고 있다.

역시 고수들은 재야에 은둔하고 있다더니 이런 인재가 숨어 있었을 줄이야.

아이디어도 그렇고 특수 볼트를 뚝딱뚝딱 만들어낸 손재주도 감탄이 나온다.

“치료제 여유분이 도착하면 본격적으로 생산해보세요. 몇 정 들고 다녀야겠습니다.”

“맡겨주십시오.”

일단 생산 단가가 저렴한데다 사용 방법도 직관적이고 또 그 효과가 확실하다.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기에 나는 김 씨를 위한 포상과 함께 생산을 지시했다.

특전대 전담 사수들이 슬슬 적응되는 대로 실전에 곧바로 투입할 예정이었다.

그렇게 훈련장에 모여 바삐 의견을 나누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캡틴!”

“어?”

깨끗한 군복으로 갈아입은 파견팀 대원들이 환하게 웃으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하나 같이 입국할 때 가지고 왔던 배낭을 등에 한가득 메고 있었다.

“귀국행 비행기가 도착해서 말입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요?”

“본토 상황이 꽤 급하답니다. 저희도 복귀 명령이 떨어져서 어쩔 수 없더군요.”

오늘 밤 성대한 송별회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지금 떠난다니 아쉬움이 몰려온다.

이미 첫날 해프닝 따위는 잃어버린 나는 파견팀 대원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놨다.

“진짜 갑니까?”

“누나랑 여기서 살자니까!”

마찬가지로 특전 대원들 또한 우르르 몰려와 그들과 포옹하고 악수한다.

고작 3주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말 멋지고 끝내주는 사람들이었다.

“캡틴, 정말 영광이었습니다.”

만나자마자 나와 치고받고 싸웠던 그린버레 남성, 아니 리암이 웃으며 손을 내민다.

나는 그 손을 꽉 붙잡아주며 앞으로 있을 파견팀 대원들의 앞날을 축복해주었다.

“나중에 꼭 살아서 봅시다.”

비록 다른 전장에서 다른 적과 싸우게 될 이들이지만, 그 이유 하나만큼은 같다.

부디 여기서 배운 생존 기술이 파견팀 대원들에게 꼭 도움이 되기를 기도했다.

“잘 가!”

“다음에는 우리가 갈게!”

우리는 아쉬운 발걸음을 떼는 외국 친구들을 향해 하염없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전장으로 돌아가는 그 심정은 오직 전장으로 돌아갈 이들만이 이해하고 있었다.

* * *

“아이고, 영감! 벌써 나가?”

“부지런히 움직여야지.”

아버지 때부터 강릉에 살았던 가로수 집 최 영감은 오늘도 농기구를 챙겨 일어났다.

한창 농사일로 바쁜 시기라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여줘야 일을 끝낼 수 있다.

“그렇게 좋아?”

“아암! 좋고말고.”

하지만 고된 농사일을 해야 하는 최 영감 얼굴에는 웃음꽃이 떠나지를 않았다.

오늘 수확할 농산물들을 생각하면 다시 젊었던 시절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이게 다 우리 시장님 덕분이지.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일해야 한다.

“웃차!”

힘찬 기합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최 영감은 농기구를 메고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한참 출근 시간인 강릉 시내에는 바삐 돌아다니는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옛날 강릉을 보는 거 같구먼?

그 누구보다 고향을 사랑하는 최 영감은 흐뭇한 얼굴로 사람들을 구경했다.

시끌시끌.

“음?”

그런데 그 순간 정류장과 그리 멀지 않은 공원에서 갑자기 소란이 일어났다.

그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모여 인상을 찌푸린 채 중년 여성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깨어 있으라! 무덤에 묻힌 자들이 일어나 구원받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심판받습니다! 산 사람, 죽은 사람이 구분되지 않을 때 진정한 주의 낙원이 찾아옵니다!”

감염체 사태 초기, 온갖 사이비 종교가 나타나던 시절 많이 봐온 광경이다.

거창한 개소리 하는 여성 앞에 강릉 주민들은 미간을 찡그리며 작게 혀를 찻다.

요즘 이런 걸 믿는 사람도 있나?

다들 금세 관심을 끄고 사방으로 흩어지려 했다.

그러자 눈이 이미 반 바퀴 이상 뒤집어진 중년 여성이 발작하며 소리를 질렀다.

“무도한 자들! 어리석은 양들아! 사탄에게 속고 있다는 걸 왜 모릅니까! 천주를 몰아내고 천사를 살해한 시장을! 신의 말씀을 어기는 이들을 왜 따르려고 합니까! 신이시여! 이 땅을 벌하소서! 모두 죽이소서!”

그 순간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진다.

흩어지려던 주민들은 미간을 꽉 찡그렸다.

“······뭐라는 겨 방금.”

“지금 우리 시장님 보고 사탄이라 했어?”

강릉 토박이들에게 있어 박범석은 존경하는 지도자이자 정신적 지주였다.

자발적으로 존경을 표하는 이들에게 그를 욕했다는 건 엄청난 분노로 찾아왔다.

“이런 썩을 년아! 당장 안 꺼져!”

특히 그냥 지나치려던 최 영감은 당장 멱을 잡을 기세로 다가와 농기구를 들이밀었다.

주변에는 어느새 성난 강릉 주민들이 사탄을 울부짖던 중년 여성을 지탄했다.

“- - - - - -!!”

그 어디를 돌아다녀도 볼 수 없었던 분위기에 여성은 놀라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가짜 광기인 척 외치던 사이비 종교는 진짜 광기들 앞에 찍소리도 할 수 없었다.

“다들 물러나요!”

“어허! 그러다 큰일 납니다!”

하지만 때마침 등장한 희망 아파트 순찰대로 인해 소요 사태는 금방 끝이 났고,

중년 여성은 불법 입국 혐의로 덜미가 잡혀 아파트에 있는 순찰대 본부로 잡혀갔다.

“쯧, 말세여.”

“다들 일하러 가자고.”

그러나 단순한 헤프닝일 줄 알았던 작은 소란은 결코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해 가을, 한반도 곳곳에선 종말론을 울부짖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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