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잘빠진 트럭 대신 고물 승합차를 운전하게 된 상식 아저씨가 조용히 투덜거렸다.
“그래서 고른 게 결국 나여?”
“경태를 데리고 올 수는 없잖아요.”
“……뭐, 그렇긴 하지.”
태식 씨는 업무 때문에 바쁘고 경태랑 가은이는 어디 암행 순찰에 데려갈 만큼 행동거지가 조심스러운 애들이 아니다.
동행인 한 명이 꼭 필요했던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나마 인상이 선하고 붙임성이 좋은 상식 아저씨와 함께 암행 순찰에 나섰다.
“사고 칠 것 같은 놈들만 찾으라는 거지?”
“예. 싹수가 노란 놈들이요.”
태식 씨가 그동안 몰랐다는 걸 보면 놈들이 정말 잘 숨어 다니고 있었거나,
이미 일본 정착촌 사이에 이런 움직임을 쉬쉬하는 분위기가 만연했을 것이다.
순찰대를 보내봤자 벌레처럼 숨어들기만 할 터, 뿌리를 확실히 뽑기 위해서는 이렇게 음지 안으로 들어가 볼 필요가 있었다.
“시장이 할 일은 아닌 거 같은디…….”
“끝나고 양주 콜?”
“솔선수범하는 아주 모범적인 시장이야.”
양주 한 병으로 투덜거림을 방지한 나는 벌써 어둑해진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강릉과 동해를 빠져나온 차량은 어느새 영동 지방 남쪽, 삼척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끼익.
어둑한 도로 위, 유일한 가로등 아래에는 지역 검문소가 쓸쓸하게 서 있었다.
창문을 내려주자 방한복을 껴입은 방위군 한 명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말했다.
“죄송합니다. 오후 9시 이후로는 차량이 통행할 수가 없어서……시, 시장님?!”
그 순간 내 얼굴을 알아본 방위군이 기절할 듯 놀라며 급히 경례를 붙였다.
이에 초소를 지키던 나머지 방위군들도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숫자는 총 다섯.
누구 하나 게으름 부리지 않고 철저하게 지역 검문소를 지키고 있는 모습이다.
나는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미리 챙겨온 담배와 간식 꾸러미를 가득 건네줬다.
“춥죠?”
“아닙니다!”
“너무 딱딱하게 있지들 마시고, 서로 돌아가면서 쉬세요. 그 정도는 되잖아요?”
“감, 감사합니다!”
이런 추운 겨울날 근무를 해야 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이쪽도 잘 안다.
나는 잔뜩 긴장한 병사들을 격려해준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검문소를 지나쳐왔다.
백미러로 보이는 초소들을 바라본 상식 아저씨는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입구는 아니네.”
불시에 찾아와서 정말 미안하지만, 검문소 경계 상태는 꼭 확인하고 지나가야 했다.
그래도 병사들이 철저하다는 걸 두 눈으로 직접 봤으니 출입구는 안심해도 될 터.
이제 남은 것은 와타베가 극우 단체라 경고한 놈들의 정체만 알아내면 된다.
우리는 곧장 차량을 몰아 일본 피난민들이 모여있는 삼척 시내로 진입했다.
“사람이 많네?”
콘크리트 건물이 남아있는 시내를 제공했기에 정착촌은 꽤 문명이라는 느낌이 난다.
특히 밤인데도 불구하고 불이 켜져 있는 건물들과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긴 수만 명이 유입되었다고 하는데 시끌벅적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근처에다 주차할까?”
“내려서 걷죠, 뭐.”
시내로 들어갈수록 길이 좁고 사람이 많아져 차를 끌고 다니기 무척 불편하다.
우리는 근처 공터에 차를 주차하고 각자 모자와 마스크를 낀 채 차에서 내렸다.
거울로 바라본 우리 둘의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용직 노동자들처럼 보였다.
“가자.”
그렇게 잠행 준비를 끝낸 나와 상식 아저씨는 자연스럽게 인파 속으로 스며들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어와 곳곳에 보이는 한자 표지판.
확실히 일본 정착촌은 우리 강릉과는 번화가 분위기부터가 정반대였다.
“신기하네요.”
“다들 적응했나 봐.”
확실히 수많은 인력과 물자들이 모여들어서 그런지 벌써 일부 체계가 잡혀있다.
특히 문명 도시와 판자촌이 오묘하게 섞인 이 풍경은 꼭 원주를 연상하게 했다.
아마 여기서도 권력을 가졌던 자, 본토에서 가지고 온 게 많은 자들이 중심을 잡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저 허름한 판자촌으로 밀려났겠지.
딱 지역 치안을 어지럽히기 좋은 슬럼가, 범죄 소굴이 될 확률이 높은 환경이었다.
“저기 같은데.”
한참 주변을 둘러보던 상식 아저씨가 저 멀리 한 허름한 선술집 하나를 발견해냈다.
마치 포차처럼 천막 대충 지은 그곳에는 수많은 일용직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아마 강릉 건설 현장에서 일하고 밤늦게 퇴근하는 일본인들이 뒤풀이를 온 모양이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안으로 끼어들어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작은 소음을 더 했다.
“여기도 한 잔.”
상식 아저씨가 어눌한 일본어로 주문하자 금세 기본 안주와 술 두 잔이 준비된다.
나는 이국적인 주변 분위기를 살피며 송판 위에 놓인 따뜻한 술을 홀짝였다.
‘물 탔네.’
술은 출처를 알 수 없는 독주에 물을 탔고 안주는 제일 싸구려 통조림 중 하나다.
하지만 이것조차 귀한 피난민들은 술기운에 의지한 채 힘든 하루를 위로하고 있었다.
“저기요.”
그렇게 한참 주변 분위기를 살피고 있는데 누군가 조용히 다가와 말을 걸어왔다.
그곳에는 머리를 짧게 친 한 일본인 여성이 무심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와타베 씨 소개로 왔는데요.”
와타베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나와 상식 아저씨는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선술집을 빠져나온 뒤 그녀와 함께 골목길로 걸어갔다.
“반갑습니다. 성함이?”
“미치코예요. 일단 약속한 돈부터 줘요.”
선금부터 달라는 말에 나는 강릉항이 발행하는 어음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이를 꼼꼼하게 살펴본 미치코는 진품이라는 걸 아는지 잠깐 두 눈을 반짝였다.
“끝나면 또 주는 거죠?”
“예.”
우리를 걱정한 와타베 씨가 이 지역에서 일하는 가이드 한 명을 소개해 줬다.
약속대로 선금을 먼저 받은 미치코는 곧 우리를 데리고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왜 그렇게 봅니까?”
그런데 그녀는 중간중간 계속 나와 상식 아저씨 얼굴을 번갈아 살펴보았다.
“수상해서요.”
“예?”
“뜬금없이 이런 일이 들어올 줄은 몰랐거든요. 혹시 통나무 장사하는 사람들은 아니죠? 아니면 강릉 시청에서 왔다거나.”
와, 시발 눈치 존나 빠르네. 전자는 모르겠는데 후자는 정말 정확하게 맞췄다.
하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이며 자연스럽게 대응해주었다.
“사업하려고 온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쓸만한 건물 하나만 찾고 돌아갈 거예요.”
“……무슨 사업이요?”
“해외 수입품이요. 강릉항에 살거든요.”
강릉항에서 발행하는 어음은 아무나 가지고 다닐 수 있는 흔한 물건이 아니다.
원래 조심성이 많은 성격인지 미치코는 몇 번 더 묻고 나서야 경계를 풀었다.
“따라오세요.”
그렇게 통성명을 마무리한 우리는 그녀를 따라 본격적으로 정착촌을 둘러봤다.
수만 명이 몰려 있는 임시 거주 지역답게 엄청난 피난민들이 몰려있는 번화가.
미치코는 그중 장사가 제일 잘 되는 상권 지역을 우리에게 소개해주기 시작했다.
“강릉 시청에서 허가받은 사람들만 건물을 임대받을 수 있어요. 대부분 각 지역에서 떨어져 나오는 불량품을 가져다 팔죠.”
“위쪽에 뇌물을 주기도 합니까?”
“아뇨. 저번에 누가 걸렸다가 추방당한 적이 있어서, 다들 시도조차 안 해요. 그쪽도 상가 얻으시려면 고생 좀 하실 걸요?”
철인 공무원 태식 씨가 버티고 있는데 직원들이 뇌물을 받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표면적으로 보이는 게 아닌 어쩌면 안쪽에서 찾아볼 수 있을지 몰랐다.
“혹시 뭐 보호비를 요구하는 야쿠자들은 없습니까? 위험하다는 소문이 조금 있던데.”
넌지시 물어보는 말에 미치코는 순간 한쪽 눈썹을 추켜 뜨며 나를 바라본다.
그 표정에는 불쾌함, 귀찮음, 동시에 쉽게 말할 수 없는 혐오감이 뒤섞여 있었다.
“……위험한 줄 알면서 여긴 왜 오셨어요? 저였으면 이딴 곳에서 장사 안 해요.”
그래, 그럴 줄 알았다. 보통 음지로 숨어든 집단이 자금을 수급하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담당 상권을 갈취하는 것이니까.
와타베가 극우 단체라고 걱정한 놈들은 조용히 뒷골목부터 장악해가고 있었다.
“이쪽이에요.”
미치코를 통해 힌트를 얻은 우리는 아무렇지 않은 척 얌전히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몰린다 싶은 곳은 전부 둘러볼 수가 있었다.
‘밤 11시.’
그쯤 되자 거리를 활보하던 사람들은 전부 자신의 거주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점점 한산해져 가는 거리, 미치코는 피곤한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북북 긁었다.
“됐죠? 보다시피 이게 끝이에요. 나머지 돈은 안 주셔도 되니까, 빨리 돌아가세요.”
그래도 양심이라는 게 있는지 겨우 이거 안내해주고 돈을 받기는 찔리는 모양이다.
나는 괜찮다는 말과 함께 미리 약속한 금액보다 더 많은 어음을 꺼내 내밀었다.
“마지막으로 한 곳만 더 봅시다.”
“어디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돌려 삼척 시내에서 한참 벗어난 피난민 판자촌을 가리켰다.
그러자 어음에서 눈을 못 떼던 미치코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며 미간을 찡그렸다.
묻고 싶은 게 많은 얼굴이다.
하지만 한몫 제대로 챙길 수 있다는 욕심에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까지만 보여드릴게요. 그 이상은 저도 위험해서 안 가요.”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미치코는 어음을 소중하게 챙긴 뒤 판자촌으로 향하는 골목으로 걸음을 옮겼다.
“따라오세요.”
서로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인 나와 상식 아저씨 또한 그 뒤를 조용히 따라갔다.
터벅, 터벅, 터벅.
가로등 하나 없는 어두운 판자촌에서는 다양한 소음과 인기척이 느껴졌다.
하지만 얇은 벽 사이로 세우고 있는 무관심은 이 겨울을 더욱 춥게 만들었다.
“피난민 중 80%는 모두 여기 산다고 보시면 돼요. 특히 저쪽은 그나마 있던 거주 지역에서도 강제로 쫓겨난 사람들이고요.”
“누가 쫓아냈습니까?”
“당신이 말했던 그런 놈들이요. 여기 판자촌에서는 그 새끼들 말이 곧 법이에요. 거역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찔려 죽는 거죠.”
미치코는 마치 감정이 죽은 사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읊조렸다.
그녀의 발걸음은 분명 ‘그쪽’이라 말하는 허름한 판자촌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쯤 되면 보일 법도 한데?
우리는 피부를 간지럽히는 묘한 감각을 느끼며 골목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여기까지예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골목 사이로 걸어가던 미치코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아까 약속한 대로 집 근처까지 안내해주겠다고 하더니 벌써 도착한 모양이다.
“당신들 사업하는 사람들 아니죠?”
“……뭐, 그렇다고 칩시다.”
“무슨 짓 하려고 왔는지는 모르겠는데 다음부터는 절대 오지 마세요. 어차피 강릉 시장 그 사람도 여기에 관심 없고, 와타베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물러날 거니까요.”
“신고하실 생각은 없으세요?”
“덜떨어진 소리 하지 마요, 아저씨. 신고한다고 해서 누가 도와주기라도 해요? 그 새끼들 일본에서도 지역 실세였어요. 오래 살고 싶으면 그냥 입 닥치고 계세요.”
지독한 인간 불신이 느껴진다. 아니, 미치코는 이미 속까지 모두 문드러져 있었다.
내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그녀는 곧 고개를 꾸벅 숙이며 집으로 돌아갔다.
“생각보다 심각한가 봐.”
“예. 계속 두면 큰일 나겠네요.”
이건 동정이라는 감정적 영역을 넘어 지역 슬럼화를 만드는 불씨가 될 수 있다.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에 동의한 우리는 발걸음을 돌려 판자촌 부근을 걸었다.
“더 보다 갈까?”
“상가 좀 살펴보다가 정각 넘어서 다시 와보죠. 삼단봉이랑 방검복 챙겼죠?”
“응, 지금 입고 있어.”
혹시 모르니 방검복도 입고 순찰대도 근처에서 대기하라고 지시해두었다.
나는 점차 드러나는 놈들의 꼬리를 찾기 위해 다시 시내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콰직!
쾅!
그런데 그 순간 저 아래 판자촌에서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음과 함께 비명을 들려왔다.
꺄아아악아악!
놔, 놔! 놓으라고 이 개새끼들아!
“- - - - - -!!”
익숙한 목소리다.
나와 상식 아저씨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미치코의 집으로 재빨리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