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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의 상속자-126화 (126/180)

126화

간혹 감염체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이런 주제가 화두가 되고는 한다.

바로 감염체 근원지가 중국이 아닌 다른 지역이었다면 어땠겠느냐는 가정 말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가정인 만큼 정말 다양한 주장과 이론들이 수없이 튀어나왔지만,

모든 감염체 학자가 입을 모아 동의한 한 가지 결론은 바로 ‘적어도 이 지경까지는 안 왔겠지.’라는 안타까운 탄식이었다.

그만큼 중국제 백신 부작용으로 발생한 감염체 사태는 인류에게 있어 큰 재앙이었다.

특히 중국 바로 옆, 북한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던 대한민국에는 더더욱 말이다.

치익!

[곧 도착합니다.]

한참 옛 생각으로 착잡해져 있던 와중 나지막한 무전기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도착했다는 말에 밖을 바라보니 어둠이 짙게 깔린 고성 시내가 보였다.

강릉 특전대를 태운 수송용 헬기가 드디어 동해안 최북단인 고성에 도착한 것이다.

‘군사분계선.’

여기서 조금만 더 나가면 한때 북한과 대한민국을 나눴던 군사분계선이 존재한다.

하지만 10년이라는 시간은 그런 경계면이 있었냐는 자각조차 잊게 한지 오래였다.

왜냐하면, 이 이상 올라가면 보이는 한반도 북쪽은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았으니까.

나는 불현듯 떠오르는 그날의 기억을 되새김질하며 얼굴을 조용히 쓸어내렸다.

“형님!”

잠시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수송용 헬리콥터가 어느새 착륙장에 내려와 있었다.

나는 옷을 잡아당기는 경태를 따라 공터에서 대기 중인 특전 대원들과 합류했다.

삐익! 삐익!

부르릉!

고성 일대에는 이미 강릉 연합에서 보낸 중장비와 인력이 속속히 도착하고 있었다.

아마 건축 자재와 방위군이 도착하는 즉시, 본격적인 방어선 구축에 들어갈 것이다.

운명을 건 전쟁의 서막.

이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파견 인원들은 열심히 중장비를 옮겼다.

“이쪽입니다!”

고성에서 근무하는 파견 직원이 대원들을 임시 본부 안까지 안내했다.

본부에 서둘러 짐을 푼 우리는 잠시 몸을 녹인 뒤 회의실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이번 브리핑을 맡은 나는 엠마가 보내준 위성사진을 스크린 화면 위에 띄웠다.

“현재 미국에서 추정 중인 상위 군락의 위치입니다. 이미 땅굴을 판 상태라 얼마나 진화했는지는 전문가들도 모른다더군요.”

“대략적인 규모는 어느 정도입니까?”

“적어도 후지산 군락과 비등한.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후지산 군락보다 클 수 있다는 말에 대원들은 하나 같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그럴 것이 후지산 군락은 일본을 멸망 직전으로 몰고 간 존재이지 않은가.

그동안 치러온 작전이 장난처럼 느껴질 만큼 이번 사태는 굉장히 심각했다.

“현재 우리가 최우선으로 파악해야 하는 건 놈이 얼마나 증식했냐입니다. 벌써 새끼 하위 군락들이 만들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공격 시기를 가늠하려면 적어도 하위 군락이 어디까지 증식했는지는 알아내야 했다.

하지만 땅굴을 깊숙이 파는 놈들의 특성상 위성이나 고고도 항공 정찰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가 레드존으로 들어가는 겁니까?”

“예. 현재는 그 방법뿐입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우리가 직접 레드존으로 들어가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것뿐.

크게 숨을 들이마신 나는 기립한 대원들과 한 명 한 명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무인기나 드론은 띄우지 못합니다. 당연히 무선통신도 먹통일 거고요. 보급, 지형, 숫자, 모두 우리한테 불리한 상황입니다.”

아무리 상위 군락이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도 레드존은 위험한 감염체 지대다.

언제 어디서 공격받고, 또 언제 어디서 사망자가 속출하지는 모르는 상황이다.

보급도, 후송할 병원도 없는 극한 전장에서 우리라고 살아 돌아올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할만 한데요?”

“이야, 북한 가는 게 꿈이었는데.”

하지만 대원들은 그딴 위험 따위에는 관심 없다는 듯 자기들끼리 떠들기 바빴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이미 ‘함께 간다.’라는 명령어가 자동으로 입력되어 있었다.

정말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꼴통들을 보며 우리는 그만 피식거리고 말았다.

웃음소리에 긴장감이 풀린다.

우리는 그렇게 고성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새벽 일찍 작전 지역으로 출발했다.

* * *

투두두두두두 - - - !!

미국에서 참 많은 것을 받아왔는데 그중 최고는 단연 이 헬리콥터가 아닌가 싶다.

전진, 후진, 제자리 비행, 심지어 차보다 빠른 전천후 이동 수단이 아닌가.

덕분에 저 높은 고지를 올라갈 필요도 없이 군사분계선을 편하게 넘을 수가 있었다.

“와…….”

“여기가 정말 레드존 맞아요?”

한때 비무장 지대가 그랬듯 10년간 방치되어있던 북쪽 너머는 자연 그 자체다.

대원들은 주황빛 여명이 감도는 산악 지대를 내려다보며 작게 감탄을 터트렸다.

다들 좋아하긴 이른데.

저 빽빽한 숲속을 돌아다니는 감염체를 보게 되면 아마 소스라치게 놀랄 것이다.

피식 웃은 나는 우리를 여기까지 태워다 준 헬기 조종사를 향해 정지 신호를 보냈다.

치익!

정말 아쉽지만, 여기서 더 갔다가는 헬기 로터 소리에 어그로가 끌릴 우려가 있다.

이제부턴 감염체들과 교전은 최대한 피하며 도보로 은밀하게 이동할 필요가 있었다.

[하강!]

조종자는 적당한 위치에 제자리 비행하며 우리 쪽으로 엄지를 척 들어주었다.

“갑시다!”

그 신호에 맞춰 나는 패스트로프를 아래로 던졌고 가장 먼저 지상으로 내려갔다.

치이이익!

한 명 한 명 천천히, 능숙하게 로프를 타고 내려와 지상으로 안착하기 시작했다.

투두두두두두 - - - -!!

모든 대원이 내린 것을 확인한 수송 헬기들은 고도를 높이며 날아올랐다.

[유인 기동!]

헬기가 사방으로 조명과 연막탄을 터트리며 근처에 있을 감염체를 반대로 유인했다.

“이동합니다.”

덕분에 놈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진 우리는 헬기 착륙 지점에서 벗어났다.

정해진 시간 안에 퇴로 지점으로 돌아오려면 한시라도 빨리 움직여야 했다.

‘여긴 참 여전하네.’

오랜만에 온 것치고는 이 지형과 공기, 그리고 서늘한 분위기가 너무나 익숙하다.

이미 레드존 수색 경험이 다분한 나는 능숙하게 방향을 잡으며 대원들을 이끌었다.

사박, 사박, 사박.

겨울내 눈이 얼마나 내렸는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발이 아래로 푹푹 빠진다.

하지만 대관령 환경이 익숙한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마 이 정도 속도라면 내일이나 내일모레쯤 목표 지점에 도착할 수 있을 터.

교전은 최대한 자제하며 하위 군락의 존재 와 위치만을 알아내는 것이 목적이다.

나와 대원들은 일정한 대형을 유지한 채 숲이 우거진 산악지형으로 숨어들었다.

끼기긱, 끼이익!

레드존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거의 30분에 한 번꼴로 감염체 무리를 발견하게 된다.

“쉿.”

하지만 나는 그럴 때마다 타이밍 좋게 경고를 보내며 놈들과의 조우를 방지했다.

‘피해서 간다.’

어떨 때는 빙 돌아서 또 어떨 때는 포복과 낮은 걸음으로 감염체 무리를 피했다.

참 절묘하고 신기한 기동 방법에 대원들은 속으로 감탄하며 내 뒤를 바짝 따라왔고,

한 2시간쯤 지나자 감염체 밀도가 높은 위험 지역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선배.”

그 순간 함께 선두를 맡고 있던 송지영이 내 쪽으로 슬금슬금 다가와 속삭였다.

“레드존에서 활동했다는 말 진짜였어요?”

“내가 예전에 말해줬잖아.”

“농담인 줄 알았죠. 레드존에서 활동하는 부대가 있다는 말 그냥 헛소문이었잖아요.”

헛소문이라기보단 베일 속에 가려져 있던 수많은 군사 기밀 중 하나일 뿐이다.

대통령이 총 맞고 뒈져버렸으니 알고 있는 건 나를 포함해 김태하 소장 정도?

분명한 건 특임대가 창설되기 전까지는 레드존에서 활동하는 기밀 부대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송지영은 콧물을 킁 삼키며 조용히 읊조렸다.

“진짜였구나…….”

“시끄럽고, 사주경계나 해.”

“예에.”

사방이 먹구름으로 어둑해진 것도 모자라 기온이 실시간으로 내려가고 있다.

기상 변화를 눈치챈 나는 송지영을 쫓아낸 뒤 경로를 바꿔 산비탈로 접어들었다.

후우우우우웅 - - - -!!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하늘에서 눈이 내리더니 갑자기 바람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겨울만 되면 불어오는 지겨운 눈보라가 레드존 지역에도 찾아온 것이다.

“이쪽으로.”

눈보라가 불어오는 레드존을 돌아다니는 건 거의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다.

타이밍 좋게 눈보라를 피할 장소를 찾은 우리는 계곡 아래 자리를 잡았다.

“눈보라가 그칠 때까지 잠시 기다리겠습니다. 몸 좀 녹이면서 뭐라도 먹으세요.”

경험상 2시간에서 3시간 정도 기다리다 보면 눈보라는 자연스럽게 그친다.

그사이 휴식을 지시한 나는 주변을 경계하기 위해 계곡 위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눈보라가 거세다.

세상이 점점 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 * *

찹찹찹!

열심히 핫팩을 흔들어 옷 속에도 넣어보고 또 연신 불과 목을 비벼보기도 했다.

하지만 추위가 가시기는커녕 손발이 덜덜 떨리고 콧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너, 너무 춥다.”

“나는 발에 감각이 없어.”

이러다 진짜 얼어 죽겠다 싶어 나는 콧물을 훌쩍이는 경태와 가은이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바람을 막기 위해 세워둔 방수천 아래 몸을 웅크려 서로의 체온을 나눴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대원들도 이미 서로를 부둥켜안고 한 몸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살인적인 추위와 눈보라는 최정예 대원들을 펭귄으로 만들어 버리는 위력이 있었다.

‘벌써 5시.’

2~3시간이면 끝날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눈보라는 5시가 되도록 그치지 않았다.

이대로 가면 작전 지역으로 이동하는 건 고사하고 이곳에서 얼어 죽게 생겼다.

어쩔 수 없이 불이라도 피워야 하나?

최대한 빛과 냄새를 조심하려 했던 나는 정말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치익!

[시장!]

그런데 그 순간 반대 방향에서 경계를 서던 최 대위가 다급한 무전을 보내왔다.

“최 대위?”

[저희 팀 사수가 이상한 소음을 들었다는데, 아무래도 감염체 무리 같습니다.]

감염체라는 말이 들리자마자 나는 그 즉시 장비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대원들에게 사방을 경계하라고 지시한 뒤 서둘러 반대편 계곡으로 뛰어갔다.

“이쪽입니다.”

조용히 손짓하는 최 대위를 따라 이상한 소음이 들려왔다는 장소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호출 받고 달려온 3팀 전원이 위장 한 채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쉿.”

마찬가지로 풀숲에 몸을 숨긴 나는 최 대위를 따라 조용히 귀를 기울여봤다.

얼핏 들으면 노이즈 같은 소음, 오직 바람 소리만이 계속 들려오는 것 같았다.

“!”

하지만 그사이에는 분명 이질적인 소음 한 줄기가 미세하게 포함되어 있었다.

그건 바로 눈 밟는 소리와 기괴한 흐느낌.

하나가 아닌 엄청난 다수가 100m 아래 눈보라를 뚫고 어딘가로 이동 중이었다.

‘따라와요.’

단순한 감염체 무리가 아니다.

이 정도 소음을 유발하려면 적어도 천 단위 아니, 만 단위 웨이브는 되어야 한다.

나는 3팀을 잠시 기다리게 한 뒤 최 대위를 데리고 산비탈 아래로 내려갔다.

사박, 사박, 사박.

자세를 낮추고 보폭을 좁게 해 최대한 발소리를 줄이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자 발을 끄는 소음이 점차 가까워지며 눈보라 속 갇혀 있던 형체가 나타났다.

끼기긱, 끼익.

끼이이익! 끽, 기끽!

그곳에는 엄청난 숫자의 감염체가 눈보라 속을 흐느적흐느적 걸어가고 있었다.

흡.

시발, 깜짝이야. 나와 최 대위는 그 즉시 입을 틀어막고 눈 위에 납작 엎드렸다.

그리고 대이동을 시작한 감염체 웨이브를 피해 슬금슬금 뒤로 포복해 기어갔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이런 가까운 거리에 감염체 웨이브가 지나가고 있었다니.

만약 먼저 발견하지 못했다면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대단위 습격을 받았을 것이다.

‘돌아갑니까?’

‘잠시만요.’

하지만 단순히 위험하다고 그냥 돌아가기에는 먼저 발견한 이점이 사라지고 만다.

왜냐하면, 감염체 웨이브는 가까운 거리에 군락이 있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가 봅시다.’

군락의 위치. 아니, 웨이브가 어디로 가는지만 확인해도 이번 작전은 손쉽게 끝난다.

나는 최 대위와 함께 눈 위를 엉금엉금 기어가며 감염체 웨이브 뒤를 밟았다.

끼기기긱, 끼이이익!

놈들은 거센 눈보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빽빽한 숲을 지나 산골짜기로 몰려갔다.

우리는 그 모습을 면밀하게 관찰하며 이동 방향을 대충이나마 가늠하려고 했다.

분명히 이 근처가 맞는데?

보통 이럴 때마다 반응해주던 왼쪽 눈 흉터가 오늘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꾹, 꾹.

“?”

그런데 그 순간 조용히 주변을 살피던 최 대위가 황급히 내 옷깃을 끌어당겼다.

무슨 일인가 싶어 무심코 고개를 돌려보니 웬 검은 물결이 꾸물꾸물 움직이고 있었다.

‘시발, 좆됐다.’

그곳에는 우리가 따라온 감염체 웨이브보다 수십 배는 더 많은 놈들이 저 남쪽, 아니 고성 방면으로 천천히 내려가고 있었다.

군락의 공격은 이미 시작된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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