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아쉽군요. 혹시나 생각이 바뀌시면 언제든지 연락해주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거친 욕설에도 불구하고 브라이언은 웃는 낯을 유지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끝까지 여지를 두기 위해 자신의 명함을 계약서 위에 올려두고 떠났다.
내가 이걸 당장 대통령한테 가져다 보여주면 어쩌려고 그냥 두고 간단 말인가.
엄청난 자신감인지, 아니면 그래도 상관없다는 뜻인지 참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엠마, 접니다.”
미간을 팍 찡그린 나는 위성 전화기를 꺼내 업무 중인 엠마를 숙소로 호출했다.
그러자 자초지종을 들은 그녀는 곧 가겠다는 다급한 음성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웅성웅성.
잠시 뒤 문밖으로 분주함이 느껴지며 엠마로 추정되는 여자가 고함을 내질렀다.
아마 문을 열어준 미국 측 경호원들에게 제정신이냐고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다.
덜컹!
곧 호텔방 안으로 들어온 엠마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이를 빠드득 갈았다.
“그 새끼 어디 갔어요?!”
“갔죠, 당연히.”
놈이 놓고 간 계약서와 명함, 그리고 아직 식지 않은 커피가 고스란히 놓여있다.
엠마는 씩씩거리며 다가오더니 곧 바이오 젠슨의 명함을 구기며 계약서를 살폈다.
“이런 개새끼가!”
어지간히 화가 났는지 그녀의 입에서 방언과 욕설이 쉴 틈 없이 터져 나왔다.
나는 만류하는 대신 유리잔을 가져와 그 안에 갈색 위스키를 가득 채워주었다.
탁!
그제야 정신을 차린 엠마는 그 많은 위스키를 숨조차 쉬지 않고 들이켰다.
꿀꺽꿀꺽!
무슨 생수 마시듯 마시네, 예전부터 알고는 있었는데 역시 보통은 아닌 여자다.
탁!
후우.
“……죄송해요.”
“진정하고, 일단 앉으세요.”
피곤한 한숨과 술기운을 푸욱 내뱉은 엠마는 비틀비틀 마주 보고 앉았다.
나는 뭐부터 말해야 할까 하다가, 일단 브라이언이 두고 간 계약서부터 가리켰다.
“무슨 배짱으로 이러는 겁니까?”
“믿는 구석이 있거든요.”
믿는 구석? 미국에서 제일 큰 제약 회사니, 자본 쪽으로는 큰 아쉬움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는 건……. 내가 미간을 팍 찡그리자 엠마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예. 예상하신 곳 맞아요.”
“아니, 그래도 전시 상황인데.”
“선거가 얼마 안 남았잖아요. 대통령께서는 현재 2선, 마지막 임기를 보내고 계세요.”
수정 헌법 22조에 따라 미국은 2회를 초과하여 대통령직에 선출될 수 없다.
전쟁 초기 당선되어 지금까지 대통령을 해온 그 양반도 드디어 은퇴할 때가 됐다.
다만, 문제는 현재 미국이 국가의 존속을 결정하는 전쟁 중이라는 것이다.
민감한 문제다.
나는 민주주의 국가라면 당연히 찾아오는 주기적인 변화 앞에 솔직한 심정을 물었다.
“백악관은 어쩔 거랍니까?”
“당연히 개헌을 원하고 계세요.”
2차 세계대전 당시 FDR이 불문율을 깬 이후로 수정 헌법 22조가 명문화됐다.
하지만 현 대통령은 개헌하면서까지 전쟁을 직접 끝내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가능하겠습니까?”
미국 헌법을 개헌하려면 양원 2/3의 동의와 3/4 이상의 주가 동의해야 한다.
지금 꼬라지를 보니 야당은커녕 본인들 표도 제대로 지키지 못할 것 같았다.
“그동안 적을 너무 많이 만드셨어요. 벼르고 있었던 사람도 한둘이 아니고, 당 내부에서조차 여전히 불만이 많은 상태에요.”
슬슬 임기가 끝나가는 데다 전쟁과 핵 발사를 자초했다는 명분을 가지고 있다.
백신 개발을 코앞에 두고 있는 지금, 먼저 움직이지 않으면 그게 더 병신이다.
정치의 양면성. 나는 이미 식어버린 커피를 마시며 입안 가득 쓴맛을 애써 떨쳐냈다.
“부끄럽네요. 이런 꼴을 보여드려서…….”
“저흰 나라가 망했는데요?”
“앗!”
그래도 이런 정치가 유지된다는 것에 감사해라, 그것조차 못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엠마를 뒤로하며 발코니를 향해 뚜벅뚜벅 다가갔다.
사각, 사각.
어째 일이 쉽게 풀리지 않을 것 같다.
* * *
짧지만, 행복했던 하룻밤 휴가를 마무리한 우리는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섰다.
그리고 순방에서 돌아온 미합중국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백악관으로 향했다.
많이 컸네, 박범석.
참치 통조림 하나 더 받겠다고 보급 창고를 전전하던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무려 백악관에 와서 미국 대통령이랑 말씨름할 수준까지 올라왔다.
근데 이게 기쁘고 뿌듯하기보다는 정말 형용 못할 귀찮음이 몰려오고는 한다.
늙어서 그래!
매번 상식 아저씨가 입에 달고 살던 그 말이 이제 슬슬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쪽입니다.”
꼼꼼한 몸수색 절차를 마치고 시크릿 서비스를 따라 백악관 안으로 들어갔다.
적막함이 흐르는 내부 풍경.
외교 접견실에는 이미 도착한 한 백인 남성이 편한 자세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덜컹.
대통령이 독대를 원했기에 최소한의 경호를 제외하면 이 자리에는 우리뿐이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미합중국 대통령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Mr. 박?”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미합중국 대통령, 아니 제프리 잭슨은 호탕한 웃음과 함께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맞잡고 흔들자 베테랑 군인 특유의 거친 굳은살이 그대로 전해졌다.
“어젯밤은 푹 쉬셨습니까?”
거친 카우보이를 연상케 하는 이미지와는 달리 제프리는 친절하게 나를 맞이했다.
덕분에 분위기는 화기애애했고 별다른 불편함 없이 만남을 계속할 수 있었다.
홀짝.
일단 차 한잔으로 숨을 돌린 나와 제프리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 곧 대화를 시작했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예. 다른 손님이 있더군요.”
“제가 대신 사과드리죠. 확실히 조치해뒀으니 앞으로 이런 일은 없을 겁니다.”
제프리로서는 바이오 젠슨의 이러한 행위가 불쾌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는 길길이 날뛰는 대신 최대한 잡음 없이 처리하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했다.
“강릉에서 제공해준 군락과 항체 덕분에 백신 개발에 속도가 붙고 있습니다. 별문제만 없으면 아마 올해 안으로 승인될 겁니다.”
“그럼 저희는 언제쯤 공급받게 됩니까?”
“초기 생산량 중 1할을 먼저 제공하겠습니다. 물론 여유분까지 포함한 물량이죠.”
미국 인구가 워낙 많다 보니 그중 1할이면 영동 지방 전체는 충분히 커버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영동 지방 밖, 서울을 포함한 나머지 한반도 요새들이었다.
“추후 물량도 공급받고 싶습니다.”
“……서울 요새가 부탁했습니까?”
“아니요, 제 판단입니다.”
이번 부산 사건을 통해 공존이라는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것을 배웠다.
한반도 통합이라는 거추장스러운 목표 따위가 아닌 미래를 약속받을 수 있어야 한다.
지겨웠던 전쟁의 종식과,
일상으로 모든 걸 돌릴 진정한 평화.
그것이 김태하 소장과 우리의 오랜 꿈이자 내가 미국행을 흔쾌히 허락한 이유다.
“으음, 곤란하군요.”
내 단호한 요구에 제프리는 수염이 거뭇하게 자란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백신을 제공해달라고 요구하는 나라가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칫하다가는 외교 관계는 물론 의회에서도 잡음이 나올 수 있는 사안이었다.
“Mr. 박. 당신이 보기에는 저는 선한 사람 같습니까?”
“글쎄요, 모르겠군요”
“맞습니다. 모른다는 게 정답이죠. 인간은 철저하게 이득을 위해 움직이는 순간 선과 악이라는 개념 자체가 점점 희미해지니까요. 제가 만약 이를 거절한다면 당신에게는 악, 다른 나라에는 선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내 나라, 내 사람을 위해 움직인다는 관념은 시대가 변해도 바뀌지 않았다.
대통령 제프리는 선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아닌 이해관계에 얽힌 인간 중 하나였다.
“그래서 말입니다.”
잠시 창밖을 바라보며 침묵을 지키던 제프리가 고개를 돌려 나와 마주했다.
“당신과 이득을 나눌 친구가 되고 싶군요.”
“지지를 원하십니까?”
“하하, 아뇨. 상황을 우습게 만들고 싶지는 않습니다. Mr. 박. 그냥 모두에게 말해주십시오. 당신이 무엇을 보았는지, 현재 미국이 무엇과 싸우고 있는지 말입니다.”
안전한 동부에 처박혀 대가리만 굴리고 있는 이들에게 참혹한 실상을 보여주어라.
나는 가볍게 그러겠노라고 답했고, 마지막 악수를 끝으로 백악관을 빠져나왔다.
* * *
“5분 전입니다.”
상황을 우습게 만들지 말자는 말답게 제프리는 TV 방송이나 라디오 쇼 같은 수단이 아닌 언론 인터뷰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덕분에 호텔에서 편안하게 준비만 하면 되었던 나는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쪽이에요.”
호텔 스위트룸 접객 공간에는 카메라와 한 중년 여성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내가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그녀는 빙긋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어차피 녹화 방송이니 편안하게 답해주세요.”
TV에서 얼굴을 본 기억이 있을 만큼 미국에선 알아주는 언론인이라고 한다.
기꺼이 인터뷰어를 맡아준 중년 여성은 진지한 얼굴로 나와 마주 앉았다.
삑.
카메라에 붉은빛이 들어왔다. 녹화 시작과 동시에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굉장히 멀리서 오셨네요. 강릉에서 오신 박범석 시장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예, 반갑습니다.”
“사실 간단하게 소개했지만, 아마 많은 분이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해요. 전 세계 최초 항체 보유자, 또 군락을 생포하시는 전문 사냥꾼으로 무척 유명하시니까요.”
“저희 팀원들 덕분이죠.”
한쪽이 게스트를 띄어주면 또 한쪽은 겸손하게 이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이어진다.
빙긋 웃으며 좋은 분위기를 이어가던 그녀는 잠시 자세로 바로 하고 앉았다.
“하지만 그 과정을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더 많으시겠죠? 어떠신가요, 시장님?”
단순히 얼굴 팔고 끝내려고 했으면 제프리의 제안을 받아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중년 여성은 기다렸다는 듯 첫 번째 질문을 했다.
“20대 초반이라는 어린 나이에 입대하신 걸로 알고 있어요. 혹시 어떤 전쟁에서 활약하셨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보충대로 들어가 기초 훈련받고 의정부로 가장 먼저 투입되었습니다. 그때는 아무것도 모를 때라 도망친 기억밖에 없네요.”
“그렇게 말씀하신 것 치고는 훈장을 받으셨네요? 좋은 전우들을 만나셨나봐요.”
“예. 모두 좋은 분들이셨죠.”
“대표적으로 어떤…….”
“다 죽어서 기억이 안 납니다. 훈장을 줄 사람이 없다고 그냥 제게 던져주더군요.”
자연스럽게 이야기 주제를 전환하려던 그녀는 잠시 할 말을 잃고 탄식을 삼켰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가며 떠올리기 싫었던 그 날의 기억을 되새겼다.
“냄새만 기억납니다. 한여름 장마철이라 감염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시체라도 치우지 않는 날에는 복부에 가스가 찬 고깃덩어리들이 물가에 둥둥 떠다녔어요.”
“………….”
“그래서 보통은 불태웁니다. 저 시체 중에 오인 사격으로 죽은 이들이 반, 물어뜯겨 죽는 사람이 반, 구분할 방법이 없으니 군번줄만 회수하고 전부 재로 만들죠.”
아직도 그 광경을 떠올리고 있노라면 담배만 쥐고 있던 오른손이 덜덜 떨린다.
나는 여전히 돌고 있는 카메라를 힐끗 주시하며 오른쪽 귀를 툭툭 두드렸다.
“그때 그 절규가 아직도 들립니다. 유해를 어디에 묻어놨는지 찾지 못해서 한 어머니가 군인들 바짓가랑이를 붙잡았거든요. 그분을 강제로 끌어낸 게 바로 저였습니다.”
현재는 잊힌 이야기, 생생한 회고록에 카메라 뒤 모두가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인터뷰어인 여성만큼은 끝까지 본분을 다하고자 내게 다시 질문했다.
“그 상태로 계속 참전하신 겁니까?”
“그 짓을 한 21번쯤 반복했습니다. 감염체를 쏘는 것도, 물린 사람을 죽이는 것도, 점점 익숙해졌죠. 주변에선 저를 좋은 군인이라고 불렀는데……. 글쎄요. 이상하게 제 이름이 아니라 군번만 기억이 났습니다.”
잃어버린 10년, 악몽은 반복되고 또 반복되며 수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나는 그런 전장 한복판에서 나 자신이 존귀하지도, 대단하지도 않다는 걸 알았다.
‘끊어요.’
방송 수위가 너무 높아졌다고 생각한 걸까, 카메라맨은 황급히 손을 휘저었다.
하지만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여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의자를 좁혀왔다.
“계속 말씀해주세요.”
그날 촬영한 인터뷰는 2시간 가까이 진행되고 나서야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방송으로 나간 건 그 어떠한 편집도 가미하지 않은 처참한 회고록의 원본이었다.
다음 차례는 누구일까?
현실이 그들에게 묻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