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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의 상속자-113화 (113/180)

113화

계절이 본격적으로 겨울에 접어들면서 열도를 탈출하려는 움직임이 가속화되었다.

당연히 피난민 80% 이상은 거리상으로 제일 가까운 한반도로 몰려들었고,

작게는 대한해협과 동해를 넘어 또 한 번 부산과 포항 쪽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부산 상황도 이제 막 겨우 정리가 되었는데 2차 난민이 이쪽으로 몰려든다고?

그대로 뒀다가는 재건은커녕 또 한 번 감염 사태가 터져도 할 말이 없었다.

‘잠시만요.’

하지만 내가 일본 문제로 약속을 미루려 하자 결국 미연방이 직접 나서버렸다.

바로 자국에서 사용하는 자가 검사 키트를 한반도에 대량으로 수출해준 것이다.

그동안 증세만을 보고 판단해야 했던 과거와는 달리 체액을 채취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보균 여부를 알 수 있는 검사 키트.

도대체 언제 개발했는지는 몰라도 숨은 보균자를 찾는데 이만한 것이 없었다.

본토가 두들겨 맞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걸 만드는 미국도 참 대단한 나라였다.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다.’

검사 키트라는 비장의 카드를 손에 쥔 한반도는 이번에는 무척 신중하게 움직였다.

일단 모든 선박과 병력을 동원해 해상을 통제하고, 무분별한 난민 난입이 벌어지지 않도록 철저하게 관리하기로 한 것이다.

이에 따른 막대한 물자와 인력, 솔직히 아깝다는 말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좁게는 한반도의 안전, 멀게는 인류라는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한반도 요새 연합은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이제 서로가 협력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슬슬 피부로 느낀 게 분명했다.

물론 이러한 협력 뒤에는 엄청난 눈치 싸움과 물밑작업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저희가 간략하게 추린 자료입니다.”

“경력이 화려하네요?”

“모두 유능한 인재입니다. 강릉으로 망명을 원하는 이들만 우선하여 뽑았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일본에서 탈출하는 고급 인력들을 잡기 위한 쟁탈전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손해 보고 있는 처지에 굴러떨어지는 사탕이라도 받아먹어야지 않겠는가.

수십 년을 공들여 키워야 하는 인재들이 탈출하는 걸 보고만 있으면 병신이었다.

이에 한반도 각 요새는 물론 서울, 심지어 미국까지 염치 불고하고 껴들었다.

“의외네요. 촌 동네라고 생각했을 텐데.”

“보시면 대부분이 30대로 젊은 층입니다. 아마 메리트가 있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그리고 강릉은 의외로 꽤 많은 인재를 포섭하며 선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미국과 서울이라는 최우선 순위가 있는 것 치고는 이 정도면 꽤 훌륭한 성과였다.

나는 흐뭇한 얼굴로 서류를 읽어내리며 새로운 식구가 될 이들을 살펴보았다.

“잘 적응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당분간은 미국에서 체류할 예정이라 웬만한 결재서류는 태식 씨가 맡아야 한다.

꽤 많은 권한을 일임한 나는 남은 시간 부지런히 업무를 봐주며 그를 도와주었다.

똑똑.

“형님, 모시러 왔습니다.”

그러자 시청까지 찾아온 경태가 집무실 문을 두드리며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시청 앞에는 어느새 1팀 대원들을 태운 차량 행렬이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갑시다.”

나는 짐이 든 캐리어를 챙기고 일어나 두 사람과 함께 시청 밖을 나섰다.

그리고 태식 씨의 마지막 인사와 함께 드디어 양양 공항으로 차를 운전했다.

이른 아침 드리우는 햇살, 대원들은 상기된 얼굴로 쑥덕쑥덕 대화를 나눴다.

그중 가장 신이 난 것은 이번 미국행 비행기에 같이 오르게 된 상식 아저씨였다.

“내가 살다 살다 미국을 다 가보는구먼.”

“꿈이셨다면서요?”

“젊을 적 꿈이었지. 설마 세상이 이 지경이 나고 나서야 이룰 줄은 몰랐는데 말이여.”

듣자 하니 남은 티켓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가위바위보 대전이 있었다고 했다.

그중 우승 후보였던 은서를 꺾고 당당하게 티켓을 거머쥔 상식 아저씨는 허허 웃었다.

미국행을 간절하게 바라던 이은서의 비명이 여기 양양까지 들려오는 듯 했다.

부우우우웅 - - -!

끼익.

새롭게 단장한 양양 공항에 도착하니 이미 미국 군용기가 들어와 있었다.

우리는 출국수속이고 뭐고 다 가볍게 건너뛰고 곧바로 활주로를 가로질렀다.

“범석 씨!”

엠마는 오랜만에 백수 패션에서 벗어나 깔끔한 정장 차림으로 우리를 반겼다.

마치 스튜어디스처럼 짐까지 대신 들어주려고 하길래 나는 수상쩍은 시선을 보냈다.

“왜 이래요, 안 어울리게.”

“VIP를 모시는데 이 정도는 해야죠.”

“팔아넘기는 게 아니고요?”

“에이, 농담도!”

“저번에 보니까 가방이 바뀌었던데…….”

“기장님! 출발하세요!”

내가 이번에 새로 산 가방을 거론하자 엠마는 다급하게 짐을 챙기며 뛰어갔다.

피식 웃으면서 그 뒤를 따라간 우리는 곧 양양을 떠나 미국을 향해 날아갔다.

* * *

워싱턴 D.C

미국의 수도이자 백악관과 국회의사당, 대법원을 포함한 연방 정부가 있으며,

또 174개가 넘는 대사관과 각종 국제기구가 ‘있었던’ 국제 정치와 외교의 중심지다.

관광을 와도 가슴이 웅장해지는데 무려 정식으로 초청받아 오게 된 것이 아닌가.

군용기에서 내린 일행들은 연신 감탄사를 뱉으며 감개무량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쪽이에요.”

한참 호들갑을 떨며 주변을 구경한 우리는 잔뜩 기대하며 공항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수도 한가운데 있는 공항이라 하기에는 생각보다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국내선 민항기조차 뜨지 못하며 군인들의 철저한 통제를 받고 있었다.

“분위기가 왜 이럽니까?”

“최근 이 근처에서 시위가 있었어요. 아마 그것 때문에 잠시 닫아둔 모양이네요.”

“시위요?”

“네. 핵 발사 문제 때문에요.”

현 정세가 워낙 혼란스럽다 보니 시위 몇 번 정도야 당연히 이해는 한다.

하지만 그게 서부로 발사한 핵 때문이라니, 나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게 최선이었잖습니까?”

“그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뭐, 그 입장도 이해는 하는데…….”

직접 현장을 뛰고 있는 엠마는 말하지 않는 답답함이 있는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리 대단한 미국이라도 내부 잡음이 들려오는 건 어찌할 수 없는 모양이다.

“오늘은 일단 숙소에서 푹 쉬시고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스케줄을 진행할게요.”

비행시간이 길다 보니 벌써 해가 저 멀리 가라앉고 주변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우리를 리무진으로 안내한 엠마는 내일 보자는 말과 함께 방긋 손을 흔들었다.

부우우우웅 - - - !!

차량이 출발하자 미국 쪽에서 보내준 호위 병력이 양옆으로 빠르게 따라붙는다.

쯧, 내일이면 또 바빠지겠구나.

나는 엠마가 보내준 회담 일정을 확인하며 리무진 안에 준비된 위스키를 홀짝였다.

“시장, 저기 봐봐.”

그런데 그 순간 한참 바깥 풍경을 구경하고 있던 상식 아저씨가 허리를 쿡 쑤셨다.

태블릿에서 시선을 떼고 밖을 바라보니 혼란스러운 거리 상황이 시야에 들어왔다.

“엠마가 말한 시위인가 저건가 보네요.”

피켓을 든 수많은 시민이 거리를 가득 채운 채 중무장한 경찰과 대치 중이었다.

그들은 무엇이 그리 불만인지 연신 고함을 지르며 피켓을 높이 들어 올렸다.

전쟁 반대를 외치는 평화 시위,

핵 발사를 반대하는 환경 단체,

심지어 백신을 불신하는 반대론자까지.

거리에는 진짜 온갖 단체와 개인들이 엉켜 세기말 분위기를 제대로 풍기고 있었다.

상식 아저씨는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이 상황과 제일 어울리는 감상평을 뱉었다.

“배들이 불렀구먼.”

현재 미국 서부에선 감염체를 저지하기 위해 수많은 젊은이가 피를 흘리고 있다.

하지만 저들은 안전한 동부에 처박혀 의무 없는 권리만을 격하게 외치고 있었다.

휘익, 탁!

그 순간 시위대 중 하나가 우리가 탄 리무진을 향해 맥주캔을 집어 던진다.

물론 차량으로 날아오기 전 경호원이 이를 재빨리 막았지만, 맥주가 조금 튀었다.

와아아아아아 - - - - -!!

그게 기폭제가 된 걸까, 경찰은 깜짝 놀라 맥주캔을 던진 한 남자를 저지하려 했고,

자극받은 시위대는 앞으로 달려들며 과격한 분위기에 기름을 부어버리고 말았다.

“위스키 한잔하실래요?”

“……그래야겠어.”

사람 사는 곳이야 다 같다지만, 이런 부분까지는 강릉이 닮지 말았으면 한다.

나와 상식 아저씨는 이 씁쓸함을 떫은 위스키로 달래며 창문에서 시선을 돌렸다.

* * *

리무진이 도착한 곳은 워싱턴 D.C에서 제일 좋고 비싼 5성급 호텔이었다.

오랜만에 쉬라고 하길래 의아해했는데 엠마가 진짜 제대로 된 휴식처를 제공한 것.

마치 전쟁 전 세상을 보는 것 같은 호텔 분위기에 일행들은 잔뜩 들떠있었다.

‘쉬세요.’

작년 겨울부터 시작해서 진짜 휴가 한 번 제대로 못 가고 여기까지 달려왔다.

오늘만큼은 대원들에게 휴식을 지시하며 마음껏 쉴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물론 나 또한 호텔 최상층에 있는 스위트룸에서 분에 겨운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미국까지 가서도 일이냐?]

“이런 건 노동으로 안 치죠.”

[그 정도면 일 중독이야.]

태식 씨에게 도착 소식을 알리자마자 곧바로 김태하 소장에게 연락을 취했다.

나는 좀 쉴 때는 쉬라는 타박에 피식 웃으며 부산과 포항 쪽 상황부터 물었다.

“현장은 어때요?”

[……뭐,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아. 이대로만 가주면 한두 달 내로 안정될 분위기야.]

“중요할 때 자리를 비웠네요.”

[지금은 자네 쪽이 더 중요해. 강릉이 백신만 확보해도 거래처가 뚫릴 수 있어.]

사실 이번 초청에 응한 이유는 현재 개발 막바지인 백신의 존재가 가장 컸다.

감염체가 제일 무서운 이유는 이름 그대로 인간을 바이러스에 감염시킨다는 것인데,

이를 방지하거나 늦출 수만 있어도 전쟁의 양상이 뒤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군락이 종말을 점점 앞당기고 있듯 인간도 이에 대응해 종전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응? 잠시만요.”

[이따 통화하지.]

한참 김태하 소장과 통화를 하고 있는데 데스크 전화기가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달칵.

“무슨 일입니까?”

[쉬시는 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뵙기를 원하시는 손님이 계셔서 연락드렸습니다.]

“저는 따로 전달받은 게 없는데요?”

[바이오 젠슨에서 오셨다고 하십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직접 만나서 하자고…….]

바이오 젠슨? 설마 미국 제약 회사 중 하나인 그 바이오 젠슨을 말하는 건가.

순간 치료제와 백신을 떠올린 나는 엠마가 미리 언질 줬나 싶어 이에 응했다.

“올라오라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옷을 제대로 차려입고 잠시 기다리니 곧 입구를 지키던 경호원이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자 멀끔하게 생긴 한 백인 남성이 웃는 낯으로 들어오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만나 뵙게 돼서 정말 영광입니다! 바이오 젠슨에서 일하고 있는 브라이언입니다.”

“편하게 박이라고 부르십시오.”

“하하! 유명인이신데 이름을 모를 리가 있나요. 잠시 실례 좀 하겠습니다, 시장님.”

무슨 이유로 찾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브라이언이라는 남성은 무척 친절했다.

그를 응접실로 안내한 나는 피곤한 밤을 달래줄 커피를 대접하며 그와 마주 앉았다.

그리고 쉴 새 없이 말을 건네오는 브라이언을 향해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꺼냈다.

“백신 문제로 오셨습니까?”

“으음, 반은 맞습니다.”

“반이요?”

“예. 연방 정부가 공급해드리기로 약속한 백신 이야기 외 다른 용건도 있으니까요.”

백신 이야기를 할 거면 백신 이야기만 하면 되지 다른 용건은 또 뭐란 말인가.

나는 혹시나 중간에 말을 바꾸는 건가 싶어 미간을 찡그린 채 그를 바라봤다.

“저희 바이오 젠슨은 모든 인간이 능력에 걸맞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바뀌지 않을 또 바꿔서는 안 되는 진리이지요.”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현재 시장님이 가진 보석과도 같은 능력, 마땅한 대우를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빙긋 웃은 브라이언은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책상 위에 살며시 내밀었다.

눈동자를 또르르 내려 이를 조용히 읽어본 나는 어이가 없다는 웃음을 터트렸다.

“앞으로 백신과 치료제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시대가 올 겁니다. 현재 개발된 약들 말고도 여러 가지 형태의 제품들이 나오겠지요. 이걸 굳이 헐값에 넘기겠습니까?”

“그래서, 나와 계약하자?”

“현재 공급해주시는 항체, 군락, 여러 연구 샘플을 저희가 독점으로 받고 싶습니다.”

말귀가 통한다고 생각했을까, 브라이언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어쩐지 그 모습이 역겹다는 생각이 들어 한동안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감정적으로 접근하시면 안 됩니다, 시장님. 편하게 비즈니스라고 생각하십시오.”

이렇게 대놓고 찾아와 제안할 정도면 저 뒤에 얼마나 많은 놈들이 엮여있을까.

장담컨대 파면 팔수록 구린내를 풍겨 감히 그 안을 엿보기조차 힘들 것이다.

나는 당연히 수락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브라이언을 향해 서류를 구겨 던졌다.

“꺼져.”

“예?”

“꺼지라고, 시발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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