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의 상속자-125화 (125/180)

125화

표정이 초췌한 이솔하는 주머니에서 위성 전화기를 꺼내 통화목록을 뒤졌다.

‘박범석.’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는데도 그는 걱정도 안 되는지 전화, 문자 한 통조차 없었다.

아니, 걱정하는 건 도리어 자신인가.

하루에도 수십 번 먼저 연락할까 고민하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쉽지만은 않다.

그나마 남아있는 자존심과 그를 향한 존경심이 수시로 부딪히고 있는 기분이다.

복잡한 감정을 느낀 이솔하는 입술을 꽉 깨물며 그에게 문자라도 보내려고 했다.

“각하.”

그런데 그 순간 듣기 거북한 목소리가 전송 버튼을 누르려는 손가락을 제지했다.

맞은편 자리에는 금테 안경을 쓴 남성이 자신을 건조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십니까?”

비서실장 엄석현. 대학을 갓 졸업한 시절부터 함께했던 죽마고우이자 정치 파트너다.

이 자리에 올라오기까지 혁혁한 공을 세웠던 그는 이젠 어엿한 비서실장이 되었다.

“집중 좀 해주십시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엄석현은 친구가 아닌 단순한 정치 파트너로 변했고,

점차 자신의 신념과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하더니 지금에 와서는 성가신 걸림돌이 돼버렸다.

특히 김태하 소장이 쓰러지고 나서는 아예 노골적으로 야욕을 드러내고 있었다.

‘곤란해.’

그동안 이솔하가 쌓아온 정치 기반은 이 엄석현이라는 존재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불안한 시국, 그를 쳐낸다는 건 자기 살을 도려내겠다는 뜻과 다름이 없는 것.

적어도 김태하 소장이 돌아와 새로운 내각을 꾸릴 때까지는 참고 있어야 했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간신히 숨기며 수석비서관들을 향해 물었다.

“그래서, 어디까지 이야기했죠?”

“강릉 건에 대해 회의 중이었습니다.”

“……그건 제가 대화로 풀어보겠다고 재차 말씀드렸을 텐데요. 또 잊으셨나요?”

이 모든 게 오해가 비롯된 일이라는 걸 아는 이솔하는 끝까지 대화로 해결하려 했다.

하지만 엄석현은 쓰고 있던 금테 안경을 추켜올리며 회의 분위기를 악화시켰다.

“박범석은 한반도 통합을 방해하는 불안 요소입니다. 또, 언제든 서울을 공격해 시민을 위협에 빠트릴 수 있는 과격분자죠. 정말 대화라는 게 통하리라 생각하십니까.”

“그동안 아무 문제없이 외교 해 왔고, 단 한 번도 위협을 끼친 적이 없습니다.”

“각하께서 왜 계속 독재자를 옹호하려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듣자 하니 시장 선거를 위한 주민투표도 거절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쭉 그래왔다고 해서 앞으로 그러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결단을 내리셔서 싹을 잘라내야 합니다.”

엄석현의 입에서 기어코 싹을 잘라야 한다는 과격한 발언까지 나오고 말았다.

수석비서관들은 이에 동의한다는 듯 입을 꾹 다문 채 침묵을 지켰다.

참으로 이기적인 자들, 단 한 번이라도 그의 행보를 이해하려고 해봤을까.

박범석을 옆에서 지켜보고 그동안 수많은 도움을 받아왔던 이솔하는 치가 떨렸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 이를 억제하는 것뿐이었다.

“군이 움직이는 일은 없을 겁니다. 오늘 회의는 이만하고 각자 자리로 돌아가세요.”

이솔하는 단호하게 상황을 정리한 뒤 의자를 박차고 회의실을 나와 버렸다.

그러자 엄석현이 그 뒤를 바짝 따라붙어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조용히 속삭였다

“언제까지 이럴 거야?”

회의가 끝난 지금만이 친구 대 친구로 대화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다.

“뭘.”

“여론이 좋지 않다는 거 너도 알잖아.”

그 모습이 참으로 가증스럽다고 느낀 이솔하는 걸음을 멈춘 채 엄석현을 노려봤다.

“네가 멋대로 만져댄 건 아니고?”

오산 하이테크와 엄석현 간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어차피 이해관계로 뭉친 놈들이 계속 대의를 울부짖는 게 참으로 역겨웠다.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었어. 사람들이 불안전한 통합을 원하고 있을 것 같아?”

“뻔뻔한 새끼.”

“김태하가 돌아오면 이젠 정말 끝이야. 잘 생각해보고 이번 달 내로 같이 결정하자.”

금테 안경을 추켜올린 엄석현은 그렇게 자리에서 멀어져 어두운 복도로 걸어갔다.

그의 등에선 세상을 바꾸겠다는 순수한 청년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하.

이솔하는 쥐고 있던 주먹을 부들부들 떨다 결국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삐리리리리!

그런데 그 순간 주머니 속에 넣어둔 위성 전화기가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예? 뭐라고요!?”

전화를 받은 이솔하는 곧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어딘가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상위 군락의 등장.

통합이냐, 분열이냐로 시끄럽던 서울 요새에는 감히 막을 수 없는 혼란이 도래했다.

* * *

“어서 오십시오, 시장님.”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우리가 보낸 호화 전세기를 타고 포항 시장이 직접 양양 공항을 찾아왔다.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던 나는 그를 직접 맞이하며 두 손을 꾹 마주 잡았다.

강릉 연합과 합류하겠다는 의사 타진 이후, 기어코 여기까지 찾아온 포항 시장.

물론 공식적인 초청은 아니지만, 그는 나를 만나 무척이나 기뻐하는 눈치였다.

“같이 가시죠.”

“네. 그럽시다.”

일단 자리를 옮겨야 했기에 미리 준비한 리무진으로 귀빈들을 안내했다.

나와 뒷자리에 나란히 앉은 포항 시장은 그제야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괜찮으십니까?”

“비행기는 오랜만이라 긴장한 모양입니다. 설마 전세기를 보내주실 줄이야…….”

“귀빈을 모시는데 이 정도는 해야죠. 제가 직접 가지 못해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아뇨. 그동안 보내주신 중장비와 구원 물자만 해도 충분합니다! 포항 시민들을 대신해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시장님.”

강릉은 인도적인 차원에서 쓰지 않는 중장비와 물자를 포항에 꾸준히 지원해주었다.

덕분에 감염체 사태로 무역항이 파괴되었던 포항은 요새를 급히 재건할 수 있었고,

겨울나기를 위한 물자를 비축함과 동시에 항구 또한 어느 정도 복구할 수 있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포항이 무너지면 가뜩이나 상황이 좋지 않은 경상권 요새들도 큰 피해를 본다.

정치적인 의도로, 또 대국적인 관점에서 이를 우려했던 나는 마찬가지로 안심했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안부를 나눈 우리는 드디어 본론으로 들어갔다.

“저희 쪽으로 합류하길 원하신다고요.”

“예. 저뿐만이 아니라 90%가 넘는 주민들이 모두 동의했습니다. 저희 포항은 대한민국이 아닌 강릉 연합 아래 있길 원합니다.”

주민투표 90%, 이 정도면 대부분 사람이 동의를 표했다고 봐도 좋은 정도다.

하지만 문제는 얼마나 동의했냐가 아닌 사람들이 왜 이런 선택을 했느냐였다.

“솔직한 생각을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강릉이 지난번 큰 도움을 드린 건 사실이지만, 겨우 그 이유만은 아닌 것 같아서요.”

“……따로 들으신 게 있으신가요?”

“아뇨,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짐작만 하고 있습니다. 혹시 제 생각이 맞습니까?”

콕 찍어서 묻는 말에 포항 시장은 피곤한 얼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과 외교적으로 마찰이 있었습니다.”

“마찰이요?”

“네. 지난 사태 이후, 비공식적으로 서울 쪽에서 찾아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때 조금 껄끄러운 일이 있었습니다.”

“껄끄러운 일이라면…….”

“예. 한반도 통합 건 말입니다. 대뜸 찾아와서는 올겨울이 지나기 전까지 알아서 협조하라고 하더군요. 협박만 안 했다 뿐이지 사실상 일방적인 통보에 더 가까웠습니다.”

“이솔하가 직접 찾아왔나요?”

“아뇨, 비서실장이라는 사람이 왔습니다.”

대통령 비서실장, 이솔하는 물론 김태하 소장에게서도 들어본 적 없는 인물이다.

하지만 포항 시장 얼굴에 분노가 느껴지는 것을 보아 어떤 인물인지 짐작이 갔다.

“포항 요새를 우습게 본 겁니다. 당장 무역항마저 잃어버린 상황에서 서울의 지원 없이는 살아남지 못할 테니까요. 만약 시장님께서 물자를 보내주지 않으셨다면…….”

마침 포항의 상황도 좋지 않겠다, 지원을 빌미 삼아 안건을 밀어붙이려 한 건가.

비서실장이라는 새끼가 누군지는 몰라도 사람 목숨을 두고 장난질하고 있었다.

“다른 요새는 이 사실을 모릅니까?”

“왜 충청과 호남권 요새들만 합류 의사를 밝혔겠습니까? 연락만 안 해 왔다 뿐이지 사정이 좋지 않은 건 다른 경상권 요새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박 시장님, 그들도 도움이 필요합니다. 부디 내치지 말아주십시오.”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은 주저하지 말라는 김태하 소장의 말이었다.

어쩌면 그는 이러한 상황을 예견하고 내게 그러한 말을 했던 걸지도 몰랐다.

싸움을 멈추지 마.

이상한 잠꼬대인 줄 알았던 그 한마디 말이 내 어깨를 강하게 짓누르고 있다.

“그쪽…….”

“예?”

“그쪽 지도자들과 자리를 주선해주십시오.”

평생 이딴 일에는 휘말리지 말아야지, 나서지 말아야지 다짐하면서 살았다.

하지만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왔고, 또 떨쳐내기에는 너무나 많은 짐이 있었다.

“지원이 필요하다면 돕겠습니다.”

“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시장님!”

불완전한 통합은 이뤄봐야 의미 없다. 찢어지더라도 안전한 분열이 유지돼야 한다.

기나긴 고민 끝에 마음을 굳힌 나는 속에서 우러나오는 깊은숨을 훅 내쉬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일단 들어가서 하죠.”

마침 시청에 도착했겠다, 자세한 이야기는 집무실에 들어가서 해도 충분했다.

나는 안도하는 포항 시장과 함께 환영식이 준비된 시청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웅성웅성.

“음?”

하지만 한참 환영식을 준비하고 있어야 할 시청 내부는 무척이나 시끄러웠다.

다름 아닌 시청 직원들이 로비에 설치된 TV 앞에 모여 긴급뉴스를 보고 있었다.

다들 일 안 하고 뭐 해?

미간을 찡그린 나는 직원들이 웅성거리고 있는 TV 앞으로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현재 레드존에서 발견된 군락은 후지산 군락과 같은 상위 군락으로 파악되었습니다. 현재 서울 전역에는 비상령이 선포되었지만, 남쪽으로 내려가는 피난 행렬로 인해 모든 도로가 마비된 상태입니다. 현재 요금소 앞 특파원으로 나가 있는……….]

긴급 속보라 쓰인 TV 화면에는 수많은 차량과 인파가 서울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 도로를 포함한 요금소는 온통 피난 행렬로 가득했다.

겁에 질린 시민.

울고 있는 아이.

그 모습은 아비규환 그 자체였으며 하나같이 공포에 질린 양떼와도 같았다.

“시장님!”

저 멀리 복도에서 얼굴이 하얗게 질린 태식 씨가 위성 전화기를 들고 급히 달려왔다.

아마 서울로 파견 나가 있는 직원을 통해 현지 소식을 전해들은 모양이다.

“다들 진정하세요.”

나는 일단 침착하게 숨을 몰아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직원들부터 안심시켰다.

그리고 2층 집무실로 급히 올라가며 태식 씨를 향해 비상소집을 지시했다.

“모두 시청으로 모이라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태식 씨는 직원들을 데리고 서둘러 시청 밖으로 나섰다.

포항 시장에게 잠시 양해를 구한 나는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 엠마와 연결했다.

달칵.

“엠마, 접니다.”

[예. 저도 방금 소식 들었어요.]

“정말 상위 군락입니까?”

[단순 크기로 보면 후지산 군락과 같은 체급이에요. 그동안 땅굴 깊숙이 숨어 있다가 겨울이 오면서 슬슬 활동을 시작한 거죠.]

“그럼 하위 군락도 있겠군요.”

[상위 군락 특유의 확장성을 생각하면 벌써 뿌리고도 남았을 거예요. 현재 위치 보이시죠? 강릉이라고 절대 안전한 게 아니에요.]

현재 상위 군락이 자리를 잡은 위치는 비무장 지대와 그리 멀지 않는 정중앙.

이미 하위 군락이 생성되기 시작했다면 본격적인 확장이 시작되고 있을 것이다.

“시장님! 특전대가 출발했답니다!”

“헬기 요청하세요. 저도 금방 가겠습니다.”

엠마와 전화를 끊은 나는 김태하 소장이 건네준 낡은 군번줄을 손에 꾹 쥐었다.

사각, 사각, 사각.

[운명은 정해져 있고 미래는 바뀌지 않는다. 예언은 ‘그’가 나아갈 지침일 뿐, 다른 길을 만들어주지 않는다. 그래왔고, 그랬으며, 또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가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나려 한다면 이는 신의 뜻인가, 아니면 인간의 의지인가. ‘그’는 삶이라는 소용돌이 아래, 치열한 싸움을 멈추지 않기로 했다.]

[End?]

[or To be continued.]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