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이 지역뿐만이 아니다.
현재 레드존에선 규모를 가늠하기 힘든 엄청난 숫자의 감염체 웨이브가 남하 중이다.
이대로 간다면 서울 요새는 물론 철원, 양구, 인제까지 위험에 빠져버리는 상황.
특히 영동 지방 입구나 마찬가지인 고성이 뚫린다면 강릉은 아비규환이 된다.
시간이 없다.
나는 대원들과 함께 급히 가파른 계곡에서 벗어나 태식 씨에게 연락을 취했다.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군요.]
“방어선 구축까지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촉박합니다. 남은 시간을 생각하면 콘크리트 장벽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인력과 물자가 충분하다고 해도 현재 남아 있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더군다나 날씨가 춥고 눈까지 내리는 상황이라 콘크리트가 굳을 여건이 아니었다.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어선 없이 몰려오는 감염체를 상대할 수도 없는 노릇.
적어도 고성에 1차 방어선을 구축해둬야 전력이 결집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치직, 칙.
막연한 건 태식 씨도 마찬가지인지 전화기 너머에선 무의미한 침묵만이 들려왔다.
[삼촌?]
[시장! 날세.]
“회장님?”
그런데 그 순간 한동안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김춘식 회장이 전화를 대신 받았다.
내가 깜짝 놀라며 대답하자 회장은 여전히 강인하고 힘 있는 목소리로 외쳤다.
[혹시 컨테이너를 쌓는 건 어떻겠나?]
“화물 컨테이너 말입니까?”
[그래. 컨테이너 안에 모래주머니를 가득 채우고 높이 쌓아 올리는 거야. 4중 5중으로 하중을 늘려 가면 충분하지 않겠나?]
컨테이너? 그래. 쌓아 올리기도 편하고 내구성, 무게, 그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다.
거기다 4중, 5중으로 보강한다면 놈들의 공격에도 쉽사리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현실성이 있다고 판단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
“고성까지 옮길 수 있겠습니까?”
[어차피 같은 바닷길이야. 러시아 친구들 화물선을 이용하면 충분히 옮길 수 있어.]
“모든 인력과 장비를 동원해도 좋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고성으로 옮겨주십시오.”
[알겠네. 이쪽은 우리가 맡도록 하지.]
김춘식 회장이 직접 지휘를 잡았으니 고성은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제야 한시름 돌린 나는 다시 전화기를 바꿔 받은 태식 씨를 향해 물었다.
“시간이 얼마나 필요할까요.”
[완공까지는 최소 이틀은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정말……괜찮으시겠습니까?]
이틀이라. 반나절도 위험한데 이틀이면 정말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해야죠.”
하지만 공사 기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특전대가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됐다.
이제 우리 목적은 레드존 정찰이 아닌 감염체 전진 속도를 늦추기 위한 지연전.
그동안 훈련해온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라도 감염체 놈들의 발목을 붙잡을 생각이었다.
[……무운을 빌겠습니다, 시장님.]
“살아서 봅시다.”
그렇게 마지막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은 나는 차가운 공기를 크게 들이쉬었다.
주변에는 어느새 장비를 모두 챙긴 대원들이 비장한 얼굴로 대기 중이었다.
“이쪽으로 모여 보십시오.”
나는 그런 그들을 한자리에 모아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약 이틀간 레드존 일대에서 지연전을 펼칠 겁니다. 일단 헬기와 합류한 뒤, 팀을 나눠 감염체를 바깥으로 유인하도록 합시다.”
“특전대 단독 임무입니까?”
“예. 지원군은 없을 겁니다. 유인, 교전, 후퇴까지 전부 단독으로 실시합니다.”
후퇴할 후방도, 지원해줄 화력도, 심지어 작전이 성공한다는 보장조차 없다.
내가 봐도 참 뻔뻔한 명령이라는 생각에 모자를 쓰고 있는 고개가 무거워졌다.
“출발 안 합니까?”
“막내야! 짐부터 챙기라니까!”
하지만 대원들은 그런 건 신경조차 안 쓴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총을 챙겨 들었다.
여기서 포기해야겠다는 나약한 전제는 그들 머릿속에서 이미 지워진 지 오래였다.
늘 그렇듯.
투쟁을 이어가기 위해서 말이다.
* * *
감염체 웨이브가 아직 이동 중이었던 동부 전선과는 달리 서부 전선에선 이미 최전방 방어선을 향한 감염체 공격이 시작됐다.
김태하 소장은 그 즉시 서울 요새를 지키는 수방사를 포함해 부산으로 갔던 서울 원정군까지 모조리 전선으로 급파했다.
하지만 군사분계선을 넘어온 감염체 웨이브의 규모는 상상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군사분계선이 이틀 만에 뚫려버린 것은 물론 전방 기지인 연천까지 공격을 받았다.
투두두두두 - - -!!
콰앙! 콰르르릉!
연천 기지로 집결한 군인들이 총열이 붉어질 때까지 총을 쏘고 또 쏘았다.
그 뒤에는 서울 요새가 자랑하는 대단위 화력 지원이 10분 꼴로 이어지고 있었다.
“쏴! 쏘라고 이 새끼야!”
“젠장, 지원군은 왜 안 오는 거야!”
하지만 감염체는 아무리 죽이고 죽여도 그 빈자리를 채우며 쉴 틈 없이 몰려왔다.
항상 우위를 점하던 인간의 화력이 놈들에게 처음으로 밀리기 시작한 것이다.
“변, 변이종이다!”
거기다 설상가상 변이종까지 등장하면서 힘겹게 버티던 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방독면! 방독면 착용해!”
“끄아아아아아악!”
감염체 지휘하는 알비노, 변이 바이러스를 퍼트리는 종양 변이체, 괴물이나 다름없는 흑색종 수천 마리가 일시에 들이닥친다.
군인들은 말 그대로 학살당했고 비장의 카드였던 기갑 장비까지 궤도에 감염체 시체가 끼어 정지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들은 떠올렸다.
어쩌면 우리가 가진 총알보다 몰려오는 감염체 숫자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결국 연천을 지키던 부대는 방어선 포기하고 후방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시장! 지금 나랑 장난합니까?”
그 시각, 연천으로 올라온 사령관 김태하 소장은 전화기를 붙잡고 소리치고 있었다.
“전방이 공격받고 있소! 지금 상황에 후방을 지키는 게 무슨 소용이란 말이요!”
현재 한반도에서 김태하 소장만큼 경험 많고 뛰어난 사령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말을 듣고 모든 요새가 힘을 합친다면 적어도 의정부까지는 뚫리지 않을 것이다.
[대전이 위험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깟 병신들 말 듣지 말라니까! 의정부랑 남양주 뚫리면 끝이야! 서울은 물론이고 대전! 호남, 경상까지 밀고 들어올 거라고!”
하지만 문제는 전쟁 시작도 전에 후방으로 내빼버린 좆같은 정치인 새끼들과,
그들 말을 들으며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는 충청, 호남권 요새 지도자들이었다.
당장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뭐? 자기들 요새와 후방 안정화가 우선이라고?
무능해도 적당히 무능해야지, 시민들 안전을 책임진다는 새끼들이 못 하는 말이 없다.
“시발!”
김태하 소장은 화를 참지 못한 나머지 들고 있던 위성 전화기를 바닥에 집어졌다.
콰직!
평화가 너무 길었던 걸까. 너무 빨리 도망치고 너무 빨리 무너져 내리고 있다.
이대로 간다면 일주일, 아니 사흘이면 감염체 놈들이 서울 요새로 당도할 것이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김태하 소장은 부관을 불러 어쩔 수 없는 명령을 내렸다.
“……동두천으로 후퇴한다.”
“알겠습니다!”
현재 경기도 북부 각지에선 몰려오는 감염체를 막기 위해 병력이 분산되어 있었다.
그러니 동두천으로 집결해 서울 요새로 들어오는 길목을 틀어막는 편이 나았다
‘시간, 시간이 문제다.’
그래도 이솔하가 요새 지도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떠났으니 차후 지원군은 올 터.
그때까지만이라도 버텨야 한다. 김태하 소장은 떨리는 손에 파르르 힘을 주었다.
* * *
우리를 태우기 위해 온 헬기에 탑승해 일단 놈들의 예상 경로를 앞질러 갔다.
그리고 딱 하루거리만큼 차이를 벌린 뒤 본격적인 사전 작업에 들어갔다.
‘시작합시다.’
이번 작전의 핵심은 그동안 치러온 직접 타격과 소멸이 아닌 지연, 즉 유인이다.
전자가 확실한 화력과 실력이 필요하다면 후자는 치밀한 계획을 토대로 한다.
하나라도 틀어지면 사망, 혹은 특전대 전원 궤멸이라는 전제를 깔고 움직여야 한다.
나는 과거 레드존을 전전했던 시절로 돌아가 모든 경험을 작전에 녹여냈다.
그렇게 사전 작업이 완료된 다음 날 새벽, 저 멀리 동토로 여명이 떠오르고 있었다.
투두두두두두두 - - - -!!
연료를 보급 받고 온 수송용 헬기들이 하늘을 가로질러 정면으로 날아갔다.
그리고는 곧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지상에서 대기 중인 우리에게 무전을 보냈다.
[놈들이 옵니다!]
예상대로 감염체 웨이브는 고성으로 직행하는 경로를 따라 천천히 남하하고 있었다.
놈들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나는 대기 중인 모든 대원에게 이를 알렸다.
치익!
“시작합시다.”
그리고 곧바로 수송 헬기가 운송해온 스노모빌에 탑승해 힘차게 시동을 걸었다.
부르릉!
주변에는 마찬가지로 스노모빌에 탑승한 1팀 대원들이 모든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부아아아앙 - - -!!
고글까지 꼼꼼하게 챙겨 쓴 나는 가장 먼저 속력을 내며 눈이 쌓인 설원을 달렸다.
온통 백지인 세상, 모든 지형지물이 순식간에 스노모빌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사격!]
그 순간 수송 헬기에 탑승한 다른 팀 대원들이 웨이브를 향해 사격을 시작했다.
투두두두두두두 - - - -!!!!
기관총 총구가 불을 뿜으며 무리 지어 몰려오던 감염체 무리를 급습한다.
끼기기기긱! 졸지에 공격받은 감염체 무리는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손을 뻗었다.
[계속 쏴! 어차피 못 잡아!]
하지만 놈들이 아무리 달려든다고 한들 수송 헬기는 유유자적 공중을 날고 있다.
투두두두두 - - -!!
타앙! 탕! 탕!
하늘이라는 절대적 우위를 점한 대원들은 뭉쳐 있는 과녁을 쏴 죽이기 바빴다.
덕분에 잔뜩 성이 난 감염체 무리는 헬기를 따라 사방으로 흩어지려고 했다.
[됐다!]
[놈들이 따라옵니다!]
하나로 뭉쳐 남하하던 대규모 감염체 웨이브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수송 헬기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사방으로 연막을 터트리며 더욱 시선을 끌었다.
부아아아아앙 - - - - -!!
좋아, 시작이 순조롭다. 나는 즉각 운전대를 꺾어 감염체 웨이브를 향해 달려갔다.
“저기 보여요!”
산과 능선, 굽어지는 산골짜기 엄청난 숫자의 감염체가 우글우글 지나가고 있었다.
치이이익! 탁!
급히 스노모빌을 멈춘 나는 놈들이 지나가는 타이밍을 맞춰 무전을 보냈다.
“지금입니다!”
그 순간 주변에서 대기 중이던 최 대위 팀이 기다렸다는 듯 격발 장치를 눌렀다.
쾅! 쾅! 쾅! 쾅!
그러자 산 능선에 100m 간격으로 설치한 TNT 폭약이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끼익?
우르르 몰려가던 감염체 놈들은 갑작스러운 폭발에 시선이 끌려 움직임을 멈췄다.
쿠르르르르르릉 - - - -!!
그 순간 대지가 격하게 흔들리더니 폭발이 일어난 산에서 눈사태가 발생했다.
겨우내 눈이 하루도 빠짐없이 온 만큼 눈사태 규모는 상상을 가뿐하게 초월했다.
콰르르르르릉!
엄청난 속도로 주저앉은 눈사태가 감염체 웨이브를 휩쓸고 지나가기 시작했다.
덕분에 아래로 남하하던 감염체 웨이브는 눈사태에 파묻혀 경로가 막히고 말았다.
부아아아아앙 - - -!!
하지만 놈들 숫자가 워낙 많다 보니 이러한 공격도 겨우 5분의 1 규모를 막아 세웠을 뿐이었다.
특히 감염체 웨이브가 위협적인 이유는 단순히 놈들 숫자가 많아서가 아닌…….
치익!
[변이종! 변이종 출현입니다!]
바로 변이체. 군락의 지휘를 받으며 독자적으로 생각할 줄 아는 변이체의 존재다.
[최 대위! 그쪽으로 갑니다!]
[시발, 못 가게 막아!]
나는 그 즉시 다시 스노모빌 위로 올라타 최 대위가 있는 산 능선으로 달려갔다.
찌릿!
갑자기 반응해오는 감각, 요동치는 감염체, 바로 알비노 변이종이 저 멀리 있었다.
[왔다! 사격!]
따다다닥! 따다닥!
미리 공격을 대비하고 있던 최 대위 팀과 알비노 변이종과의 교전이 시작되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들려오는 총소리에 나는 경태와 함께 모빌을 탄 가은이를 호출했다.
“가은아!”
“네!”
그러자 1팀은 사방으로 흩어지며 미리 지정해둔 장소로 운전대를 꺾었다.
부아아아아앙 - - - -!!
하지만 나만큼은 일직선으로 나아가며 우르르 몰려가는 알비노 변이종을 노렸다.
철컥!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한 손으로 묵직한 콜트 파이슨을 꺼내 한 바퀴 돌린다.
촤악!
그리고 경사진 언덕에서 그대로 날아올라 알비노 변이종들의 뒤를 잡았다.
끼익?
시간이 늘어진다.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뒤를 돌아본 변이종이 두 눈을 크게 뜬다.
투쾅!
나는 머리통을 날려버리는 것으로 화답하며 놈들과 연결되어있을 군락을 반겼다.
끼이이이이이이이 - - - -!!!!!!!
놈이 여기 있다!
변이종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