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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의 상속자-133화 (133/180)

<133화>

흑표!

56톤짜리 강철의 맹수가 우렁찬 울부짖음과 함께 전장 한가운데로 난입했다.

그 압도적인 광경에 한참 격전을 벌이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집중됐다.

불어오는 돌풍!

분노한 아종 군락은 즉각 방향을 돌려 흑표 전차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

분명 한쪽 팔이 너덜거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속도와 기세가 너무나 맹렬했다.

부르르릉!

하지만 전차들은 능숙하게 후진 기동하며 아종 군락을 향해 포신을 조준했다.

퍼엉!

퍼엉!

사방에서 포탄이 날아든다. 처음은 팔, 다리, 마지막으로 몸통을 그대로 관통했다.

집중 포격을 버티지 못한 아종 군락은 결국 처절한 비명과 함께 중심을 입고 말았다.

쿵!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결국 뼈와 살로 이루어진 한낱 생명체일 뿐이니, 웬만한 장갑도 모두 관통해버리는 전차 포탄 앞에서 놈들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크아아아!

아종 군락은 검은색 피와 내장을 쏟아내며 다른 동족을 향해 도와 달라 소리쳤다.

끼기기기긱-!!

그러자 한참 장벽을 넘고 있던 감염체 웨이브가 깜짝 놀라 방향을 선회했다.

새로운 적이 등장했다!

놈들은 남아있는 군락의 지시를 따라 빠른 속도로 기갑부대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지원군이 전열을 재정비하기 전, 최대한 빠르게 몰아쳐 섬멸하려는 목적이었다.

부르릉!

하지만 안타깝게도 고성을 찾아온 강철 맹수들은 흑표 전차뿐만이 아니었다.

위이이잉, 철컹!

육중한 전차 사이로 비교적 아담한 보병 전투 차량들이 밀물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끼익?

갑자기 나타난 기갑 웨이브 앞에 감염체 웨이브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퉁! 퉁! 퉁! 퉁!

투두두두두-!!

K-21 보병 전투 차량은 몰려오는 감염체 웨이브를 향해 기관포를 발사했다.

동시에 흑표 전차에 탑재된 활강포와 기관총들이 맹렬하게 불을 뿜기 시작했다.

끼이이이익!!

숫자라도 많으면 모를까, 그동안의 전투로 규모가 4분의 1로 줄어든 감염체들이다.

놈들은 무언가를 해볼 겨를도 없이 집중된 기갑 병력 앞에 빠르게 녹아내렸다.

“형님!”

그걸 넋을 놓은 채 바라보고 있는데 경태와 가은이가 저 멀리서부터 달려왔다.

이미 꼴이 엉망인 그 둘은 응급 키트를 꺼내 내 상처부터 지혈하기 시작했다.

“괜찮으세요!?”

“호들갑 좀 떨지 마.”

허벅지에는 철근이 관통했고, 부러진 갈비뼈가 어딘가에 박혔는지 숨 쉬는 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동안 입은 부상과 비교하면 이 정도는 애들 장난 수준에 불과했다.

나는 진통제를 투여하려는 가은이를 제지한 뒤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벽은?”

“오른쪽이 완전히 무너졌어요. 아마 지원이 없었으면 본거지까지 뚫렸을 거예요.”

기갑차량이 전방으로 투입된 사이, 다른 보병 병력이 후방을 지원하기 위해 투입됐다.

이 정도 규모와 화력을 지닌 기계화부대는 이 한반도에서 단 하나뿐인 것으로 알고 있다.

바로 김태하 소장의 휘하인 정예 수방사 부대. 그들이 우리를 돕기 위해 찾아왔다.

끼이이이익-!!

한순간에 동족을 모두 잃은 군락 한 마리가 분노를 터트리며 앞으로 뛰쳐나왔다.

쿵! 쿵! 쿵!

그리고 혼자 떨어져 나와 있던 흑표 전차 한 대를 전복시키기 위해 힘껏 달려들었다.

한 녀석이라도 더 데려가기 위한 치열하고도 집요한 위협적인 공격이었다.

부르르릉-!!

하지만 그 흑표 전차는 후퇴 기동하는 대신 도리어 달려오는 놈과 정면으로 격돌했다.

쿠웅!

육중한 엔진음을 내뿜은 강철 맹수가 압도적인 힘으로 군락을 밀어내버린다.

끼이익! 놈은 무언가를 해볼 틈도 없이 애처로운 비명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콰직!

굳이 포를 발사할 필요도 없이 궤도로 짓뭉개 놈을 다져진 고기로 만들어버렸다.

그 압도적인 힘과 퍼포먼스에 지켜보고 있던 나와 일행들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 사이 군락을 잃은 변이종은 소멸했고, 감염체는 하나둘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덜컹!

군락을 궤도로 짓뭉갰던 전차의 해치가 덜컹 열리며 한 남성이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화끈한 퍼포먼스를 바로 앞에서 직관했던 나는 악수를 청하기 위해 다가갔다.

“오랜만이다, 박 중위.”

하지만 전차장인 줄 알았던 남성은 무려 반짝이는 금색별을 계급장에 달고 있었다.

순간 두 눈을 의심한 나는 주름진 남성의 얼굴을 뒤늦게 알아볼 수 있었다.

“구 단장님?”

“다행히 늦지 않게 왔나 보군.”

“단장님이 여긴 어떻게…….”

국군정보사령부를 지휘하고 있어야 할 인물이 뜬금없이 수방사 병력을 이끌고 있다.

구 단장과는 일찍이 친분이 있었던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마주했다.

“도대체 무슨 상황입니까?”

“보는 그대로야. 김태하 소장이 지원 병력을 파견했고 내가 대신 지휘권을 잡았다.”

수방사 주요 전력이나 다름없는 기계화부대를 구중탁 소장한테 통째로 넘겼다고?

순간 인지부조화가 온 나는 지끈거리는 허벅지를 부여잡으며 고통을 호소했다.

“자네 괜찮나?”

“별거 아닙니다. 일단 상황부터 설명해주시죠. 김태하 소장님은 왜 안 오셨습니까?”

정예 병력이 지원군으로 왔으니 서울 상황이 생각보다는 괜찮은 줄 알았다.

하지만 실상은 이와 다른지, 구 단장의 표정은 아까부터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일단 흐트러진 전열부터 재정비하지. 나머지 이야기는 들어가서 해주겠네.”

한 차례 치열한 격전이 오고 갔던 전장에는 싸늘한 바람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 바람은 조금 전 겪었던 돌풍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거센 기류를 머금고 있었다.

* * *

함락 직전까지 갔었던 고성 방어선은 지원군 덕분에 무사히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당연히 사람들은 기뻐했고 고성으로 진입하는 지원군을 진심으로 환영해주었다.

“…….”

하지만 그와 반대로 고성 지휘부 천막에선 숨 막히는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구 단장이 전한 서울 요새의 참담한 상황 때문이었다.

‘연천 기지가 뚫렸다.’

서부 전선을 뚫고 내려온 웨이브는 감히 가늠할 수조차 없는 엄청난 규모였다.

조금 과장을 보태 동부 전선과 두세 배가량 차이가 난다고 봐도 좋은 정도.

아무리 수방사가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다 해도 이를 막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김태하 소장은 일찍이 동두천에 마지막 방어선을 구축해놓은 것이다.

“마지막 방어선은 어딥니까?”

“동두천.”

“그 뒤로는요?”

“끽해봐야 의정부나 파주? 아니, 사실상 후방 방어선은 없다고 보는 게 맞겠지.”

하지만 후속 부대나 지원군이 없는 이상, 동두천이 뚫리는 것은 어쩌면 기정사실.

이대로 방어선이 돌파당한다면 서울 요새는 사실상 멸망한다고 봐도 좋았다.

“……후퇴할 생각은 없으시답니까?”

“죽어도 거기서 죽겠다더군. 고성으로 기갑부대를 보낸 거 보면 모르겠나? 이미 서울 요새는 희망이 없어. 김태하 소장은 그걸 알고 자네한테 모든 걸 걸려고 한 거야.”

김태하 소장은 그나마 성공 가능성이 있는 우리에게 최후의 전력을 보내왔다.

그 말인즉슨 이솔하가 아닌 내게 이 한반도의 운명을 맡기겠다는 뜻이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짧으면 사흘, 길어야 일주일이다.”

시간이 촉박하다. 당장 내일 재정비한다고 해도 동두천까지는 거리가 꽤 있다.

제시간에 도착하려면 지금 당장 판단을 내리고 강릉의 방침을 결정해야 했다.

잘그락!

나는 벌써 두 개째 받게 된 상관의 군벌줄을 꾹 움켜쥐며 무거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기까지가 김태하 소장의 생각이었고, 이제부터는 내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지.”

그런데 그 순간 잠자코 있던 구 단장이 목소리를 무겁게 깔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나는 서울을 돕는 건 반대다.”

“예?”

“후속 부대랑 지원군이 왜 아직도 없는지 모르겠나? 도망칠 새끼들은 이미 다 대전으로 내려간 지 오래야. 서울을 구하려고 해봤자, 결국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

“…….”

“자네는 전쟁은 알아도 정치는 몰라. 엄석현이 원하는 건 김태하 소장과 강릉 연합이 전력을 소모하는 거다. 두 세력 다 감염체를 막느라 지쳐있을 때가 기회니까.”

현 상황을 이미 꿰뚫고 있었던 구 단장은 날카로운 눈을 빛내며 내게 제안했다.

“후방을 쳐라.”

“……쿠데타라도 일으키라 말입니까?”

“자네도 알지 않나. 지금 같은 세상에서 이상을 꿈꾸는 건 사치라는 걸 말이야. 민주주의? 그게 만들어낸 결과가 뭐지? 무능한 지도자, 정치인! 모조리 죽여 버려야 해.”

과격하기 그지없다. 이를 받아들이기에는 내 이성이 절대 안 된다고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가장 현실적이며 또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었다.

어두웠던 과거의 답습이냐, 아니면 대의를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자기 합리화냐.

덜컹!

답답함을 참지 못한 나는 결국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빠르게 창가로 다가갔다.

찰칵.

서둘러 담배를 입에 물자 구 단장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마지막으로 조언했다.

“세상은 순리대로만 흘러가지 않아. 역사라는 건 결국 수많은 피를 요구하지. 박 중위, 이 정도면 자네는 할 만큼 한 거야.”

인간이 아무리 발버둥 친다고 한들 세상은 운명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따라간다.

이에 순응해야 하는가, 아니면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 불확실한 길을 걷느냐.

나는 침묵하는 미래일기처럼 스스로 던진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 그런데 말이여.”

“……?”

그 순간 잠자코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 구수한 사투리와 함께 손을 들었다.

심각한 분위기에 끼어든 사람은 다름 아닌 머리를 긁고 있던 상식 아저씨였다.

“꼭 양자택일할 필요가 있을까?”

“예?”

“전쟁만 끝나면 되는 거잖여.”

이에 구 단장은 헛웃음과 함께 팔짱을 끼며 상식 아저씨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끝낼 방법이나 있소?”

“전쟁 원인을 없애는 거지.”

“하! 그게 말처럼 쉬운 줄 아는…… 음?”

하지만 그것도 잠시, 혼자 어이없어하다가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깜짝 놀라 일어난다.

마찬가지로 두 눈을 크게 뜬 나도 약속이라도 한듯 구 단장과 눈을 마주쳤다.

‘잠깐, 이거?’

현재 상위 군락이 지휘하는 감염체 웨이브는 동, 서부 전선을 동시 습격한 상태다.

“빈집이잖아……?”

그 말인즉슨, 현재 레드존에는 상위 군락만이 홀로 남아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

말 그대로 텅텅 비어있는 빈집. 놈들의 본거지는 탈탈 털기 딱 좋은 무방비한 상태였다.

쾅!

담배를 급히 비벼 끈 나는 일행들의 이목을 한곳으로 모으며 급히 지시를 내렸다.

“태식 씨! 수송 헬기 수리 끝나는 대로 이륙 준비하라고 하세요! 경태는 특전대 모아서 집결시키고, 나머지는 무기부터 챙겨!”

“알겠습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일행들은 각자 맡은 바 일을 하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잘그락!

그 모습에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진 나는 군번줄 두 개를 목에 걸고 밖으로 나섰다.

* * *

사각, 사각, 사각.

[세상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그 어둠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으며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다. 항거할 수 없는 공포, 떨쳐낼 수 없는 두려움. 수없이 반복되는 절망 속에 우리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나타날 ‘그’를 위해 이 기록만은 절대 멈추지 않았다. 우리가 겪었던 실패, 이기심과 수많은 실수를 돌아볼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리고 오랜 시간 끝에 ‘그’는 우리가 걸어온 길 앞에 당도했다.]

[정해진 운명이 없다는 건 ‘그’ 스스로가 증명했다. 불확실한 삶 속의 환한 등불이 될 차례다. 아포칼립스의 상속자, 다음 일기를 보게 될 수많은 ‘그들’을 위해서 말이다.]

[기록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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