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연말은 사람을 차분하게 만든다.
특히 곧 혹독한 겨울을 맞이하게 될 생존자들은 특히 말수가 적어지고는 한다.
올해도 힘들었다. 우리가 내일도, 모레도, 그리고 내년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몸이 추워지면 마음도 부쩍 추워진다고 겨울은 잡생각을 많이 떠오르게 한다.
“으, 춥다.”
드디어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다.
물론 그 ‘드디어’는 밤과 새벽이 아닌 해가 떠 있는 시간을 가리키는 의미다.
이제 강릉은 해가 중천인 시간을 제외하면 한동안 영하권에서 놀게 될 것이다.
미국에서 귀국한 나는 숨 돌릴 틈도 없이 아파트 월동 준비를 서둘러야 했다.
“어디 세는 곳 없죠?”
“모두 새거라 아주 튼튼합니다!”
지난겨울 함께 살았던 상가 공동 숙소를 없애고 개별난방 시스템을 도입했다.
아파트 인구가 점점 많아짐에 따라 공동 숙소 효율이 무척 떨어지기도 했고,
이제 각 집마다 난방 기구를 달아줄 만큼 희망 요새 사정이 좋아진 것도 한몫했다.
나는 김이 폴폴 나는 라디에이터를 일일이 확인하며 직접 현장을 사찰했다.
역시 공사자들이 하나같이 베테랑들이라 그런지 군더더기가 보이지 않는다.
볼 것도 없이 합격, 모여 있는 현장 감독들을 향해 오케이 사인을 보내주었다.
“훌륭하네요.”
그러자 사람들은 서로 손뼉 마주치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던 공사를 마무리했다.
나는 상식 아저씨와 함께 자연스레 방을 나서며 아파트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접종은 시작했어요?”
“응, 어제 아침부터.”
곧 백신이 개발되면 희망 요새는 물론이고 모든 강릉 주민이 예방 주사를 맞게 된다.
나는 의료진들이 익숙해질 겸 겨우내 전염병 예방을 위한 독감 주사를 놓게 했다.
물론 만 12세 이하 어린 애들에게 필수 예방 주사를 맞게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동안 각 요새 의료원에서는 아이들이 우는 소리가 멈추지 않을 예정이다.
“방한복은요?”
“미리 주문했으니 걱정하지 말어.”
“요즘 창고에 쥐새끼가 보이던데…….”
“유난이여! 그 정도는 알아서 한다니까!”
늘 강릉 시장으로만 일해오다 보니 오늘만큼은 동장 노릇을 톡톡히 하고 싶었다.
하지만 원래 1시간이면 끝났던 아파트 순찰이 3시간이 지나도 끝나지 않는다.
이건 내가 걸음이 느려진 것이 아닌 그만큼 희망 요새가 커졌다는 걸 의미했다.
“……원래 이렇게 넓었나.”
“이제야 실감이 나는 겨? 많이 늦네.”
희망 요새는 기본적으로 작은 아파트 단지가 기반이라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할아버지 설계도를 따라 증축을 거치더니 어느새 대형 요새로 성장해버렸다.
이 정도면 한때 강릉 최고의 요새라고 불렸던 강릉항보다 훨씬 크지 않을까?
할아버지는 어쩌면 이러한 미래를 보고 설계도를 그리고 계셨을지도 모른다.
“사람도 많고…….”
물론 요새가 커진 만큼 입주민도 많아지고 갖가지 시설이 자연스레 들어섰다.
특히 학교, 병원과 같은 필수 시설은 강릉 이곳저곳에서도 찾아올 정도로 훌륭했다.
이제 강릉의 중심 요새는 희망 아파트라고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꼬치 하나 먹고 갈까?”
“좋죠.”
많은 사람이 오가는 정문 앞에는 항상 가게들과 식자재 장마당이 열려 있다.
마지막으로 시끌벅적한 시장으로 들어온 나는 상식 아저씨와 단골집으로 들어갔다.
“어머! 또 오셨어요?”
“고생하시네요.”
“어휴, 고생은 무슨! 계속 고생해도 좋으니 늘 올해만 같았으면 소원이 없겠네요.”
홀몸으로 아이 둘을 키우는 가게 주인은 오늘도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어있다.
시장 인심은 곧 사람 인심, 나는 야무진 어묵 꼬치를 우물우물 씹어먹었다.
와, 맛있네.
가격도 싸고 맛도 좋은 게 늘 상인들이 찾아와 매출을 올려주는 이유가 있구나.
“선거 앞둔 정치인처럼 잘 먹네.”
“기본이죠.”
박범석은 늘 배고픕니다. 딱 선거 영상으로 찍기 좋은 구도인데 카메라가 없어 아쉽다.
나는 상식 아저씨와 낄낄 웃으며 아침부터 분주한 시장 풍경을 구경했다.
“잘 먹고 가요, 아줌마.”
“예~ 들어가세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묵 가게를 오고 가는 손님마다 장부에 무언가를 적고 있다.
내가 뭔가하고 살펴보니 다름 아닌 현물 거래를 대신하는 외상 장부였다.
“계산을 원래 이런 식으로 합니까?”
“네? 아~ 이게 일일이 계산하기가 힘들어서요. 나중에 현물로 받거나 그래요.”
보통 상인끼리 거래할 때는 총알이나 가치가 있는 현물이 화폐를 대신한다.
하지만 이처럼 어묵 하나, 국수 한 그릇 계산할 때는 이게 무척 애매해진다.
특히 슬슬 총기 규제가 들어갈 예정인 강릉을 생각하면 앞으로가 더 문제였다.
“불편하시겠네요.”
“에이, 그냥 다들 참으면서 하는 거죠.”
말은 저렇게 하셔도 그동안 못 받은 돈, 떼먹힌 돈만 해도 상당하실 것이다.
나는 어묵을 우물우물 씹으며 잉크로 얼룩진 외상 장부를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슬슬 손볼 때가 되긴 혔지?”
“그러게요.”
지금이 무슨 원시 시대도 아니고 언제까지 현물을 주고받으며 거래해야겠는가.
강릉 경제가 커진 만큼 이제 슬슬 화폐를 다시 필요할 때가 되었다는 걸 직감했다.
“근데 쉽지 않네요.”
하지만 문제는 화폐를 다시 쓴다는 게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죽하면 서울도 개혁 몇 번 말아먹고 지금까지 미국 달러를 쓰고 있겠는가.
이솔하가 대가리 아프게 고민하는 게 바로 이 화폐 문제라는 걸 생각하면,
비전문가인 내가 건드렸다가는 과거 북쪽 새끼들 꼴이 나는 건 거의 확실했다.
그냥 우리도 달러를 써야 하나?
현재 미국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걸 생각하면 그렇게 나쁜 방법도 아니었다.
치익!
[시장님, 시청에서 호출입니다.]
그렇게 한참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주머니 속 무전기가 조용히 울렸다.
오늘 오전 방문 일정이 있다고 하더니 이른 아침부터 찾아와 대기 중인 모양이다.
“가봐야겠는데요.”
“시장은 어째 쉴 틈이 없구먼.”
어묵을 입에 급히 욱여넣은 나는 9mm 총알 두 발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아주머니, 잘 먹었어요.”
“너, 너무 많아요! 다시 가져가세요!”
“다음에 또 올게요.”
그리고 깜짝 놀라 달려나오는 가게 주인을 뒤로한 채 정문을 향해 급히 걸어갔다.
다음에 또 찾아올 때는 저 외상 장부 대신 계산대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 *
강릉의 위상이 점점 커지며 시청을 방문하려는 손님들도 자연스레 많아졌다.
물론 대부분 건은 직원이나 태식 씨 선에서 알아서 정리되고 잘려나갔지만,
간혹 강릉 시장인 내가 직접 만나야 할 만큼 중요한 손님들도 있는 편이었다.
똑똑.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며 태식 씨와 함께 한 백발노인이 조심스럽게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다.
그 노인은 나를 보자마자 허리를 푹 숙이며 어눌한 한국말로 인사를 해왔다.
“안, 안녕하십니까, 시장님.”
이 노인은 다름 아닌 일본인 피난민 수만 명이 투표로 뽑은 임시 대표였다.
나는 허리를 과도하게 숙이는 노인에게 다가가 악수한 뒤 자리를 안내했다.
“과하게 예의 차릴 필요 없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괜찮습니다. 일단 앉으세요.”
내가 시의원을 두들겨 팬 뒤로 현재 일본인 피난민들은 찍소리도 못한 지 오래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노인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정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성함이……와타베 상?”
“예, 예에! 맞습니다.”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이셨네요?”
대표라길래 의외로 정치인이나 군인 중 하나가 뽑힐 줄 알았는데 무척 의외다.
나는 여전히 저자세를 취하는 와타베를 관찰하다 이내 본론부터 꺼내 들었다.
“전달해주신 의견서는 잘 봤습니다. 대부분 강릉에 남기를 원하시더군요. 맞습니까?”
현재 일본 임시 정부는 홋카이도로 자리를 옮겨 본토 수복을 계획 중이다.
만약 피난민들이 원한다면 대형 화물선을 이용해 직접 데려다 줄 생각이 있었다.
“예, 맞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일본으로 돌아가는 대신 여기 강릉에 남아있기를 강력하게 원했다.
아마 인간적인 대우와 안전한 입지를 보자 생각이 다른 쪽으로 기울어버린 모양인데,
그 때문인지 현재 삼척 지역에는 일본인 피난민들이 우글우글 모여 사는 거대한 판자촌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었다.
위생에도, 치안에도 좋지 않은 저 허름한 판자촌을 계속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
교통정리가 필요하다고 여긴 나는 결국 그들의 망명을 공식적으로 허용하기로 했다.
“삼척 쪽에 거주 지역을 마련해 드릴 겁니다. 앞으로 쭉 그쪽에서 머무시면 됩니다.”
선례가 없다면 모를까, 블라디보스토크 정착촌도 강릉에 잘 적응하면서 살고 있다.
혹여나 재팬 타운이 건설되더라도 모든 이들은 강릉 연합 아래 모이게 될 것이다.
“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혹시나 쫓겨나는 건 아닐까,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을 와타베는 눈물을 흘렸다.
그래도 시의원 같은 미친놈이 아닌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 찾아와주어서 망정이지.
나는 그에게 직접 휴지를 건네며 그동안 통제를 잘 따라준 것에 감사를 표했다.
“저, 시장님.”
“예?”
그런데 그 순간 한참 눈물을 닦던 와타베가 갑자기 주변을 둘러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 고민하는 사람처럼 연거푸 한숨을 내쉬더니 결국 못다 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걸 말씀드려야 말아야 하나 저희 쪽에서도 고민이 무척 많았습니다. 하지만 시장님이라면 이해해 주실 것 같아서…….”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으, 자치권 문제 말입니다. 혹시 강릉 직할 지역으로 들어갈 수는 없을까요?”
보통 자치권을 요구하는 거면 몰라도 직접 관리해달라는 부탁은 또 처음 듣는다.
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쳐다보자 와타베는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언제부턴가 피난민들을 괴롭히는 무리가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다들 처음 보는 얼굴들인데 질이 무척 좋지 않습니다.”
“야쿠자를 말하는 겁니까?”
“아뇨, 아마 일본 내에서 활동하는 극우 단체가 아닌가 싶습니다. 과격한 성향뿐이라 저희가 통제하는 게 쉽지 않아서요…….”
하긴 수만 명이 몰려왔는데 그중 미친놈 몇몇 있다고 해서 이상한 건 아니다.
하지만 와타베 말처럼 그게 여러 정신병자가 모인 집단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극우 단체?
시발, 말만 들어도 기분이 나빠지는 게 반드시 사고를 칠 새끼들 같았다.
“알겠습니다. 일단 놈들이 누군지부터 확인하고 다시 연락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시장님!”
와타베는 그제야 한심했다는 듯 고개를 꾸벅 숙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나간 것을 확인한 나는 함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태식 씨에게 물었다.
“혹시 알고 계셨습니까?”
“아뇨, 저희도 처음 듣습니다. 만약 저 말이 사실이라면 자치권은 보류해야겠네요.”
성향이 온순한 와타베라면 모를까, 극우 인사가 지도자가 되었다가는 골치 아파진다.
특히 일본 특유의 극우 문화가 어떤지를 생각하면 절대 자치권은 줄 수 없었다.
쯧.
바깥일이 슬슬 마무리되나 싶더니 또 내부에서 사건 사고가 일어날 낌새이다.
한동안 담배만을 뻑뻑 피우고 있던 나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챙겼다.
“차량 대기하라고 하세요.”
“직접 가보시려고요?”
“암행 순찰이라고 합시다.”
벌써 구린 냄새를 풍기는 게 직접 움직이지 않으면 나중에 뒤통수를 맞을 것 같다.
나는 미래 일기가 예언할 경고에 앞서 진상을 확인하고자 미리 삼척으로 향했다.
어때, 이 종이 쪼가리 새끼야.
이쪽에서 선수 치는 건 처음 보지?
사각, 사각, 사각.
[……………….]
[다음 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