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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의 상속자-99화 (99/180)

99화

밤늦게 내린 가을비에 나뭇잎이 모두 떨어지더니 새벽 날씨가 꽤 쌀쌀해졌다.

주민들은 입김을 호호 불며 일어나 아파트 공원에 쌓인 낙엽을 쓸기 시작했고,

새벽 내내 요새를 지키던 당직들은 순찰대를 위해 하나둘 난로를 지펴주었다.

은은한 여명이 깔린 늦가을 새벽, 나는 104동 옥상에서 이를 조용히 내려다봤다.

슬슬 겨울이다.

한 두어 달만 있으면 기온은 영하로 떨어지고 하늘에선 눈이 펑펑 내릴 것이다.

그 말인즉슨 내가 여기 강릉에 온 지도 벌써 1년이 다 되어간다는 소리다.

그때만 해도 다 죽어가던 주민들과 허름한 아파트가 언제 이렇게 바뀌었는지, 참.

듣자 하니 장벽 규모만 한 세배 가까이 커졌고 이젠 남는 방조차 없다고 하는데,

아마 내가 주민들한테 월세를 받았으면 강릉 시장은 진즉에 그만뒀을 것이다.

물론 진짜 그랬다가는 노하신 할아버지가 저승사자가 되어 찾아오시겠지만 말이다.

사악, 사악.

나는 오랜만에 찾아온 할아버지 집 앞으로 다가가 마당을 쓸기 시작했다.

세상은 점점 바뀌어도 미래 일기가 있는 이 집만큼은 여전히 포근하고 정겨웠다.

웅성웅성.

“음?”

그렇게 한참 밀린 청소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104동 아래가 소란스러워졌다.

옥상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보니 순찰대 사무소 앞에 주민들이 잔뜩 모여있다.

새벽에 나갔던 순찰대가 돌아올 시간인가?

나는 때아닌 소란에 이끌려 상식 아저씨가 있는 사무소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꺼져! 꺼지라고!”

사무소 안에는 수갑을 찬 한 중년 여성이 날카로운 유리 조각을 들고 서 있었고,

이에 놀란 순찰 대원들은 권총집 위에 손을 올려둔 채 한창 그녀와 대치 중이었다.

“진정 좀 혀! 그거 내려놓으라고!”

상식 아저씨는 총을 뽑으려는 대원들을 황급히 막으며 중년 여성을 타일렀다.

하지만 아무리 진정시켜보려 해도 그녀는 미친 듯이 유리 조각을 휘두를 뿐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시, 시장님?”

내가 인파를 헤치고 들어가자 대원들과 주민들이 깜짝 놀라 옆으로 비켜준다.

한창 대치 중이던 상식 아저씨와 중년 여성이 동시에 나를 뒤돌아봤다.

“젊은 시장?”

“이익······.”

그 순간 그녀의 눈이 반쯤 획 돌더니 피가 묻은 유리 조각을 내게 겨누었다.

표정이 싹 굳은 순찰 대원들은 베테랑들답게 순식간에 권총을 뽑아 겨누었다.

“잠깐.”

하지만 나는 대원들 총구를 손으로 밀며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중년 여성을 마주했다.

탁!

이미 이성이 날아간 사람이다.

한쪽 다리를 걸어주자 금세 중심을 잃고 쓰러진다.

털썩!

“잡아!”

내가 가뿐하게 난동자를 쓰러트리자 대원들은 서둘러 그녀를 제압해버렸다.

아침부터 재밌는 구경한 주민들은 오오! 감탄하며 내게 엄지를 들어 올렸다.

상황이 순식간에 정리가 되자 그제야 안심한 상식 아저씨가 급히 달려왔다.

“아침부터 이게 뭔 난리냐.”

“안 다치셨어요?”

“대원 하나가 손을 긁히긴 했는데, 옅어서 괜찮아. 지금 의무실 가서 소독 중이야.”

그래도 상식 아저씨가 빠르게 나서준 덕분에 크게 다친 사람은 없는 모양이다.

나는 유치장으로 질질 끌려가는 중년 여성을 보며 소란을 벌인 원인을 물었다.

“그래서, 왜 저런 겁니까?”

“도통 협조를 안 해줘 그냥 오늘 추방하려고 했거든. 근데 갑자기 화장실 간다는 핑계로 유리를 깨더니 저 지랄을 하네.”

“좀 미친 여자 같던데요.”

“나도 그런 줄 알았거든? 근데 말하는 거 보면 또 정상인이야. 여기에 무슨 포교를 하러 왔다나, 뭐라나. 목격자들 진술 들어보면 무슨 사이비 같다고 하더라고.”

사이비? 막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피켓 들고 종말론을 설파하는 걔들 말하는 건가.

상식 아저씨도 자세한 사정은 잘 모르는지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저었다.

“요즘 유명한 애들인데 모르세요?”

그런데 그 순간 다른 유치장에 갇혀 있던 불법 입국자가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그 남자는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는 듯 철창에 머리를 들이밀며 내게 속삭였다.

“쟤들 에덴동산 애들이잖아요.”

“에덴동산?”

“다른 지역에선 이미 유명해요. 도대체 무슨 재주로 사람들을 모았는지는 모르겠는데 생각보다 규모도 상당히 크다니까요?”

“뭐, 종교 단체 이런 곳입니까?”

“당연히 사이비죠. 걔들 교주가 무슨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니 뭐니 이러면서 감염체를 숭배하는 미친놈이에요. 군락이 하늘에서 온 천주님이고, 변이종이 천사랬나.”

남자는 자신이 생각해도 웃긴다는 듯 피식 웃으면서 철장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갑과 라이터를 꺼내 넣어주며 질문을 재차 이어갔다.

“그걸 사람들이 믿습니까?”

“먹고살 만한 사람들이 믿겠어요. 다 어려운 사람들한테 접근해서 먹이고 재우고 하면서 세뇌하는 거죠. 그 짓을 한 몇 달 하다보면 저 여자처럼 미치는 거예요.”

단순 사이비들인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치밀하고 또 계획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나는 상식 아저씨와 한참을 상의한 끝에 곧 모든 순찰 대원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았다.

“당분간은 순찰 주기와 범위를 늘리겠습니다. 방위군이 협조할 테니 업무는 걱정하지 마시고, 저런 식으로 포교하려는 이들이 보이거나 신고받으면 무조건 체포하십시오.”

만약 본진이 강릉이었다면 죄다 때려잡아 영동지역 밖으로 추방했을 것이다.

하지만 전국구로 활동하고 있는 놈들이라고 하니 당장은 유입을 막는 게 최선이었다.

척!

단호한 지시에 용기백배해진 순찰 대원들은 경례를 붙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짹. 짹짹.

어느덧 먹먹한 새벽을 뚫고 떠오른 아침 해, 또다시 하루를 시작할 시간이 왔다.

“오랜만에 같이 밥이나 먹을까?”

“아침 메뉴 뭔데요?”

“고순튀.”

“윽, 진짜 싫다.”

오랜만에 희망 아파트로 돌아온 나는 상식 아저씨와 함께 급식실로 향했다.

시간이 흐르고 세상은 변해도 내 집에서 먹는 밥맛은 여전히 달고 맛있었다.

* * *

“교, 교주님을 뵙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흰옷으로 치장한 한 신도가 제단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는다.

까닥.

그러자 교주라 불린 여성은 손가락 한쪽을 조용히 까닥이며 접근을 허용했다.

아아! 이에 작게 감탄한 신도는 그녀의 발 위에 입을 맞추며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지시하신 일은 모두 완수했습니다.”

“노고가 많았다.”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신실한 신도들이 앞다투어 몰려와 궂은일을 모두 처리한다.

교주는 그 모습에 만족했는지 흡족한 웃음과 함께 신도를 조용히 어루만져주었다.

“아아······!”

남성 신도는 황홀한 얼굴로 덜덜 떨며 눈물을 주르륵 흘리기 시작했다.

기뻐하는 건 교주 주변에 엎드려 있는 나머지 극성 신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아해들아.”

하지만 그것도 잠시, 교주는 다시 싸늘하게 변한 목소리로 주변을 둘러봤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은 눈빛에 신도들은 뱀 앞에 개구리처럼 굳어버렸다.

“내 눈에는 한 곳이 비어 보이는구나.”

“그, 그것이······.”

“신께 거짓말을 한 것이야.”

경기도 이천에서 처음 발족한 에덴동산은 1년 동안 정말 무서운 기세로 커왔다.

진즉에 이천 일대를 장악하고 주변 경기 지역까지 신도 숫자를 늘려간 건 물론.

올가을부터는 서울 요새와 남쪽 지방으로까지 진출해 본격적인 확장을 꾀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한 곳, 요즘 떠오르는 지역인 영동지방만큼은 아직도 소식이 없었다.

그나마 이 중 제대로 머리를 쓸 줄 아는 신도가 나와 교주 앞에 바짝 엎드렸다.

“아무래도 다른 지역과 동떨어진 곳이다 보니 주민 간 유대감이 끈끈합니다. 자선 사업으로 위장하려고 해도 강릉이 워낙 기본적인 사회 시스템이 잘 되어있어서······.”

“그래서?”

“당, 당분간은 힘들 것 같습니다.”

차마 교주와 마주 볼 수 없었던 신도는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며 머리를 박았다.

비비고 들어갈 틈이 없는데 그들이라고 뽀족한 수가 있기는 하겠는가.

까닥.

하지만 교주는 그런 것 따위는 상관 안 한다는 듯 무심한 얼굴로 손가락을 까닥였다.

쿵!

그 순간 문이 열리며 건장한 사내들이 우르르 몰려 신도를 강제로 끌어냈다.

“안, 안돼! 살려주십시오! 교주님, 제발!”

감히 신의 뜻을 이행하지 못한 죄, 오직 고통과 죽음으로 갚아야 할 것이다.

“열어라.”

교주가 다시 손짓하자 건장한 남성들은 건물 안쪽 굳게 잠긴 지하실 문을 개방했다.

끼이이이익!

끼기기기각! 끼이이익!

그 깊숙한 지하에는 수많은 감염체가 곧 떨어질 먹이를 찾아 울부짖고 있었다.

“으아아아악! 아아악!”

남성들은 거세게 반항하는 신도를 강제로 끌어낸 뒤 지하로 집어 던져 버렸다.

그는 곧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 속에 파묻혀 교주가 말하는 천국으로 향했다.

“구, 구세주를 믿습니다.”

하지만 신도들은 그 가혹한 처벌 앞에 떠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저 신도를 늘리고 세력을 확장하는 거 그녀를 기쁘게 할 유일한 방법이었다.

* * *

보통 집에서 바퀴벌레를 발견했다면 집구석 어딘가에 이미 그 알이 있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그건 바퀴벌레뿐만이 아니라 프락치와 이 사이비 새끼들도 모두 해당이 된다.

‘또 에덴동산?’

오늘만 무려 두건이 잡혔다.

단속이 벌써 한 달째인 걸 생각하면 지금까지 오십 명이 넘게 체포된 것이다.

오죽하면 순찰대가 놈들을 가둘 유치장이 모자라서 옆 건물을 새로 빌렸겠는가.

심문하는 족족 난동을 부려대니 이를 감시하는 대원들도 점차 지쳐가고 있었다.

하지만 진짜 좆같은 건 이게 현재 강릉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서울은 이미 난리다.]

하소연이나 한 번 하려고 전화했더니 김태하 소장 쪽 상황은 더 최악이었다.

강릉은 그나마 양반이지, 서울은 놈들이 이미 따로 법인까지 세웠으니 말이다.

뭐, 자선 단체?

돈이 얼마나 썩어나는지 아주 재단까지 차리고 지랄이 났다.

“안 잡습니까, 그거?”

[자네도 알잖아. 서울은 그렇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이 아니야. 딱히 위법을 저지르는 건 아니니 계속 지켜볼 뿐이지.]

민주주의, 법치주의, 헌법이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를 김태하는 지킬 의무가 있다.

하지만 이게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게 바로 종교 문제다.

“솔직한 심정은?”

[······아주 죽여버리고 싶다.]

나는 으르렁거리는 김태하 소장을 위로하며 피곤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금이야 강 건너 불구경이지만, 우리라고 저 꼴이 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그래서 어쩔 생각이냐?]

“선 넘기 전에 잡아야죠.”

바깥에서 돌아다니는 벌레들은 몰라도 집 안으로 돌아온 벌레는 꼭 잡아야 한다.

그래야 놈들도 아, 여기는 들어오지 말아야 하는 곳이구나 말귀를 알아듣는다.

[시간 나면 서울에도 한 번만······.]

“끊습니다.”

이 양반이 진짜, 누구를 맨날 깽판 치고 사람 패고 다니는 용역으로 아시나.

나는 위성 전화기를 냉큼 끊어버린 뒤 태식 씨와 상식 아저씨를 시청으로 불렀다.

사각, 사각, 사각.

['신성한 피를 이어받은 자는 아무리 물려도 감염되지 않는다. 신의 딸로 태어난 자는 미래를 예언하는 성전을 가지고 있다. 내가 너희를 바른길로 이끌리라.’ 이 모든 게 구세주를 자청한 교주의 거짓말이다.]

[하지만 무도한 자들은 그런 교주의 말을 믿고 따르며 가짜 구세주를 섬기고 있다. 문명을 복원하는 것이 아닌 파괴하고,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 아닌, 혼란에 빠트리려는 진정한 교주의 목적을 모른 채 말이다.]

[종교는 인간을 바른길로 인도하는 반면, 또 다른 광기로 인도하기도 한다. 눈을 가리고 귀를 막는 이성의 마비를 막아라. 신성한 피와 진짜 예언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그들에게 보여줄 차례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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