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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의 상속자-122화 (122/180)

122화

새벽에 있었던 소란은 아침 라디오 방송을 통해 영동 지방 전역으로 알려졌다.

물론 출근하던 강릉 사람들은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며 쉽게 넘기는 분위기였고,

다른 지역 또한 별다른 감흥 없이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뉴스로 하루를 시작했다.

‘야쿠자 조직 토벌!’

하지만 일본 피난민들이 모여 사는 삼척 지역만큼은 정말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그동안 수탈과 핍박에 시달렸던 정착촌 주민들이 드디어 놈들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거리로 나와 방위군과 순찰대를 반겨주었다.

“감사합니다!”

“고마워요! 정말로 고마워요!”

이렇게 환영받을 줄 누가 예상이나 하고 있었을까, 그냥 임무라는 말만 듣고 파견되었던 방위군은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병사들은 그들이 보내주는 환호에 손을 흔들어 화답해주었다.

일하면 받는 월급을 넘어 이러한 존중은 그들을 움직이는 진정한 원동력이었다.

그날, 수줍게 볼 뽀뽀를 받는 한 방위군 병사의 사진이 강릉 신문 1면을 장식함으로써 이번 일은 더욱 화제가 되었다.

지금이 기회다.

전투 현장을 빠르게 정리한 나는 중구난방이었던 정착촌 체제부터 손을 댔다.

‘관리 사무소 신설.’

일단 폭발로 쑥대밭이 된 시청을 허물고 그 옆 별관에 관리 사무소를 새로 만들었다.

그동안 비어있던 삼척 지역 행정은 이제 우리 직원들이 출퇴근하며 맡을 예정이다.

거기다 현지 사정을 가장 잘 아는 일부 주민들을 인턴으로 새로 뽑은 것은 물론,

정착촌 대표를 선발해 일부 자치권을 허용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역 인구는 곧 노동력과 군사력, 또 그 집단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척도.

강릉은 이번 일을 통해 거의 수만 명이 넘는 인구를 고스란히 흡수할 수 있었으며

일본 정착민들은 드디어 연합으로 편입되어 정식적인 대우받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첫 번째 대표로 뽑힌 와타베 씨와 악수하며 그렇게 일정을 마무리했다.

‘말할래, 할복할래?’

물론 그 시각 본부 수용소에서는 순찰대가 강도 높은 조사와 심문을 이어가며 잡혀 온 야쿠자 새끼들을 탈탈 털어대고 있었다.

이번 총기 난동을 통해 놈들의 배후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다 말하겠습니다! 자수할게요!’

실제로 범죄자 처형까지 이뤄지고 있는 강릉인데 놈들이 버틸 재간이 있을까.

진짜 사형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주자 야마구치는 결국 먼저 실토해버리고 말았다.

물론 이 내용은 기밀로 붙여져 현장을 직접 찾아온 상식 아저씨를 통해 전달되었다.

“배후가 저기 본토에 있었나 봐.”

“일본이요?”

“응. 한반도로 넘어온 야쿠자 조직하고 주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고 있더라고. 야마구치랑 이 새끼들도 거기서 지령받고 움직이는 야쿠자 조직 중 하나여.”

“목적이 뭔지는 밝혀냈습니까?”

“삼척 지역과 항구를 장악하라는 지령이 마지막이었다고 하더라, 압수한 증거와 대조해보니 날짜도 대충 엇비슷하고 말이여.”

이런 시발, 그냥 극우 세력이랑 얽힌 단순한 야쿠자 조직인 줄 알고 있었는데,

설마 전쟁이 한창인 일본 정치권과 연관되어 있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부산 때도 그러더니 이 음흉한 섬나라 새끼들은 조금만 틈을 줘도 이딴 짓을 벌일까.

아마 성공하면 좋고, 실패하면 버리는 카드로 야마구치를 보냈을 확률이 높았다.

나는 몰려오는 짜증을 가까스로 참으며 상식 아저씨와 함께 차량에 탑승했다.

“당분간 외곽지역 순찰에 집중해주세요.”

“또 야근 시작이구먼.”

그나마 난민이 적게 유입된 강릉에서도 이 지랄을 하는데 규모가 큰 부산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나는 강릉으로 돌아가는 길, 이솔하와 김태하 소장에게 문자를 한 통씩 보내며 최대한 빠르게 연락을 달라고 말했다.

부우우우웅 - - -!!

그사이 나와 상식 아저씨를 태운 낡은 승합차는 천천히 삼척 시내를 빠져나가려 했다.

끼이이익!

그런데 그 순간 운전대를 잡고 있던 아저씨가 깜짝 놀라며 황급히 차를 멈춰 세웠다.

무슨 일인가 싶어 앞을 바라보니 한 익숙한 얼굴의 여성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미치코?”

찬바람이 쌩쌩 불어오는 이 추운 날, 왜 길가 옆에서 저러고 서 있었던 걸까.

내가 창문을 내리자 미치코는 손을 입김으로 후후 녹이며 빵모자를 벗었다.

“돌아가시는 거예요?”

“네, 이제 슬슬 돌아가려고요.”

“이제 가이드는 필요 없겠죠?”

“하하, 아뇨. 다음에도 또 부탁할게요.”

추위 때문일까, 아니면 부끄러움 때문일까. 늘 무뚝뚝하던 미치코의 양쪽 볼은 마치 화장을 한듯 붉게 물들어 있었다.

“선물이에요.”

바닥에 쌓인 눈을 툭툭 찬 그녀는 주머니에서 장식품 하나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그 장식품은 다름 아닌 일본인들이 가지고 다니는 조그마한 부적 중 하나였다

“건강을 기원하는 부적이에요. 어머니가 떠나시기 전에 남겨두고 가셨어요.”

어머니가 가지고 있던 유품이라면 백만금을 줘도 바꾸지 않을 귀한 물건이다.

하지만 미치코는 내게 기꺼이 유품을 넘기며 처음으로 환하게 웃기 시작했다.

“저한테는 이제 필요 없는 물건 같아서요. 시장님이 가지고 계셨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유품을…….”

“저는 이제 위험한 일 따위는 안 할 거거든요. 어머니도 아마 더 좋아하실 거예요.”

잠깐, 이제 위험한 일을 안 한다고? 나는 깜짝 놀라 미치코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자 그녀는 내게 꼬질꼬질한 명함 하나를 내밀며 콧물을 킁 훌쩍였다.

“그동안 모은 돈으로 상가를 빌렸어요. 다음에는 꼭 우동 한 그릇 드시고 가세요.”

무겁고 비참했던 악몽에서 벗어나 드디어 행복하고 평범한 삶을 살게 되었다.

“시장님 덕분이에요.”

미치코는 결국 참고 있던 눈물을 줄줄 흘리며 우리를 향해 고개를 푹 숙였다.

“감사합니다. 두 분이 주신 도움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저! 꼭, 꼭 열심히 살게요.”

아무도 믿지 않았다. 어머니를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우는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 하루만큼은 억지로 써야 했던 가면을 벗고 진심 어린 눈물을 흘렸다.

“……잘 지내요, 미치코.”

나는 특별한 의미가 담긴 부적을 소중히 챙긴 뒤 마지막으로 미치코와 손을 붙잡았다.

언제 다시 만날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부디 평범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원했다.

부르릉.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끝낸 우리는 다시 도로를 달려 삼척 시내를 빠져나왔다.

미치코는 우리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드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평생 삶이라는 겨울에서 살았던 그녀에게도 드디어 따뜻한 봄이 찾아오고 있었다.

눈이 꽃처럼 내린다.

* * *

[안녕하세요, 청취자 여러분! 오늘도 반가운 아침과 함께 찾아온 희망 FM 이하나입니다!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면서 월동준비로 한창 바쁘시죠? 청취자 여러분 모두 꼼꼼하게 준비하셔서 올해 겨울은 아무런 탈 없이 지내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아, 맞다! 겨울 동안 무료 급식소와 구호소가 운영될 예정이니, 도움이 필요하신 분들은 언제든지 강릉 시청을 찾아주세요. 그럼 오늘의 희망 FM은 연말 분위기와 어울리는 크리스마스 캐럴로 시작해보겠습니다!]

희망 라디오 진행자이자 이제 아파트 방송국 총책임자가 된 이하나의 발랄한 목소리와 함께 강릉은 아침을 시작했다.

그리고 늘 습관처럼 라디오를 듣던 나는 흥얼흥얼 커피를 타 집무실로 들어갔다.

“오셨어요?”

하지만 내부에는 이미 엠마가 세상 편한 자세로 앉아 땅콩을 주워 먹고 있었다.

“여기가 당신 안방입니까?”

“에이, 야근하느라 그래요.”

아니, 새로 산 간식통은 숨겨놨는데 그새 찾아서 입에 꾸역꾸역 처넣고 있네?

나는 간식통을 냅다 뺏어 엠마의 손이 닿지 않는 찬장 위에 올려두었다.

“쳇.”

그러자 아쉽다는 얼굴로 입맛을 쩝쩝 다신 엠마가 자세를 바로 하며 서류를 꺼냈다.

그 서류에는 내가 부탁한 첩보 정보들이 최소한의 검열과 함께 전부 적혀있었다.

“범석 씨 예상이 맞았어요. 한반도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이런 짓을 하고 있었네요. 아마 대규모 이주할 땅들을 구하고 있는 것 같은데 수법이 조금 더러워요.”

“우리가 만만하게 보였나 봅니다.”

“그래도 자위대 병력이 아직 남아있으니까요. 여차하면 무력으로 점거하거나, 나중에 협상해서 땅을 뺏어올 수도 있잖아요?”

마지막 안전지대인 홋카이도마저 무너지면 이제 일본이라는 나라는 완전히 끝이다.

일본 정부는 그나마 여력이 남아있을 때 나라 자체를 옮길 땅을 찾으려 하고 있었다.

그중 국가 자체가 없는 한반도는 일본이 충분히 침을 흘릴만한 좋은 땅이었다.

시발, 자기들 본토나 신경 쓰지. 욕설을 읊조린 나는 엠마를 향해 재차 물었다.

“후지산 군락은요?”

“점점 더 커지고 있어요. 아니, 이젠 후지산 전체가 군락 둥지라고 봐도 되겠죠.”

후지산 군락은 감염체가 관측된 이후로 가장 거대한 상위 군락으로 보고 있다.

거기다 수백만 명이 넘는 사상자까지 발생시켰으니 그 규모는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아직도 전술핵은 반대랍니까?”

“지금 쓰기에는 늦었어요. 놈이 둥지를 깊숙이 파기 전에 소거했어야 했는데, 일본에서 반대했잖아요? 후지산이 아직 활화산이라는 걸 모르고 있었던 등신들 때문이죠.”

현재도 간헐적인 지진이 발생 중인데 핵을 쐈다가는 어떤 현상이 벌어질지 모른다.

초동 조치에 실패한 일본은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외통수에 걸려버렸다.

올해는 버틸 수 있을까?

이미 수만 명을 수용하는 것도 벅찬데 피난민이 더 몰려온다면 진짜 답이 없다.

거기다 일본 정부까지 저 지랄을 하고 있으니 아주 머리가 아파 돌아가실 것 같았다.

“다른 이야기 할까요?”

“……예. 그러죠.”

내가 표정이 좋지 않자, 엠마는 눈치껏 서류를 치우며 화제를 전환했다.

“저번에 말씀하신 달러 건 있잖아요? 어젯밤 위쪽에서 긍정적인 답변이 왔어요.”

“벌써요?”

“최대한 편의를 봐준다고 했으니까요. 일단 위쪽에서 검토해보고, 아마 12월 전에 결정이 날 거예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진짜 같은 달러를 쓰게 되실지도 모르겠네요.”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차에 그나마 희소식이 전해지니 기분이 조금 풀린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조금 전 치워두었던 간식통을 다시 엠마에게 건넸다.

하는 짓이 얄밉기는 해도 이렇게 일 처리가 확실한 외부 인사는 찾기 힘들다.

“드세요.”

나는 늘 자기 일처럼 나서주는 엠마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기꺼이 땅콩을 베풀었다.

그러자 한참 햄스터처럼 땅콩을 주워 먹던 엠마가 조심스럽게 나를 올려다봤다.

“범석 씨.”

“네?”

“혹시 오늘 시간 있어요?”

시간이라. 삼척 일도 대충 끝내고 화폐 건도 마무리했으니 어느 정도 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엠마는 두 눈을 반짝이며 입에 남은 땅콩을 급히 삼켰다.

“대관령 양떼 목장이라고 아세요?”

“네, 알죠.”

“거기에 있던 사육사가 가을부터 다시 양을 키우기 시작했더라고요. 제가 양을 진짜 좋아하거든요? 혹시 시간 나시면 저랑…….”

똑똑.

“시장님, 접니다.”

그런데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태식 씨가 집무실 문을 노크하며 들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서울에서 사업체를 운영하시는 분이 시청으로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만나 뵙고 싶으시다는데, 혹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보통 사업체를 운영하는 손님들은 비즈니스와 관련된 목적으로 오는 게 대부분이다.

누군지는 몰라도 강릉으로 공장이나 물류 창고가 들어오는 건 언제나 환영이었다.

“예, 금방 갈게요.”

그렇게 면담 자리를 위해 나가려는데 엠마가 태식 씨를 매섭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왜 그러십니까?”

“………….”

“제, 제가 뭐 잘못했습니까?”

나는 잔뜩 삐진 엠마와 졸지에 화풀이 대상이 된 태식 씨를 내버려 두고 나왔다.

강릉은 오늘도 평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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