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의 상속자-115화 (115/180)

115화

그날 촬영한 인터뷰 내용은 거의 다큐멘터리화되어 미국 전역으로 방영되었다.

워낙 시청층이 두꺼운 저명한 언론사답게 방송은 금세 널리 퍼져 화제 되었고,

연이은 재방송과 함께 인터넷 다시 보기 숫자 또한 가파른 속도로 올라갔다.

항상 영웅화, 전쟁 선전, 애국심 고취 목적으로 만들어졌던 참전 경험담과는 다른 담담한 회고록이 큰 충격을 준 것이다.

물론 누군가는 이를 과장과 허위라며 비난은 또 누군가는 애써 외면하려고 했다.

하지만 대다수 ‘보통’ 시민은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고민에 빠졌다.

그동안 외면했던 불편한 진실을 뒤늦게 마주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반응을 기대했었던 제프리는 침묵을 깨고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상 공개.’

지난번 강릉으로 파견되었던 특수팀의 영상이 드디어 대중들에게 공개되었다.

여러 개 바디캠으로 편집된 그 영상은 군락 내부로 침투하는 과정이 찍혀있었다.

물론 잔혹한 장면은 일부 편집되거나 알아볼 수 없도록 모자이크 처리되었지만,

당시 대원들이 느낀 숨 막히는 긴장감과 공포만큼은 정말 여실히 전달되었다.

오직 군락을 소거해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죽음을 불사하고 달려드는 대원들.

참혹하기에 용기를 내야 했고 무모한 도전인 걸 알면서도 목숨을 바쳐야 했다.

당신은 이를 보고도 떠들 수 있는가?

그 영상은 호소도, 사정도 아닌 그저 담담하게 읊어내려 가는 하나의 메시지였다.

‘잠시 기다려보죠.’

사실 이러한 행동은 반쯤 도박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무모한 점이 많았다.

영상이 참혹만을 너무 부과시킨 나머지 사회 분위기가 침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승부수를 본 제프리는 초조한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리고자 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백악관으로 성적표 한 장이 전달되었다.

‘됐다!’

부정적일 거라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반응은 불씨 안에서 뜨겁게 타올랐다.

이번 일로 무언가를 느낀 이들이 하나둘 숨기고 있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시장님!”

얼굴이 잔뜩 상기된 엠마가 호텔 방을 찾아와 기쁜 목소리로 결과를 알려주었다.

“항상 미달이던 올해 모병 계획이 한주 만에 목표치를 채웠어요! 단순 수치가 얼마인지 아세요? 무려 200%가 넘어요!”

항상 찬 바람만이 불던 모병 센터 앞에는 수많은 젊은이가 길게 줄을 섰다.

그들은 어제만 해도 시끄럽고 성가신 시위대를 피해 도망치던 일반 시민들이었다.

드디어 용기를 내려 한 걸까.

방관과 외면이 주된 여론이었던 전체적인 사회 분위기는 점차 바뀌어 가고 있었다.

“정치권은요?”

물론 이러한 현상은 바닥뿐만 아니라 정치권에서도 빠르게 나타나고 있었다.

“지지가 계속 이어지고 있어요. 부정적이었던 의원들도 일단 수긍하는 분위기고요!”

그들도 바뀌어 가는 여론을 감지했는지 모호한 스탠드를 취하며 하나둘 돌아섰다.

국가 위기 상황 때마다 하나로 뭉치는 것이 원래 미 의회 기조이기도 했던 것처럼.

여기서 건드려봤자 좋을 게 없다는 걸 그들도 점점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지지율을 대폭 상승했고 긍정적인 반응이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왔다.

모든 판돈을 걸고 던진 마지막 카드가 제대로 통했으니 제프리도 만족했겠지.

일주일간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그제야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슬슬 돌아가야겠네요.”

“바로 가시게요?”

“용건 끝났으니 가야죠.”

이번 거래를 통해 한반도 전체 인구가 접종할 수 있는 백신 물량을 약속받았다.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접종하려면 한시라도 빨리 지도자들과 힘을 합쳐야 했다.

바쁘시구나…….

아쉽다는 얼굴로 시무룩하던 엠마는 곧 들고 온 태블릿으로 항공편을 수배했다.

출국 시간은 내일 오후 13시.

나는 마지막으로 일행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며 미국행 일정을 마무리하려고 했다.

“저기, 범석 씨.”

“예?”

그런데 그 순간 문밖으로 나서려던 엠마가 갑자기 멈춰 서며 내 이름을 불렀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가 복잡한 표정으로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으셨던 줄은 몰랐어요. 만약 알았으면 절대 데려오지 않았을 거예요.”

끔찍한 기억을 되새기는 것조차 힘이 드는데 나는 그걸 무려 2시간 동안 인터뷰했다.

엠마는 이에 죄책감을 느꼈는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평소 당차고 거칠어도 그 마음만큼은 누구보다 따뜻한 그녀다운 태도였다.

“괜찮습니다.”

“예?”

“도리어 속이 시원했습니다.”

그날 1:1 인터뷰가 방영된 이후로 밤마다 일행들이 내 숙소를 찾아왔다.

이 감정을 뭐라 설명할 길이 없어 대뜸 나를 찾아와 얼굴을 보려 한 것이다.

안아주는 사람도 있었고 눈물을 훌쩍이며 대신 손을 잡는 사람도 있었다.

특히 초창기 때부터 같이 해온 경태와 가은이 그리고 상식 아저씨는 아예 술병을 들고 찾아와 온종일 내 곁을 지켜주었다.

그런 사람들이다.

흉터처럼 숨기기 급급했던 아픔조차 전부 포용할 만큼 따뜻하고 착한 그런 사람들.

나는 일행들이 있었기에 끔찍했던 과거를 저 멀리 버려두고 돌아올 수 있었다.

“안길래요?”

농담 삼아 팔을 벌려주자 엠마는 기다렸다는 듯 후다닥 뛰어와 품에 안겼다.

그리고 일행들이 그랬듯 내 등을 토닥여주며 말없이 모든 아픔을 위로해주었다.

이제 괜찮아,

앞으로도 괜찮아질 거야.

창밖으로 보이는 눈부신 야경 위에는 어느덧 포근한 눈송이가 수를 놓고 있었다.

* * *

바이오 젠슨의 최대 주주이자 CEO인 하워드는 심각한 얼굴로 목소리를 낮췄다.

“이렇게 손 떼면 그만입니까?”

[자네도 알다시피 분위기가 좋지 않아. 여기서 들쑤셔 봤자 상황만 나빠진다고.]

“그래도 투자한 건 회수해야죠!”

[정말 이해가 안 되는구먼. 이미 충분히 점유율을 높이고 있으면서 왜 이렇게 욕심을 부리는 건가? 어차피 전쟁이 끝나면 다 정상화로 돌아갈 수 있는 게 미국이야.]

정상화로 돌아가면 끝이라고? 그게 지금 문제니까 이 난리를 피우는 게 아니겠는가.

처음에는 다 도와줄 것처럼 굴더니 불리해지자 발을 빼는 꼴이 참으로 역겹다.

[내 충고하나 하자면 당분간은 알아서 사리는 게 좋을 거야. 개헌이 통과되면 대통령이 어디부터 건드릴 것 같나? 오랜 정을 생각해서 말하는데 이만 여기까지 하지.]

그동안 처먹은 돈이 얼마이며 받아 간 물건이 몇 개인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쳐?

콰직!

참다못한 하워드는 결국 들고 있던 전화기를 던지고 책상 위 물건을 내팽개쳤다.

사무실을 개판으로 만들고 나서야 진정한 하워드는 옆에 놓인 위스키를 찾았다.

꿀꺽, 꿀꺽.

이미 반병 넘게 내용물을 비운 그의 눈동자에선 이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레임덕을 앞둔 정부를 우습게 보고 계속 건드렸다가, 한순간 끈 떨어진 신세가 되고 말았으니 말이다.

만약 진짜로 개헌이 통과된다면 앞으로 어떤 일이 발생할지는 아무도 몰랐다.

조금만 더 침착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었던 하워드는 결국 실수를 범하려고 했다.

그는 그나마 유일하게 멀쩡한 책상 위 스피커 폰을 돌려 누군가에게 연락했다.

삑.

“나야. 뒤처리는 이쪽에서 알아서 할 테니까, 지금 당장 실험체부터 지하로 숨겨.”

[……빼돌리라는 말씀입니까?]

“못 알아들었어? 숨기라고!”

[미치셨습니까? 금방 들킬 겁니다!]

“지금 빼앗기는 것보단 나아! 우리가 그걸 구하려고 얼마를 쓴지는 알기는 해!”

당시 박범석이 처음 생포했던 군락 말고도 파견팀 소속으로 이뤄진 신설 특수 부대에서 하위 군락 두 개를 확보했었다.

당시 바이오 젠슨은 엄청난 로비를 통해 그중 하나를 실험체 명목으로 확보했고,

현재도 정부의 삼엄한 감시 아래 수많은 연구 자료와 실적을 뽑아내고 있었다.

근데 그걸 빼돌린다고?

이게 미친 짓이라는 걸 안 관리팀장은 결국 지시를 거부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전 못합니다. 여기서 손 떼죠.]

이에 얼굴이 시뻘게진 하워드는 책상을 쾅쾅 두드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 새끼들이나, 저 새끼들이나 도움 안 되는 건 똑같아! 시발, 못하겠으면 꺼져!”

온갖 욕설이란 욕설을 다 퍼부은 그는 곧 거칠게 전화를 끊고 씩씩거렸다.

그리고 한참을 고민하더니 결국 현재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직원들을 불렀다.

“지금 당장 연구소 시설로 가.”

하지만 하워드가 호출한 직원들은 관리팀장과 비교하면 비전문가에 불과했다.

철저한 관리, 기술, 노하우가 필요한 군락 가수면 기술에 비전문가가 손을 댄다고?

그 결말이 어떨지는 오직 운명의 장난과 이 사태를 직면할 이들만이 알고 있었다.

그날 밤, 워싱턴 D.C에는 통제가 풀린 군락이 분노를 포효하며 깨어났다.

* * *

제프리가 만찬을 열어주겠다는 걸 기어코 뿌리치고 대충 컵라면으로 식사를 때웠다.

그리고 떠날 채비를 끝낸 일행들과 함께 호텔을 빠져나와 리무진에 탑승했다.

“너 배가 왜 이렇게 나왔냐?”

“너무 먹어서 그런가…….”

다들 어찌나 마음 놓고 놀았는지 얼굴 살이 포동포동 오르다 못해 반짝거린다.

마찬가지로 정말 푹 쉬다간 나 또한 만족스러운 웃음과 함께 옆자리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이미 관광지를 전부 둘러보고 온 상식 아저씨가 사진을 돌려보고 있었다.

“직접 다 찍으신 거예요?”

“언제 또 올지 모르는디 다 찍어서 방에 걸어두려고. 이것 봐! 풍경 기가 막히지?”

링컨 기념관, 의회도서관, 워싱턴 기념탑, 국립 자연사, 항공 우주 박물관까지.

이게 일주일 동안 가능한가 싶을 정도로 정말 많은 곳을 재밌게 즐기다 오셨다.

나는 상식 아저씨를 데려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에 빙긋 웃으며 주머니를 뒤적였다.

출발까지 2시간 남았으니 아마 강릉에는 밤늦게나 새벽쯤에 도착할 것이다.

걱정하고 있을 태식 씨에게 마지막으로 연락이나 한 번 줄 생각이었다.

삐용! 삐용! 삐용!

“잉? 불이라도 났나?”

그런데 그 순간 요란한 소란과 함께 소방차 하나가 리무진 옆을 빠르게 지나간다.

그 뒤를 수많은 구급차와 또 경찰차가 줄을 이어 어딘가로 달려가고 있었다.

진짜 불이라도 났나?

호텔을 나올 때만 해도 몰랐는데 지금 보니 도시 분위기가 조금 많이 이상하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창문을 내려 소란스러워진 바깥 풍경을 살펴봤다.

투두두두두두 - - -!!

그 순간 하늘에서 군인들을 잔뜩 태운 수송 헬기가 빠른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군인이 시내 한복판에 나타났다? 한참 웃고 떠들던 대원들이 표정을 굳혔다.

우우우우웅.

전화기가 울린다.

발신자는 엠마, 무언가 일이 터진 것을 직감한 나는 지체할 것 없이 전화를 받았다.

[시장님!]

“무슨 일입니까?”

[군락이에요! 군락이 풀려났습니다!]

군락이라는 말이 들려오자마자 발끝에서부터 시작된 혐오감이 찌르르 느껴진다.

“여기!”

때마침 리무진 안에 설치된 TV에서는 정규 프로그램 대신 속보가 흘러나왔다.

헬기에 탑승한 기자는 심각한 얼굴로 상황을 전달하며 한 건물을 가리켰다.

그곳은 바이오 젠슨이라는 상표가 떡하니 찍힌 건물에서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뭡니까?”

[바이오 젠슨에서 군락을 숨기려다가 동결 장치가 풀렸습니다! 현재 연구소 내부에 둥지를 튼 상태고 사람들 여럿이 갇혔어요!]

사람이 보통 당황하면 한숨이 나오고 다음은 욕설이 나온다고들 한다.

하지만 지금은 당황하다 못해 어이가 없어서 흔한 욕설조차 나오지 않았다.

[지금 감염체 대응팀이 급히 그쪽으로 가고 있어요! 당시 파견팀으로 갔던 대원들이 시장님과 연락하고 싶다는데, 괜찮으세요?]

“예, 바꿔주십시오.”

나는 전화가 연결되는 사이, 함께 탑승한 경태와 가은이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통화내용을 듣고 있던 그 둘은 재빨리 다른 차량에도 현재 상황을 알려주었다.

“차 돌려요!”

공항으로 향하던 리무진은 그대로 방향을 꺾어 깨어난 군락을 향해 달려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