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군락이 마치 피라미드처럼 수직으로 연결되어있다는 건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아래에는 여러 개 하위 군락이 있고 위에는 상위 군락이 있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론상으로만 확인되었지 실제로 목격된 적은 없다.
아니, 정확히는 그 규정조차 없어 어떤 군락이 상위 개체인지도 알지 못한다.
LA에서 핵을 버텨낸 군락?
미연방조차 놈이 어떻게 되었는지 파악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 후지산에서 고위 군락이라니.
처음 미래일기를 읽은 나는 뒤통수를 치는 전개에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일본.
전쟁에 영향을 받지 않아 아직 국가라는 형태를 10년째 유지 중인 섬나라, 열도.
물론 우경화가 진행되어 기이한 정치 체계로 바뀌었지만, 그래도 나라는 나라다.
특히 이 동아시아 일대에선 거의 절대적이다 싶을 정도로 큰 영향력을 자랑했다.
다만, 그런 일본조차 후지산에 몰래 기생중이던 고위 군락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아직 미연방에서 소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미래 일기가 한발 먼저 알려준 게 뻔하다.
나는 날이 밝자마자 태식 씨를 불러 일본으로 오가는 모든 상선 출입을 막았고,
또 개조한 상선에 무기를 장착해 본격적으로 경비정으로 운용하기 시작했다.
한참 고민거리였던 에덴동산도 토벌됐는데 갑자기 이런 돌발행동을 벌이다니.
나 같으면 이유를 물어볼 법도 한데 태식씨는 그저 고개만을 끄덕였다.
이쯤 되니 슬슬 내게 이상한 촉이 있다는걸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는 모양이었다.
“시장님!”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정확히 사흘 뒤 엠마를 통해 도쿄 함락 소식이 전해졌다.
후지산에서 발생한 상위급 군락이 기어코 일본의 수도로 들이닥친 것이다.
미연방이 본토 서부에 핵을 발사한 이후, 또 한 번 전해진 충격적인 소식.
경악을 감추지 못한 일행들은 밤늦게 시청으로 모여 일단 브리핑부터 들었다.
“상황은 파악됐습니까?”
“네. 일단 위성 상으로 확인했어요. 여기가 후지산이고, 여기가 1차 방어선이죠.”
군락이 예고 없이 등장했다고 해서 일본이 손 놓고 지켜만 본 건 아니다.
당장 육상 자위대만 해도 도시무라를 기점으로 1차 방어선을 빠르게 건설했으니까.
하지만 단순한 화력으로만 상대가 된다면 미국이 여태 그러고 밀리고 있겠는가.
상위 군락은 당연히 변이종과 공기 중 감염이라는 변이 바이러스를 지니고 있었다.
“결과는 뻔하겠네요.”
군락과 싸워본 경험이 전무한 육상 자위대는 순식간에 1차 방어선이 뚫렸고,
2차 방어선을 채 구축하기도 전 놈들에게 수도인 도쿄를 함락당하고 말았다.
서울만큼이나 많은 인구수가 밀집되어있는 지역이니 나머지는 상상에 맡기기로 했다.
“미국은 어쩌기로 했습니까?”
“일단 핵 사용을 고려 중이에요. 다만, 일본 쪽에서 거부 반응이 너무 심하네요.”
본토 전체가 군락 둥지가 되기 싫으면 차라리 과감한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실질적 수도이고 기반 시설이 워낙 많다 보니 또 결정이 지체되는 모양.
이러면 결국 데드라인을 놓치고 일본 전역이 감염체 군락이 되는 일만 남았다.
“피난민들을 시코쿠나 규슈 같은 다른 섬으로 대피시키는 작전이 진행 중이에요.”
“잘 되겠습니까?”
내 퉁명스러운 반응에 엠마는 무거운 한숨을 푹 내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 전쟁보다 힘든 게 피난민 수용인데 개판인 상황에서 잘 될 리가 없다.
“어쩌면 바다를 건너올지도 모르겠네요.”
군락이 헤엄을 쳐서 오지 않는 이상, 감염체 놈들이 한반도로 건너올 일은 없다.
다만 문제는 다른 섬으로 피난 가지 못하고 빠져나온 선상난민의 존재였다.
단 한 명만 보균자가 있어도 난리가 나는 상황에서 멀쩡한 이들이 존재하기나 할까.
아마 그중 보균자가 있거나 또 선박 안에서 변이가 진행 중일 확률이 높았다.
강릉은 대표적인 무역항 중 하나, 선상난민이 몰려오기 딱 좋은 장소다.
나는 한참 걱정을 토로하던 사람들을 조용히 시킨 뒤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일단 지금처럼 대비하겠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사흘 먼저 해상을 통제하고 대비책을 세웠다는 것이다.
적어도 경비정이 수시로 돌아다니고 있으니 몰래 들어오는 건 막을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에게 긴장을 늦추지 말라고 당부한 뒤 회의를 이어갔다.
‘부산.’
그리고 정확히 사흘 뒤 한참 전쟁이 마무리 중인 부산으로 피난민이 몰려왔다.
에덴동산으로 시끄러웠던 한반도가 다시 한번 혼란으로 휩싸이는 순간이었다.
* * *
총부리를 겨눈 약탈자야 죽이면 끝이고 달려드는 감염체는 저지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이 밀고 들어온다면 그것만큼 난감한 것이 없다.
특히 단순 불법 이민이 아닌 살 곳을 잃고 도망쳐온 난민들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이미 부산으로 넘어왔다.’
다나카가 죽은 부산을 성공적으로 점령한 김태하 소장과 그 외 한반도 요새들은 본격적인 재건 사업에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난데없이 등장한 후지산 군락으로 인해 일본에 엄청난 피난민이 발생했고,
한반도 항구 요새 중 가장 가까운 부산으로 수십만 명이 바다를 건너 넘어왔다.
이대로 내버려 뒀다가는 또 다른 대참사가 일어날 것이 너무나도 뻔한 상황.
김태하 소장과 지도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격리와 통제에 들어가야 했다.
물론 이는 부산만이 아닌 한반도 전역에 있는 무역 항구 요새들도 마찬가지였다.
“시장님, 이쪽입니다!”
한밤중 자다가 급히 연락받고 당직 중이던 순찰대와 함께 삼척으로 달려갔다.
태식 씨가 나를 부른 장소는 다름 아닌 삼척에 있는 호산항이라는 항구였다.
“못 들어오게 막아!”
“통역! 통역 어디 있어!”
가끔 어선만 몇 대 오가던 한적한 호산항은 이미 한바탕 난리가 난 지 오래였다.
다름 아닌 울진 쪽에서 올라온 피난민들이 결국 여기 삼척까지 올라온 것이다.
삐이익!
물러나십시오!
호산항 앞 바다에는 온갖 선박들과 허름한 보트들이 우글우글 몰려 있었다.
아니, 사실 보트라고 부르기도 미안한 부유물에 수많이 사람이 올라타 있다.
급히 투입된 방위군이 아무리 경고하고 몰아내도 꾸역꾸역 다가오는 그들.
살아야 한다는 의지는 자신을 향해 겨눠진 총부리를 무시하는 힘을 가지게 했다.
“저격수 배치했습니까?”
“네, 혹시 몰라서 배치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피난민이라고 해서 모두가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지금도 사방에서 고성과 비명이 터져 나오는 게 충돌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과열된 분위기를 확인한 나는 어쩔 수 없이 최선의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돌아갈 생각 없을 겁니다. 항구 싹 비우고 펜스로 주변 격리하세요. 현재 쓸 수 있는 치료제도 전부 부탁합니다.”
파도가 거칠고 바람이 차다.
여기서 진압해봤자 더 위로 올라갈 게 뻔하다.
차라리 영동 지방 하단인 삼척에서 이들을 격리하고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내가 단호한 결정을 내리자 그제야 안심한 태식 씨는 바쁘게 항구로 뛰어갔다.
“시장님!”
그 순간 저 멀리 도로에서 한 익숙한 얼굴들이 이쪽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오랜만에 보는 나탈리, 세르게이, 그리고 조합장.
모두가 가볍게 무장한 상태였다.
“급히 불러서 죄송합니다.”
“섭섭한 말씀을! 당연히 도와야죠.”
삼척 지역이 워낙 넓다 보니 강릉 방위군만으로는 모든 걸 커버하지 못한다.
어쩔 수 없이 태백으로 출장 가 있는 블라디보스토크 인원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한 명 한 명 나와 반갑게 인사한 그들은 서둘러 항구로 뛰어가 방위군을 도왔다.
“빨리! 펜스부터 건설해!”
“지체되면 안 된답니다!”
강릉에서 뒤늦게 보낸 지원까지 속속히 도착하며 점차 현장이 정리되기 시작한다.
이쯤 되면 괜찮다고 판단한 나는 곧 항구를 막고 있는 저지선을 물러나게 했다.
그러자 바다에 위태롭게 떠 있던 피난민들이 눈치를 살피며 선착장을 건너왔다.
“이쪽으로 오세요!”
“통제를 따르셔야 합니다!”
방독면과 치료제를 챙긴 방위군은 피난민들을 격리지역 안으로 천천히 안내했다.
그들을 땅을 밟은 것만으로도 감사한 지 제법 침착하게 통제에 따르기 시작했다.
통역을 맡은 직원이 접근하자 한 일본인 여성이 울면서 무언가를 이야기했다.
“대부분 돗토리라는 지역에서 넘어왔답니다. 피난민이 채 넘어가기 전에 다리를 끊어버려서 고립되어 있었다고 하네요.”
돗토리? 지도를 확인해보니 도쿄와 꽤 멀리 떨어진 항구 도시 중 하나다.
다행히도 변이 바이러스가 퍼지기 전 급히 빠져 나올 수 있었던 모양이다.
“다른 이들은 없냐고 물어보십시오.”
“바다를 건너오다가 대부분 낙오한 것 같습니다. 이분도 어머니랑 오시다가······.”
나는 하나 같이 눈물을 보이는 피난민들을 보며 무거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군락이 퍼져나가는 속도는 이제 막 시작인데 일본은 벌써 삐거덕거리고 있다.
“어, 어어!”
그런데 그 순간 피난민들이 몰려오던 선착장에서 갑자기 큰 소란이 일어났다.
다름 아닌 한 무리 인간들이 현장을 통제하던 방위군과 충돌을 일으킨 것이다.
“- - - - - -!!”
일반 피난민들과 다르게 제대로 된 선박을 타고 온 그들은 연신 고함을 질렀다.
내가 통역으로 파견된 직원을 바라보자 그는 곧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자기가 일본 시의원이라는데요?”
다른 피난민과는 다르게 복장도 제대로 갖춰 입었고 타고 온 선박도 진짜 요트다.
거기다 대놓고 배지까지 끼고 있는 걸 보아 아마 진짜로 시의원일 확률이 높았다.
방위군도 난감한 상황이라는 걸 아는지 그를 최대한 자극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짝!
그런데 가만히 표정을 붉히고 있던 일본 시의원이 대뜸 한 방위군 뺨을 후렸다.
또 어깨를 툭 밀치며 무어라 외치는 것을 보니 통역이 없어도 될 것 같았다.
여기 책임자 나오라 해!
졸지에 뺨을 얻어맞은 앳된 방위군 병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시장님?”
몸이 먼저 움직였다.
나는 당황하는 직원을 뿌리치고 시의원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놈은 검버섯이 핀 주름을 일그러트리며 또 알 수 없는 욕을 뱉으려 했다.
콰직!
나는 그대로 주먹을 들어 시의원이라 불리는 작자의 아구창을 후려버렸다.
힘이 실린 일격에 놈은 대처할 틈도 없이 턱이 돌아가 바닥에 쓰러져버린다.
경악!
설마 아구창을 냅다 후려버릴 줄은 몰랐던 방위군 병사들은 입을 떡 벌렸다.
동시에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놈의 측근들이 얼굴을 붉히며 달려오려 했다.
철컥!
하지만 나는 묵직한 콜트 파이슨을 꺼내겨누는 것으로 마지막 경고를 대신했다.
움직이면 뒤진다.
눈을 마주친 놈들을 곧 주제가 파악됐는지 뒤로 주춤거렸다.
“이 새끼 끌어다 바다에 던져.”
시의원이고 나발이고 내 구역에서 우리 애들 건들면 그게 누구라도 보복한다.
총구를 까닥이자 넋이 나가 있던 방위군 병사들은 서둘러 달려와 놈들을 끌어냈다.
“뒤로 물러나!”
“비켜! 말이 말 같지 않아?!”
강릉에서 가장 세다는 시장 백이 여기 있으니 여차하면 방아쇠도 당길 기세다.
나는 뽑아 든 콜트 파이슨을 조용히 집어넣으며 언제 그랬냐는 듯 제자리로 갔다.
“- - - - - -.”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되었지만, 현장 분위기는 싸늘하다 못해 차갑게 식었다.
피난민들은 더욱 몸을 움츠리며 질서를 지켰고 곧 격리 구역 안으로 들어갔다.
일이 수월해졌다.
내가 작게 웃어주자 뺨을 맞은 방위군 병사가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일단 급한 불을 껐다는 안도감은 채 1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내렸다.
다름 아닌 부산을 막고 있는 김태하 소장에게서 급한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레드 코드!
부산에서 감염체 사태가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