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덜컹!
끼익.
미리 준비된 방 안으로 들어서자 양복을 입은 남녀 둘이 기다렸다는 듯 일어났다.
나는 그들에게 편히 앉으라는 제스처를 취한 뒤 커피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탁.
한 명은 안경을 쓴 30대 여성, 또 다른 한 명은 나이가 지긋한 60대 남성이다.
빠른 속도로 그들을 스캔한 나는 여유롭게 자리에 앉아 먼저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서울에서 오셨다고요?”
“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박범석 시장님. 저는 오산 하이테크에서 파견된 이나영 팀장, 이분은 박길영 고문이십니다.”
오산 하이테크에서 왔다고? 순간 두 귀를 의심한 나는 조용히 미간을 찡그렸다.
하지만 명함을 받아보니 뭐 어디 하청이나 계열사가 아닌 진짜 오산 하이테크.
그것도 미래 전략 개발부라는 중추이자 심장에서 직접 팀장과 고문을 보내왔다.
‘이건 예상 못했는데.’
오산 하이테크는 과거 대전쟁에서 살아남은 기업 중 하나이자 현재는 화학, 섬유, 방위산업을 주 사업으로 삼고 있는 계열사다.
물론 지금은 전체적인 사업 규모가 줄어들어 옛 성세를 잃어버린 지 오래지만,
경제 기반이 무너진 한반도에서 그나마 버티고 있는 기업 중 가장 건실한 곳이다.
특히 지난 정권과 손을 잡으며 10년인 넘게 방위산업을 독점하다시피 했는데,
이번에는 그 누구보다 빨리 이솔하와 손을 잡으며 다른 배로 옮겨 탄 것으로 유명했다.
나쁘게 말하면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박쥐, 좋게 말하면 타고난 사업가들이다.
내가 아무런 말이 없자 자신을 이나영 팀장이라 소개한 여성이 공손히 고개 숙였다.
“미리 연락드리지 못한 점,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희 오산 하이테크는 그동안 시장님 행적을 따라가며……….”
“본론부터 시작합시다. 비즈니스입니까?”
가뜩이나 바쁜 시간대다. 미사여구는 필요 없으니 빨리 용건부터 꺼내줬으면 좋겠다.
이는 오산 쪽도 마찬가지인지 이나영 팀장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본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서로 간 이득이 되는 제안을 하고자 찾아왔습니다.”
“제안이요?”
“예. 정확히는 협약입니다.”
거기까지 말한 이나영 팀장은 가지고 온 가방에서 태블릿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편집된 동영상 하나를 재생하며 내 쪽으로 화면을 돌렸다.
끼이이익!
10초짜리 짧은 동영상이다.
태블릿 화면에는 우리가 미국 본토에서 벌인 액션캠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고,
그중 진화형 군락과 감염체를 상대하는 확산형 폭탄이 면밀하게 분석되어 있었다.
이 동영상은 또 어디서 구한 거래?
조용히 물건이나 파는 줄 알았더니 지구 반대편에서 다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미국 방위산업체에서 공동으로 개발한 확산형 폭탄입니다. 감염체와 군락을 상대하는데 탁월한 효과를 보이는 최신 장비죠.”
확산형 폭탄의 위력은 현장을 직접 뛰어본 나와 강릉 특전 대원들이 더 잘 알고 있다.
치료제 물질로 만든 확산형 폭탄은 현장에서 정말 압도적인 위력을 보여주었다.
삑.
동영상이 끝나자 이나영 팀장은 사진 여러 장을 보여주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물론 이게 끝이 아닙니다. 현재 미국은 감염체 치료제를 기반으로 새로운 무기를 계속 개발 중입니다. 그중 반절은 이미 실험이 끝났고 현장 검증을 대기 중입니다.”
“빠르네요.”
“시장님이 군락과 항체를 제공해주심에 따라 무기 개발에 탄력이 붙었습니다. 아마 향후 벌어질 전쟁은 이러한 신무기가 승패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될 겁니다.”
조그마한 확산형 폭탄도 저만한 위력을 보이고 있는데, 만약 대규모 방역 능력을 갖춘 화학 무기라도 만든다면 어떻게 될까.
그녀의 말대로 향후 대 감염체 전쟁은 기술력을 갖춘 미국이 주도할지도 몰랐다.
“저희 오산 하이테크도 이러한 변화에 맞춰 여러 가지 대책을 마련하는 중입니다. 하지만 시장님도 아시다시피 저희가 미국을 따라잡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죠.”
“그래서 저를 찾아온 겁니까?”
“네. 현재 유럽과 호주 쪽에서 오퍼가 계속 들어가고 있다는 걸 들었습니다. 저희도 늦지 않게 기술 협약을 약속받아야 합니다. 시장님 도움이 절실한 상황입니다.”
유럽과 호주 기업들과 비교하면 오산 하이테크는 네임벨류가 너무 떨어진다.
그렇기에 미국과 긴밀한 사이인 내게 부탁해 어떻게든 줄을 대려고 하는 모양이다.
“부탁드립니다.”
동아줄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찾아온 이나영 팀장은 고개를 숙이며 부탁했다.
나는 잠시 무거운 침묵을 지키며 이미 식어버린 커피믹스를 조용히 홀짝였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긴 해.’
다른 국가라면 모를까, 그래도 같은 한반도에 속해 있는 국내 방위산업체다.
그들이 기술 협약을 받아 새로운 무기를 개발한다면 강릉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제안서 좀 봅시다.”
“네!”
그제야 얼굴이 환해진 이나영 팀장이 허겁지겁 태블릿을 조작해 내게 내밀었다.
나는 밖에서 대기 중인 태식 씨를 불러 함께 기술 협약 제안서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와 태식 씨의 얼굴은 점점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결국, 참다못한 나는 결국 태블릿을 던지듯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짜증을 냈다.
“뭐 하자는 겁니까, 지금?”
“예?”
말이 좋아 기술 협약이지 사실상 납작 엎드려 미국의 도움을 구하는 게 현실이다.
기술 이전은 물론이고 적어도 저쪽이 고개를 끄덕일 대가 정도는 넘겨줘야 했다.
“지금 저랑 장난합니까?”
하지만 오산 하이테크는 거의 날강도와 다름없는 제안을 들이밀려고 했다.
뭐? 내게 부탁하고자 왔다고? 의도가 너무 뻔히 보여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네.
단순한 협력 요청인 줄 알았더니 호구 하나 물어서 어떻게 해보려던 개수작이었다.
“무, 무슨 문제가 있으신지…….”
“당신이 직접 보세요.”
내가 태블릿을 두드리자 이나영 팀장은 그제야 제안서를 다시 확인해보았다.
그리고 곧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리며 함께 온 박길영 고문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박길영 고문님!”
같은 회사에서 나온 줄 알았더니 제안서 내용을 다르게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크흠!
여태 입을 다물고 있던 박길영 고문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크게 헛기침했다.
“일부 항목에서 잠시 조정이 있었고 이게 저희 측에서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이게 최선이라고요?”
“그만큼 회사 사정이 좋지 않습니다. 정부에서 지원한 개발비를 제외하면 사실상 운용할 수 있는 자금과 물자가 없습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박길영의 말이 진짜가 아니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하지만 그가 마지막으로 한 호소는 이 모든 생각을 뒤바꿔버리기 충분했다.
“미국과의 기술 협약은 앞으로 한반도의 미래를 위한 중요한 사업입니다. 국민들을 위해서라도 두 팔 걷어 나서주십시오. 회사가 아닌 개인으로서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아니, 그게 지금 무슨……!”
뻔뻔하기 그지없는 말에 이나영 팀장은 할 말을 잃었는지 얼굴을 붉게 붉혔다.
설마 오산 하이테크에서 이러한 제안을 해올 줄은 상상조차 못 한 모양이다.
마찬가지로 어이가 사라져버린 나는 고개를 푹 숙인 박길영 고문을 향해 물었다.
“군 출신이십니까?”
“아! 역시 알아보시는군요. 생도 시절부터 반평생 군에 몸담았습니다. 지금은 시장님처럼 시민을 위해 부단히 노력 중이지요.”
없어진 대한민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산에서 지급하는 월급과 성과급 때문이 아닐까.
드디어 관심을 받은 박길영 고문은 금세 표정이 풀어지며 호탕하게 웃었다.
처음부터 군 출신이라는 공통점을 이용하기 위해 함께 파견된 게 눈에 훤했다.
하하!
웃음소리가 거슬린다.
그 순간 나는 껄껄 웃고 있는 박길영 고문을 향해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해주었다.
“참 한결같네요.”
“예?”
“당신이 말하는 그 대단한 애국심 말입니다. 참 예나 지금이나 듣기 좆같습니다.”
“시, 시장님?”
“도대체 왜 변하는 게 없습니까? 그렇게 싼 값으로 팔아먹고도 성에 안 차요?”
욕설이 섞인 경고 앞에 이나영 팀장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체념하며 고개 숙였다.
물론 아직도 사리 분별이 안 되는 박길영 고문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제안은 거절하겠습니다. 협약이고 나발이고 당신들끼리 열심히 애국하십시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경고와 함께 밖으로 나가는 문을 가리켰다.
“나가주십시오.”
그곳에는 이미 권총으로 무장한 순찰대가 손님이 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철컥!
그 위협적인 모습에 무언가를 말하려던 박길영 고문은 꿀 먹은 벙어리가 돼버렸다.
얼굴이 초췌해진 이나영 팀장은 내게 고개를 꾸벅 숙인 뒤 밖으로 나갔다.
“……죄송합니다, 시장님.”
그러자 박길영 고문 또한 순찰대에게 반쯤 끌려가다시피 문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덜컹!
문이 닫히자 접견실이 조용해진다.
나는 몰려오는 두통을 느끼며 실내에선 자제하고 있던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러자 태식 씨가 말없이 창문을 열어주고 따뜻한 물 한잔을 가져다주었다.
“괜찮으십니까?”
“네. 곧 있으면 괜찮아질 겁니다.”
머리가 아플 때마다 피웠던 이 담배가 그날의 기억을 다시금 떠올리게 만든다.
하지만 나는 그 기억이 사라질 때까지 피우고 또 피우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름 없이 죽어간 이들, 시체조차 찾지 못했던 전우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라고,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 * *
슬슬 겨울나기에 들어간 강릉과는 달리 한반도는 한 가지 주제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다름 아닌 이솔하가 꿈꾸던 한반도 통합이 드디어 실체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로 뭉쳐야 할 때.’
그동안 벌어진 숱한 사건과 갑작스러운 일본의 패망이 원인이라도 된 것일까.
당최 내년 예정이었던 충청권이 먼저 주민 투표를 열어 합류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조용히 눈치만을 보던 호남권 또한 하나둘 참석해 본격적인 합의에 들어갔다.
이러한 소식이 한반도 전역으로 퍼져나가자 사람들은 하나둘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이솔하는 그 즉시 대국민 담화를 열어 대통령으로서 두 번째 데뷔전을 알렸다.
“하나 된 뜻! 하나 된 대한민국!”
타고난 능변가답게 그녀의 연설은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알 수 없는 힘이 있었다.
그동안 한반도라는 울타리 안에 묶여 있던 사람들은 드디어 10년 전을 떠올렸다.
이 한반도 위에 국가라는 게 존재했을 때, 그리고 평화라는 달콤한 과실을 말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요새 단위로 묶여 있던 이 땅에는 새로운 기류가 불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기류에는 이솔하의 등을 밀어주는 순풍만이 존재하는 건 아니었다.
‘강릉 요새 연합.’
서울로 시선이 몰리는 것과 반대로 강릉에도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고 있었다.
그 원인은 다름 아닌 강릉 시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전쟁 영웅 박범석 때문이었다.
‘그 또한 지도자다.’
강릉을 수복하고 지역을 통합했으며 수많은 적을 몰아낸 것도 모자라 아무런 대가 없이 백신을 한반도로 들여오게 해주었다.
단순한 실적으로만 따지면 이솔하는 박범석의 뒤를 절대로 따라올 수가 없었다.
둘 중 누가 더 평화에 기여했는가?
서울이 한반도를 통할 수 있다면 강릉 또한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는 게 아닌가?
이에 의구심을 가지던 통합 속 분열의 시작은 저 멀리 포항에서부터 꿈틀거렸다.
[합류하고 싶습니다.]
지난번 전쟁을 통해 강릉과 친구가 된 포항 시장이 핫라인을 통해 연락을 보내왔다.
서울로 통합될 줄 알았던 포항 요새가 노선을 바꿔 강릉에 합류 의사를 밝힌 것이다.
이는 강행이나 억지가 아닌 주민 투표를 통해 모든 이들의 동의로 결정된 사항.
순조롭게 진행될 줄 알았던 한반도 대통합에는 기어코 급제동이 걸리고 말았다.
‘오산 하이테크! 미국과 협상 결렬!’
때마침 그날 서울 언론에는 박범석이 오산 하이테크의 협약 제안을 거절했다는 소식이 뉴스와 신문을 통해 멀리 퍼져나갔다.
겨울과 함께 찾아온 긴장된 기류.
한반도 정세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