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컨테이너 장벽은 그동안 단 한 번도 떠올리지도, 해본 적도 없는 새로운 개념이다.
솔직히 말해 이게 정말 가능할지도 직접 보기 전까지 쉽게 믿을 수 없었다.
‘훌륭해.’
하지만 직접 살펴보고 만져본 컨테이너 장벽은 그러한 의심을 깨기 충분했다.
일단 철로 만든 컨테이너라는 점에서 기본적인 내구성과 중량은 보장이 될뿐더러,
내부가 비어있어 있으니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 임시 참호로도 사용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컨테이너의 최고 장점은 층층이 쌓아도 문제가 없다는 것 아닌가.
공격 위험이 있는 1층을 제외한 사실상 모든 층에서 화력 투사가 가능했다.
겹겹이 쌓아 부피를 늘리고 모래주머니를 채워 하중을 크게 늘린 컨테이너 장벽.
거기다 용접까지 했으니 웬만한 공격쯤은 웃으면서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병력 집결했습니다.”
고성 방어선에는 최소 경비 인력을 제외한 모든 방위군이 집결한 상태였다.
물론 노련한 희망 아파트 순찰대와 포항에서 보낸 자경단 병력이 2군으로 합류했고,
그것도 모자라 기초 훈련을 받은 모든 군필 주민들은 전부 예비군으로 편입시켰다.
감염체와의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지속해서 공격을 막을 수 있느냐다.
언제든 투입할 수 있는 훈련된 예비 병력은 정말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지상 포대는 역할을 정해 총 3개 방면으로 분리해뒀습니다. 해상에선 블라디보스토크 무장 화물선이 지원할 예정입니다.”
특히 주공격을 담당하게 될 강릉 포병 병력은 이미 방열을 끝낸 지 오래였다.
아마 지속적인 교차 사격으로 화력이 낭비되는 걸 최대한 방지할 것이다.
뭐, 이젠 내가 없어도 되겠는데?
나는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끝낸 태식 씨를 바라보며 엄지를 들어 올려주었다.
“시장님!”
“모두 고생 많으십니다.”
전방만큼이나 중요한 방어선 후방에는 허드렛일을 자처한 주민들이 잔뜩 몰려있었다.
그들은 자잘한 공사 인력이나 전방을 향한 보급을 도맡아 처리해주는 것은 물론,
군인들이 먹을 식사와 가장 중요한 난방 같은 자잘한 일까지 전부 담당해주었다.
덕분에 전방에서 싸울 모든 이들은 아무런 걱정 없이 전투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저희가 이거라도 해야죠.”
“우리 애들 아빠도 저기 있는데요, 뭘.”
군인과 경찰, 민간인 할 것 없이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나는 그들을 향해 조용히 웃어준 뒤 다시 발걸음을 돌려 방어선으로 향했다.
“범석 씨.”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막사에서 나온 엠마가 자연스럽게 어깨에 손을 걸었다.
“왔어요?”
그동안 정보를 취합하느라 바빴을 그녀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내게 말했다.
“죄송해요. 제가 계속 요청해봤는데 아무래도 지상군 투입까지는 힘든가 봐요.”
“괜찮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미연방에 병력을 투입해줄 수는 없는지 비밀리 접촉해봤다.
하지만 아무래도 항공모함이 퇴역하고 본토가 전쟁 중이라 지상군 투입은 힘든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래도 지난번 도움을 잊지 않은 제프리는 다량의 치료제를 포함해 자신들이 개발한 대 감염체 장비를 기꺼이 지원해주었다.
앞으로 상대해야 할 변이종을 생각하면 그 어떠한 지원보다 값진 걸 얻어온 것이다.
나는 무척 실망하는 엠마를 위로해준 뒤 전방으로 향하는 차량에 탑승했다.
“방어선으로 가는 거죠? 같이 가요.”
그러자 엠마는 냉큼 내 옆자리를 차지하며 흘러내리는 머리를 하나로 묶었다.
“돌아가는 거 아니었습니까?”
“저를 도대체 뭐로 보는 거예요? 시민권까지 있는 사람인데, 한몫 보태야죠!”
지금 보니 미국이 개발한 특수 방검복에 허리춤에는 권총까지 든든히 챙겼다.
그래, 한몫 보태야지. 나는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엠마를 태우고 장벽으로 향했다.
“곧 예상 시간이죠?”
“네.”
“솔직히 말해서 조금 떨리거든요.”
모두가 바삐 할 일을 찾아 돌아다니고 있지만, 얼굴에는 하나같이 긴장감이 맴돈다.
후우!
이는 그녀도 마찬가지인지 엠마는 가슴팍 위에 양손을 올리며 심호흡했다.
“엠마.”
“네?”
“지난번에 말한 양떼 목장 있잖습니까. 이번 일 잘 해결되면 우리 다 같이…….”
“스탑! 더 이상 말하지 마요!”
양떼 목장에 같이 가자는 말에 엠마는 경악하며 내 입을 황급히 틀어막았다.
“범석 씨는 영화도 안 봐요? 가족사진 보지 말기. 고향으로 간다고 하지 말기. 이건 기본적으로 하면 안 되는 말이라고요.”
“또 이상한 헛소리 하시네.”
“됐고! 일 끝나면 그때 다시 말해요.”
지금 농담을 하자는 건지 아니면 진지하게 말하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나를 걱정하는 마음만큼은 충분히 전해졌기에 웃는 것으로 대답은 대신했다.
치익!
[시장님!]
그런데 그 순간 차량 무전기가 울리며 태식 씨로부터 다급한 연락이 왔다.
나도, 엠마도 얼굴에 웃음기를 싹 지우며 이 무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치챘다.
“왔습니까?”
[예! 정찰대가 위치를 확인했습니다! 앞으로 30분 뒤에 고성 방어선에 도달합니다!]
예상 시간보다 살짝 이르지만, 그래도 예상한 경로를 따라 고성으로 남하하고 있다.
나는 곧 가겠다는 대답을 끝으로 황급히 차량을 몰아 방어선으로 달려갔다.
에에에에에에엥 - - - -!!
전방에는 이미 경보 사이렌을 들은 수많은 군인이 배치된 장소로 뛰어가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긴장감이 깨지고 그 자리를 미약한 두려움이 채우고 있었다.
“이따 봐요.”
“네!”
나는 그 자리에서 엠마랑 헤어진 뒤 장벽 꼭대기로 향하는 계단을 밟았다.
텅! 텅! 텅!
관측 지점에는 이미 태식 씨를 포함한 일행들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서 있었다.
“형님.”
나는 경태가 건넨 망원경을 받아 어둠이 짙게 깔린 방어선 정면을 관측했다.
그러자 저 멀리 오토바이를 탄 정찰대가 다급히 복귀하는 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그들은 연신 무어라 외치며 굽이진 산골짜기를 필사적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조명탄 한 발 장전하세요.”
현재로서는 어둠이 너무 짙어 정찰대 오토바이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 암막을 드러내고 진실을 마주해야 할 때, 나는 조명탄 장전을 지시했다.
퐁!
치이이익.
박격포가 발사한 조명탄이 고성 하늘 높이 솟아오르며 어두운 하늘을 밝혔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던 어둠 속에서 그 형체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끼이이이익! 끼아아악!
끼기긱! 끼기기긱! 끼이이익!
감히 그 규모를 가늠할 수 없는 엄청난 숫자의 감염체 웨이브.
그것은 무리라고 보기엔 너무나 컸고 또 흐름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부자연스러웠다.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장벽을 지키고 있던 모든 이들이 가쁜 숨을 헉 들이켰다.
치익.
“대기!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십시오.”
하지만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무전을 보내며 일렁이는 동요를 빠르게 진정시켰다.
두려움, 공포, 막연함, 어쩌면 당연한 이 모든 감정도 오늘만큼은 이겨내야 한다.
끼이이이익! 끼기긱!
끼아아아아아아아악 - - -!!
놈들은 드디어 산골짜기를 넘어 방어선 2km 앞까지 접근하기 시작했다.
“포격 준비!”
정찰대가 장벽 안으로 들어온 것을 확인한 나는 한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포격 준비!]
그러자 이미 장전을 끝낸 모든 포대가 복창하며 내 사격 지시만을 기다렸다.
‘지금이야.’
하늘 높이 솟아오른 조명탄이 서서히 꺼져가는 것을 끝으로 나는 크게 외쳤다.
“쏴!”
퍼엉! 펑! 퍼펑!
퍼버버버버벙!
산, 육지, 바다 할 것 없이 모든 방면에서 묵직한 포성이 세상을 뒤흔들어놓는다.
장약을 가득 채운 고폭탄은 어두운 하늘을 가로질러 감염체 웨이브를 향해 날아갔다.
콰아아앙!
쿠르르르르릉- - -!!!
포탄이 놈들에게 정확히 적중하며 크고 작은 폭발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모든 화력을 집중하는 대단위 포격에 감염체들은 순식간에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계속 쏴! 멈추지 마!]
견인포도 겨우 빌려 쓰던 시절이 무색할 만큼 엄청난 화력이 한 곳에 집중된다.
덕분에 10분도 되지 않아 일대는 초토화됐고 놈들의 진영은 사실상 무너져 내렸다.
장벽 위 군인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으며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기뻐하기에는 이르다.
전쟁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다.
“……조명탄 준비.”
이번에는 박격포 각도를 조금 올려 수십 개 조명탄을 하늘 높이 쏘아 올렸다.
펑!
그러자 세상이 다시 환해지더니 감염체 웨이브의 진짜 본체가 모습을 드러낸다.
끼이이이익! 끼기긱!
끼아아악! 끼기이익!
여태 우리가 봐왔던 건 겨우 빙산의 일각! 산처럼 쌓인 시체 위를 그보다 많은 감염체가 무리가 우르르 몰려오고 있었다.
“교차 사격하라 하십시오.”
“네!”
앞으로 얼마나 더 싸워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장비에 큰 무리를 줘서는 안 된다.
교차 사격을 명령한 나는 경태가 내미는 소총을 받아 들고 탄알집을 끼워 넣었다.
철컥! 철컥!
철컥! 철컥!
그러자 너나 할 것 없이 노리쇠를 전진하며 컨테이너 참호 밖으로 총구를 내밀었다.
꿀꺽.
숨 막히는 침묵이 찾아오고 누군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바로 옆까지 들려왔다.
하나, 둘, 그리고 셋. 입김을 훅 뱉은 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사격을 명령했다.
투두두두두두두 - - - - -!!!
장벽 꼭대기 배치된 중기관총을 시작으로 모든 중대 지원화기가 불을 뿜었다.
마찬가지로 참호에 들어가 있던 군인들 또한 놈들에게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탕! 타다다다다당!
드르르륵! 드르륵!
중간중간 예광탄이 섞인 탄알 궤적은 달려오는 감염체 무리를 향해 날아갔다.
콰직! 펑!
후두둑! 털썩!
머리를 맞고 쓰러진다. 가슴팍이 꿰뚫리고 팔다리가 떨어져 날아가는 건 기본이다.
맹렬한 기세로 달려오던 놈들은 마치 낙엽이 쓸려나가듯 차례차례 허물어졌다.
“재장전!”
“멈추지 말고 계속 쏴!”
어차피 소모되는 탄약이야 경상권 요새들이 보내둔 물자로 충분히 충당된다.
마음껏 쏘라는 지시를 기억한 사람들은 검지가 떨어져 나가라 방아쇠를 당겼다.
땡그랑!
땡그랑!
컨테이너 바닥에는 어느덧 뜨거운 탄피와 빈 탄알집이 눈처럼 쌓이고 있었다.
탄약을 전달하기 위해 달려온 자원자들은 넉가래로 탄피를 수시로 퍼냈고,
뜨거운 물과 간단한 음식을 수시로 가져오며 군인들의 기운을 북돋아 줬다.
후욱, 후욱.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숨이 잔뜩 거칠어져 있었다.
나는 그제야 개머리판을 어깨에서 내리며 전체적인 전황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직 버틸만해.’
멀리서도 확인할 수 있도록 100m 지점마다 형광 지표를 여러 개 심어두었다.
그 간격으로 추측해보건대, 현재 방어선은 일정 수준 거리를 잘 유지하고 있다.
이대로 잘 버텨주기만 한다면 일단 오늘 새벽은 무사히 넘길 수 있을 것이다.
제발, 아무 일도 없길.
나는 믿지도 않는 신에게 기도하며 주민들이 가져온 탄약을 챙기려고 했다.
치익!
[변이종 출현! 놈들이 몰려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상공을 정찰하고 있던 수송 헬기로부터 다급한 무전이 도착했다.
아니나 다를까, 군락이 불리한 정황을 눈치채고 또 한 번 변이종을 투입한 것이다.
“경태야!”
“네!”
흑색종이라는 말에 깜짝 놀란 나는 한참 사격 중인 강릉 특전대를 다급히 호출했다.
그리고 컨테이너 참호에서 빠져나와 변이종이 몰려온다는 방향으로 급히 달려갔다.
[쏴! 오지 못하게 막아!]
[시, 시발 왜 죽어! 총알이 안 통한다!]
이미 수백 마리가 넘는 흑색종이 화망을 강제로 뚫기 위해 달려오고 있었다.
총알이 통하지 않는다는 무전에 오른쪽 방어선에는 다급한 고함이 들려왔다.
[뚫렸다!]
100m 저지선이 무너지고 흑색종이 컨테이너 장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한다.
무전을 통해 들려오는 절규!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전선이 무너지려고 했다.
[특, 특전대가 왔습니다!]
하지만 이를 귀신같이 눈치챈 특전대는 어느새 오른쪽 방어선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비켜!”
나는 그 즉시 3층 컨테이너에서 뛰어내리며 흑색종 사이로 몸을 집어 던졌다.
“선, 선배!?”
끼익?
적도, 아군도, 경악하는 찰나, 나는 품 안에 넣어둔 확산 폭탄을 터트렸다.
퍼엉!
이런 미친 새끼! 몰려오던 흑색종은 뒤늦은 경악과 함께 폭발에 휘말리고 말았다.
놈들이 녹아내린다.
주변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철컥!
나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하얀색 거품과 분말 사이로 총구를 들이밀었다.
끼기긱, 끼익…….
그러자 맹렬한 기세로 달려오던 흑색종들은 순간 움직임을 멈추며 주춤거렸다.
놈들의 멈추지 않는 공격성이 드디어 공포라는 본능 뒤로 숨어버리는 순간이었다.
‘곧 보자.’
나는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을 상위 군락과 인사하며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