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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의 상속자-136화 (136/180)

<136화>

한걸음 옆으로 디딜 때마다 기반이 튼튼하지 못한 절벽에서 흙이 파스스 떨어졌다.

그 광경에 저절로 허벅지 오금이 저리고 딛고 있던 손발이 미친 듯이 떨려왔다.

꿀꺽.

하지만 뒤로 물러날 수는 없었던 나는 꿋꿋이 다시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사력을 다해, 목적지와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 말이다.

방독면 속 얼굴은 어느덧 이마에서 흘러내린 축축한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후욱, 후욱.

그렇게 한참을 전진하던 나는 잠시 숨을 고르며 뒤따라오던 대원들을 바라봤다.

긴장되는 것은 그들도 마찬가지인지 얼굴과 머리가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나는 유난히 떨리는 로프를 꾹 움켜잡아주며 그들이 올 때까지 잠시 기다려주었다.

‘이제 거의 다 왔다.’

그래도 부지런히 걸음을 옮긴 덕분에 중간지점까지는 무사히 잘 도달할 수 있었다.

여기서 한 5분 정도만 더 걸어가면 아마도 군락들이 이동하는 통로가 보일 터.

숨 고르기를 끝낸 나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위해 절벽 틈으로 발을 디디려 했다.

치익!

그런데 그 순간 허리와 연결된 로프에서 갑자기 강한 장력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

깜짝 놀란 나는 다급히 힘을 주며 아래로 끌려 내려가는 로프를 위쪽으로 당겼다.

치이이익!

우리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절벽 틈은 결국 한쪽 지반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정확히 두 사람이 이에 휘말렸고, 나머지 대원들 또한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버텨!’

하지만 선두에 있던 경태와 문 상사가 최대한 힘을 주며 끝까지 버텨내주었다.

푹!

나는 그사이 재빨리 대검을 뽑아 절벽 틈에 끼워 넣고 몸과 로프를 동시 고정했다.

이에 정신을 차린 나머지 대원들도 서둘러 로프를 당겨 간신히 무게 중심을 맞췄다.

탁!

절벽 틈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대원 두 명이 하나둘 위쪽으로 끌어올려졌다.

그제야 참고 있던 숨을 내뱉은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고정해둔 대검을 뽑았다.

‘서둘러!’

한쪽 지반이 무너지기 시작한 이상, 언제 아래로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나는 정신이 없어 보이는 대원들을 급히 다그치며 빠른 속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파스스!

아니나 다를까, 무너졌던 기반을 시작으로 절벽 틈이 하나둘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나마 빠르게 눈치 채서 다행이지 하마터면 대원 전원이 아래로 떨어져 죽을 뻔했다.

하지만 나는 안도할 틈도 없이 주변을 급히 둘러보며 이동할 통로를 찾아야만 했다.

‘보인다.’

저 멀리 방금 태어난 유체를 품은 진화형 군락이 한 통로로 들어가고 있었다.

드디어 목적지까지 도달한 우리는 로프를 고정하고 천천히 아래로 강하했다.

치이이익.

천천히, 은밀하게. 여기서 만약 모습이 발각되면 전원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벌어진다.

대원들은 한 명 한 명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오며 사방으로 총구를 겨누었다.

‘됐습니다.’

마지막으로 후방을 싹 훑어보고 온 최 대위가 이쪽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나는 그 즉시 대기 중이던 대원들을 이끌고 통로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후욱, 후욱.

눈보라가 몰아치는 바깥과는 달리 둥지 내부는 거의 30도에 육박하는 환경이었다.

특히 안으로 들어갈수록 올라가는 유독 가스 수치는 위험 수준까지 도달해 있었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 누적된 피로, 부족한 산소와 체력을 갉아먹는 극한 상황.

여기까지 정말 힘겹게 버텨온 나와 대원들은 점차 한계라는 걸 느끼고 있었다.

‘이쪽!’

하지만 아무리 막연한 목표라도 포기하지 않고 걷다 보면 그 끝이 보이는 법이다.

레드존과 둥지를 뚫고 여기까지 숨어들어온 우리는 기어코 목적지에 도달했다.

‘상위 군락.’

거의 축구장 하나와 맞먹는 엄청난 공간에는 거대한 군체 하나가 놓여 있었다.

마치 탑을 연상케 하는 그곳에는 수많은 군락과 변이종들이 쉴 틈 없이 오고 갔다.

찌르르르!

동시에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존재감 또한 왼쪽 눈 흉터를 통해 전해지기 시작했다.

놈이 느껴진다.

저 거대한 군체 한가운데에는 분명 상위 군락이 똬리를 튼 채 잠들어 있었다.

‘은폐.’

수신호를 보내자 대원들은 위장막을 꺼내 은폐한 뒤 마지막 휴식을 취했다.

나는 그사이 경태와 쪼그리고 앉아 흙먼지와 오물이 묻은 군락 교란기를 살폈다.

‘남은 배터리는?’

‘45% 정도입니다.’

아직은 개발 초기형태라 그런지 배터리가 소모되는 속도가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특히 최고 출력을 유지하고 있는 지금은 숫자가 줄어드는 게 보일 정도였다.

길어야 30분, 짧으면 15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철컥!

나는 마지막으로 총기 안전장치와 탄알집을 확인한 뒤 이동 수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은폐하고 있던 대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군체 안으로 진입했다.

“…….”

진입과 동시에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묵직한 공기와 긴장감이 두 어깨를 짓눌렀다.

분명 주변에는 아무도 없는데 누군가 귓가에 알 수 없는 말을 속삭이는 기분이었다.

지옥이 있다면 이곳일까.

세상은 온통 붉고 검으며, 또 음산한 죽음의 기운이 발아래에서 넘실거리고 있었다.

끼이이익.

상층으로 추정되는 공간에 들어서자 진화형 군락의 출현 빈도가 점점 늘어났다.

놈들이 밖으로 나가기를 기다린 우리는 통로를 빠져나와 내부로 들어왔다.

끼기기긱, 끼이익!

상층에는 산란장에서 갓 태어난 군락 유체들이 마치 열매처럼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놈들은 상위 군락 아래 보호받으며 완전한 진화만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규모가 가늠되지 않는다.

여태 우리가 처리해온 군락보다 많은 숫자가 여기 집단 군체에서 성장 중이었다.

저놈들이 다 진화하면 우리 강릉. 아니, 한반도와 전 세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상상만 해도 몰려오는 막연함에 당장 폭탄을 던져 군체를 무너뜨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능사가 아니라는 걸 알기에 총 손잡이를 꾹 움켜잡으며 인내했다.

‘이쪽입니다!’

그 순간 주변을 정찰하던 대원들이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다급히 수신호를 보냈다.

우리는 그 즉시 다음 벽과 이어지는 좁은 통로를 통과해 마지막 방으로 들어섰다.

꿀꺽.

그곳에는 엄청난 크기의 회색 살덩이가 고치 속에 파묻혀 꿈틀거리고 있었다.

상위 군락. 굳이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놈이 어떤 존재인지는 직감할 수가 있었다.

찌릿!

상위 군락은 침입자가 들어온 줄도 모른 채 저 멀리 남쪽 어딘가를 주시하고 있었다.

우리는 거의 무음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주변을 포위해 하나둘 주입기를 꺼내 들었다.

달칵.

그간의 경험을 떠올렸을 때 겨우 치료제 한 발로는 놈을 완벽하게 무력화시킬 수는 없을 터.

장비는 놓고 와도 주입기만큼은 꼭 챙겨왔던 대원들은 침착하게 볼트를 장전했다.

끼릭.

겨눠진 주입기만 해도 총 다섯 개. 나도 그중 하나를 잡고 침착하게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오른쪽 손을 조용히 들어 동시에 발사할 수 있는 타이밍을 재려고 했다.

찌릿!

그런데 그 순간 왼쪽 눈 흉터를 통해 갑자기 극심한 고통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나는 자세를 취하다 말고 황급히 고개를 들어 상위 군락을 바라봤다.

“……!!”

그리고 마주쳤다. 저 깊은 심연 속에서 번뜩이는 놈의 끔찍한 눈동자와 말이다.

한순간 시간이 느리게 흐르며 양쪽 눈을 깜빡이는 찰나가 덧없이 흘러갔다.

들켰다!

나는 턱하고 막혔던 목구멍을 억지로 열고 모든 대원을 향해 사격 명령을 내렸다.

끼아아아아악-!!

상위 군락은 엄청난 고주파를 발산하며 사방으로 분노를 터트리기 시작했다.

주입기를 쏘려고 했던 대원들은 끔찍한 고통을 호소하며 하나둘 바닥에 쓰러졌다.

푸슉!

주입기 다섯 개 중 겨우 두 개만이 정상적으로 발사되어 상위 군락의 몸체에 꽂혔다.

치명상을 입은 놈은 살덩이를 꾸물거리며 도와달라는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끼기기기긱!

어미가 공격당했다는 말에 주변에 있던 군락들과 변종들이 우글우글 몰려왔다.

입구, 천장, 벽이 몰려온 놈들로 가득 차는 데에는 채 30초라는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들 정신 차려!”

조금 전 충격의 여파로 고막이 나갔거나 머리가 흔들린 대원들이 쓰러져 있었다.

하지만 경험이 많은 이들이 먼저 정신을 차리며 나머지 팀원들을 강제로 이끌었다.

끼아아아아악!!

현재 상위 군락은 치료제 주입기를 두 발이나 맞고 엄청난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즉사는 아니기에 소멸하기 전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몰랐다.

“젠장!”

나는 상위 군락을 둘러싸는 감염체 놈들을 노려보며 어쩔 수 없이 총을 들었다.

“뒤로! 뒤로 물러나!”

“이쪽으로 전부 모여! 빨리!”

그사이 정신을 차린 대원들은 사방으로 총을 난사하며 군체에서 빠져나가려 했다.

“젠장, 막혔습니다!”

하지만 놈들은 우리가 들어왔던 군체 입구마저 틀어막으며 사방을 포위했다.

졸지에 고립당한 나와 대원들은 어쩔 수 없이 한쪽 벽을 등질 수밖에 없었다.

바퀴벌레처럼 우글우글 몰려오는 수많은 감염체 앞에 그 간격은 조금씩 좁혀졌다.

“버텨! 조금만 버텨!”

극독인 치료제를 맞은 이상, 상위 군락도 곧 자연스레 소멸을 맞이할 것이다.

결국 버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던 대원들은 죽음을 결사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투두두두두두-!!

퍼엉! 펑!

사방으로 치료제 폭탄이 날아가며 몰려오는 진화형 군락과 변이종을 틀어막았다.

총구는 연신 불을 뿜었고 대원들은 고함을 지르며 달려드는 놈들을 저지했다.

치열한 혈투!

사방에선 고성과 비명이 난무했고 쓰러진 감염체들로 인해 핏물이 쏟아져 내렸다.

“재장전!”

“젠장, 총알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분투해 봐도 놈들의 숫자는 줄기는커녕 간격만 더욱 좁아지고 있었다.

설상가상 절벽에 짐까지 놓고 온 상태라 총알도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가은아!”

나는 총알이 떨어진 가은이를 향해 남은 탄알집을 던지고 부무장을 뽑아 들었다.

이미 대다수 대원은 나처럼 권총과 대검으로 감염체 놈들과 육박전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특전대원이라 해도 태생적인 차이를 뒤집을 수는 없는 법이다.

“끄아아아악!”

진화형 군락이 달려드는 대원 하나를 붙잡고 목과 어깨를 통째로 물어뜯었다.

“안 돼! 이런 시발…… 컥!”

그를 구하기 위해 달려든 다른 대원 또한 가슴팍이 꿰뚫려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다.

하나가 아닌 전체적인 붕괴다.

사방에서 사상자가 발생하자 아슬아슬하던 대열은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나는 떨리는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며 쓰러진 대원 하나를 뒤쪽으로 끌고 오려고 했다.

끼아아아아악-!!

그 순간 변이종 수십 마리가 시체를 뛰어넘어 이쪽으로 달려들었다.

피잉!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확산 폭탄을 재빨리 꺼내 머리 바로 위에서 폭발시켰다.

퍼엉!

그러자 치료제 거품이 사방으로 퍼지며 달려드는 놈도, 나도 폭발에 휘말렸다.

몸을 뒤집는 부유감이 느껴진다. 곧이어 짧은 고통과 함께 이명이 몰려왔다.

삐이이이.

쓰러진 건가?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바닥을 손으로 짚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형님!”

그런데 이미 온몸이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경태가 시체 속에 파묻힌 나를 끌어냈다.

주변에는 얼굴이 피와 눈물로 범벅이 된 가은이와 무어라 외치는 송지영도 보였다.

쿨럭!

뭐라고? 잘 안 들려. 답답함을 참지 못한 나는 피가 섞인 기침을 토해냈다.

이에 깜짝 놀란 경태가 붕대로 상처를 지혈해주며 대원들 사이에 나를 눕혔다.

짤랑, 짤랑!

떨어지는 탄피, 고함과 비명, 꺼져가는 의식처럼 서서히 총성 또한 잦아든다.

“젠장, 빨리 파!”

그 와중에 문 상사와 일부 대원들은 필사적으로 구멍을 파 탈출로를 만들어 냈다.

“형님! 먼저 빠져나가세요!”

겨우 사람 하나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좁고 협소하기 짝이 없는 개구멍이다.

경태와 문 상사는 가지고 있던 교란기를 넘기며 나를 구멍 밖으로 내보내려 했다.

꽉!

하지만 나는 두 사람의 멱살을 꽉 움켜잡으며 구멍으로 들어가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형님! 제발요!”

그동안 혼자 살아남았던 과거를 떠올리며 얼마나 후회하고 또 고통 받았는지 모른다.

같은 실수를 절대 반복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혼자 가라고?

나는 결국 울음을 터트리는 경태를 밀어내고 대원들을 향해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기둥! 기둥을…… 조준해!”

일촉즉발의 순간, 넋 놓고 나를 바라보고 있던 대원들이 동시에 시선을 돌린다.

“……!”

그곳에는 천장을 떠받친 기둥이 있었고, 우리에겐 아직 마지막 화력이 남아있다.

어차피 이판사판이다.

마지막 도박 수에 모든 것을 건 대원들은 기둥을 향해 수류탄을 던지고 유탄 발사기를 쐈다.

콰아아앙-!!

그러자 주변을 집어삼키는 엄청난 폭발과 함께 기둥과 천장이 통째로 무너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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